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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54화 (54/171)

# 54

학사환생 054화

천신우는 찻잔 너머로 황보세가 가주를 바라보았다.

분노와 절망을 넘어 체념한 모습.

결국 황보세가 가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새로운 계약조건을 적기 시작했다.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군.’

자존심과 실리 사이에서 황보세가 가주는 후자를 택했다.

‘그래봐야 한동안은 재기하기 힘들겠지만.’

문파대전에 이어 이번 대홍수로 황보세가는 돌이키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이제 마교의 침공이 시작되더라도 황보세가와 백가장은 아무것도 못한다.’

전생처럼 야금야금 다른 문파들의 영역을 갉아먹는 것은 물론. 마교와 손잡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교는 이용가치가 있는 자들에게만 손을 내밀지. 약자는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것이 놈들의 방식이다.’

마교와의 본격적인 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상황.

하지만 분명 착실하게 잠재적 위험요소들을 제거해가고 있는 천신우였다.

이윽고 계약서 작성을 마친 황보세가 가주는 10년은 늙은 모습이었다.

천신우는 그에게서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계약서를 꼼꼼하게 검토한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조건을 제시하셨다면 훨씬 대화가 쉬웠을 텐데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황보세가 가주가 이를 바득 갈았다.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진 마라.”

“저도 이대로 끝낼 생각 없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서요.”

“…….”

천신우가 손뼉을 부딪쳤다. 계약을 마친 이상 굳이 황보세가 가주와 얼굴을 계속 맞댈 이유가 없었다.

“손님께서 돌아가신다니 준비하게.”

황보세가 가주는 잠시 천신우를 노려보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간다!”

황보세가 가주 일행을 배웅한 천신우가 천무흔을 돌아보았다.

“계약서는 읽어보셨습니까?”

“그래. 이대로라면 황보세가는 다시 일어나기 힘들겠구나.”

“황보세가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오대세가의 판도는 완전히 바뀔 겁니다.”

천신우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황보세가는 오래전에 천씨세가를 밀어내고 오대세가에 합류했다.

그로부터 기나긴 세월이 흘러 마침내 둘의 처지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천무흔이 항상 꿈만 꿔왔던 오대세가로의 복귀. 이제는 꿈이 아니라 머지않은 현실이었다.

천무흔이 천신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수고 많았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구나. 황보세가에 곡물을 내어준다면 백가장은 어찌할 것이냐.”

천신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연히 백가장에도 곡물을 내어줘야지요. 그러려고 계약서도 쓰지 않았습니까.”

“그럼 설마?”

“짐작하신 그대롭니다. 곡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황보세가 가주와 백가장주를 속이기 위해 천무흔에게조차 밝히지 않은 사실이었다.

“허어! 전혀 몰랐구나.”

현재 천씨세가의 살림은 평소보다 훨씬 커진 상태.

천무흔이라 해도 각지에 흩어진 곡물들의 양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진 못했다.

“숨겨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지. 그나저나 그 인간들이 이걸 알게 되면 아주 땅을 치겠구나. 으허허.”

한참을 웃던 천무흔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금와전장 장주는 어째서 우리 천씨세가를 찾아왔을까. 너는 짚이는 구석이 있느냐?”

확실히 만금소는 다른 손님들과는 방문목적이 달랐다.

“아마 우리 천씨세가의 다음 행보를 파악하고자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행보라? 아무리 우리 가문의 세가 커졌다지만. 만금소가 직접 나서면서까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느냐?”

“확실히 천씨세가의 살림규모는 거대문파들에 비해 아직 부족합니다. 하지만 곡물 보유량만큼은 주목할 만한 수준. 천씨세가의 행보에 맞춰 곡물 처분시기를 결정하려는 것이겠지요. 금와전장도 산하 상단을 통해 보유한 곡물의 양이 제법 되니까요.”

거기까진 일반적으로 가능한 추측.

하지만 천신우는 또 다른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금소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먼저 모든 무림인들이 존경하는 명사의 모습.

대외적인 자리에서 만금소는 남을 위해 호의를 베푸는 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상대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전작업일 뿐.’

그렇게 가까워진 후엔 상대가 돈을 빌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만금소의 호의는 계속된다.

별다른 담보 없이도 선뜻 돈을 빌려줄 뿐만 아니라, 채무자에게 협박은커녕 독촉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채무자에게 아직 변제능력이 남아 있을 때지.’

만금소의 안목은 매우 날카롭다.

채무자의 재산은 물론, 능력과 인간관계까지 계산범위 안에 넣는다.

그리고 채무자가 감당하기 힘든 규모까지 빚이 늘어나는 순간, 만금소는 악귀가 된다.

채무자로부터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뽑아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채무자와 주변 사람들은 파멸로 치닫는다.

‘채무자의 딸을 사창가에 넘기고, 그 딸에게서 태어난 아이까지도 노예로 팔아치우는 자가 만금소다.’

그런 만금소가 천씨세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이상,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천씨세가의 살림을 직접 확인했으니 조만간 작업을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미리 대비해야겠지.’

이미 천신우와 만금소의 싸움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이런 말씀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박입니다. 우리 천씨세가 10년 치 예산이 한꺼번에 들어왔어요.”

천신우에게 보고하는 천씨세가 총관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물론 그마저도 표정을 관리한 것이다.

대홍수로 인해 벌어들인 돈이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게다가 대금 대신 받아낸 이권이나 현물도 상당합니다. 당분간 살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물론 총관은 알지 못했다.

천신우가 단심회를 통해 거둬들인 수익 역시 그에 못지않음을.

덕분에 전생엔 상상도 못했던 막대한 부를 쌓은 천신우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들뜬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총관께서 책임지실 살림살이는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테니까요.”

총관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들떴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군요.”

총관의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이미 그의 머릿속엔 앞으로의 계획이 짜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방금 전에 결정된 사안인데 조만간 총관부가 신설될 겁니다. 물론 총관부의 수장은 총관께서 계속 맡아주셔야 합니다.”

이제 천씨세가의 규모도 커졌으니 주먹구구식 운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총관은 충성심과 수완 모두 갖춘 인물이어서 외부영입은 불필요했다.

총관이 감격 어린 얼굴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얼마나 감사하는지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천신우가 미소로 화답했다.

“하하.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에 대형무관을 세웠으면 합니다.”

“무관을요?”

“세가에서 직접 지원하고 운영하는 무관입니다. 정기적으로 소질 있는 아이들을 모집하고, 무관 성적에 따라 천씨세가의 정식무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무림맹이나 거대문파들에서 시행하고 있는 인재육성방법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겁니다.”

기존 천씨세가의 인재관리방식은 주먹구구식에 가까웠다.

천가의 핏줄은 따로 스승을 두어 가르쳤고.

일반무인들은 외부에서 지원자를 영입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충성도와 실력 모두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아무래도 자질이 뛰어난 인재들은 천씨세가보다 강대한 문파로 모여들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천씨세가에서 체계적으로 인재를 육성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터였다.

‘고수를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문파를 떠받치는 것은 일반무인들이다. 게다가 운이 좋으면 월척이 걸릴 수도 있지.’

권왕처럼 천씨세가 출신의 절대고수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사실 천씨세가라고 자체육성방식의 장점을 몰라서 실행 안 한 게 아니다.

총관은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대공자님. 예전에도 내부적으로 검토해 보았지만 결국 자금 때문에 철회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이 적기이지요.”

이보다 상황이 더 좋을 수 있을까.

곡물을 팔아 벌어들인 풍부한 자금.

천씨세가의 인지도 역시 전에 비교하기 힘들 만큼 올라간 상태다.

“그리고 이건 제가 전에 말씀드린 자선사업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자선사업이요?”

총관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미 천씨세가는 수재민들에게 무상으로 식량을 배급했기에.

“이번 수해로 고아들이 많이 생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가 살아 있더라도 자식을 키우기 힘든 형편인 가정도 제법 되지요.”

비로소 총관이 눈을 빛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무관을 세운다면 인재육성뿐만 아니라 자선사업의 성격도 띠게 되겠군요.”

아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무공을 가르치고.

수재민들 가운데 일부를 무관의 일꾼으로 고용하는 것.

항상 모든 일을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천신우다운 계획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총관이 빠르게 주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금 천씨세가의 재정은 무관사업을 추진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특별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향후 5년 정도까지도 운영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5년이 아니라 50년. 나아가 100년이 지나도 유지되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사람들 중엔 지금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부류가 있다.

천신우와 마찬가지로 총관 역시 그런 부류였다.

물론 천무흔 밑에서도 제 몫을 다했던 그다. 하지만 천신우가 세가의 의사결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더욱 빛을 보고 있었다.

천신우를 바라보는 총관의 눈빛에 신뢰가 가득한 이유였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무림맹 인재모집시험이 다가왔다.

천신우는 벌여놓은 계획들을 점검하는 한편 천신혁을 만났다.

요즘 들어 한창 수련에 매진한 천신혁은 실력이 부쩍 늘었다.

여전히 천신우에게 매달리는 모습은 한결같았지만.

“저도 언젠가는 형님처럼 무림맹에 들어갈 날이 오겠지요?”

“물론이야. 지금처럼만 하면 무림맹에 네 이름이 알려지는 것도 금방일 거다. 그건 그렇고 간만에 대련이나 할까.”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개인연무장에서 천신혁과 가볍게 검을 섞는데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바로 풍뢰권이었다.

“소식 들었다. 이번에 무림맹에 간다며?”

“그렇습니다.”

“받아라.”

풍뢰권이 천신우에게 내던진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든 천신우가 물었다.

“이게 뭡니까?”

“보면 모르냐?”

“……검이군요. 설마 제게 주시는 선물입니까?”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네놈이 뭐가 예쁘다고 선물을 주겠느냐. 무림맹에 가거든 철옹이라는 늙은이가 있으니 전해주면 된다.”

철옹?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전생에조차 듣지 못한 이름인 것이다.

“어디 계신 분입니까?”

“수미관.”

“수미관이라면 무림맹에 있는 식당이 아닙니까?”

무림맹 안에 살아가는 사람만 수만 명이다.

당연히 식당도 굉장히 많았는데 수미관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 언제든 식사시간에 맞춰 가면 구석에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늙은이가 있을 게다. 성격이 워낙 지랄 맞아서 나 아니면 말동무도 없는 불쌍한 인간이지.”

천신우는 풍뢰권과 철옹의 친분이 보통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관심이 없는 대상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풍뢰권이기에.

‘어쩌면 무명의 일원일지도 모르겠군.’

풍뢰권은 귀찮은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정작 무림맹까지 가서 검을 돌려줘야 하는 사람은 천신우인데 말이다.

“그 늙은이에게 그 검을 전해줘라. 노망이 들어 까먹었을지도 모르니 예전에 빌려준 물건을 돌려준다고 말해주고.”

“알겠습니다.”

굳이 뽑아보지 않아도 명품이란 느낌이 드는 검이었다.

천신우는 풍뢰권으로부터 받은 검을 자운검과 사선으로 교차해 등에 멨다.

“끌끌. 그렇게까지 소중히 다룰 필요는 없다만.”

“그래도 어르신께서 맡기신 물건이 아닙니까. 반드시 무사히 전달하겠습니다.”

“그래봐야 주먹에 자신 없는 놈들이 기대는 쇳덩이일 뿐이지. 여의치 않거든 강물에 던져 버려도 상관없다.”

권법에 자부심을 가진 풍뢰권다웠다.

문득 천신우는 궁금해졌다. 풍뢰권은 무슨 이유로 이 검을 빌린 것일까.

물론 풍뢰권은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언제쯤 돌아올 생각이냐?”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대홍수 피해가 복구되는 대로 세가연합 수뇌부들이 회합을 갖는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그때 맞춰서 돌아오지 않을까 싶군요.”

“그깟 능구렁이들 모임일랑 얼굴만 비춰도 되지 않겠느냐.”

천신우는 즉시 풍뢰권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저를 데리고 가실 곳이 있군요.”

“눈치가 아주 없진 않구나. 아무튼 나중에 보자꾸나.”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풍뢰권이었다.

천신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풍뢰권 어르신이 형님을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걱정 마라.”

사실 위험한 곳이 맞다.

풍뢰권이 데려가려는 곳은 육지 위의 섬이라 불리는 무법지대 구왕도일 테니까.

‘뭐 그거야 나중 얘기고.’

지금은 무림맹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천신우는 아버지 천무흔과의 작별인사까지 마치고 천씨세가를 나섰다.

수행원들 몇몇만이 천신우를 뒤따랐다.

* * *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천신우는 번화한 도시에 도착했다.

무림맹까지는 아직 멀다.

이곳은 일행을 만나기로 약속한 지점일 뿐이었다.

“저기군.”

화려하진 않지만 깔끔한 객잔.

바로 약속장소였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천신우를 가장 먼저 발견한 제갈휘가 손을 흔들었다.

“아우! 어서 오게!”

제갈휘의 경쾌한 목소리에 객잔 안의 시선들이 천신우에게 모여들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

천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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