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학사환생 044화
방금 전까지 바위벽이 있던 곳은 돌무덤처럼 변해버렸다.
살아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사람들은 입조차 벙긋하지 못했다.
“저기…….”
천신우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검을 들고 끝까지 산적과 맞서던 청년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들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천신우는 감사인사를 받아주며 바닥에 쓰러진 무인의 상태를 살폈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당분간은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겠군.’
청년도 그걸 알기에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죄송하지만 은인께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청년의 선한 눈동자가 천신우를 향했다.
“칠악을 넘는 동안 동행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사례는 하겠습니다.”
천신우는 대답을 고민하지 않았다.
이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산적 패거리들에게 보복당할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게 합시다.”
천신우의 대답에 청년뿐만 아니라 모두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 * *
칠악을 넘는 동안 산적들은 계속해서 습격해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천신우가 나서서 해결했다.
덕분에 안전하게 산을 넘은 사람들이다.
갈림길에서 그들이 진심을 다해 감사를 표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사례를 건네는 사람도 많았지만 천신우는 정중히 사양했다.
함께 산을 넘으면서 그들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지 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떠나간 자리.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사인문의 아진이라 합니다. 혹시라도 사인문을 찾을 일이 있으시거든 제가 모시겠습니다.”
의식을 되찾은 남자도 감격한 얼굴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은혜는 잊지 않겠소.”
그들은 굳이 천신우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무인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다.
“그럼.”
천신우는 그들과 헤어져 적당한 객잔에 짐을 풀었다.
식사를 마치고 무공수련까지 끝낸 후에 시장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딱히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기보다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기에.
초저녁.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던 천신우의 코에 알싸한 냄새가 닿았다.
“의방인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는데 한 무리의 무인들이 몰려왔다.
“길 막지 말고 저리 꺼져!”
천신우에게 폭언을 내뱉은 그들은 의방에 내걸린 현판을 확인했다.
“여기가 확실해?”
“그렇습니다. 부상을 입은 채로 칠악을 넘어왔답니다.”
“그렇단 말이지.”
조장으로 보이는 무인이 턱짓하자 부하들은 당장 의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천신우는 뒤로 물러나서 그들의 복장을 확인했다.
‘남악련이군.’
무림 제13영역을 지배하는 세력 남악련.
그들은 소속문파와 상관없이 모두 동일한 무복을 착용한다.
‘다만 문파마다 무복 왼쪽 가슴에 다는 표식이 다르지. 이놈들은 백가장 소속이군.’
백가장이라는 배경. 그리고 그들이 방금 나눈 대화.
짚이는 구석이 있는 천신우였다.
‘아무래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천신우는 남악련 무인들을 따라 의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의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아이고! 왜들 이러십니까? 저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나이 지긋한 의원이 하소연했지만 백가장 무인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오늘 부상당한 무인들이 여기 왔다며?”
“그, 그렇습니다만……?”
“그놈들 받아주고 치료해 준 게 죄야!”
백가장 무인이 의원을 걷어차려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환자들이 묵는 별채 문이 열리며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천신우에게 도움을 받은 사인문의 아진이었다.
“애먼 사람 괴롭히지 말고 대화로 풉시다. 어째서 우릴 찾는 거요?”
“몰라서 묻는 거냐? 네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우리는 산을 넘었을 뿐이오. 단지 도중에 산적을 만나…….”
거기까지 말하던 아진이 멈칫했다.
“그럼 산적들 뒤를 봐준다는 소문이…….”
“헛소리하지 말거라. 네놈들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죗값을 치르는 것이니.”
“무고한 양민이라.”
전혀 뜻밖의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가장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저건 뭐하는 새끼야?”
천신우는 대답 대신 사인문의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모른 척하고 가라고. 이놈들을 건드렸다간 아무리 당신이라도 무사하지 못한다고.
천신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는 못하지.”
“뭐라는 거야!”
성질 급한 백가장 무인이 천신우에게 다가왔다.
칼집으로 퇴로를 막는 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셋을 세는 동안 네놈 출신과 이름. 그리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지 말해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
서슬 퍼런 협박에도 천신우는 오히려 반문했다.
“누가 너희에게 명령을 내렸지? 백동철인가?”
“……뭐라고?”
천신우는 무인들의 표정이 바뀐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남악련의 실력자 중에 산적들 뒤를 봐준다면 1순위는 당연히 백동철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예상대로였다.
“잠깐.”
백가장 조장이 손을 들어 부하를 제지했다.
“소문주님과 아는 사인가?”
“아주 잘 알지.”
천신우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남악련 소속문파 백가장의 후계자 백동철은 어려서부터 악명을 떨쳤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남악련에서 그를 보호해 줬기 때문.
그러나 백동철은 무림맹에 파견된 이후에도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무림맹에서 일하는 시비를 겁탈하고 목을 졸라 죽였지.’
남악련의 영역에서라면 문제 되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무림맹의 규율은 엄했다.
백가장주가 직접 탄원서를 보냈음에도 백동철은 엄벌을 면치 못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정신 못 차리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쓰레기를 내가 잊을 리가.’
회상을 마친 천신우는 남악련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설마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백가장의 소문주가 누군지.”
“친분도 없는 주제에 소문주님의 존함을 입에 올렸다?”
존함이란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말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다.
“됐고. 백가장이 저들을 노리는 이유가 뭐지? 무고한 양민이란 게 설마 칠악의 산적들을 말하는 건가?”
천신우는 상대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놈들이라면 내가 죽였다. 그러니 용건이 있다면 내게 말하도록.”
“그렇단 말이지.”
백가장 조장이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우릴 원망하진 마라. 네놈 말대로 우린 소문주님 지시를 따르는 것뿐이니까.”
어느새 백가장 무인들이 천신우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나 천신우의 표정에서 긴장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너희야말로 나를 원망하지 말도록. 그따위 지시를 네놈들에게 내린 건 내가 아니라 너희 소문주니까.”
“곧 죽을 놈이 허세는!”
천신우에게 검을 내리치려던 무인 둘이 휘청거렸다.
천신우의 주먹에 턱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것이다.
“……!”
백가장 조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보통 놈이 아니다! 한꺼번에 쳐라!”
무의미한 명령이었다.
천신우가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백가장 무인들은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으니까.
털썩!
마침내 마지막 부하까지 쓰러지자 조장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천신우를 노려보았다.
“이, 이럴 수가…….”
천신우가 성큼 다가오자 그는 발악하듯 외쳤다.
“여긴 남악련의 영역이다! 이대로 끝날 거라 생각하느냐!”
“잘됐네. 나도 이대로 끝낼 생각 없거든.”
덥석!
백가장 조장의 멱살을 틀어쥔 천신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 *
“젠장! 늦잖아!”
백동철은 신경질적으로 술상을 걷어찼다.
그 바람에 옆에서 시중들던 여인의 옷이 엉망진창이 됐지만,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백동철은 남악련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백가장의 소가주.
그의 비위를 거스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동철도 그걸 알기에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아직이냐고! 술맛 떨어지게!”
백가장에서 나온 호위무인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많이 안 기다린다.”
“…….”
긴장한 나머지 숨을 졸이며 물러나는 호위무인.
평소라면 그걸 보고 기분이 풀렸을 백동철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 칠악의 산적들이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
약탈한 금품뿐만 아니라 여자까지 백동철에게 상납해 온 산적들이었다.
당연히 백동철은 격노해 당장 그들을 죽인 자를 잡아 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한 의방에서 범인을 찾아냈다는 보고가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것이다.
“빌어먹을!”
또다시 분을 못 이긴 백동철이 벽을 걷어찼다.
쾅!
벽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못마땅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마땅한 항의.
그러나 백동철은 그걸 받아들일 만큼 도량이 넓은 인간이 아니었다.
“야,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라.”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달려가는 백동철.
그 뒤로 그의 술친구들이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백동철은 지랄 맞은 성격을 맞춰주기란 그들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견뎌내면 이런 구경거리를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콰앙!
방문을 걷어차며 들이닥친 백동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방금 지껄인 새끼 누구야!”
옆방에서 술을 마시던 무인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군데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백가장의 백동철이다.”
“……!”
무인들의 눈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들도 만만한 문파 출신은 아니다.
그래서 백동철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고도 주눅 들지 않았던 것인데, 설마 백가장의 미친개일 줄이야.
“험험. 백가장의 소가주셨구려.”
“닥쳐! 지금 내가 묻잖아! 지껄인 놈이 누구냐고!”
좌중의 시선이 벽에 앉은 무인에게로 향했다.
백동철은 대뜸 그에게 다가갔다.
“너냐?”
“…….”
“방금 지껄인 게 너냐고!”
“그, 그렇소. 그러나 나쁜 뜻은 없었소. 나는 그저…….”
철썩!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인 백동철이 거만하게 무인을 내려 보았다.
“내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는데 뭔 말이 많아!”
철썩! 철썩!
백동철에게 연거푸 뺨을 얻어맞은 무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한 거 아니요?”
“너무해? 네놈이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이제 와서 너무하다?”
“먼저 시비를 걸다니. 너무 억지 아니요?”
“오호. 이제 누명까지 씌우겠다는 거지?”
백동철이 가래침을 퉤하고 뱉었다.
반사적으로 피한 무인이 눈을 부릅떴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백동철의 호위무인들이 그에게 검을 겨눴다.
보통 호위무인들이 아니었다. 백가장에서도 최정예로 손꼽히는 그들이었다.
“…….”
홧김에 욕설을 내뱉었던 무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런 무인을 내려다보는 백동철의 표정엔 승리자의 미소가 가득했다.
“웬만하면 적당히 넘어가려 했더니만 화를 자초하는군. 야, 너 어느 문파야.”
“…….”
“씨발! 귀 먹었어? 어디 문파냐고 묻잖아!”
“……청산파요.”
“청산파? 아, 그 유가장이랑 붙어 있는?”
그들이 백동철을 바로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청산파는 남악련 소속이 아니었기에.
“촌놈들이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어?”
백동철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들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지만 차마 뭐라 하지 못했다.
청산파도 만만한 문파는 아니지만, 백가장엔 비할 바가 못 된다.
게다가 상대는 백가장의 소가주.
신분 면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치욕을 견뎌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하지만 백동철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저거라도 핥아먹지그래?”
백동철이 가리킨 것은 방금 그가 바닥에 뱉은 가래침이었다.
“…….”
청산파 무인들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백가장의 미친개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다. 하지만 설마 그게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진실일 줄이야.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는 안하무인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무리 무림맹 고위인사라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사람을 대하진 않건만.
“안 먹어? 내가 먹여주기까지 해야겠냐?”
백동철이 청산파 무인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처박으려는 순간이었다.
“소가주님! 피하십시오!”
비명과 함께 날아온 백가장 조장이 술상 한복판에 처박혔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