# 63
학사환생 063화
다음 날 오후.
총감독관은 무림맹으로 복귀한 응시생들을 시험장에 불러 모았다. 얼마 전에 개인전이 열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알다시피 어제 시험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이미 상부에 보고했지만 당연히 너희들에게도 알려줘야겠지.”
다행히 희생자 수는 전생보다 훨씬 적었다.
감독관 둘에 응시생 여섯.
사건개요를 설명한 총감독관이 천신우를 돌아봤다.
“천신우! 자네 도움이 아니었다면 피해가 훨씬 커졌을 것이다. 모두를 대표해 감사를 표하는 바다. 무림맹에서 적절한 포상이 있을 것이니 기대해도 좋아.”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천신우에게 모였다.
개인전 때보다 확실히 우호적인 반응이 늘었다.
응시생들뿐만 아니라 감독관들의 눈빛 역시 신뢰로 가득했다.
여전히 속이 뒤틀린 인간들도 존재했지만.
“다들 오늘 하루는 충분히 쉬어두도록. 마음도 추스르고.”
죽거나 다치지 않은 응시생들도 많이 놀란 상태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때 누군가 물었다.
“그럼 시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총감독관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재개될 것이다. 다만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던 만큼 무림맹 내부에서 진행된다. 규정 역시 수정될 예정이다.”
전례를 떠올려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또한 이번 사건의 내막에 대해선 감찰각이 수사 중이니 그리 알고 있도록.”
“감찰각?”
응시생들이 웅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감찰각은 무림맹 최고의 수사기관.
무림맹주를 제외하면 누구도 감찰각의 수사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감찰각에 조사를 맡긴 것은 이번 일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겠다는 무림맹의 의지였다.
“수사결과는 기밀을 제외하곤 너희들에게도 당연히 공유될 것이다.”
감찰각이 나선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응시생들은 없었다.
하지만 천신우의 생각은 달랐다.
‘이렇게 되면 이번 생에서도 진실이 밝혀질 일은 없겠군.’
차라리 하급기관인 수사대가 이번 사건을 맡았다면, 보다 나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어차피 마찬가지인가. 감찰각주의 입김은 당연히 수사대에도 미칠 테니.’
지금은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할 사실.
감찰각주는 마교를 추종하는 칠객의 일인이다.
그 사실이 처음 밝혀지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정말이지 무림맹 전체가 충격에 빠졌었지.’
사실상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지키고 있던 셈이다.
마교가 일으킨 사건들을 마교와 가장 가까운 추종자가 조사했으니.
나중에 추가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 마교에 유리하게 조작된 사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른 일도 중요하지만 가능한 빨리 감찰각주를 제거해야 한다.’
물론 감찰각주 상대로 무력행사는 쉽지 않다.
감찰각주 개인의 무공도 엄청나거니와.
감찰각주를 암살했다간 바로 꼬리가 밟힐 테니까.
‘그래도 방법이 없진 않아.’
전생에서 감찰각주의 실체가 드러나는 계기가 됐던 사건.
‘그걸 앞당길 수만 있다면.’
천신우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는 사이 총감독관이 외쳤다.
“이상이다! 해산!”
언제나 그렇듯 모용비와 함께 숙소로 돌아가는 천신우에게 다가온 것은 장윤호였다.
“어이!”
“무슨 일입니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두려고. 덕분에 살았으니까.”
부상을 당했음에도 장윤호의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응시생들에게 친근하게 굴던 모습이 원래 성격이라는 거겠지.
“그나저나 선배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온갖 잘난 척은 다하고서 개망신을 당했으니.”
어차피 무림맹 무인임이 밝혀졌기에 장윤호는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내가 정보수집 하나는 자신 있는 편이거든? 그러니 나중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장윤호가 천신우에게 나직하게 덧붙였다.
“화향루로 와서 난화를 찾으면 된다네.”
천신우는 깜짝 놀랐다.
‘화향루라면 분명히……!’
사실 무림맹에 존재하는 정보조직은 한두 개가 아니다.
무림 전역에서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필요에 따라 계속해서 정보조직이 추가됐기 때문.
그중에서도 화향루는 유명한 편이었다.
물론 좋은 의미로.
감찰각주가 마교와 결탁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낸 것도 바로 화향루였다.
‘운이 따라주는군. 그렇잖아도 화향루와의 접점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 중이었는데.’
그길로 숙소로 돌아온 천신우는 화향루를 이용해 감찰각주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밖에 다른 계획들도 차분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먼저 만상서고의 세 번째 단서.
위치는 이미 알고 있다.
사실 그 사실만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온다.
‘무림맹 장서각이라니. 웃기지도 않지.’
전생에서 좌천된 이후 죽기 전까지 근무했던 장소.
바로 그곳에 만상서고의 세 번째 단서가 숨겨져 있다.
‘전생에선 내 집처럼 편한 곳이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장서각 출입이 불가능했다.
장서각도 엄연히 출입이 통제되는 장소이기에.
‘일단 가장 급한 것은 출입권한을 획득하는 문제인가.’
무림맹 출입권한은 5단계로 나뉘는데 4급이 가장 낮고 특급이 가장 높았다.
무림맹의 모든 장소를 출입할 수 있는 특급 출입증은 무림맹주와 극소수 인물들에게만 부여된다.
천신우의 경우엔 전생에서 승진을 거듭하며 2급 출입증까지 얻었다.
1급으로 가는 길목에서 채은영과의 사건으로 좌절하고 말았지만.
‘장서각에서 도서를 대출하는 것쯤은 4급 출입증만 있어도 충분해. 하지만 직접 출입하려면 2급 출입증이 필요하다.’
전생에도 엄청난 속도로 승진한 천신우였지만, 이번엔 그 이상으로 시간을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무림맹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준비를 마쳐야 한다.’
다행히 조건은 전생보다 훨씬 나았다.
천씨세가 대공자라는 신분.
학사로서의 경험뿐만 아니라 무인의 재능까지 손에 쥐었으니까.
천신우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마쳤다.
어떤 조직에 지원할지. 심지어 인사고과를 높이기 위한 방법까지도.
‘역시 구왕도 임무에 자원해야겠군.’
얼마 후에 구왕도 대참사가 발생하면.
무림맹에선 사건해결을 위해 무인들을 대거 파견할 것이다.
그때 자원해 공을 세운다면 전생보다 빠른 승진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을 마친 천신우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숙소에 딸린 정원으로 나왔다.
때마침 지원전형 시험을 마친 제갈휘가 홀가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오오! 드디어 끝났는가! 어때? 결과는?”
모용비의 물음에 제갈휘가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다들 수준이 높더군. 최종시험결과는 나와야 알겠지만 1등은 절대 무리일세.”
“허어. 자네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1등을 한다는 말인가?”
“진사명이라고. 아주 대단한 친구더군. 적어도 1등은 그 친구가 확실해.”
진사명. 천신우의 기억에도 있는 이름이었다.
오래된 서랍장을 열어보듯 천신우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무림맹 지원전형에서 제갈휘는 3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진사명이 2등이었다.
천신우는 피식 웃었다.
‘1등이 나였지. 진사명과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러나 제갈휘와 달리 진사명과는 가까워질 계기 자체가 없었던 천신우다.
그래도 같은 차수 동기라서 간간이 소식은 들었다.
무림맹이 마교에 의해 불타기 전까지도 살아 있던 걸로 기억한다.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궁금해지는군.’
진사명은 전생에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 * *
무림맹 시험 지원전형 1위에게 제공된 최고급 숙소.
지금 그곳에선 장발의 사내가 손가락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헤집는 중이었다.
그의 이름은 진사명. 이번 지원전형을 수석으로 합격한 인물이었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이 피식 웃었다.
“청승맞기는.”
“아아. 왔군.”
진사명이 턱짓했다.
“저기 앉아.”
방석조차 내어주지 않는 진사명의 태도에 여인이 투덜거렸다.
“당신 너무 불친절해. 그게 매력이지만.”
“용건은?”
“1등이라며. 축하해.”
“당연한 일을 축하할 필요가 있을까?”
진사명은 오만하게 대답했지만 여인은 알았다.
진사명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그는 무림맹의 사룡에 비견될 만한 마교 최고의 신성이었으니까.
물론 무공보다는 책략에 특화된 쪽이긴 하지만 말이다.
“주목할 만한 얼굴은 있었어?”
“제갈휘라고. 제갈세가의 후계자인데 그럭저럭 재능은 갖췄더군.”
“대단한데? 당신한테 인정을 받을 정도면.”
“그렇다고 아직 경계할 수준까진 아니고. 그쪽은 어땠지?”
“철사자나 척화진 모두 사룡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야.”
“그런데도 흥미로운 놈이 있었나 보군. 역시 그 천신우란 놈이겠지?”
“그래.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어.”
여인이 눈을 빛냈다.
“천신우 그놈 때문에 광소와 참혼객 모두 목표치를 채우지도 못하고 죽었잖아.”
광소와 참혼객의 죽음은 전혀 안타깝지 않았다.
어차피 버리는 패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까.
다만 당초 계획한 것보다 성과가 미흡한 것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었다.
“확실히 이래서는 이번 기회에 성가신 놈들을 쳐내긴 힘들겠어. 물론 기회야 앞으로도 많지만 말이야.”
“네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보다 천신우 그놈의 실력을 직접 봤나?”
여인이 기다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놀랍도록 매혹적인 모습이었지만 진사명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눈으로 확인하진 않았지. 그랬다간 잡아먹고 싶어질 테니까.”
강한 사내를 굴복시키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그나저나 살생부에 올릴 거야?”
진사명이 되물었다.
“천신우?”
“그래.”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진사명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치 장난감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지.”
진사명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물론 앞으로 지켜볼 생각이다. 절명곡과 이번 무림맹 시험. 거기서 보여준 놈의 행보가 단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우리 앞길을 막을 놈인지.”
여인이 침을 꼴깍 삼켰다.
“죽일 거야? 그럼 나한테 맡겨줘.”
“죽일 놈은 많아. 너무 한 놈한테 집착하지 마라.”
“쳇.”
불만스러운 표정의 여인을 무시하고 진사명이 반쯤 눈을 감았다.
“천신우라…….”
나직하게 중얼거린 것도 잠시.
구왕도 계획을 면밀히 점검하는 진사명이었다.
어차피 절명곡이나 무림맹 시험을 비롯한 이전의 계획들은 초석에 불과하다.
마교의 침공을 위한 본격적인 사전작업은 구왕도 계획부터다.
하지만 진사명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기 올라와 봐! 풍경 끝내줘!”
어느새 건물 지붕에 올라간 여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귀찮게 하기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진사명 역시 지붕 위로 올라갔다.
“어때? 죽이지?”
과연 무림맹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고히 솟은 전각들. 그리고 밤하늘 아래 반짝이는 불빛들.
감성에 빠진 여인이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우리가 저 모든 걸 가질 수 있을까?”
“물론이지.”
진사명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 * *
재개된 무림맹 전투전형 시험.
최종 1위는 천신우였다.
임무를 위해 잠입했던 장윤호와 무신궁의 무영이 일신상의 이유로 시험을 포기한 가운데.
척화진과 철사자가 각각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모용비 역시 20위 안에 드는 저력을 발휘했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은 아니었다.
물론 천신우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에 받은 자극은 모용비가 껍질을 깨고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할 테니까.
감독관의 인솔에 따라 합격자들은 커다란 건물로 이동했다.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전이군.’
무림맹의 중요행사 용도로 쓰이는 건물이다.
굳이 대기실을 시험장이 아닌 태화전으로 정한 것은 단지 관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합격자들이 무림맹의 일원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
“여기서 기다리도록!”
총감독관은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덩그러니 남겨진 합격자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문이 덜컹 열리며 사나운 인상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천신우가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