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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52화 (52/171)

# 52

학사환생 052화

“좋습니다. 무림맹 모집시험에 응시하지요.”

“정말인가?”

천신우의 흔쾌한 대답에 제갈휘가 반색했다.

“이렇게 빨리 대답하는 걸로 봐서는 이미 염두에 뒀던 듯한데.”

잠시 생각하던 제갈휘가 넘겨짚었다.

“여기 오는 길에 유가장에 들렀다더니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겐가?”

“전혀요. 유설화 소저와 대화를 나누긴 했습니다만.”

제갈휘는 대화 내용이 궁금한 눈치였지만 체면이 있는지라 차마 묻진 않았다.

“유설화 소저는 아직 전형을 결정하지 못했더군요. 형님은 어떻습니까?”

무림맹의 시험분류는 단순하다.

먼저 전투에 직접 투입되는 전투전형.

그리고 전투엔 참가하지 않으면서 전투인원들을 보조하는 지원전형이 있다.

전생의 천신우는 당연하게도 지원전형에 응시했었다.

제갈휘 역시 마찬가지.

“전투전형도 생각이 없진 않았네만 아우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마음을 접었네.”

이번 생에서도 제갈휘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분명 이유만큼은 변했다.

“차라리 내가 잘하는 분야에 집중해 최고의 군사가 되어볼 생각이야.”

지원전형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전생의 천신우처럼 학사가 되는가 하면. 군사나 총관으로 진로를 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생에 제갈휘 형님은 학사로 시작했지만 마교의 침공이 시작되자 군사로 전향했지. 이번엔 처음부터 군사로 시작하게 되는군.’

긍정적인 변화였다.

제갈휘의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전생에서 검증됐기에.

제갈휘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기왕 무림맹에 함께 가게 됐으니 각자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보자고.”

천신우 역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맞잡았다.

제갈휘와는 전생에도 인연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각별하게 느껴진다.

‘이번엔 형님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전생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했던 제갈휘를 떠올리며 천신우는 각오를 다졌다.

* * *

적의 적은 친구라 하던가.

황보세가와 백가장이 그러했다.

천신우라는 공통의 적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그들이다.

황보세가는 문파대전에서 패배해 천씨세가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했고.

백가장주는 아들 백동철을 잃고 문파의 위신이 추락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제법 시간이 흘러.

여전히 복수심에 불타는 백가장주에게, 황보세가 가주가 만남을 제안하면서 오늘의 회담이 성사됐다.

“소가주의 일은 정말 안타깝게 됐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는 바요.”

자리에 앉자마자 황보세가 가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고맙소.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오.”

“물론이외다.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하든,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오진 않지요. 다만.”

황보세가 가주가 눈을 빛냈다.

“복수는 해줘야 하지 않겠소이까.”

“복수라.”

백가장주가 살벌한 눈으로 황보세가 가주를 바라보았다.

“살수라도 고용하자는 것이오?”

그야말로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천신우와 백동철의 은원은 용천세의 선언에 따라 일단락됐다.

그런데 앙심을 품고 살수를 고용해 천신우를 암살한다?

“성공 여부를 떠나 발각되는 날엔 무림맹에서 퇴출당할 거요.”

“허어. 본인을 그런 악수나 쓰는 우둔한 자로 봤다면 실망이오.”

백가장주는 황보세가 가주의 표정에서 방법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럼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이까?”

개인적인 인맥을 총동원했던 백가장주지만 결국 해법을 찾지 못했다.

과연 황보세가 가주가 가져온 해법은 무엇일까.

“아시다시피 당장 무력으로 천가 놈들을 응징하기란 쉽지 않소.”

천신우만이 아니다.

황보세가의 빈객 혈염도를 그야말로 압도한 풍뢰권.

거기에 수많은 문파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천씨세가에 합류한 전직 무림맹 교관 조충헌까지.

천씨세가의 전력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거기에 무림맹 인맥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오.”

천신우는 공덕과 용천세와 여러 차례 독대할 정도로 친분을 쌓은 상태.

황보세가와 백가장에서 무림맹 인맥을 동원해 천씨세가를 압박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무력이 아니라.”

황보세가 가주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걸로 천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오. 다행히 그간 천씨세가의 속사정을 들여다본 결과 약점을 발견했소.”

“약점이라 함은?”

“천가는 지금 곡물에 상당한 금액을 투자 중이오.”

“투자?”

문파들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 투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다만 대상이 의외였다.

“곡물에 투자했다는 거요?”

“그렇소이다.”

천신우가 알게 모르게 확보한 곡물의 양은 엄청났다. 단심회 거래망을 통해 비밀리에 매입한 물량을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우리 황보세가는 지난 문파대전 배상금으로 천씨세가에 물류창고를 내줬소. 거기에 가득 쌓여 있던 곡물까지 다해서.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전부 곡물투기를 위한 사전포석이었던 거요.”

“곡물은 투자할 만한 대상이 아닌데.”

곡물은 가격변동이 적다. 홍수나 가뭄이라도 크게 들지 않고서야.

게다가 오래될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대표적인 품목.

“투자금액이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하셨소?”

“허허. 놀라지 마시구려.”

정확한 수치를 전해 들은 백가장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보세가 가주가 기대한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그놈들 제정신이오?”

“사실 워낙 금액이 커서 오히려 재미를 조금 보고 있더이다.”

집중적으로 곡물을 사들이다 보니 이유도 없이 시세가 올랐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이오. 거품이 걷히는 것은 시간문제지.”

비로소 백가장주는 황보세가 가주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직접 거품을 걷어주자?”

“바로 그렇소이다. 천가에서 시세차익을 보기 전에 대량의 곡물을 시중에 푼다면 어떻게 되겠소?”

천씨세가는 이미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금액을 곡물에 쏟아부었다.

지금 시점에서 대량의 곡물이 시중에 쏟아져 나온다면, 더는 물량을 소화하지 못할 것이다.

“기껏 올려둔 곡물가격이 폭락하겠군.”

“바로 그렇소. 물론 처음에야 빚을 끌어다 쓰더라도 곡물을 사들여 시세를 유지시키려 하겠지. 하지만 결국 천가에 남는 것은 막대한 빚과 창고에서 썩어가는 곡물뿐일 거요.”

백가장주는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바빴다.

현재 곡물시세는 비정상적으로 오른 상태.

지금 곡물을 내다 팔고 시세가 정상화된 후에 다시 사들인다면?

천씨세가가 입는 손해만큼 백가장과 황보세가는 이득이다.

‘대충 계산해도 천씨세가 때문에 입은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는다.’

생각에 잠긴 백가장주에게 황보세가 가주가 결단을 촉구했다.

“이미 우리 황보세가와 우호적인 문파와 상단들과 합의를 마쳤소이다. 일시를 맞춰 대량의 곡물을 시중에 풀기로. 이제 백가장만 결단을 내려주시면 되오.”

백가장. 그리고 백가장과 우호적인 상단과 문파들까지 끌어들인다면 파괴력은 배가 된다.

뿐만 아니라 고급정보를 물어다 줬으니 동맹관계도 지금보다 두터워질 것이다.

문제는.

“투기란 것은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끝장이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는 법이다.

“그건 걱정 마시오. 미리 합의한 일시를 어길 경우 배상한다고 각서를 쓰겠소이다.”

그제야 백가장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황보세가의 계획에 적극 협력하겠소이다.”

“하하. 잘 생각하셨소. 골치 아픈 얘기는 끝났으니 미리 축배를 듭시다.”

술잔을 부딪치며 백가장주와 황보세가 가주는 호탕하게 웃었다.

천씨세가를 골로 보낼 생각을 하니, 앓던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 * *

천씨세가로 돌아온 천신우는 무공수련과 세가를 정비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경사가 쏟아졌다.

천무흔은 마침내 천무검법 8성의 벽을 넘었고.

천신혁은 천무검법 7성에 도달한 것으로도 모자라 8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으며.

권왕은 천신우를 제외하면 동년배에 적수가 없을 수준까지 성장했다.

천씨세가 무인들의 성장도 눈에 띄었다.

한수 지역 교역로에서 발생한 여러 차례의 교전을 손쉽게 제압한 것이다.

하지만 가장 기쁜 소식은 역시.

“그게 정말입니까? 황보세가와 백가장이 우호세력들까지 움직여서 곡물을 대량으로 내다 팔고 있다고요?”

천신우조차 예상 못했던 황보세가와 백가장의 움직임이었다.

물론 속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천신우와 달리. 대답하는 총관의 표정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대공자께서 지시한 대로 꾸준히 곡물을 매입해 왔습니다만. 이번 사태로 인해 장부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고 말았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당연히 총관은 천신우가 단심회 거래망을 통해 곡물을 사들인 사실은 모른다.

아마 그것까지 알았다면 이미 거품을 물고 기절했을 것이다.

지시한 것은 천신우라도 결국 천씨세가의 장부를 날마다 들여다보는 사람은 총관이니까.

“그럼 지금 세가에 여유자금은 얼마나 됩니까?”

“대공자님. 설마…….”

“생각하시는 그대롭니다. 우리 천씨세가의 역량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추가로 매입하세요.”

“죄송하지만 이번엔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확신을 갖고 곡물에 투자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심 끝에 묻는 총관이었다.

지금 천씨세가에선 단순히 곡물만 사들이는 게 아니다.

곡물창고를 확장하고 보수하는 작업까지.

천씨세가의 역량을 곡물투자에 모조리 쏟아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곡물가격이 떨어지고 오르고는 관심이 없습니다.”

천신우에게서 나온 뜻밖의 대답.

총관은 깜짝 놀랐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로?”

“천씨세가를 지금보다 훨씬 강대하기 만들기 위해섭니다.”

힘을 키운다고 해서 천씨세가가 단숨에 명문문파가 되진 못한다.

천신우 개인의 명성만큼이나 문파의 평판을 높이는 일 또한 중요했다.

무림엔 명분으로만 움직이는 고수들도 많기 때문이다.

“확보한 곡물의 상당량은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내놓을 겁니다. 그럼 사람들이 천씨세가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달라지겠지요.”

“아!”

총관은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이었다.

대공자의 무리한 지시에 이런 뜻이 숨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그다.

“손실에 대해선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전부 책임질 테니.”

총관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천신우의 배려.

“아닙니다.”

단칼에 사양한 총관이 강렬한 눈빛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문파의 살림을 도맡은 총관으로서 어찌 책임을 회피하겠습니까. 대공자님 뜻대로 곡물을 추가 매입하시지요. 부족한 재정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살림살이라도 내다 팔 기세인 총관을 쳐다보며 천신우는 그저 미소 지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천씨세가만큼은 숟가락 수가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 * *

마침내 전생에서 대홍수가 시작됐던 전날 밤이 찾아왔다.

천신우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중이었다.

총관에게 혹시 모를 물난리에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지.’

솔직히 이번만큼은 미래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대홍수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무사했으면.

하지만 단지 바람에 그칠 것이다.

지금까지 천신우가 수많은 미래를 바꿨음에도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예정대로 일어났듯이.

‘마교의 침공과는 달라. 천재지변은 나 혼자서는 어찌해 볼 방법이 없다.’

전생에서 대홍수가 발생한 이후 무림맹 학사들은 연구를 진행했었다.

대홍수를 예측하고 대응할 방법에 관해.

하지만 그때 나온 결론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무림맹주가 직접 명령을 내리더라도 피해를 줄일지언정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하물며 천씨세가 대공자에 불과한 천신우로선 더더욱 방법이 없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준비하는 것밖에는.

‘이제 시간이 됐군.’

자정이 되자 달이 자취를 감추고 사방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처마 밑에 서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천신우의 심정은 복잡했다.

전엔 미처 몰랐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게 이렇게 괴로울 줄은.

* * *

자정부터 시작된 비는 며칠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극적으로 바뀌어갔다.

처음엔 가뭄에 단비라며 기뻐하던 사람들의 표정에서 언젠가부터 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그들의 얼굴을 채운 것은 근심이었다.

물론 그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적어도 백가장주처럼 분노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황보세가는! 황보세가로부터 연락은 아직인가!”

“장주님. 죄송합니다만 이런 상황에선 서신을 주고받기가 어렵습니다. 무림맹 공문도 오늘 새벽에야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곡물 매입은! 이미 올해 농사가 망한 건 기정사실이라 하지 않았더냐! 그럼 시중에 풀린 곡물이라도 확보해야 할 것이 아니냐!”

백가장 총관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말이 있다.

원래 갖고 있던 곡물이라도 잘 보관했으면 그나마 손해가 적었을 텐데.

백가장주가 황보세가와 작당하여 곡물을 투매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무림 전체에 대홍수가 난 마당에 이제 와서 무슨 수로 곡물을 사들인단 말인가.

“하다못해 전에 내다 판 곡물이라도 다시 회수해라! 거래장부가 있을 것이 아니냐! 상단에서 내놓지 않겠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그게…… 이미 알아봤습니다만 천씨세가에서 전부 매입해서 회수가 불가능하답니다. 우리 백가장에서 내다 판 곡물뿐만 아니라 동산파와 철장방 물량까지 죄다 사들였다고.”

“지금 뭐라고 했느냐? 천씨세가에서 그 많은 물량을 전부 사들였다고?”

이제 상황이 완전히 정반대가 됐다.

백가장과 황보세가가 입을 손해만큼 천씨세가는 이득을 얻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백가장주는 억장이 무너졌다.

“황보세가……! 그놈들 때문에 우리까지!”

하지만 백가장주는 알지 못했다.

이미 황보세가 가주는 혈압으로 뒷목 잡고 쓰러졌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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