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학사환생 051화
“물론 그대에겐 천림을 자유롭게 돌아볼 자격이 있네. 하지만 허락된 시간은 하루뿐이야. 명심하게.”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대답하는 천림의 수호자.
“그거면 충분합니다.”
천신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허락해 주지 않았다면 입장이 난처해졌을 텐데 천만다행이었다.
“천림은 아주 넓은 곳이네. 안내할 길잡이를 붙여주지.”
숲속에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걸어 나왔다.
별다른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한 자루 칼처럼 벼려진 느낌이었다.
유순한 제갈세가 무인들과는 정반대의 인상.
그는 입도 열지 않고 손짓으로 천림 안쪽을 가리켰다.
그렇게 천신우는 천림의 금지로 발을 내디뎠다.
입구에서 그를 지켜보던 시선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천신우로선 반길 만한 일이었다.
‘나야 보는 눈이 적을수록 편하니까.’
천신우는 길잡이와 함께 천림을 누비기 시작했다.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말라죽은 풀들과 바스러진 나뭇가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제갈휘와 돌아봤던 천림 외곽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이 또한 만상서고 두 번째 단서의 영향이겠지.’
단서는 두루마리에 적힌 추상적인 표현이 전부.
‘구체적인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걱정을 많이 했지만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잠깐. 이건……!’
천신우는 깜짝 놀랐다.
어느 순간부터 나뭇가지들이 스스로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다다른 곳엔 가시덤불이 무성했다.
‘설마 여기로 가라는 건가?’
천신우는 고민 끝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가시덤불들조차 양쪽으로 비켜나는 것이 아닌가.
신비한 현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옆에 붙어 있던 길잡이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의구심을 뒤로하고 천신우는 거대한 나무가 심어진 장소에 이르렀다.
정말이지 하늘 끝까지 닿을 것처럼 높게 자라난 거목.
“이렇게 커다란 나무라면 천림 어디서든 보였을 텐데.”
천신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품에 간직하던 두루마리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천신우는 눈을 의심했다.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가 빛나고 있었다.
동시에.
스스스-!
바람이 불어오며 나뭇가지들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나무껍질이 허물처럼 벗겨지며 거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천신우는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야 지금까지의 상황이 납득이 됐다. 두루마리는 천림의 수호자들조차 모르는 장소로 자신을 인도한 것이다.
흥분도 잠시.
천신우는 신중하게 상자를 살폈다.
분명 전에 호수 밑바닥의 수중동굴에서 찾아낸 상자와 유사한 형태.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상자와 달리 상자 끄트머리가 녹아 있진 않군.’
대신 상자 겉면이 부식되어 있었다. 손만 대면 바스러질 것처럼.
과연 천신우가 손을 대기 무섭게 상자가 바스러지며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구슬이군.’
크기 또한 이전과 동일하게 어린아이 머리 크기.
다만 핏빛으로 불타고 있던 첫 번째 구슬과 달리, 눈앞의 구슬은 모래로 뒤덮여 있었다.
천신우는 구슬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그러자 모래가 흘러내리듯 구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처럼 목곽만이 그 자리에 남겨졌다.
‘이게 보상인가?’
전에 얻은 목곽 겉에 승천단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에 반해.
눈앞의 목곽 겉에 적힌 글자는 폭풍비였다.
천신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폭풍비? 설마 무림삼대비도의 하나인 그 폭풍비?’
목곽을 향해 손을 뻗는 천신우의 손이 떨렸다.
달칵.
목곽을 여는 순간 바람이 불어오는 착각마저 들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서늘한 예기가 흐르는 비수였다.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
천신우는 눈앞의 비수가 폭풍비임을 직감했다.
‘승천단에 이어 폭풍비라니.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군. 잠깐.’
천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번엔 어째서 두루마리가 나타나지 않은 거지?’
폭풍비라는 보상은 마음에 들었지만 이걸로 끝나면 곤란했다.
‘만상서고의 세 번째 단서는?’
천신우의 마음속 질문에 대답하듯 두루마리에 적혀 있던 글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내용을 확인한 천신우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식이었군.”
다음 단서를 찾으면 두루마리에 새로운 단서가 나타나는 방식.
누가 설계한 것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선 만상서고의 위치만 알려졌을 뿐. 만상서고의 주인이 누군지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었지.’
만상서고의 비밀을 파헤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천신우였다.
그런데 두근거리는 것은 천신우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우우웅.
“뭐지?”
천신우는 미심쩍은 눈으로 칼집에 들어 있는 자운검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운검이 스스로 요동치고 있었다.
‘자운검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가?’
사실 천신우가 자운검에 대해 아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내공을 주입하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
거기에 더해 주인과 함께 성장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막연히 자신이 강해지는 만큼 자운검도 성장하리라 생각했을 뿐.
그런데 오늘 자운검은 확실히 뭔가 달랐다.
잠시 생각한 끝에 천신우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폭풍비에 반응하는 건가?’
자운검과 폭풍비 모두 전설적인 무기들.
서로 공명현상을 일으키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확인해 보기 위해 자운검을 폭풍비 가까이 가져가자…….
쿠우우우웅!
과연 진동이 훨씬 격렬해졌다. 주변의 공기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
천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도대체!”
자운검의 칼날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며 폭풍비를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이 순간, 천신우가 검성이 죽기 전에 했다는 말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운검을 완성시켰다면 마교 교주인 천마조차 자신 앞에 무릎 꿇었을 거라고.”
무인은 수련하고 싸우면서 성장한다.
그렇다면 무기는 어떻게 성장할까.
천신우는 왠지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설마…… 다른 무기를 먹으면서 성장하는 건가?”
대답이라도 하듯 자운검이 요동쳤다.
천신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분명 자운검은 주인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폭풍비를 흡수해도 되겠냐고.
천신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폭풍비는 무림삼대비도에 선정된 전설적인 무기였으니까.
값을 매길 수조차 없는.
‘내가 폭풍비를 사용해도 충분히 효과를 보겠지. 그걸 자운검의 성장을 위해 먹인다? 얼마나 강해질지도 모르는데?’
쇳덩어리라도 하나 먹여서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지금까지 자운검으로 박살 낸 무기만 해도 수레 한 대 분량은 될 텐데.’
심지어 그 무기들 중엔 제법 유명한 것도 있었다.
참월도가 사용하던 도만 하더라도 눈독 들이던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하지만 그때 자운검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폭풍비 정도는 돼야 먹을 마음이 난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검성이 죽을 때까지 자운검을 완성시키지 못한 것도 납득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두 자루로는 성도 차지 않을 듯한데.’
고심 끝에 천신우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좋다. 폭풍비 하나 정도는 희생해 주마.”
계속해서 자운검을 성장시킬지는 폭풍비를 흡수한 결과를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자운검은 폭풍비를 으적으적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폭풍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운검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겉모습은 그대로군.”
실망하긴 일렀다. 원래 자운검은 내공이 주입되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무기니까.
천신우는 자운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우연히 얻은 이후 거의 손에서 놓은 적이 없건만 지금만큼은 낯설게 느껴진다.
지이잉-!
깊은 울림 속에서 천신우는 보았다.
자운검에 얇은 막이 씌워진 것을.
육안으로 간신히 확인될 만큼 얇고 투명하다.
그러나 닿기 무섭게 모든 것이 잘려 나갔다.
나무도, 풀도, 바람마저도.
두근두근.
천신우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완성된 자운검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가득 들어찼다.
* * *
천신우가 사라진 곳을 두리번거리던 길잡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천신우가 나타난 것이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천신우의 등장과 함께 주위의 풍경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천신우에게서 시작된 무형의 파도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시들었던 풀이 생기를 되찾고 말라비틀어졌던 나뭇가지가 물기를 머금었다.
순식간에 천림은 완벽히 색을 되찾았다.
믿기지 않는 표정의 길잡이에게 천신우가 미소 지어 보였다.
“해결했습니다. 돌아가지요.”
하지만 길잡이는 웃지 못했다.
천신우가 비틀거리더니 급기야 바닥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승천단의 지속시간이 끝난 것이다.
* * *
천림 수호자들의 주거지역.
본래 외부인의 출입이 일절 금지되는 곳이었지만 천신우에겐 예외였다.
길잡이에게 상황을 보고받은 천림의 지도자가 천신우의 출입을 허락한 까닭이다.
극진한 간호 속에 천신우는 금세 기력을 회복했다.
사실 승천단의 부작용은 길지 않다.
일시적인 탈진상태에 빠지는 것이 전부.
그러나 그걸 모르는 천림의 수호자들은 천신우에게 감동한 눈치였다.
물론 그들 중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천림에서 살아온 그들조차 모르는 장소를 천신우가 무슨 수로 발견했단 말인가.
하지만 천림의 지도자는 반발을 간단하게 일축했다.
“선조들이 남기신 말씀을 잊은 게냐? 천림엔 우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그는 직접 천신우를 찾아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천림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병에 걸렸던 일족도 전부 나았네. 그대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도운 덕에.”
천림의 지도자는 준비한 나뭇가지를 천신우에게 건넸다.
천신우가 물었다.
“이게 뭡니까?”
“간직하게. 훗날 천씨세가에 위기가 닥친다면 우리 일족이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증표네.”
제갈세가가 멸문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림에 나온 천림의 수호자들이다.
천씨세가에 힘이 될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그러나 천신우는 나뭇가지를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어차피 천림을 방문한 목적은 달성했다.
수호자들의 약속이야 덤으로 생각해도 좋으리라.
“하나만 묻지. 천림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찾았나?”
“물론입니다.”
그게 뭔지 묻지는 않는 천림의 지도자였다.
천신우는 생각했다.
만일 이들을 천림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좋은 인연을 맺었을 거라고.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천신우는 수호자들을 뒤로하고 천림을 빠져나왔다.
기다리던 제갈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너무 늦어져서 걱정했다네. 그래. 원하는 답은 찾았는가?”
막힌 무공의 벽을 깨겠다며 제갈휘에게 천림 방문을 요청한 천신우였다.
물론 제갈휘나 제갈세가 가주 모두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인이 무공수련을 위해 풍광 좋은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그렇습니다.”
“하하. 도움이 됐다니 나도 기분이 좋군.”
제갈세가로 복귀하는 길에 제갈휘가 넌지시 물어왔다.
“부탁을 들어줬으니 나도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나는 이번 여름에 무림맹 정기모집에 응할 거라네.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아우 생각은 어떤가?”
천신우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제갈휘가 무림맹에 들어간 시기 또한 올해 여름.
‘무림맹은 3년마다 여러 분야에 걸쳐 인재들을 모집한다. 인재들을 선별하는 시험은 까다롭기로 악명이 자자하지. 그나저나 공교롭군.’
제갈휘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천신우는 무림맹 시험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막기 편하다. 무엇보다 무림맹 연쇄살인사건은 내부에서 일어나니까.’
무림맹으로 가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오늘 알아낸 만상서고의 세 번째 단서.
그 단서가 가리키는 곳은 바로……
무림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