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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55화 (55/171)

# 55

학사환생 055화

앙칼진 눈빛. 뾰족한 콧날과 얇은 입술.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싸가지 없는 인상이란 표현이 어울렸다.

틀림없다.

전생의 그녀다.

‘채은영…… 어째서 저년이 여기 있는 거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다.

채은영. 그녀와의 악연은 무림맹 학사 시절 시작됐다.

길거리에서 맞고 있는 상인을 돕고자 나섰는데 하필 상대가 채은영이었던 것이다.

당시 천신우는 호신용 무공 정도만 간신히 익힌 상태였기에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제갈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반병신이 됐을지도 몰랐다.

간신히 내막을 알아내고 보니 가관이었다.

‘고작 옷에 먼지가 묻게 했다는 이유였지.’

심지어 그렇게 행패를 부렸음에도 채은영은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녀의 배경이 너무나도 화려했기 때문이다.

제7영역을 지배하는 무신궁 출신.

채은영의 조부는 무신으로 추앙받는 절대고수. 언니는 무림맹 후기지수들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사룡의 일인.

변변한 배경 하나 없는 천신우로선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천신우는 포기하지 않고 채은영을 무림맹에 고발했다.

‘하지만 뒤로 손을 썼는지 형식적인 처벌에 그쳤지. 심지어 나는 장서각으로 보복성 좌천을 당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하던 천신우의 날개가 꺾이는 순간이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채은영은 천신우의 전생을 망친 원수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신우뿐.

전생에서 천신우를 도왔던 제갈휘조차 현재는 채은영의 실체를 모를 수밖에 없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제가 가장 늦고 말았군요.”

시선을 회수한 천신우는 아무렇지 않게 제갈휘 옆에 앉았다.

“하하. 우리도 방금 왔다네.”

호쾌하게 웃어 보이는 것은 역시나 모용비.

“그건 그렇고 아우의 유명세가 대단한 거야 알고 있었네만. 이렇듯 눈앞에서 확인하니 더욱 놀랍군.”

“무슨 말씀이신지.”

“후후. 모른 척하는 건가. 아니면 이런 방면엔 눈치가 없는 건가.”

모용비가 천신우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창가 쪽을 보게. 아름다운 여인이 아까부터 아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잖은가. 분명 명문가 출신 같은데.”

천신우가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관심 없습니다.”

모용비는 바로 납득한 얼굴이었다.

“하긴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

아무래도 남궁세미와의 파혼을 떠올린 듯하다.

명백한 오해였지만 천신우는 굳이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귀찮은 것보단 나았기에.

“어쨌든 같은 무림인이니 가서 인사라도 나누고 오겠네.”

사교성과 친화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모용비다웠다.

대뜸 일어나 채은영 일행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환하게 웃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모용비.

“안녕하세요.”

채은영도 눈웃음을 지었다.

사실 방금 전까지 천신우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던 그녀다.

눈이 마주친 직후 천신우의 반응 때문이었다.

원래 그녀를 처음 보는 남자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눈을 떼지 못하거나 아예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거나.

그런데 천신우의 눈빛엔 한순간이나마 경멸이 담겼던 것.

기분이 상해 노려보던 차에 모용비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저는 모용세가의 모용비라고 합니다. 소저의 성함을 알고 싶습니다만.”

“채은영이에요.”

“채은영? 설마…… 무신궁의 이화십니까?”

이화라는 표현에 채은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무신궁의 이화는 채은영과 언니를 한데 묶어 부르는 호칭.

사룡의 일인인 언니에게 자격지심을 지닌 채은영으로선 가장 듣기 싫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화라니요. 가당치도 않답니다. 그보다 모용비 소협이셨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어요.”

사실 모용비의 이름은 오늘 처음 듣지만, 이렇게 말하면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채은영이었다.

과연 그녀의 의도대로 모용비는 환하게 웃었다.

“하하. 부족한 이름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신궁은 이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아는데. 혹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무림맹 모집시험에 응시하려고요. 그쪽은요?”

“그러셨군요! 마침 저희 일행도 무림맹에 가던 길입니다.”

모용비는 목을 가다듬은 후에 정중히 제안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합석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술은 제가 사도록 하지요.”

“좋아요.”

흔쾌히 대답하며 채은영은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일행은 모두 6명.

그녀의 외모를 돋보이게 만들고 추임새를 넣어줄 평범한 외모의 여자 후기지수가 둘.

거기에 채은영을 떠받들고 아부하는 남자 후기지수가 넷이었다.

구성도 화려했다.

한 명은 돈 많은 물주. 다른 한 명은 관상용. 나머지 둘은 귀찮은 일이 있을 때 나서서 처리해 주는 해결사들이었다.

당연히 의견을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채은영의 생각에 동의했다.

“채 소저가 괜찮다면야.”

“저희는 언니 뜻에 따를게요.”

만족스러운 반응들에 모용비도 자리로 돌아가 일행을 불러왔다.

채은영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 후기지수들의 얼굴에 설렘이 묻어났다.

모용비와 제갈휘 모두 눈에 띄는 미남이었기에.

물론 천신우도 키가 크고 잘생겼지만 그를 바라보는 채은영의 눈초리는 따가웠다.

합석하고 나서도 천신우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그딴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맛있는 요리와 좋은 술이 계속해서 나오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도, 채은영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어려서부터 항상 언니와 비교당하며 살아온 그녀다.

외모면 외모. 무공이면 무공. 하다못해 애교마저도 언니에 뒤처졌던 것이다.

언니를 향한 채은영의 열등감은 항상 주목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변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주목해야 직성이 풀리는 채은영이었다.

“언니. 안색이 별론데 괜찮아요?”

“어머. 그래 보이니?”

채은영의 반응을 통해 남자 후기지수들은 그녀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아차렸다.

그 원인제공자가 누군지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는 천신우가 범인임이 틀림없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자 모용비가 나섰다.

“그나저나 다들 실력이 대단해 보이시는군요. 여기 계신 분들은 충분히 합격하시고도 남을 듯합니다.”

화제를 바꾸려는 시도.

그러나 채은영이 가만 놔두지 않았다.

“원래 실력은 직접 맞붙기 전엔 모른다잖아요. 여기 중에도 분명 떨어질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몇몇이 노골적으로 천신우를 쳐다봤다.

그들이 태어나 자라온 제7영역은 세가연합이 지배하는 제16영역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천신우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소문을 들었더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이름 꽤나 날리는 고수들이었기에.

하지만 정작 천신우는 자신을 무시하는 분위기에도 개의치 않고 술잔만 비웠다.

술이 들어갈수록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진다.

‘운명이란 참으로 끈질기군.’

마교와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전생의 악연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채은영과 마주친 것을 보면 분명 운명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이봐. 듣고 있긴 한가?”

천신우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남자는 양씨세가의 차남 양주철이었다.

양씨세가는 무신궁이 지배하는 제7영역에 위치한 거대문파.

사실 다른 영역에서라면 충분히 위세를 떨칠 양씨세가다. 하지만 무신궁이 건재한 이상 2인자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양주철도 채은영에게만큼은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천신우에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그쪽 얘기하고 있잖아.”

옆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식의 조합을 많이 봐왔던 천신우다.

당장 세가연합 후기지수들 중에도 팽우경과 황보도준. 남궁세미가 이러했으니까.

‘양주철이라. 팽우경과 다를 바가 없는 놈이군. 들어본 이름은 아니다만.’

천신우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면 이유는 간단했다.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어쭈? 계속 무시해?”

양주철의 거듭되는 도발에도 천신우는 무표정했다.

이런 부류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상대를 꺾거나 본인이 꺾이기 전까지는.

‘딱히 원한은 없다만.’

굳이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도 없는 천신우였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순간, 모용비가 끼어들었다.

“자자.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고 한잔하자고.”

얼떨결에 모용비에게서 잔을 받아든 양주철이다.

팽우경과도 친하게 지냈던 모용비의 친화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으득.

이를 악문 채은영이 전략을 수정했다.

“주철 오라버니. 무림맹 시험에 복면을 쓰고 겨루는 과목도 있다고 하셨던가요.”

빈 술잔을 채워주며 미소 짓는 채은영의 모습에 양주철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래. 소속문파에 구애받지 말고 맘껏 실력을 발휘하라는 주최 측의 배려지.”

“그럼 정보가 전혀 없는 상대와 붙어야 한다는 뜻인데.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연습 따윈 하지 않아도…….”

양주철은 뒤늦게 채은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지금 판을 깔아주려는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신우를 짓밟아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게.

“아니지. 생각해 보니 연습이 필요할 듯싶구나. 하지만 우리끼리는 연습이 되지 않아.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뭐가 문젠가요. 여기 모용비 소협과 제갈휘 소협이 계신걸요.”

의도적으로 천신우를 언급하지 않는 채은영이었다.

물론 천신우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도와주실 거죠?”

채은영의 간곡한 표정에 모용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서로 다치지 않는 선에서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상대의 악의를 염두에 두지 않는 모용비다웠다.

그렇다고 그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저 사람이 선한 것뿐이니까.

“그럼 허락도 받았겠다. 간만에 몸이나 풀어볼까.”

양주철이 위압적으로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어이. 그쪽 이름이 뭐라고?”

아까 각자 자기소개를 마쳤음에도 굳이 되묻는 양주철이었다.

천신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천신우.”

“그래. 천신우. 은영이에게 고마워하라고. 덕분에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됐으니.”

“주철 형님. 살살 하십시오. 좌절해서 시험을 포기해 버리면 어떡합니까.”

양주철이 지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는 일행들이었다.

“무림맹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당하는 것보다야 낫지. 수치심은 복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법이니까.”

촤아앙!

양주철이 기세 좋게 검을 뽑아 들었다.

검보다는 도에 가까운 형태. 두꺼운 칼날이 인상적이다.

찌르기보다는 베기에 중점을 두는 양씨세가 검법에 어울리는 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쌍검을 쓰나 보군?”

모용비와 제갈휘조차 의외라는 얼굴로 천신우를 쳐다봤다.

물론 천신우는 풍뢰권의 심부름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양주철에겐 쌍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웃음의 대상인 듯했다.

“가끔 있다니까. 쌍검 쓰면 배로 강해진다고 착각하는 놈들이.”

“하하하! 그렇다면 저는 아예 세 자루를 쓰렵니다. 이름하여 삼검류!”

채은영 일행 사이에서 경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양주철도 씩 웃었다.

이 정도까지 도발했는데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 겁먹은 게 분명하다.

“어디 그 잘난 쌍검 한번 볼까.”

양주철이 성큼성큼 다가와 천신우의 등에 매단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림에서 상대의 무기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

물론 그걸 모를 양주철이 아니다.

전부 계산된 행동.

천신우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 그 즉시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양주철은 순간적으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본능이 속삭였다.

위험하다고.

검에 손을 대려다간 끝장이라고.

그럼에도 양주철은 애써 본능을 무시했다.

‘착각이겠지.’

무엇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은영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무신궁이라는 배경을 빼고 보더라도 채은영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미녀였으니까.

“뽑아.”

양주철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천신우를 압박했다.

“뽑으라고!”

그래도 천신우는 검을 뽑지 않았다.

험악해져 가는 분위기에 앞으로 나서려던 모용비와 제갈휘를 채은영이 붙들었다.

“그러지 마요. 사내들끼리의 자존심 싸움일 뿐이잖아요.”

채은영은 즐거움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남자들을 보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인생을 살아가는 낙이었기에.

채은영의 목소리를 들은 양주철의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오냐! 이래도 뽑지 않는지 보자!”

양주철은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느새 칼집에서 빠져나온 천신우의 검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얼음처럼 얼어붙은 양주철의 귀로 천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뽑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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