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학사환생 062화
천신우의 발밑에서 시작된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너무도 압도적인 존재감에 무영은 전율마저 느꼈다.
“너는 천씨세가의……!”
개인전에서 맞붙은 이후 천신우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꼈던 무영이다.
물론 그 이면엔 제대로 붙으면 자신이 이긴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천신우가 보여준 광경은 무영의 평가를 송두리째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천신우는 무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였던 것이다.
“그랬군.”
천신우 역시 무영을 기억했다.
정확히는 개인전에서 맞붙은 그의 전투방식을 잊지 않았다.
어쩐지 후기지수에 어울리지 않게 실전경험이 많아 보인다 싶었더니.
“그쪽은 무신궁에서 나온 사람이었군.”
달려오면서 무영과 참혼객의 대화를 들었기에 가능한 추측.
천신우가 무영을 등지고 돌아섰다.
“부상자들을 부탁하지.”
천신우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신궁에서 무림맹 시험에 고수를 잠입시킨 이유가 뭐든지 간에.
마교의 추종자를 쓰러뜨리는 것이 우선이다.
뒤쪽으로 물러났던 참혼객이 한쪽 눈을 감았다. 창백하고 얇은 입술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천씨세가라…….”
사실 참혼객은 천신우에 대해 남들이 아는 것만큼만 알고 있었다.
마교의 정보력은 가공할 만하지만 추종자 모두에게 정보가 공개되는 것은 아니다.
천신우가 절명곡에서 추혼객을 제압한 정보 역시 참혼객은 알고 있지 못했다.
“하긴 네놈이 누구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참혼객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늘 이곳에서 최대한 많은 후기지수를 죽이는 것이다.
그게 천신우든 누구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인 것을.”
“…….”
지켜보던 무영이 채은영을 데리고 장내를 벗어날지 고민하는 순간.
싸움이 시작됐다.
먼저 몸을 날린 것은 참혼객이었다.
천신우의 눈높이까지 도약한 그가 매섭게 도를 휘둘렀다.
쏴아앙!
도의 궤적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천신우의 얼굴을 노렸다.
천신우는 자세를 낮추며 참혼객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쿠웅!
뒤쪽의 나무가 박살 나는 소리를 들으며 천신우가 앞으로 파고들었다.
회피와 공격이 하나의 동작처럼 이어졌다.
날아드는 천신우의 검을 참혼객도 피해냈지만 이어진 결과는 사뭇 달랐다.
콰콰콰콰!
파도에 휩쓸리듯 숲이 쑥대밭으로 변했다.
수백 년을 살아왔을 나무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쓰러지는 나무를 피해 옆으로 몸을 내던진 참혼객이 눈을 부릅떴다.
잠깐 사이 천신우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공중에서 천신우의 자운검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데굴데굴 굴러서 간신히 피해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천신우의 돌려차기가 날아들었다.
“!”
이번만큼은 참혼객도 피해내지 못했다.
퍼어억!
배를 얻어맞고 한참을 날아간 참혼객이 수풀에 처박혔다.
천신우는 바닥에 꽂힌 자운검을 뽑아 들며 수풀로 다가섰다.
사박사박.
가슴 높이까지 웃자란 수풀이 밤바람에 흔들린다.
수풀을 잠시 바라보던 천신우가 그대로 검을 가로로 그어버렸다.
솨아아아악!
파도가 밀려나듯 수풀이 검이 휘둘러진 방향을 따라 눕혀진다.
잘려 나간 수풀 한복판.
참혼객이 도를 공중에 내던지며 몸을 솟구쳤다.
허공에 떠오른 그의 손엔 발사장치가 들려 있었다.
달칵.
잠금장치를 풀자 수백 발의 쇠침이 쏟아져 나왔다.
촤라라락!
달빛을 반사한 쇠침은 마치 별이 떨어지듯 수백 가닥의 선을 그렸다.
“이런!”
무영이 채은영을 품에 안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가 있던 자리에도 십여 발의 쇠침이 빽빽하게 꽂혔다.
파바바박!
“으으…….”
소란 때문인지 채은영이 눈을 떴지만 무영은 그녀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쏟아지는 수백 발의 쇠침을 뚫고 달려가는 천신우의 모습에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따다다다당!
주위에 무형의 막이 뒤덮인 것처럼 천신우의 검이 쇠침을 튕겨냈다.
참혼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발사장치를 바닥에 버렸다.
휘리릭!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도를 다시 움켜쥔 참혼객이 땅을 박찼다.
달을 등지고 날아오른 그가 천신우를 향해 도를 내리쳤다.
솨아악!
“……!”
지켜보던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채은영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말았다.
순간 밀려드는 통증에 채은영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그제야 채은영의 존재를 떠올린 무영이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무영이 아주 잠깐 한눈판 사이.
참혼객의 도는 미친 듯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솨악! 쏴아아앙!
나무가 갈라지고 바위가 박살 났다.
바위 파편과 흙더미들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처음부터 지켜보던 무영은 물론.
방금 의식을 되찾은 채은영마저 숨이 멎는 듯했다.
참혼객이 뿜어내는 내공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신궁의 최정예 고수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핏빛으로 물든 눈빛에서 쉬지 않고 광기가 폭발한다.
그런데도…….
“어째서! 어째서 맞지 않는 거냐!”
암기가 통하지 않자 최후의 수단으로 마교에서 지급받은 증폭환까지 복용한 참혼객이다.
증폭환으로 내공을 증폭시키면 당연히 천신우와의 격차를 극복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했는데.
격차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참혼객의 공격이 모조리 빗나가는 것이 증거.
“도대체 어째서!”
격분한 참혼객이 도를 내리쳤다.
콰앙!
땅거죽이 뒤집히고 흙더미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옆으로 그어지는 칼날에 뒤편의 나무들이 수수깡처럼 잘려 나간다.
“맙소사.”
지켜보던 무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솔직히 무영으로선 따라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감독관들이 도착하기 전에 참혼객의 공격에 천신우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까라면 몰라도 지금의 참혼객으로부터 부상당한 채은영을 데리고 달아나기란 불가능.
결국 무영과 채은영 모두 죽을 것이다.
이제 천신우의 손에 두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염치없지만…… 부탁한다.’
무영의 기대에 부응하듯 천신우가 자운검으로 참혼객의 도를 쳐냈다.
까아아앙!
귀신의 울음처럼 섬뜩한 금속성을 시작으로.
차차차창!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천신우와 참혼객은 산속이 좁게 느껴질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천신우의 표정에 여유가 넘치는 것에 비해.
참혼객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쩌엉!
검과 도가 부딪힐 때마다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 참혼객이 신음을 토했다.
“이런 미친!”
증폭환을 복용했음에도 속도와 힘 모두 천신우에게 밀리고 있었다.
“네놈은 도대체……!”
생각해 볼 수 있는 원인은 두 가지 정도였다.
참혼객처럼 증폭환을 복용했을 경우.
하지만 천신우의 모습에서 증폭환을 복용하면 나타나는 특이현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처음부터 실력을 숨겼구나! 감히 나를 기만하다니!”
물론 참혼객의 추측은 틀렸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전혀 없는 것뿐.
지금 천신우는 승천단의 효과로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상태였으니까.
몸속에서 요동치는 강렬한 기운을 느끼며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어느 쪽이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천신우는 처음부터 참혼객을 심문해 정보를 얻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마교는 이해관계로 얽힌 무림맹과는 다르니까.’
마교에 대한 추종자들의 충성심은 그야말로 절대적.
회유나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
천신우가 자운검을 바로잡았다.
칼날에 반사된 달빛이 다시 천신우의 얼굴을 비췄다.
지금 이 순간, 천신우는 분명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
그런 천신우를 바라보며 참혼객은 결론을 내렸다.
정면대결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이 상황을 반전시킬 유일한 열쇠.
그건 바로 채은영의 존재였다.
그녀를 인질로 삼는다면 천신우의 움직임에도 제약이 생길 것이다.
무신의 손녀를 그냥 죽게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
참혼객은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천신우를 따돌리고 무영을 제압한 다음, 채은영의 신병을 확보하는 그림을.
“후우.”
심호흡한 참혼객이 몸을 날렸다.
‘바로 지금!’
예상한 대로 천신우의 검이 날아든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천신우의 검엔 아주 옅은 막이 씌워져 있었다.
‘뭐지?’
의문을 떨쳐내기라도 하듯, 참혼객이 힘차게 도를 휘둘렀다.
천신우를 일단 뒤로 물러나게 만든 다음 무영에게 달려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자운검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쉭!
변화무쌍한 움직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본과 정석에 치중하던 천신우이기에, 약간의 변화만으로도 주효했다.
살짝 방향을 비튼 천신우의 자운검이 정확히 참혼객의 팔뚝을 베어냈다.
“크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참혼객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숨을 돌리기도 전에 천신우가 검을 찔러왔다.
이번엔 항상 그렇듯 정석적인 찌르기.
하지만 막 변칙에 당한 참혼객으로선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대처해도 속도를 따라가기 힘든 상황.
잠시 주저한 대가는 혹독했다.
푸우욱!
천신우의 자운검이 참혼객의 목을 꿰뚫었다.
뒤늦게 내질러진 참혼객의 도는 천신우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는 천신우를 보며 참혼객이 울컥 피를 토해냈다.
달빛 아래 그의 눈빛이 음울했다.
적어도 간담 정도는 서늘하게 만들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실패한 것이다.
다음 순간.
참혼객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쿵!
마침내 풀숲에 머리를 처박고 숨을 거둔 참혼객.
천신우가 검을 쥐지 않은 다른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신에게 가르침을 받은 보람이 있군.’
무신의 가르침은 단지 한 가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어디에든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촤아악!
자운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천신우는 참혼객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교에서 무림맹 시험에까지 개입했을 줄은 몰랐군.’
절명곡 사건 말고도 마교에서 일으킨 사건들을 기억하는 천신우였다.
‘하지만 절명곡 사건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무림맹 연쇄살인사건과 구왕도 대참사도 끝내는 마교의 의도가 드러났지.’
천신우는 의구심을 품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목적이 뚜렷하지가 않아. 무림맹 시험에 잠입해서 뭘 하려고 했던 거지?’
특정표적을 암살하기 위함이라면 굳이 시험에 잠입할 필요가 없다. 괜히 무림맹을 자극하고 이목을 집중시킬 테니까.
‘잠깐만. 설마…….’
마교는 침공을 시작하기에 앞서 추종자들을 사주해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켰다.
그중엔 이번 사건처럼 도저히 의도를 종잡기 힘든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로 인해 잠잠하던 무림맹을 들쑤셔놓았다는 것.
‘당장 이번 사건만 놓고 보더라도 관계자들이 대거 사퇴했었지. 사상자가 다수 발생한 책임을 지고.’
천신우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 무림맹의 조직개편과 제도변화를 초래했다. 덕분에 유능한 인물들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무림맹을 떠났다.’
물론 모든 인재들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진 않았다.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실제로 진실에 접근한 이들도 있었다.
‘절명곡 사건을 재수사한 무림맹 제16지부 부지부장 공덕. 그리고 그의 지인인 용천세를 비롯해 몇몇 인물이 진실에 다가갔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제 알겠군. 마교에서 이런 사건들을 일으킨 이유를.’
사전작업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편했다.
마교의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명단을 추려내고 제거하기 위함.
‘어쩌면 나도 마교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갔을지도. 절명곡 사건에 이어 이번 일까지 훼방을 놓았으니.’
물론 두렵지는 않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니까.
‘그래도 준비는 서둘러야겠지.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모르니까.’
각오를 다지며 천신우가 돌아섰다.
무영이 다가와 정중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말투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천신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천신우가 쳐다보자 무영의 품에 안겨 있던 채은영이 황급히 떨어졌다.
무영의 응급조치 덕에 목숨엔 지장이 없는 그녀였다.
“저기…….”
채은영은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천신우는 무영에게만 고개를 끄덕여주고 그녀를 지나쳐갔다.
“어어……?”
여전히 이런 식의 대접에 익숙지 않은 채은영이 눈을 파르르 떨었지만.
천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방에서 횃불이 모여들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뒤늦게 도착한 감독관들은 쑥대밭으로 변해버린 숲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의외로 차분한 표정의 중년인도 보였다.
바로 총감독관이었다.
그가 천신우를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상황은 이미 보고받았네. 정말 고생 많았네.”
깨어난 장윤호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그였다.
만일 천신우가 없었다면 사상자는 급증했을 것이다.
사실 응시생들은 물론이고 총감독관 입장에서도 천신우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사상자가 지금보다 많았다면 문책성 인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자네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총감독관이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
“시험을 중단시키도록. 무림맹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