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학사환생 045화
술상에 얼굴이 처박힌 채로 허우적거리는 백가장 조장.
그걸 보는 백동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냐? 잡아 오라는 놈들은 어쩌고!”
“그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백동철은 흠칫 놀랐다.
“……!”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입구에 검은 장포를 걸친 청년이 서 있었다.
물론 백동철은 상대가 천신우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최근 엄청난 유명세를 얻은 천신우지만 아직 다른 영역에까지 알려지진 않았기에.
백동철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네놈은?”
천신우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웃어?”
발끈한 백동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하냐! 당장 저놈을 무릎 꿇리지 않고!”
그러나 입구를 지키던 호위무인들은 대답이 없었다.
“이것들이?”
백동철이 이를 바드득 갈던 그 순간, 호위무인들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풀썩!
백동철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들이 이미 천신우에게 제압당했다는 사실을.
‘대체 어느 틈에…….’
기척 없이 나타난 것도 모자라 호위무인들까지 제압하다니?
백동철은 어느새 청산파 무인의 얼굴을 바닥에 처박으려던 것도 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벌 떨고 있는 조장.
바닥에 쓰러진 호위무인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천신우.
두근두근.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무시하며 백동철이 물었다.
“너 뭐냐.”
여전히 천신우는 성큼성큼 다가올 뿐이다.
“뭐하는 놈이냐고!”
그러는 동안 천신우와 백동철의 거리는 서너 걸음까지 좁혀졌다.
백동철의 눈썹이 휘어졌다.
“개자식이 감히 나를 무시해? 오냐! 손발이 다 잘리고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기어이 검을 뽑아 든 백동철을 대신해 호위무인들이 나섰다.
“소가주님.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들이 살벌한 기세를 내보내며 천신우에게 경고했다.
“멈춰라.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천신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백가장 미친개.”
“……!”
호위무인들이 움찔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이 뒤집힌 백동철이다.
“이런 개새끼가!”
뒤에서 자신을 미친개라 부르는 놈들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미친개라 부른 놈은 천신우가 처음이었다.
“오냐!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면 내가 직접 죽여주마!”
호위무인들을 밀치며 달려드는 백동철을 천신우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뭘 모르는군. 뒤에 숨어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지.”
촤아앙!
천신우의 칼집에서 검이 뽑혀져 나왔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깔끔하고 경쾌한 발검이었다.
다음 순간!
천신우의 검과 백동철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까앙!
“……!”
백동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나는 그를 호위무인들이 황급히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저리 비켜!”
자존심에 호위무인들을 밀쳐냈지만 백동철은 술이 확 깬 상태였다.
앞서 입구를 지키던 호위무인들이 속절없이 당한 게, 이제야 이해가 됐다.
천신우의 실력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백동철은 오기를 부렸다.
이렇게 물러나서야 백가장 소가주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죽어!”
천신우의 머리를 향해 내리친 검이 두 동강 났다.
스각!
천신우의 자운검은 백동철의 검을 잘라낸 걸로도 모자라, 가슴에까지 상처를 남겼다.
“커억!”
피를 뿌리며 뒤로 물러나는 백동철의 눈은 경악으로 가득했다.
방금 일격으로 자존심뿐만 아니라 싸우려는 의지마저도 잃어버린 그였다.
“막아! 놈이 소가주님께 접근 못 하게 막아야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호위무인들이 일제히 천신우에게 달려들었다.
파파파팟!
순식간에 호위무인들이 천신우를 빙 둘러쌌다.
그들은 백가장에서 최정예로 꼽히는 고수들이었다.
백동철이 온갖 난동을 부리고도 지금까지 무사했던 건, 그들 덕이 컸다.
“죽여! 아주 죽여 버려!”
가슴의 상처를 움켜쥐며 백동철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싹둑!
먼저 달려든 호위무인의 팔이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이노오옴!”
사방에서 매섭게 공격이 몰아쳤다.
하지만 천신우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피할 필요가 없었다.
서걱! 서걱!
천신우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적들의 사지가 잘려 나가고 있었으니까.
쏴아앙! 스가각!
천신우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베었다.
달려드는 호위무인들의 검과 사지는 물론.
그들의 자긍심과 의지마저도.
끝까지 버티던 호위책임자의 팔이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이미 다른 호위무인들은 모조리 팔이 잘린 후였다.
호위책임자가 피가 솟구치는 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소가주님! 피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충격을 받은 백동철은 제자리에서 꼼짝 못했다.
지금까지 그가 무슨 짓을 벌여도 다 수습해 줬던 호위무인들이다. 누구보다 믿음직했던 그들이 사지가 잘린 채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가, 감히 백가장에 맞서다니.”
이제 백동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배경을 들먹이는 것뿐.
하지만 그마저도 천신우에겐 먹히지 않았다.
“백가장? 그게 뭐? 백가장 소가주는 산적들 시켜서 사람 죽이고 금품을 빼앗아도 용서가 되나?”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백동철은 애써 부인했지만 천신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좋아. 어디 손발이 다 잘리고 나서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고.”
백동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천신우였다.
“오, 오지 마!”
백동철이 바들바들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믿기지가 않았다.
호위무인들의 무력도, 백가장이란 이름도 통하지 않는 상대라니.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남악련의 영역에서 말이다.
턱.
뒷걸음질 치던 백동철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말 그대로 막다른 길목에 놓인 그에게 천신우가 다가섰다.
뚜벅.
백동철의 얼굴에서 아예 핏기가 사라졌다.
“…….”
지켜보던 백가장과 청산파 무인들은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아무리 망나니라도 백동철은 백가장 소문주다.
그를 죽인다면 백가장과의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천신우는 주저 없이 자운검을 들어 올렸다.
그 짧은 순간에 백동철은 마음속으로 수백 번이나 갈등했다.
목숨을 구걸할지, 자존심을 세울지.
원래라면 불필요한 고민이었다.
감히 백가장의 소가주에게 위해를 끼치려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천신우는 다르다.
‘이놈은 진심이다.’
자존심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목숨부터 건지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조, 좋아. 원하는 걸 말해라. 다 들어주지.”
백동철로선 최대한 자존심을 굽힌 것이었지만, 천신우는 코웃음만 쳤다.
‘약속이라곤 지켜본 적도 없는 놈이 어디서.’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약속을 지키는 자. 지키지 않는 자.
백동철은 언제나 후자였다.
그렇기에 거침없이 자운검을 내리치는 천신우였다.
백동철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스걱!
바람이 코앞을 스쳐 간다고 느끼는 찰나, 백동철은 왼팔이 뜨끈해짐을 느꼈다.
뒤이어.
툭.
뭔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소가주님!”
백가장 무인들이 토해낸 신음이 백동철의 귀에서 윙윙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힘겹게 눈을 뜨자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팔이 보였다.
잘려 나간 절단면이 너무도 깔끔하다.
그러나 절단된 자신의 팔을 보고 감탄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마, 말도 안 돼…….”
현실부정.
이어진 것은 찢어지는 절규였다.
“으아아아!”
그런 백동철을 바라보는 천신우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팽우경은 적어도 자의로 악행을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네놈은 달라.’
백동철이 저지른 악행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놈인 것이다.
살려둘 가치가 없는 존재.
천신우는 백동철을 향해 핏물이 흘러내리는 자운검을 겨눴다.
‘마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힘을 키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마교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위험요소를 없앨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백동철은 그 출발점에 불과했다.
‘고작 백동철 따위에 망설이면 마교의 다른 추종자들, 특히 칠객을 상대할 때는 더 주저할 수밖에 없다.’
칠객은 백동철보다 훨씬 강력한 무공과 세력을 갖고 있으니까.
“역시 팔 하나론 부족한 것 같군.”
천신우의 몸에서 노골적인 살기가 피어올랐다.
죽음을 직감한 백동철은 덜덜 떨었다. 이빨이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낸다.
무인으로서의 자긍심도, 백가장 소가주로서의 자존심도 완전히 잃어버린 그였다.
솨아악!
천신우의 검이 백동철의 얼굴을 그어버리려던 바로 그때!
천신우 등 뒤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엄청난 존재감에 천신우가 몸을 돌렸다.
자운검은 백동철 바로 코앞에서 멈춰선 상태.
다리에 힘이 풀린 백동철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본인은 무림맹 제13지부 부지부장 용천세라네. 그대는 누군가?”
천신우는 깜짝 놀랐다.
‘용천세!’
사실 부지부장 정도는 무림맹에서 거물이라 보긴 힘들다.
그럼에도 천신우가 용천세의 이름을 듣고 놀란 이유가 있었다.
‘무림맹 연쇄살인사건의 희생자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얼마 후 무림맹을 뒤흔들 연쇄살인사건.
용천세는 그 첫 번째 희생자였다.
“묻고 있지 않나. 그대는 누군가? 백가장과 무슨 악연이 있기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지?”
용천세가 얼마나 공명정대한 인물인지 아는 천신우였다.
용천세 상대로는 굳이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천씨세가의 천신우입니다.”
“천신우라면 설마!”
“문파대전에서 대활약했다더니 과연……!”
호들갑 떨던 청산파 무인들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작정 감탄하기엔 장소와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물론 용천세는 백가장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가. 요즘 무림에 소문이 자자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용천세가 백동철과 백가장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팔이 잘린 채로 신음하는 그들에게서 평소의 패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누군지는 알았고. 이제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듣고 싶군.”
“백가장은 산적들을 사주해 칠악을 넘는 여행자들을 습격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산적을 응징했다는 이유로 무인들을 보내 저를 죽이려 했지요. 이만하면 소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모함입니다!”
변명하려던 백동철이 천신우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용천세가 헛웃음을 지었다.
“소가주. 자네는 내가 바보로 보이나?”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같잖은 변명은 집어치우게.”
백동철은 뭐라 대꾸하려 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이렇게 증거가 존재하거늘.”
용천세가 부하를 시켜 가져온 것은 진술서였다.
백동철이 산적들을 사주했다는 내용이 담긴.
“물론 이것 말고 확실한 물증도 있네. 자네가 산적들에게 상납 받은 금품들이 바로 그것이지.”
백동철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 어떻게…….”
“역시 자네는 나와 무림맹을 바보로 생각하고 있던 게 분명하군.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 시간이 걸렸을 뿐. 설마 내가 지금까지 눈감아주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백동철이 다시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보다시피 무림맹에선 오래전부터 백가장 소가주의 범죄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네. 자네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여기서 더 나간다면 정치적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을 터.”
천신우는 용천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떻겠나. 백가장 소가주에 대한 처벌은 내가 책임지고 약속하지. 또한 오늘 일에 대해 백가장이 문제 삼지 않도록 처리해 주겠네.”
천신우가 용천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천세 역시 이채로운 눈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과연 소문대로 젊은 나이에 엄청난 무공을 지녔군. 그렇다면 오늘 일도 계산을 끝내고 벌인 것일 터.’
용천세의 예상이 맞았다.
천신우는 백동철을 죽이고 어떻게 수습할지 이미 계산을 끝낸 후였다. 심지어 이번 일을 또 다른 기회로 만들려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단지 용천세의 등장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뿐.
“보증해 주실 수 있습니까? 지금 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물론이네. 원한다면 문서로도 만들어주지.”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다만 그전에 계산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천신우가 뒤돌아서며 백동철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콰아앙!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백동철이 벽에 처박혔다.
백가장과 청산파 무인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천신우가 손을 탁탁 털었다.
“아쉽지만 이걸로 마무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