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학사환생 053화
“가주님! 정신이 드십니까?”
귀로 흘러드는 음성에 황보세가 가주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무겁다.
모든 게 꿈처럼 느껴진다.
문파대전에서 패배해 물류창고를 내줬던 일. 백가장과 힘을 합쳐 곡물을 내다 팔았던 일. 대홍수 피해를 수습하려고 대책을 논의하던 순간들이…….
“악몽…… 그래. 악몽을 꾸었구나. 내가.”
정말이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가주님. 안정을 찾으셔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만…….”
황보세가 가주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측근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황보세가의 재정을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보고하는 측근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전례 없는 대홍수가 끝났지만 재앙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당장 올해 농사만 망친 수준이 아니다.
곡물을 보관한 창고가 물난리에 휩쓸리는 바람에 문제가 훨씬 심각해졌다.
당장 오늘 먹을 식량마저 없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한시가 급한데 심지어 황보세가는 가주의 부재로 대처가 늦어진 상황.
“이러는 동안에도 다른 문파들은 한발 앞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희도 더 늦기 전에 곡물을 확보해야 합니다.”
“알겠으니 잠시만 기다리게.”
황보세가 가주는 시비가 가져온 미음으로 배를 채웠다.
“그랬단 말이지…….”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받아들이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이미 발생한 손해야 돌이키기 힘들다.
이제부터 대책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일단은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우리가 보유한 곡물이 얼마나 되나?”
“최대한 절약하면 최대 두 달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황보세가 가주는 이번에 곡물을 내다 팔면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확보해뒀다. 곡물 가격이 내리는 추수철까지 버틸 식량을 남겨둔 것이다.
“하지만 추수철까지 버틴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대홍수 때문에 예년과 달리 곡물 수확량은 바닥칠 것이다.
지금이야 저장해둔 식량으로 버틴다고 해도, 추수철이 지나 겨울이 찾아오면 끝장이었다.
황보세가 가주는 비로소 모두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책임질 사람은 자신뿐인 것이다.
황보세가 가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결단을 내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곡물을 사들이게. 시세보다 비싸게 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도 황보세가 가주는 백가장주보다는 나았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측근들이 현실을 지적했다.
“죄송하지만 이미 시중엔 곡물이 씨가 말랐습니다. 물론 대규모 상단들이야 물량이 있지만 급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어서…….”
말끝을 흐리는 측근이었다.
“아까 다른 문파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도 헛고생만 하고 있다는…… 잠깐. 그럼 설마?”
“짐작하신 그대롭니다. 지금 근방의 문파들은 모조리 천씨세가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론 황보세가도 천씨세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천씨세가는 오랜 숙적이다. 최근엔 문파대전을 벌이기도 했고.
이제 와서 천씨세가에 손을 벌린다는 것은 자존심을 전부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더없이 일그러진 황보세가 가주의 표정이 지금 상황을 대변했다.
* * *
대홍수 이후.
천씨세가는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천신우의 지시에 따라 미리 대량의 곡물을 확보해둔 천씨세가다.
게다가 창고도 착실히 보수해놔서 다른 곳에 비해 피해가 훨씬 적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천씨세가 총관은 그들에게 면담 순번과 숙소를 정해주느라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대공자와의 면담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이미 손님들로 가득 들어찬 숙소는 깔끔하긴 했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별도의 거처로 안내될 거라 생각했던 황보도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 지시에 따라 자존심도 접고 천씨세가를 방문했건만.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다.
천신우에게 된통 당했다지만 그는 여전히 황보세가 대공자가 아니던가.
“지금 뭐하자는 거냐?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미 숙소에 묵고 있는 손님들이 있었지만 황보도준은 개의치 않고 총관을 윽박질렀다.
“나는 절대 기다릴 생각 없으니까 당장 안내해!”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황보도준답게 강압적인 태도.
그럼에도 총관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저는 가주님께서 정하신 원칙에 따를 뿐입니다. 아무리 황보세가의 대공자시라 하더라도 임의로 순번을 앞당겨드릴 수는 없습니다.”
가주 천무흔은 곡물과 관련된 일 처리를 모두 천신우에게 일임했다.
거기엔 천신우가 천씨세가의 후계자임을 공식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덕분에 지금 무림은 천신우 얼굴이라도 보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천씨세가 입장에선 황보도준도 그런 인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더러 이따위 누추한 곳에서 기다리라? 내가 길바닥에서 빌어먹는 거지도 아니고!”
“…….”
총관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아직까지도 황보도준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놈들 수준이야 거기서 거기일 거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덜컹.
근처의 방문이 열리며 중년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황보도준은 흠칫했다.
“……!”
상대는 제13영역을 지배하는 남악련 소속의 고수였다.
아무리 황보도준이 황보세가의 대공자라 해도 결코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상대.
“어어…….”
우물쭈물하는 황보도준.
그러나 남악련의 고수는 시작에 불과했다.
드르륵.
방문이 하나둘 열리며 앞서 방문한 손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 무공과 나이. 심지어 배경마저도 황보도준에게 밀리지 않는 거물들이었다.
처음엔 당황했던 황보도준의 눈동자는 이제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제야 그는 깨달았다.
총관이 그를 차별한 것이 아님을.
오히려 저들과 같은 숙소에 배정해 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모르고 날뛰었으니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도 있었다.
누구 하나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 정도 되는 거물이라면 황보도준을 꾸짖어 마땅한데.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껄껄껄!”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걸어 나왔다.
노인의 등장에 사람들은 약속한 것처럼 양옆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모두 무림의 실력자들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노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를 알아본 황보도준도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만금소! 어떻게 금와전장의 주인이 이곳에!’
무림 최대전장인 만수전장까진 아니지만 금와전장 역시 엄청난 규모를 갖춘 곳이었다.
무림에 유통되는 자금 중에 무려 2할이 금와전장을 통해 움직였다.
눈앞의 만금소는 바로 그 금와전장의 주인이었다.
심지어 그저 돈만 많은 부자가 아니라 엄청난 무공을 익힌 고수이기도 했다.
금와전장은 여타 전장들과 달리 태생부터가 무림문파에서 시작됐기 때문.
만금소가 굵은 금반지를 착용한 손가락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돈은 제법 가진 편인데. 거지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군.”
황보도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만금소는 그의 아버지 황보세가 가주라도 고개 숙여야 하는 거물이기에.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 자네가 말하지 않았던가. 거지도 아닌데 이런 누추한 곳에서 기다릴 수는 없다고.”
다르게 해석하면 이곳에서 묵고 있던 이들은 거지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 그건…….”
끝까지 변명을 늘어놓는 황보도준.
만금소의 눈빛이 싸늘해지던 그때였다.
“변명은 그만 두고 지금이라도 사과드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황보도준 뒤에서 나타난 것은 천신우였다.
황보도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신우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다른 몇몇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깜짝 놀란 얼굴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천신우가 그들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가운데.
천신우와 함께 나타난 가주 천무흔이 만금소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장주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천무흔과 만금소는 다른 자리에서 스쳐 간 정도의 안면만 있는 사이였다.
“아닐세.”
“인사 드려라. 금와전장의 장주님이시다.”
천신우가 만금소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천신우라고 합니다.”
만금소는 황보도준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눈빛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사실 만금소 정도 되면 순번 따위완 관계없이 언제든 천씨 부자를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만금소 본인이 남들과 똑같이 대접해 주길 원했다.
‘어떤 상단보다도 많은 곡물을 보유한 천가의 행보가 궁금했으니까.’
천씨세가의 다음 행보는 금와전장 산하 상단이 보유한 곡물의 처분 시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렇기에 만금소는 천씨세가에 머물면서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현재. 만금소는 당초 목적을 어느 정도는 달성한 상태였다.
‘천씨세가는 곡물시세가 폭등했음에도 상당한 양을 수재민들에게 풀었다. 덕분에 보유량은 당초 알려진 것보다 줄어들었지만. 대신 인망이 두터워지면서 천씨세가에 합류하는 고수들이 늘어나는 추세.’
확보한 곡물을 가지고 시세차익을 얻는 거야 너무나도 쉬운 일.
하지만 천씨세가는 당장 눈앞의 시세차익에 연연하지 않고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건, 놀랍게도 가주 천무흔이 아니라 대공자 천신우였다.
그 사실이 만금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천신우. 소문이야 진작부터 들려오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도 그릇이 크군. 앞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하지만 만금소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천신우는 이미 만금소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금와전장의 주인 만금소가 직접 찾아올 줄이야. 원래 격식을 따지지 않는다지만 확실히 파격적이군. 아마도 곡물 때문이겠지.’
만금소는 천신우가 과거로 돌아와 타도대상으로 삼은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만금소. 단심회주 석무해. 남해검문 문주 유일성. 팔룡도문 문주 장수기. 전부 똑같은 놈들이지.’
무고한 사람들을 착취해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마교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한 쓰레기들.
당장에라도 찢어 죽여 마땅한 놈이지만, 단심회주 석무해 때처럼 과감하게 움직이긴 어려웠다.
‘만금소는 석무해와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거물. 굳이 자극해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만금소의 목적이 뭔지만 파악하자.’
천신우와 만금소 사이의 탐색전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장주님. 이쪽으로.”
천무흔이 만금소를 안내하는 동안.
천신우는 황보도준을 마주했다.
“오랜만이다.”
“그래.”
황보도준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저래 천신우가 불편한 그였다.
전에 된통 당한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천신우와의 격차가 너무 컸다.
당장 지금도 황보도준은 천신우에게 사정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젠장. 도대체 뭐라고 말하지?’
황보도준에겐 다행스럽게도 천신우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용건은 역시 곡물이겠지?”
황보도준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래. 당장 필요한 양이 어느 정도냐면…….”
“나중에.”
말을 자른 천신우가 쐐기를 박았다.
“기다리다 보면 네 차례가 올 거야.”
황보도준은 그 말을 믿고 며칠을 기다렸지만 차례는 오지 않았다.
* * *
“그래서 그냥 돌아왔다?”
황보세가 가주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게…… 천신우 그놈은 아무래도 저를 만나줄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수완이 떨어지는 거야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한심할 줄이야.
“알았다. 물러가라.”
따져봐야 머리만 아플 것이기에 황보세가 가주는 황보도준을 내보냈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진 자존심 때문에라도 직접 나서길 꺼렸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곡물시세 급등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선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곡물을 사기 힘들다는 소문이 들려올 정도다.
‘아직은 소문일 뿐이지만.’
지금이라도 곡물을 확보하지 않으면 이번 겨울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이다.
황보세가의 평판은 곤두박질칠 것이며.
줄어든 인구는 세금의 감소로 이어질 것이다.
그 피해를 회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결국 황보세가 가주는 천씨세가를 방문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 * *
“오셨소이까.”
문파대전 이후 아무 교류 없이 지내다가 만난 천무흔과 황보세가 가주다.
그러나 둘의 입장은 많이 달랐다.
천무흔은 그때보다 자신감이 넘쳤고 황보세가 가주는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의례적인 안부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황보세가 가주는 마음이 초조했다.
곡물을 조금이라도 구입하고자 천씨세가를 찾은 구름 같은 인파를 봤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황보세가가 처한 상황을 아실 거요.”
천무흔은 손을 들어 황보세가 가주의 말을 가로막았다.
예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에 황보세가 가주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뿐.
아쉬운 마당에 싫은 내색할 수는 없었다.
“곡물 이야기라면 대공자와 하시면 되오. 지금은 다른 손님을 만나는 중이니 간단한 요기라도 하면서 기다리시구려.”
* * *
결국 한참을 기다린 끝에 천신우를 만난 황보세가 가주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을 듣기란 쉽지 않았다.
“가주님. 너무 늦게 오셨어요.”
황보세가 가주의 거래제안에 천신우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알다시피 내가 제안한 조건은 어제 시세가 기준이네. 대체 뭐가 늦었다는 건지 모르겠군.”
“시세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천신우가 미소 지었다.
“이젠 천씨세가가 보유한 곡물량도 많이 줄었습니다. 아무리 황보세가라 하더라도 선뜻 내주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내주다니. 거래를 하자는 것일세.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천씨세가가 확보한 곡물 중에 상당량은 우리 황보세가 소유였잖은가.”
“물류창고야 문파대전의 배상금으로 합의하신 거고. 나머지 물량은 천씨세가에 타격을 주려고 투매하신 것이 아닙니까? 실제로 한때 곡물시세가 폭락하기도 했었지요.”
정곡을 찔렸음에도 황보세가 가주는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어이가 없군! 근거도 없는 헛소리로 나를 모함할 셈인가!”
“가주님.”
천신우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황보세가 가주는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제가 방금 전까지 누굴 만났는지 아십니까?”
“…….”
황보세가 가주는 대답을 못했지만 누군지 짐작은 갔다.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황보세가의 제안 때문에 곡물을 투매했다고. 천씨세가에 피해가 돌아갈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개소리! 백가장주는 알고 있었다. 알고서도 동의한 거야!”
고함을 질렀던 황보세가 가주의 안색이 변했다.
방금 그는 직접 혐의를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미 백가장과 황보세가의 담합을 알고 있던 천신우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걱정 마십시오. 옛날 일을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니까요.”
천신우는 주판을 튕기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천씨세가가 보유한 곡물은 많지 않습니다. 황보세가와 백가장. 두 곳에서 원하는 거래를 동시에 성사시키긴 힘들다는 겁니다.”
황보세가 가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그래서 지금 나와 백가장주를 놓고 저울질하겠다는 것이냐!”
벌떡 일어난 그에게 천신우가 경고했다.
“그 문 열고 나가시면 이번 거래는 완전히 끝입니다.”
“…….”
황보세가 가주는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여기서 거래조건을 더 올리자고?”
“그건 가주님이 선택하실 문제지요.”
천신우의 고자세에 황보세가 가주는 판을 뒤흔들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대로 끌려가면 황보세가 비전의 연성단까지 내어줘야 할지도 몰랐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우리 황보세가가 버틸 식량이 없는 게 아니다. 만일을 대비해 여유분을 확보하려는 것뿐.”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보름 정도 더 버티실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솔직히 내부에서 소비할 식량 정도야 다른 곳에서 사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천신우가 정곡을 찔렀다.
“여러 상단에서 곡물을 빌리면서까지 내다 파신 걸로 아는데요. 그 많은 물량은 대체 어떻게 메우실 겁니까?”
“그걸 네놈이 어떻게!”
황보세가 가주의 눈이 뒤집혔다.
황보세가가 여러 상단에 곡물을 현물로 갚아야 한다는 사실은 기밀 중의 기밀이었기에.
그러나 천신우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다.
“그게 중요합니까? 괜한 추측 말고 이번 거래에만 집중하시지요.”
천신우는 황보세가 가주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 적으세요. 이번 거래를 위해 황보세가에서 뭘 내어줄 수 있는지.”
또 다른 종이 한 장을 황보세가 가주 눈앞에 흔들어 보이는 천신우였다.
“참고로 이건 백가장에서 제안한 조건입니다.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은 돼야 제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천신우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웃었다.
“딱 차 한 잔 마실 동안만 기다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