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학사환생 061화
“끄아아악!”
산중에 울려 퍼지는 비명.
이어 붉은 신호탄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감독관 혼자선 해결하기 힘든 응급상황이 발생했다는 의미.
천신우가 고개를 돌렸다.
응시생끼리 충돌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엔 비명이 들려온 방향이 심상찮았다.
‘저쪽은 분명히…….’
틀림없다.
광소와 장윤호가 향한 곳이다.
천신우의 조에 속한 응시생들도 불안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일이지?”
“설마…….”
“어떻게 하지?”
모두의 시선이 천신우에게로 모였다.
개인전 우승자니 아무래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신우는 잠시 생각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봐야겠어. 다들 생각이 다르겠지만 지금은 의견을 따라줬으면 좋겠군. 증표 여섯 개는 내가 책임지고 확보할 테니.”
“설령 사고라 해도 어차피 감독관들이 알아서 처리할 텐데…….”
반발은 극소수.
대부분은 천신우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럴 필요까지야. 우리도 제 몫은 해야지.”
“혹시 알아? 이것도 시험의 일부일지.”
응시생들 대부분은 명문 후기지수.
그런 만큼 정의감도 투철한 편이었다.
함께 산속을 내달리는데 옆에서 느닷없이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조원 하나가 함정에 발을 헛디딘 것이다.
시험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주최 측에서 미리 설치해둔 함정이었다.
깊은 구덩이 아래로 추락하려는 조원의 팔을 천신우가 붙잡았다.
천신우와 눈이 마주친 조원이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고마워요.”
“인사는 나중에.”
개인전 결승에서도 느긋하던 천신우지만 오히려 지금은 초조함을 느꼈다.
전생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사상자 수는 무려 수십 명에 달했다.
‘어쩌면 그마저도 숫자를 축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최대한 서둘러야 하는 이유였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기에.
‘하지만 이렇게 발을 맞춰 움직이다간 제시간에 도착하기 어려워.’
조원들의 수준이 제각각이기에 생기는 문제였다.
천신우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먼저 가지.”
주위를 두리번거린 천신우는 가장 높은 나무에 올랐다.
파파파팟!
순식간에 나무꼭대기까지 오른 천신우가 나뭇가지 위에 서서 멀리 내다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작은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한 천신우다.
‘저기군.’
천신우가 곧장 나뭇가지를 박찼다.
굽어졌던 나뭇가지가 탄성을 발휘해 원래 위치로 돌아오기도 전에.
천신우는 이미 산비탈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바위나 자갈 따위는 전혀 장해물이 되지 못했다.
“……!”
응시생들이 순수하게 감탄하던 그때.
천신우 조를 담당하는 감독관은 잠시 갈등했다.
원래 감독관은 모습을 숨기고 시험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
하지만 지금 천신우가 내려가는 산비탈 아래는 낭떠러지다.
‘아무리 그래도 저기서 떨어졌다간…….’
결국 사고를 막기 위해 감독관이 위험을 경고하려던 순간이었다.
활시위처럼 뒤로 젖혀졌던 천신우의 상체와 무릎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동시에 산비탈을 미끄러지던 발이 정지하며 하체를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킨다.
다음 순간!
바위를 디딤돌 삼아 천신우의 신형이 허공으로 쏘아졌다.
빠가각!
단단한 바위를 박살 낼 정도로 힘이 실린 발돋움은 천신우에게 엄청난 가속도를 선사했다.
하늘을 나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천신우가 반대편 절벽 위에 착지했다.
지금까지의 힘찬 도약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안정적인 착지.
이어진 것은 광폭에 가까운 질주였다.
천신우의 몸이 빛처럼 쏘아져 나간다.
파아앗!
그렇게 천신우는 모두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반대편에 남겨진 조원 하나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미친…….”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 중에 천신우가 개인전 우승자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마음속엔 같은 후기지수라는 생각이 여전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하지만 천신우의 신위를 눈앞에서 지켜본 지금.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졌다.
천신우는 그들과는 아예 격이 다른 고수였다.
같은 범주에 묶으려는 생각 자체가 죄스럽게 느껴질 만큼.
침묵 속에서 누군가 어렵게 입을 뗐다.
“우리도 가야…….”
그 말에 모두가 눈을 껌벅거렸다.
천신우의 움직임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엄청난 내공과 단련된 육체. 거기에 천부적인 감각까지 갖춰야 가능한 동작.
그들 중에 감히 시도라도 해보려는 무모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가야지. 그럼.”
당연한 듯이 안전한 길로 우회하는 후기지수들.
모습을 감춘 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던 감독관은 천신우가 사라진 방향을 스윽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천신우를 제외한 다른 후기지수들이 뛰어가는 방향으로.
* * *
당연하게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천신우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신우의 합류가 무의미하진 않았다.
먼저 합류했던 감독관은 이미 광소에게 당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달아나…….”
천신우의 얼굴을 알아본 감독관이 힘겹게 신음을 내뱉었다.
때마침 마지막 상대를 제압한 광소가 천신우를 돌아보며 섬뜩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번뜩인다.
천신우는 단번에 정황을 파악했다.
‘증폭환을 복용했군.’
엄청난 부작용을 담보로 내공을 일시적으로 증폭시켜주는 증폭환.
그중에서도 마교에서 제조한 증폭환은, 복용하는 즉시 눈동자가 붉어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교의 추종자가 증폭환까지 복용했으니 다들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이해는 되는군.’
주위에 쓰러진 사람들을 훑던 천신우의 눈길이 한곳에 우뚝 멈췄다.
‘장윤호?’
개인전부터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던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광소가 중얼거렸다.
“그놈은 확실히 다르더군. 하긴 무림맹에서 잠입시킨 놈이니 당연하겠지.”
의외로 천신우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장윤호는 분명 평범한 응시생이라고 생각하기엔 수상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무슨 배짱으로 달려온 거냐? 설마 목숨이 여러 개는 아닐 테고.”
광소는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천신우의 눈앞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솨악!
하지만 광소는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박살 내는 짜릿한 쾌감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
심지어 천신우의 모습을 놓친 광소였다.
“!”
그런 광소를 도발하듯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천신우의 목소리.
“증폭환을 복용한 게 이 정도라면 너무 실망스러운데.”
벼락처럼 돌아선 광소가 저돌적으로 천신우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악!
천신우의 자운검이 옆구리를 길게 찢었지만, 광소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천신우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격을 받아쳤다.
‘마교에서 제조한 증폭환은 통각을 마비시키지. 미리 알고 있어서 다행이군.’
허를 찌른 공격이 연거푸 막히자 광소가 혀로 입술을 날름 핥았다.
패배를 직감했음에도 그는 전혀 당혹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키키킥.”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던 광소가 돌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달아나려는 의도였지만 천신우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뒤따라 몸을 솟구친 천신우가 내공을 주입한 자운검으로 광소의 다리를 잘라냈다.
서걱! 서걱!
무릎 아래가 잘려 나간 광소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간신히 검을 바닥에 꽂으며 체중을 지탱했지만 아까 같은 움직임은 불가능했다.
“아무리 고통을 느끼지 않더라도, 팔다리가 잘리면 움직이지 못하긴 마찬가지.”
천신우는 광소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절명곡에서 상대한 추혼객은 죽음의 순간 회한을 감추지 못했었는데.
눈앞의 광소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웃고 있어?’
착각이 아니었다.
증폭환의 부작용으로 눈의 실핏줄이 터지고 핏물이 흐르는데도, 광소는 소리 내어 웃었다.
“키키키키키.”
피거품을 뿜어내며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광소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당연히 천신우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전생에선 바로 오늘 이곳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분명 그때도 누군가 응시생들과 감독관을 학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확인한 광소의 실력은 절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증폭환을 먹고도 이 수준이라면 다수의 감독관들을 상대하긴 무리다. 그런데 전생엔 왜 그렇게 희생자가 많았던 거지?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
그때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장윤호가 힘겹게 눈을 떴다.
“너는…….”
천신우와 눈이 마주친 장윤호에게서 평소의 여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걱정 말아요. 이미 광소는 제압했으니까.”
천신우의 설명에도 장윤호의 안색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다행히 신호탄 덕에 늦지 않게 합류…….”
“아니.”
장윤호가 힘겹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우리가 아니야.”
천신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럼?”
“광소…… 저놈이 신호탄을…….”
그 말을 끝으로 장윤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천신우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들었던 위화감이 이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광소는 나도 알아차릴 만큼 존재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무림맹도 광소에게 감시자를 붙였고. 하지만 실은 그 모든 게 시선을 끌려는 의도였다면?’
보통 고의로 시선을 끈다면 이유는 하나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함.
광소가 무리하면서까지 감추고 싶었던 것.
그게 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틀림없어. 광소 말고도 이곳에 마교의 다른 추종자가 있는 거다.’
그것도 수십 명을 혼자서 상대할 실력을 지닌!
‘어디지? 놈은 어디에 있는 거지?’
더 이상의 신호탄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놈에겐 광소처럼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산중 어디선가 은밀하게 살육을 저지르고 있을 것이다.
‘잠깐…….’
천신우는 주변지형을 살핀 끝에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방금 광소는 오른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쪽은 상대적으로 시험본부와 가까워.’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면 왼쪽으로 달아났어야 한다. 그쪽 지형이 도주하기도 훨씬 편하다.
‘그런데 왜? 어째서 굳이 이쪽 방향을 택한 거지?’
지금까지 광소의 행동을 미루어보면 답이 나왔다.
‘그게 최선이니까. 이쪽으로 달아나야 동료로부터 최대한 멀어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천신우는 바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부상자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곧 도착할 감독관들이 돌봐줄 것이다.
지형은 험하고 주위는 어두웠지만 천신우는 마치 호랑이처럼 산속을 가로질렀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 * *
“…….”
무신궁 출신 고수 무영은 창백한 인상의 상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시험 내내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던 놈이다.
사전에 무신궁에서 추려낸 요주의 인물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놈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위에 너부러진 시체들이, 놈의 칼에 묻은 흥건한 피가 그 증거였다.
“네놈 이름이…….”
“참혼객. 죽어서도 기억하도록.”
“참혼객?”
난생처음 듣는 별호였다.
애초에 무영은 마교의 추종자들이 객으로 불린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물론 네가 누군지 밝힐 필요는 없다. 그년을 필사적으로 지키는 것을 보면 무신의 수족이겠지.”
일순 참혼객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무신도 한심하군. 기껏 손을 쓰려면 진짜배기를 보냈어야지. 너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놈이 아니라.”
“이놈!”
무영이 격분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신에 대한 모욕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파앗!
엄청난 속도로 쇄도한 무영이었지만 참혼객은 너무도 쉽게 피해냈다.
“확실히 계집애 때문에 마음껏 날뛰지 못하는군.”
주변에 쓰러진 다른 후기지수들과 마찬가지로 채은영 역시 참혼객에게 제압당한 후였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은 물론이다.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 것은 전적으로 무영의 공이었다.
하지만 참혼객이 건재한 이상 채은영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영은 섣불리 참혼객과 진검승부를 펼치지 못했다.
“그년부터 죽여야겠어. 네놈과 제대로 붙으려면.”
순식간에 채은영 앞에 나타난 참혼객이 완만하게 휘어진 도를 내리쳤다.
무영은 다급히 채은영을 막아섰지만 참혼객의 목표는 처음부터 그였다.
급선회한 도가 무영의 옆구리를 스쳤다.
스각!
베여 나간 옆구리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무영의 몸은 동강 났을 것이다.
“운이 좋군. 하지만 언제까지 운이 따라줄까.”
참혼객의 냉소에 무영은 이를 악물었다.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채은영이 문제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물론 참혼객은 무영이 고민할 틈을 주지 않았다.
차차차창!
다시 한번 불꽃 튀는 공방전이 벌어지던 그때.
환하던 달빛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순간적으로 어두워진 하늘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
무영과 참혼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그들이 그곳을 벗어나기 무섭게.
콰콰쾅! 굉음과 함께 바닥이 쩌저적 갈라졌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천신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