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학사환생 058화
채은영은 두 눈을 의심했다.
무림맹에 도착하자마자 조부인 무신을 찾아왔건만.
어째서인지 무신은 천신우와 겸상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할아버지가 이딴 놈이랑 같이 있는 거야?’
의문에 빠진 채은영에게 무신이 물어왔다.
“둘이 아는 사이더냐?”
채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막은 몰라도 어쨌든 천신우를 찾아다닐 수고는 던 셈이다.
“그럼요. 제 얼굴 보이세요? 이렇게 만든 게 바로 이 인간이에요!”
의원에게 치료를 받긴 했지만 아직 얼굴의 붓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채은영.
무신이 천신우를 돌아봤다.
“내 손녀 말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천신우는 부인하지 않았다.
무신은 한층 흥미로운 눈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순순히 시인하는구나.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닐 터인데.”
이젠 천신우도 철옹의 정체가 무신임을 깨달은 상황.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르신께서 누구시든 저는 당당합니다. 잘못한 게 없으니 말입니다.”
“나는 무죄도 유죄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다만.”
“지금껏 그런 적이 없으셨기에 무신으로 추앙받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껄껄껄! 한 마디를 안 지는구나! 그 고약한 늙은이를 쏙 빼닮았어.”
호탕하게 웃은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나는 지금껏 무고한 사람을 힘으로 핍박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알다시피 여기 이 아이는 내 손녀다. 그러니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야겠구나.”
“못할 것도 없지요. 일단 손녀분과는 객잔에서 마주쳤습니다. 흔히 그렇듯 일행끼리 통성명을 하고 술자리를 함께했지요. 그러던 차에 무림맹 시험에 대비해 대련을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천신우는 양주철을 때려눕힌 직후, 채은영이 검을 구실로 시비 걸었던 일까지 모두 설명했다.
채은영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지만 무신 때문에 차마 끼어들지 못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무신이 채은영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정녕 풍뢰권 그 인간을 도둑이라 했느냐?”
“네에…….”
설마 풍뢰권이 무신과 이토록 친분이 두터울 줄은 상상도 못했던 채은영이다.
“그 늙은이가 아주 성격이 고약하고 막돼먹은 인간이긴 하나, 남의 물건을 훔칠 위인은 결코 아니다. 더군다나 네 주장에 따르면 나는 검 하나 간수 못하는 팔푼이란 뜻인데.”
“아, 아니요! 저는 절대 그런 뜻이…….”
무신은 거듭 강조했다.
“이 검은 내가 그 늙은이에게 준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게 만들지 말거라.”
채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무신이 편들어주길 바랐건만.
괜히 얘길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게 생긴 것이다.
감정이 격해진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무하세요. 흐흑. 제가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단 말이에요.”
그러나 눈물작전조차 통하지 않았다.
“엄살이 심하구나. 네가 지금껏 먹어온 영약이며 배워온 무공이 있는데 그깟 상처로 죽는다는 말이냐?”
천신우는 새삼 감탄했다.
세상 어떤 할아버지가 손녀의 눈물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오직 무신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이 녀석이 마음만 있었다면 충분히 널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은 것은. 내 얼굴을 봐서일 수도 있고, 네가 저지른 잘못이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무신의 목소리가 더욱 진중해졌다.
“그런데 너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이 녀석에게 무력을 사용하려고 했다면서. 그러라고 호위들을 붙여준 것이 아니다만.”
채은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걸 어떻게…….”
무신은 혀를 찼다.
“영아. 도대체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설마 내가 손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거라 생각한 것이냐?”
무신이 쐐기를 박았다.
“혹시나 애꿎은 호위들 들쑤실 생각은 말거라. 그 녀석들이야 네 지시에 따른 죄밖에 없으니.”
누가 그날 객잔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했는지, 호위들을 추궁하려던 채은영이 움찔했다.
지금 그녀는 무신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아주 잘 찾아왔다. 안 그래도 사람을 보내 너를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채은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집으로 돌려보내신다니요!”
“무림맹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고나 치고 다녔으니 당연한 일 아니냐.”
궁지에 몰린 채은영이 무릎 꿇고 무신에게 매달렸다.
“할아버지…… 돌아가란 말씀만은 하지 마세요. 제발요.”
이대로 돌아가면 평생을 언니의 그늘 아래서 살아야 한다.
채은영은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신은 무릎 꿇은 손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러 면에서 부족한 손녀다. 심지어 성정마저도 올바르지 못하다.
그럼에도 매정하게 내칠 수 없는 것은 역시 핏줄이기 때문.
깊은 한숨과 함께 무신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에게 사과해라. 풍뢰권 그 늙은이를 도둑으로 몰았으니 그것도 사과하고. 또한 앞으로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너는 다시는 무신궁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전부 받아들인다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몇 번이나 주저하던 채은영이 결국 천신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미안해요…….”
급기야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는 채은영.
그러나 손녀를 바라보는 무신의 표정은 더없이 냉정했다.
“너는 아직 멀었구나. 내 분명히 피는 흘려도 눈물은 절대 흘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거늘.”
결국 마지막까지도 무신의 눈높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채은영이었다.
“됐다. 그만 가보아라. 풍뢰권 늙은이에겐 내가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해주마.”
끅끅거리는 채은영을 돌려보낸 무신이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천신우라고 했느냐? 미안하고 고맙구나.”
무신은 회한에 잠긴 표정이었다.
“내 일찍이 손이 귀하다는 핑계로 영이를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다. 선생이라고 붙여놓은 인간들도 내 눈치를 보느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지. 그래서 걱정이 많았는데 이번에 영이가 임자를 제대로 만났구나.”
천신우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팽우경이 그랬고 백동철이 그랬듯 채은영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 검은 풍뢰권 늙은이에게 돌려줘라. 받기 싫다면 네가 가져도 좋다.”
천신우는 탁자 위의 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검에 얽힌 일화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크흠!”
사레가 들렸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무신이 입가를 스윽 닦았다.
“못 해줄 것도 없지. 예전에 그 늙은이와 사소한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다.”
무신은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로 지난날이 거슬러 올라왔다.
* * *
시작은 애꾸눈 노인의 질문이 발단이었다.
“철옹, 자네와 풍뢰권이 맞붙은 적이 있던가?”
무명이라는 명칭의 모임.
거기에 소속된 이들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별명으로 불렀다.
무신 역시 무명 모임에서만큼은 무신이 아닌 철옹이었다.
“한 서너 번쯤? 물론 오래전 일이네만.”
“그래? 누가 이겼는가?”
잔뜩 기대한 애꾸눈을 보며 무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한 걸 왜 묻나.”
무림의 명숙으로 알려진 그들이었지만 무명 모임에선 격의 없이 서로를 대했다.
“어쩐지 둘이 서로 비무하는 일이 없더라니. 이미 결과가 났던 게로군.”
“허허허.”
무신이 머쓱하게 웃던 그때였다.
“결과고 나발이고, 배울 게 하나라도 있어야 비무할 맛이 나지.”
풍뢰권의 등장이었다.
무신도 질세라 대꾸했다. 이 자리만큼은 체면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
“배울 게 없긴. 패배자의 겸손을 배워놓고 발뺌은.”
“으허허허!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발끈한 풍뢰권이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승패를 따져보면 감히 그런 소릴 못할 텐데.”
지켜보던 애꾸눈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나간 얘기는 해서 뭐하나. 그러지 말고 아예 이 자리에서 붙어보지그래.”
무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못할 것도 없지.”
그런데 풍뢰권은 한술 더 떴다.
“좋아. 단! 난 주먹을 쓰지 않겠네. 닭 잡는데 소 잡는 주먹을 쓸 필요는 없지.”
“허허허! 누가 할 소릴! 나도 검을 놓고 맨손으로만 상대하도록 하지.”
이번에도 애꾸눈이 맞불을 놓았다.
“그럼 아예 이러는 건 어떤가? 철옹 자네는 주먹으로, 풍뢰권 자네는 검을 들고 싸우는 거네.”
풍뢰권이 툴툴거렸다.
“그깟 쇳덩이 따위 갖고 있지도 않네만.”
무신이 흔쾌히 제안했다.
“내 검을 빌려주지.”
무신으로부터 건네받은 검을 어설프게 움켜쥐는 풍뢰권이었다.
무신이 물었다.
“설마 자네 검을 처음 잡아보는 건 아니겠지? 그럼 너무 불공평한데. 나는 권법도 어느 정도는 익혔거든. 그러지 말고 이리 줘보게. 쥐는 법이라도 알려줄 테니.”
“일없어. 젓가락 쥐는 거보다야 쉽겠지.”
그렇게 시작된 무신과 풍뢰권의 이색적인 비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깨달았다.
풍뢰권이 허풍을 떤 게 아니란 사실을.
풍뢰권은 젓가락질을 처음 배우는 아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빠르게 검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급기야는…….
* * *
“어르신?”
천신우의 목소리에 무신은 회상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하구나. 요즘 들어 가끔씩 이런다. 나이가 든 게지.”
겸연쩍게 웃는 무신의 눈에 탁자 위의 검이 들어왔다.
분명 자신의 검이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검은 풍뢰권의 손에 들려 있어야 더 빛난다는 사실을.
“그 늙은이는 요즘도 주먹질에만 몰두하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하늘이 이렇게 불공평하다.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과할 정도로 재능을 내려주니 말이다.”
솔직히 천신우로선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신이 재능의 부족함을 논하다니.
“사족이 너무 길었구나. 어쨌든 이 검은 내게 돌려줄 필요가 없다. 아까 말한 것처럼 네가 보관하다가 나중에 늙은이에게 돌려줘라.”
“……알겠습니다.”
“그래도 심부름 값은 줘야지. 내가 그 노인네처럼 그리 인심이 야박한 사람은 아니야.”
천신우가 깨끗하게 비워낸 국밥 그릇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맛있는 한 끼를 대접받았으니 충분히 만족합니다.”
무신이 미소를 지었다. 예의 바른 아이를 보면 더 챙겨주고 싶은 법이다.
“내가 여길 항상 찾는 이유가 뭔지 아느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무신이 말을 이었다.
“여기 국밥은 언제나 한결같거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왜 그런지 아느냐.”
“요리사의 마음가짐이 한결같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하지만 마음가짐만 한결같다고 해서 항상 같은 맛을 낼 수는 없는 법이다. 언제나 한결같기 위해서는 오히려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계절에 맞춰서, 그날 날씨에 맞춰서. 그래야 항상 같은 맛이 나게 돼 있지.”
“아!”
천신우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천무검법 10성의 벽을 허물어뜨릴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무신은 그런 천신우를 대견하게 바라보았다.
“말해줘도 알아듣질 못하는 놈들이 수두룩한데 너는 싹수가 보이는구나. 하긴 그러니 그 늙은이가 천씨세가에 들러붙었겠지.”
사실 따지고 보면 권왕 때문이었지만 천신우는 굳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언제고 풍뢰권이 직접 사람들 앞에 나서서 권왕의 존재를 드러낼 날이 올 것이다.
“지금부턴 내 할 일이 있으니 이만 물러가거라. 혹시 부탁할 일이 있거든 여기로 찾아오고. 빚은 그 망할 늙은이 앞으로 달아둘 테니.”
“기억해두겠습니다.”
천신우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식당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무신에게 식당 종업원이 다가왔다.
그릇을 치우며 종업원이 입을 열었다. 식당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정체는 무신의 심복이었다.
“놈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이번 무림맹 모집시험에 끄나풀을 심어둔 모양입니다.”
“누군지는 확인했는가?”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하네. 놈들의 일 처리야 워낙 은밀하니.”
언젠가부터 무림의 여러 사건사고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지의 세력들.
워낙 은밀하고 신중하게 움직이기에 무신조차 그들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무림맹 모집시험에서 일을 벌인다면 개인전보다는 단체전을 노릴 가능성이 높겠군. 그러는 편이 피해를 극대화할 수 있을 테니.”
무신이 넌지시 물었다.
“우리 쪽 사람도 심어뒀겠지?”
“물론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놈들의 실체를 밝혀내겠습니다.”
무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일은 정보를 공개하고 무림맹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 원칙.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놈들은 저번처럼 흔적을 없애고 사라질 것이다.
‘아직 추측일 뿐이지만 무림맹 수뇌부에서 정보가 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무신이라도 함부로 발설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건 그렇고 일전에 절명곡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다만 동일세력의 소행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가장 사건과 마찬가지로 계획이 실패하자마자 흔적을 지워버렸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절명곡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 바로 천신우입니다. 방금 만나보신.”
“그거 참 공교롭군.”
무신은 천신우가 사라진 방향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무림맹 모집시험 첫날 아침이 밝았다.
무림맹 무인의 안내를 받아 시험장으로 이동한 천신우 일행이다.
시험장엔 이미 수백 명의 응시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천신우 일행을 돌아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이렇게 보니 위압감이 장난 아니군. 쉽지 않겠어.”
모용비조차 긴장한 모습.
“모두 주목!”
그때 깐깐한 인상의 총감독관이 단상 위에 올라 외쳤다.
“지금부터 무림맹 모집시험 개인전을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