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학사환생 047화
놀란 투숙객들이 속옷 차림으로 객잔을 뛰쳐나왔다.
다행히 건물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천신우가 묵던 방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다.
벽에 금이 가고 집기가 박살 났으며 창문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굉장하군.”
양손을 내려다보며 순수하게 감탄하는 천신우였다.
직접 경험한 승천단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내공을 늘려갈수록 승천단의 효과도 커진다는 건데.’
일반적인 증폭환은 내공을 2배에서 3배까지 올려준다.
승천단 역시 내공 증폭효과는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론적으론 내공을 1만큼 올리면 3만큼의 효과를 체감할 수 있다는 뜻.
‘물론 엄연히 제약이 존재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선 다른 누군가가 승천단을 복용했었겠군.’
승천단뿐만이 아니다.
만상서고로 통하는 또 다른 단서를 찾는 과정에서도 또 다른 보상이 나왔을 것이다.
‘이번 생에선 다른 보상들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겠어.’
승천단이 시작이라면 그 다음은 뭐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굳이 추측을 해보자면 승천단처럼 지금은 거의 구하기 불가능한 물건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긴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일단은 승천단으로 인해 달라진 육체에 적응하는 것이 급선무다.
천신우는 객잔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아직까지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객잔주인에겐 넉넉하게 수리비를 쥐어주고.
목적지인 무림맹 제13지부로 향하는 천신우였다.
* * *
천신우는 쉬지 않고 달렸다.
순식간에 숲을 빠져나온 그가 높은 나무 위에 서서 멀리 내다보았다.
멀찍이 무림맹 제13지부가 시야에 들어온다.
전에 방문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새 풍경이 변했을 리는 없으니.
‘내가 변한 거겠지.’
제13지부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천신우가 몸을 날렸다.
파아앗!
상쾌한 바람을 가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줄기 빛을 연상시켰다.
* * *
은밀한 모임에 어울리는 밀실.
“결국 백가장은 이번 일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다는 뜻이구려.”
무림맹 제13지부 수호단주는 손가락으로 거뭇거뭇한 입술을 쓸었다.
그는 부지부장만큼은 아니지만 제13지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
그렇기에 그를 대하는 백가장주의 태도는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렇습니다. 최소한 설욕은 해야 저희 백가장의 위신을 되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 며칠 사이, 천신우가 백동철을 응징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놔두면 백가장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일을 키우면 소가주에게도 이목이 집중될 터. 비난의 화살을 감당하실 수 있겠소이까?”
백가장주가 준비해 온 상자를 꺼냈다.
“그래서 단주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내 선에서 해결하기 힘든 일임을 아시는 분이.”
백가장주라고 모르지 않는다. 용천세가 개입한 이상 백동철은 처벌을 피하기 힘들다는 것을.
그래도 최대한 처벌수위를 낮추기 위해 무림맹 윗선에 전달할 뇌물까지 준비해 왔다.
“윗분들께 잘 말씀해 주십시오.”
수호단주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큼직한 금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절반은 챙기고 나머지는 윗선에 상납하면 되리라.
“알겠소. 장주의 성의를 봐서 최대한 힘써볼 테니 걱정 마시구려.”
그때.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수호단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일인가.”
밀담을 방해하면서까지 보고할 일이라면 중요한 문제임이 틀림없었다.
“단주님.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심복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수호단주는 바로 백가장주와 내용을 공유했다.
“천씨세가 대공자가 지금 지부를 방문했다고 하오.”
며칠 전에도 천신우와 용천세가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수호단주였다.
“아마 용천세를 만나기 위함일 거요. 어떻게 하시겠소?”
잠시 생각한 끝에 백가장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만들어주십시오.”
* * *
무림맹 제13지부.
부지부장 용천세의 집무실.
쌓여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우며 용천세가 물었다.
“벌써 해결했다고?”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실종자들의 흔적은 찾지 못했지만 안개를 일으키는 원인은 제거했습니다.”
“그래도 추가 실종사건을 막게 되어 다행이군. 그래. 대체 원인이 뭐였나?”
“영단이었습니다.”
원래 전체를 숨기긴 힘들어도 일부를 숨기긴 쉽다.
천신우는 다른 정보는 전부 공개하고 만상서고와 관련된 사실만을 숨길 생각이었다.
“영단이라 함은?”
“승천단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승천단!”
화들짝 놀랐던 용천세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군.”
사실 용천세가 아니라 누구라 하더라도 반응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승천단은 보통 귀한 영약이 아니었기에.
“설마 승천단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던 겐가?”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유난히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지점을 수색해 보니 승천단이 있더군요. 믿기 힘드시겠지만 승천단을 복용하자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라졌습니다.”
욕심이 적은 용천세임에도 승천단을 복용했다는 대목에선 아쉬움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용천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판단이네. 본래 영물은 얻자마자 취해야 하는 법이지.”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기에.
“어쨌든 고맙네. 덕분에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해결됐어.”
용천세는 보답으로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천신우는 나중으로 미뤘다.
용천세처럼 은혜를 아는 인물이라면 빚은 오래 지워둘수록 좋다. 훗날 훨씬 크게 돌아올 테니까.
“백가장 소가주에 대한 처벌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네. 아마 시간이 걸릴 거야. 그나저나 언제 돌아갈 생각인가?”
“오늘 떠나려고 합니다.”
“많이 바쁜가 보군.”
“죄송합니다.”
만상서고의 두 번째 단서. 한수 지역 활성화. 유가장과의 협약.
당장 산재한 문제만 해도 이렇게나 많다.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죄송할 것까지야. 바쁘다는 사람 억지로 붙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어나지. 입구까지라도 배웅하겠네.”
용천세와 함께 집무실을 나선 천신우.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뜻밖의 인물들과 마주쳤다.
“여기 계셨군요. 집무실로 찾아가려 했습니다만.”
수호단주와 백가장주가 용천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용천세가 인사를 받아주며 물었다.
“어쩐 일이시오?”
백가장주가 천신우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천씨세가 대공자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곧바로 백가장주의 의도를 알아차린 용천세다.
“이미 꺼진 불씨를 다시 피울 생각이오?”
“부지부장님. 아들놈의 잘못은 인정합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요. 그러나 천 공자와 아들놈 문제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백가장주는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무난히 해결됐을 일입니다. 그런데도 천 공자는 아들놈을 찾아가 모욕을 주고 위해를 가했습니다.”
정당성은 천신우에게 있지만 백가장주가 따지고 드는 것은 절차였다.
“그래서 절차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요구하는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아들놈이 수모를 갚을 기회를 달라고 요청 드리는 겁니다.”
개인 간의 은원까지 무림맹의 규율로 다스리진 않는다.
백동철이 천신우에게 팔을 잘린 것은 사실이니, 개인적으로야 얼마든지 갚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 소린가.
“지금 소가주는 투옥 중인 데다 한쪽 팔을 잃었는데 괜찮겠소?”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아들놈에게 의형이 있습니다.”
백가장주가 직접 나서면 문파 간의 일이 된다. 백가장주는 백가장을 대표하기에.
하지만 의형제가 나서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백동철의 의형이 상당히 유명한 고수란 사실이다.
용천세도 그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소가주의 의형이라면 참월도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의형제가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당장 천 공자를 찾아가겠다는 걸, 간신히 말리고 오는 길입니다.”
사실 참월도와 백동철의 우애는 그리 깊지 않았다.
예전에 참월도의 아버지가 백가장에 빈객으로 머물렀던 인연으로, 백동철과 의형제를 맺었던 것뿐.
그런 참월도가 만사 제쳐놓고 달려온 것은, 백가장주가 후한 보상을 약속했기 때문.
내막을 들여다보면 백가장에서 참월도에게 청부를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참월도라…….”
용천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참월도는 지금껏 천신우가 쓰러뜨린 고수들보다 분명 강한 고수다.
황보세가 최고수인 황보세민조차도 참월도의 명성엔 미치지 못했다.
‘하긴 황보세가는 절대적인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세력은 아니긴 하지.’
무림 전체를 놓고 보면 오대세가보다 강한 세력은 얼마든지 있다.
오대세가들은 힘을 합쳐 제16영역을 다스린다.
그보다 거대한 영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리는 세력들과의 격차가 엄청날 수밖에.
‘어쨌든 위협적인 상대인 것만은 분명한데.’
용천세의 시선이 천신우를 향했다.
진지한 얼굴. 흔들림 없는 눈빛.
‘상대가 참월도라도 피하지 않겠다는 거군.’
사실 용천세조차 천신우가 질 거 같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하기까지 하다.
원래의 실력에 승천단까지 복용한 천신우의 폭발력은 어느 정도일지.
“확실히 개인적인 분쟁까지 무림맹에서 통제할 수는 없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백가장주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수호단주 입장에서도 굳이 나설 필요가 없어졌기에 얼굴이 밝았다.
용천세가 천신우를 돌아봤다.
“들었다시피 백가장 소가주와의 은원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싶네만. 천 공자 생각은 어떤가?”
“그전에 백가장주님께 몇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천신우가 무덤덤한 얼굴로 백가장주를 쳐다봤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뿐.
파고들면 백동철보다 더한 작자가 바로 백가장주다.
“이번에 소가주의 의형과 싸우면 끝입니까? 아니면 뒤에 또 누가 있는 겁니까?”
백가장주가 헛웃음을 흘렸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물론 이번이 마지막이네. 나는 개인적인 은원을 문파 간의 분쟁으로 끌고 갈 만큼 분별력 없는 사람은 아니라네.”
“그렇군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장주님께서 생각하시는 이번 은원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요?”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백가장주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이번 싸움이 비무가 될 수도, 생사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나. 다만 아들놈은 팔을 잃었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내고 싶지 않겠나.”
“소가주는 두 번이나 부하들을 시켜 제 목숨을 노렸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저를 죽이려 했고요. 그럼에도 제가 팔 하나로 참은 건, 여기 부지부장님께서 중재하셨기 때문입니다.”
“말하고 싶은 게 뭔가?”
“다 끝난 일을 이렇게 끄집어내신 이상, 저도 긴말 하지 않겠습니다.”
천신우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번 싸움, 일단 시작하면 저와 소가주 둘 중 누구 하나는 죽어야 끝납니다.”
지켜보던 용천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주 섬뜩한 말을 하는군. 팔 하나로 끝냈기에, 이렇게 서로 점잖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네. 만일 그때 천 공자가 소가주의 목을 날렸다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야.”
“지당한 말씀이지만 보시다시피 이미 대화로 풀 상황이 아닙니다.”
천신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백가장주는 더 거칠게 밀어붙일 것임을 알기에.
“난감하군.”
당사자인 천신우와 백가장주 모두가 원한다는데, 용천세가 제지할 수도 없는 노릇.
“일단 당사자끼리 합의를 보게. 나와 여기 수호단주가 공증을 서주겠네.”
백가장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천 공자. 일시는 언제가 좋겠나.”
“지금 당장 가능합니까?”
천신우의 저돌적인 태도에 백가장주뿐만 아니라 수호단주도 내심 긴장할 정도였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설마 참월도의 명성을 들어보지 못한 것인가?’
물론 천신우는 참월도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참월도의 아버지는 선한 사람이다. 백가장주의 본색을 알게 되자 바로 인연을 끊었을 정도로. 하지만 참월도는 달라.’
백가장주와 마찬가지로 밝혀지지만 않았을 뿐. 이미 몇 번의 추악한 악행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뉘우치기는커녕 끔찍한 범죄를 계속해서 저지르다가, 결국 무림맹 고수들에게 쫓겨 죽게 되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참월도의 아버지는 피해자들에게 속죄하기 위해 여생을 바친다. 그러다 마교와의 전쟁에서 산화하는 것이 앞으로 예정된 미래.
‘하지만 내가 오늘 참월도를 죽인다면 미래는 바뀔 것이다.’
승천단의 효과를 백분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천신우가 용천세를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비무하는 자리에 백가장 소가주를 불러주실 수 있습니까?”
용천세의 눈빛이 한층 심각해졌다.
천신우는 참월도와의 생사결에서 승리하면 백동철까지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정녕 그렇게까지 해야겠는가?”
“물론입니다.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 제가 죽더라도 천씨세가에서 아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겠습니다.”
천신우의 강경한 태도에 질린 용천세는 백가장주를 돌아봤다.
천신우가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곤 예상 못했는지, 백가장주의 표정이 심각했다.
“또한.”
천신우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백가장주는 이를 악물었다.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이려는 걸까.
“판을 더 키웠으면 합니다.”
용천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판을 키우다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생사결을 벌인다면, 나중에라도 다른 말이 나오는 일은 없겠지요.”
천신우는 백가장주를 돌아보며 쐐기를 박았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끝까지 가겠다고.”
백가장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