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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57화 (57/171)

# 57

학사환생 057화

무신궁 무인들이 쓰러졌어도 객잔 안엔 여전히 채은영의 일행이 많이 남아 있었다.

양씨세가 무인들. 그리고 무신궁과 양씨세가엔 미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알아주는 중견문파의 무인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천신우를 막아서지 못했다.

“구경만 하지 말고 도와달라고! 당신들 모두……!”

부르튼 입술로 외치던 채은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두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같이 겁에 질린 얼굴.

제7영역에서 이곳까지 오는 기나긴 여정 동안 항상 당당하던 그들이었는데.

지금은 그때의 자신감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들처럼 느껴질 정도다.

기댈 곳이 없음을 깨달은 채은영이 천신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천신우를 마주 보지 못했다.

쫘악!

천신우의 손바닥이 채은영의 뺨을 돌려세웠다.

죽이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당한 선에서 멈출 생각도 없었다.

보는 사람들이 질릴 만큼 채은영의 뺨이 좌우로 돌아갔다.

마침내.

“잘못…… 잘못했어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채은영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버지에게도 이렇게 맞은 적은 없었던 것이다.

지켜보던 모용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하면 됐네.”

채은영이 죽기라도 한다면 무신궁은 천씨세가와의 전쟁을 불사할 터.

모용비는 그걸 우려했다.

하지만 천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이대론 못 끝냅니다.”

채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사과했잖아…… 요.”

“누구한테 사과한 거지? 무슨 이유로?”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채은영이었다.

“너는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뿐이야. 누구도 그런 걸 사과라고 하지 않아.”

천신우가 채은영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

할 말이 없어진 그녀는 탁자 위의 검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부인 무신의 검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무기력함이었다.

물론 천신우라고 풍뢰권이 맡긴 검이 무신의 물건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무신의 검이라고 해도 저게 장물일 리는 없다.

무신이 누군가? 무림맹의 살아 있는 전설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런 무신에게서 다른 것도 아닌 검을 훔친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보단 차라리 풍뢰권과 무신 사이에 친분이 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천신우는 탁자 위의 검을 챙겼다.

‘슬슬 마무리해야겠군.’

이젠 천신우 눈만 봐도 움찔하는 채은영이다.

급기야 천신우가 다가가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오늘 일로 이거 하나는 깨달았겠지. 언제까지나 남들 뒤에 숨을 수는 없다는 것을.”

“…….”

한참을 기다려도 손이 날아들지 않자 채은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드디어 끝난 건가?

물론 아니었다.

촤악!

눈앞이 번쩍이며 채은영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개자식!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입에서만 맴돌았을 뿐이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은영을 내버려 두고 천신우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사람들은 눈을 피하기 바빴다.

“이만 가시지요.”

“그러세.”

모용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에 들어오기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 * *

객잔을 나와 천신우와 함께 마차에 오른 모용비가 입을 열었다.

“오늘 하나 배웠네. 저런 년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것을. 솔직히 보는 내가 속이 다 시원하더군. 하지만 감당할 수 있겠나?”

황보세가와 백가장을 말 그대로 밟아버린 천신우다.

하지만 무신궁은 격이 달랐다.

“아무리 아우라 하더라도 무신궁주의 딸을 건드렸으니 그냥 넘어가긴 힘들 거야.”

“아니요. 무신궁주는 원칙을 중시하는 위인이라 들었습니다. 딸에게 잘못이 있으니 섣불리 공론화하지 않을 겁니다.”

무신궁은 무신을 신봉하는 고수들이 모인 세력.

하지만 정작 무신은 아들에게 궁주 자리를 물려주고 무신궁의 행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신궁주가 모든 일을 처리하진 않는다. 특히 무신의 명성에 누를 끼칠 만한 일은 추종자들이 나서서 사전에 차단하지.’

전생에서 천신우 문제가 공론화되지 않은 것도 무신을 추종하는 이들의 뜻이었다.

채은영이 처벌을 받을 경우 무신의 명성에 흠집이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중에 사건을 보고받은 무신궁주는 대노하여 채은영에게 근신을 명했지.’

결국 오늘 일로 무신궁과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었다.

무신의 추종자들이 나설 수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확률이 적다고 봐야지.’

천신우는 멀어지는 객잔을 바라보았다.

‘채은영 성격에 오늘 일을 함부로 떠벌리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사룡인 언니에 대한 열등감이 엄청나다.

오늘 일이 언니 귀에 들어가는 것을 누구보다 원치 않을 것이다.

“아우 생각대로 일이 커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하지만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나는 아우 편이네.”

“나도 마찬가질세. 맹주께 탄원서를 써서라도 아우의 결백을 입증해 보이겠네.”

호언장담하는 제갈휘를 보며 천신우는 미소 지었다.

“어째서 웃는 겐가? 내가 허풍이라도 떤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허풍이 아님을 안다.

실제로 제갈휘는 천신우를 위해 무림맹주에게 탄원서를 썼었으니까.

물론 그걸 알지 못하는 모용비는 제갈휘의 등짝을 쳤다.

“흐흐. 그럼 그게 허풍이 아니고 뭔가. 자네처럼 소심한 사람이 맹주님께 무슨 수로 탄원서를 쓴다고.”

제갈휘가 얼굴을 붉혔다.

“험험.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라네.”

“하하하!”

모용비의 웃음소리가 길가에 울려 퍼졌다.

* * *

“아가씨. 정신이 드십니까?”

채은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긴?”

“근처 의방입니다. 진찰한 의원에 따르면 다행히 크게 다치신 곳은 없다고.”

채은영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주위를 훑었다.

“그놈은……?”

대답하는 무신궁 무인의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이미 이곳을 떠났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아야!”

채은영이 신음과 함께 턱을 움켜쥐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깜짝 놀랐잖아!”

“죄송합니다.”

“됐어. 그건 그렇고 아직 무신궁에 보고 안 했지?”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도 할까요?”

“아니! 절대! 양씨세가와 다른 문파 인간들한테도 경고해. 오늘 일을 발설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채은영은 입술을 악물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 귀에 들어가면 안 돼.”

물론 언니는 이번 일을 알게 되더라도 비웃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 주겠지.

하지만 채은영은 안다. 그게 전부 가식임을. 언니의 진짜 얼굴은 따로 있음을.

“그럼 이대로 넘어가실 겁니까?”

언니를 떠올리며 증오심을 불태웠던 채은영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할아버지한테 직접 말씀드릴 거야.”

아무리 길고 나는 천신우라도 무신의 상대가 될 리 없다.

“두고 봐. 오늘 당한 수모를 배로 갚아줄 테니.”

채은영의 눈동자가 복수심으로 이글거렸다.

* * *

천신우 일행이 무림맹으로 향하는 동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림맹 지부에서 발급받은 응시증 덕분.

어떤 영역을 통과하더라도 응시증만 내보이면 아무 문제 없이 통과됐다.

이따금 다른 지역의 후기지수들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채은영처럼 시비를 걸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무림맹.

“……!”

지평선을 가득 메운 웅장한 광경에 모용비와 제갈휘는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십 개의 거대한 장원과 수백 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진 무림맹은 그야말로 하나의 세상이었다.

무림맹을 처음 찾는 이들로선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하지만 천신우는 경우가 달랐다.

‘여길 다시 오게 되다니.’

학사의 신분으로 수도 없이 드나든 곳임에도 감회가 새롭다.

눈을 감자 떠오른다.

이곳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 그들과 부대끼며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언제나 그렇듯 회상은 마교의 고수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됐다.

‘그놈은 정말…… 대단했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무공을 익힐수록 상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깨닫게 된다.

‘언제쯤이면 놈을 꺾을 실력을 갖추게 될지.’

생각에 잠긴 천신우를 모용비가 불렀다.

“하하. 아우도 이럴 때는 영락없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군. 그만 두리번거리고 들어가세.”

천신우는 모용비를 따라 모집시험의 1차 집결지인 제4정문으로 들어섰다.

일단 이곳에서 신분확인을 마친 후에 임시숙소를 배정받는 방식이었다.

“어디서 오시는 분들이오?”

모용비가 대표로 나섰다.

“제16영역 출신입니다. 여기 응시증을 가져왔습니다.”

응시증은 무림맹 지부에서 발급하는 문서.

신원이 확실하고 기본적인 실력을 갖춘 자에 대해서만 발급된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신분을 확인하겠으니 양해 바라오.”

마교가 건재하던 시기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충분히 무림맹 출입절차는 까다로웠다.

복잡한 절차 끝에 무림맹으로 들어선 천신우 일행.

무림맹의 오랜 전통에 따라 경력 3년 이내의 무인이 안내를 맡았다.

모용비와 제갈휘보다 두 살 연상인 그는 제5영역에 위치한 군소방파 출신이었다.

“여기가 임시숙소. 짐부터 풀고 따라와.”

서글서글한 인상의 그는 출입가능한 곳과 통제구역을 설명해줬다.

천신우의 기억대로 수미관은 응시생들도 출입가능한 곳이었다.

“알다시피 시험은 3일 후부터 시작이니 그때까지 마음 편히 쉬어둬. 너무 긴장하면 본인만 손해니 명심하고.”

자리를 뜨려던 무인이 유쾌하게 덧붙였다.

“참! 밥은 정해관이 맛있으니 참고해. 그럼 사흘 후에 보자.”

그가 돌아가고 나자 모용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3년 차의 여유란 건가.”

무림맹 시험은 합격하기도 어렵지만 버티기는 훨씬 어렵다.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2년 내에 무림맹을 떠날 정도.

“3년 차든 2년 차든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당장 시험부터 붙어야 하는 처지에.”

제갈휘가 숙소로 들어가 책을 펼치자 모용비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답답한 친구 같으니라고. 첫날은 무림맹 구경도 하고 그래야지.”

“그러니 더더욱 시험에 붙어야지. 오늘 하루만 구경하고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하아. 하긴 자네와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모용비와 제갈휘가 동시에 천신우를 돌아봤다.

서로 자기편을 들어달라는 얼굴로.

그러나 천신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말씀들 나누십시오. 저는 들를 곳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무림맹에서 혼자 돌아다니다간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라고?”

천신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림맹 10년 차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 * *

미로처럼 얽힌 무림맹 구조는 천신우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수미관에 도착한 천신우다.

‘근처의 다른 건물을 방문한 적은 있어도 수미관은 처음이군.’

무림맹엔 수많은 식당이 존재한다.

천신우가 장서각에서 멀리 떨어진 수미관까지 와서 밥을 먹을 이유는 없었다.

‘그나저나 사람이 굉장히 많은데 찾기 쉬우려나.’

괜한 걱정이었다.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천신우는 그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철옹 어르신 되십니까?”

국밥을 떠먹던 노인이 숟가락질을 멈췄다.

“뭐하는 놈이기에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냐?”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천씨세가의 천신우라고 합니다. 풍뢰권 어르신의 심부름으로…….”

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숟가락을 놓아버린 철옹이었다.

“에이잉! 밥맛 떨어지게!”

철옹이 턱짓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찾아온 성의가 있으니 국밥 한 그릇은 대접해 주마.”

그러면서 탁자를 두드린다.

“여기 국밥 한 그릇 더 내오게.”

국밥이 나오는 동안, 철옹은 자리에 앉은 천신우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천씨세가의 사람이라고? 그럼 그 노망난 늙은이와는 무슨 관계냐.”

“지금 천씨세가의 빈객으로 계십니다.”

“빈객은 무슨. 빈대겠지.”

밥 한 번 산 적 없다느니, 구시렁거리던 철옹은 툭하고 내뱉었다.

“아무튼 그 늙은이가 뭐라더냐.”

“저더러 이 검을 어르신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천신우는 등에서 검을 풀어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노인을 살폈지만, 역시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하긴 정작 무신도 명성만 익히 들었지,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으니.’

검은 본체만체하며 철옹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큼큼. 혹시 딴소릴 지껄이진 않더냐?”

“빌린 검이니 돌려드리라고.”

바로 발끈하는 철옹이었다.

“빌리기는! 그냥 준 거야! 그 모자란 늙은이 칼 잡는 법이라도 익히라고.”

친구는 닮는다고 하던가.

나이 지긋한 노인들임에도 풍뢰권과 철옹은 많은 면에서 비슷했다.

“그럼 도로 가져갈까요?”

철옹이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새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흐느끼면서 철옹에게 다가온 것은 천신우도 아는 얼굴이었다.

“제가 여기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흐흐흑.”

눈물까지 흘려가며 하소연하려던 채은영이 뒤늦게 천신우와 눈이 마주쳤다.

“히이익!”

얼마나 놀랐는지 채은영은 딸꾹질까지 해가며 외쳤다.

“뭐,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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