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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50화 (50/171)

# 50

학사환생 050화

만상서고의 두 번째 단서를 찾아 제갈세가로 떠나기에 앞서.

천신우는 가주 천무흔과 천씨세가 정원에서 만났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천무흔이 평소와 달리 무복 대신 작업복을 걸쳤기 때문.

“따라오면 안다.”

천무흔은 미리 봐둔 자리로 가서 삽으로 땅을 파고 묘목을 심었다.

식수를 마친 천무흔이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알고 있느냐. 여기 있는 나무들은 모두 전대 가주들께서 직접 심으신 것들이다. 처음에 심을 때는 이 묘목처럼 작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저렇게 커졌지.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에도 후손들이 나무를 돌봤기 때문이다.”

천신우는 천무흔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오늘 심은 이 묘목이 세상의 어떤 나무보다도 크게 자랐으면 한다. 물론 나보다는 네가 이 묘목을 돌볼 시간이 훨씬 많을 것이야.”

천무흔은 천신우를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잘할 수 있겠느냐?”

오늘 심은 묘목은 천씨세가나 마찬가지. 결국 아버지는 천신우에게 천씨세가를 세상 어느 문파보다도 강대하게 키워달라고 당부한 것이다.

천신우는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빛마저 빨아들인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기괴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환한 햇살이 쏟아졌다.

마치 천씨세가의 미래를 축복해주는 듯해서 천무흔과 천신우의 표정이 덩달아 밝아졌다.

* * *

천무흔과의 독대를 마치고 곧장 한수 지역으로 떠난 천신우다.

공사가 끝난 선착장에서 천신우는 인부들과 재회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천신우와 일면식이 있는 양 노인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대공자님. 말씀 편히 하십시오. 저희 같은 천한 것들에게 말을 높이시다니요.”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이제 어엿한 천씨세가의 일원인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들어보시지요.”

천신우가 눈짓하자 천씨세가 무인이 설명을 대신했다.

“앞으로 천씨세가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인부들에겐 우선적으로 일자리가 제공될 겁니다. 당장 예정된 곡물창고 보수공사부터 지원자를 받을 예정입니다.”

“그럼 이제 일자리 걱정은 없는 건가?”

“용역업자들에게 뒷돈 찔러줘가며 아쉬운 소리 할 필요도 없고?”

“어허. 그런 소리를 여기서 하면 어떡하나.”

인부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들에게 보장된 일자리는 어떤 것보다 절실하다.

엎드려서 절이라도 올릴 기세인 인부들을 뒤로하고 천신우는 배에 몸을 실었다.

직접 배를 타고 교역로를 둘러보고 유가장에도 들를 생각이었다.

* * *

천신우의 방문소식에 유가장이 들썩였다.

원래 유가장 정도 되면 귀빈들이 수도 없이 찾아오지만 천신우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이제 그저 그런 가문의 후계자 정도가 아니라 무림에서 주목하는 신성.

자연히 유가장 수뇌부들부터 말단 시비에 이르기까지 천신우에게 관심을 보였다.

물론 가장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유가장주의 부인이었다.

아직 미혼인 딸만 셋인 어머니답게 천신우가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시비들을 들볶았다.

“천 공자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전부 준비해놓아라.”

“이불과 침구도 깨끗하게 빨아서…… 아니지! 아예 새로 사는 편이 낫겠어.”

“먼지 하나 보이지 않게 청소해라. 방에서 벌레라도 나오면 우리 유가장을 어떻게 보겠니.”

보다 못한 유설화가 한마디 했다.

“어머니. 그만 하세요. 천 공자는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에요.”

“마침 잘됐다. 이리 와보렴. 옷이 그게 뭐니.”

괜히 얘기를 꺼냈다 본전도 못 찾은 유설화였다.

그렇게 환대를 받으며 유가장을 방문한 천신우.

그는 유가장주와 면담한 후에 바로 실무자와 만남을 가졌다.

“협정서에 합의한 대로 향후 2년간 천씨세가에 인원을 파견해 의술을 전수해 주겠소.”

“한수 지역 교역로에서 취급되는 유가장 물품에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만족스러운 협정서를 받아든 천신우는 연회에도 참석해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유가장주 부인도 기회를 놓칠세라 딸들을 소개시켜주며 제안했다.

“호호호. 천 공자. 볼수록 사람이 마음에 드네. 천 공자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우리 유가장에 머물러도 좋아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다른 일정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굴하지 않고 천신우를 눌러 앉히려는 부인을 유가장주가 잡아끌었다.

“부인. 대공자가 불편해하니 그만하시구려.”

“그만하긴요. 이러다 다른 집안에서 채간다니까요. 어디 천 공자처럼 괜찮은 사윗감이 흔한 줄 알아요?”

“그야 그렇지만.”

“천 공자도 내심 바라고 있을 걸요? 우리 딸들도 어디 보통 인물이어야지.”

“흠흠. 그렇기는 한데.”

“잔말 말고 나한테 맡겨둬요. 내가 혼사 성사시킬 테니까.”

물론 유가장 안주인의 호언장담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천신우는 다음 날 정중한 인사와 함께 유가장을 떠났던 것이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유가장 안주인은 애꿎은 유설화만 물고 늘어졌다.

“너는 두 번이나 만나는 동안, 천 공자 마음 휘어잡지 않고 뭐했니? 이 엄마는 말이야, 네 아빠 눈웃음 한 번으로 꼼짝 못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네 나이였으면…….”

좀처럼 끝날지 모르는 잔소리에 유설화는 침묵했다.

실은 어머니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유설화는 어젯밤 천신우와 따로 만났다.

그때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괜히 귀밑이 달아오르는 유설화였다.

* * *

“물론 나보다는 네가 이 묘목을 돌볼 일이 많을 것이야. 잘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가주 천무흔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던 천신우는 깜짝 놀랐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천씨세가의 정원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거대한 수림.

“여긴…….”

“어디긴. 천림이지.”

옆에서 웃고 있는 사람 역시 천무흔이 아니라 제갈휘였다.

그제야 천신우는 유가장에 이어 제갈세가를 방문한 사실을 떠올렸다.

잠시 넋이 나갔던 모양이다.

“천림에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마력이 있다더니…….”

“하하. 아무리 천림의 풍광이 아름답다지만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서야 쓰나.”

제갈휘가 천신우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있었던 겐가?”

“여기 오기 전에 아버님과 정원에 나무를 심었거든요. 천림을 거닐고 있자니 갑자기 그때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하하. 단순하기는.”

사람 좋게 웃던 제갈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제부턴 정말 집중하게. 괜히 외부인들의 천림 출입이 금지되는 것이 아니니.”

천신우야 제갈휘와의 친분으로 제갈세가 가주로부터 출입허가를 받았지만.

원래는 출입절차가 훨씬 까다롭다.

천림엔 제갈세가의 역사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저길 보게.”

구름을 뚫을 기세로 뻗어 나간 나무에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선조들이 이곳에서 수련하신 흔적이네. 예로부터 천림은 제갈세가 무인들이 깨달음과 수련을 위해 찾는 장소였지.”

천림에 숨겨진 비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금만 가면 천림의 수호자들이 나타나겠군. 명심해. 수호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천림의 금지엔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수호자들은 제갈세가에서 갈라져 나온 핏줄로 평생을 천림에서 살아간다.

가주라도 그들을 불러내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도 세상에 나갈 수 없다.

수호자들이 천림 밖으로 나오는 건, 제갈세가의 존망을 뒤흔들 위기가 닥쳤을 때뿐이다.

‘전생에서 천림의 수호자들이 제갈세가의 멸문을 막고자 나타났을 때는 정말 모두가 놀랐었지.’

제갈세가를 오대세가의 한곳이라고만 생각하던 무림인들. 그리고 제갈세가를 거의 멸문까지 몰아붙였던 마교의 추종자들.

심지어 수호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제갈세가 무인들마저도 놀랐다.

천림의 수호자들이 지켜온 힘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기에.

물론 천신우가 이번에 제갈세가를 방문한 목적은 천림의 신비를 파헤치기 위함이 아니다.

‘천림의 금지. 그곳에 만상서고의 두 번째 단서가 숨겨져 있다.’

당연히 제갈휘에겐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선 무림맹에서 제갈세가에 정식으로 요청해서 천림을 수색했겠군.’

물론 추측일 뿐이다.

경험하지 못한 미래.

지금부터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천신우도 알지 못했다.

그때 앞서가던 제갈휘가 멈춰 섰다.

길이 점점 좁아지는가 싶더니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철문 주변은 온통 바위산으로 뒤덮여 있어,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도착했네.”

옆으로 비켜서는 제갈휘.

천신우가 의아하게 물었다.

“형님은 함께 가지 않습니까?”

“사람 무안하게 만들기는. 말했잖은가. 천림의 금지로 들어가려면 수호자들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제갈휘의 실력이 천림 수호자들의 눈높이에 미치지 않는다는 뜻.

괜히 민망해진 제갈휘가 앞을 가로막은 철문을 가리켰다.

“금지로 가는 첫 번째 시험이네. 저기 보이는 구슬을 움켜쥐고 내공을 흘려보내게. 조건은 간단해.”

사악한 기운이 섞이지 않는 일정 수준의 내공을 증명할 것.

그게 천림의 금지로 들어가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천신우는 제갈휘의 조언에 따라 투명한 구슬을 움켜쥐었다.

“이런 식인가.”

내공을 조금씩 흘려보냈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시 집중해 최대한의 내공을 뽑아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허허. 아우도 사람이구먼. 그만하면 됐으니…….”

제갈휘가 천신우를 말리려던 그때.

천신우의 손에서 흘러나온 엄청난 내공이 구슬을 감싸기 시작했다.

번쩍!

구슬이 빛나며 찬란한 빛을 사방으로 쏘아 보냈다.

“우웃!”

잠시 팔로 눈을 가렸던 제갈휘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방금 보여준 것이 아우의 진정한 힘인가? 정말이지 굉장하군!”

드르륵.

요구조건을 만족했는지 철문이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신우의 표정은 제갈휘와 달리 밝지 못했다.

‘결국 승천단의 힘을 빌리고 말았다.’

승천단의 지속시간이 끝나면 일시적으로 탈진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아무리 제갈세가의 영역이라고는 하나 천림의 금지는 분명 의미가 다르다.’

탈진상태에 빠지면 어떤 위험에 처할지 모르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만상서고의 두 번째 단서를 찾아내고 복귀하는 수밖에.’

천신우는 제갈휘를 뒤로하고 철문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겠네!”

제갈휘의 외침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철문 너머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동굴이었다.

천신우가 발을 내딛기 무섭게.

파바바바박!

어디선가 쏟아져 나온 쇠침이 천신우가 있던 곳을 교차해 양쪽 벽에 박혔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에 천신우는 신음을 삼켰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다면…….”

쇠침이 꽂힌 곳은 벽이 아니라 천신우의 몸뚱이였으리라.

놀란 것도 잠시.

천신우는 계속해서 빠르게 전진했다.

단순히 빨리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곳은 바닥이 아예 칼날로 뒤덮여 있어 한참을 날아가야 했다.

내공뿐만 아니라 고도의 신법과 보법까지 요구되는 시험이었다.

마침내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온 천신우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에 새로운 숲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이곳이 진정한 천림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기연도 실력이 있어야 얻는구나.’

예전엔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숨을 고르던 천신우가 멈칫했다.

눈앞의 숲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우리의 기척을 느끼다니.”

마치 나무가 말하는 것처럼 숲이 들썩였다.

‘대단한 고수다!’

승천단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다행히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천씨세가에서 찾아온 손님이란 말은 들었네.”

천신우는 숲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천씨세가 대공자 천신우라고 합니다.”

“초면에 갑작스럽지만 일단 축하하네. 잃어버린 천씨세가의 세월을 되찾은 것을.”

천신우의 실력을 칭찬하는 목소리는 산울림처럼 숲에 울려 퍼졌다.

천신우는 상대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살아왔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원래 자격을 갖춘 손님은 성대하게 맞이하는 것이 우리 일족의 전통이네만. 안타깝게도 천림에 병이 돌아 그러지 못함을 이해해 주게.”

뭔가 짚이는 바가 있어 천신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병이라 하심은?”

잠시 망설이던 수호자가 대답했다.

“원래 외부인에게 밝힐 사안은 아니네만. 환대 못하는 이유가 뭔지는 알려줘야겠지. 피부가 나뭇가지처럼 말라붙는 병이라네.”

천림에 전해져 내려오는 의술로도 고치지 못하는 질병.

하지만 천신우는 원인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먼저 만상서고의 첫 번째 단서로 인해 일어났던 핏빛 안개.

그리고 전생에서 만상서고의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던 시기에 발생한 기현상들.

‘그걸 종합해 보면 천림에 도는 병은 만상서고의 두 번째 단서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천신우는 승부수를 던졌다.

“원래는 천림의 수호자들을 뵙고 가르침을 얻으려 했습니다만. 그런 일이 있다면 먼저 천림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천신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전에 비슷한 병을 치료한 경험이 있습니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끝에 숲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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