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학사환생 038화
“풍뢰권?”
가주 천무흔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선뜻 풍뢰권이란 이름은 떠오르질 않았다.
유명인사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도 한데.
“솔직히 처음 듣는 이름이구나. 하지만 네가 추천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최대한 지원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최고의 조건을 제시해라.”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풍뢰권은 재물을 중시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아마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더라도 그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풍뢰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천신우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어떤 인물인지 점점 궁금해지는구나.”
관심을 보이는 천무흔에게 천신우가 자신감을 드러냈다.
“조만간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기대하마.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말고.”
“걱정 마십시오. 좋은 소식 갖고 돌아가겠습니다.”
갈림길에서 작별인사를 나누는 천씨 부자.
그 모습을 천씨세가 무인들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떤 조직이든 내부결속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천씨세가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었다.
* * *
두두두!
풍뢰권을 만나러 가는 마차 안에서 천신우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풍뢰권이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제자 권왕의 활동시기와 겹친다.
그전까진 풍뢰권의 이름을 아는 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천신우는 알고 있다.
‘풍뢰권은 이미 이 시점에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다.’
젊어서부터 한눈팔지 않고 무공을 수련해 온 고수.
스스로 재능이 있음은 물론, 남을 가르치는 능력까지 갖췄다.
더불어 풍뢰권이 내세우지 않아서 그렇지, 인맥 또한 굉장했다.
‘풍뢰권이 말년에 제자로 거둘 재목을 찾아다닌 것도, 사실 지인들과의 자존심 대결 때문이었지.’
비공개적인 자리에서 무림의 많은 고수들과 비무하며 친분을 다진 풍뢰권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임이 바로.
‘무명.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던가.’
물론 명칭과 달리, 무명에 소속된 고수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만일 풍뢰권 대신, 그들의 이름을 하나라도 댔더라면 천무흔의 반응도 달라졌을 것이다.
‘풍뢰권을 초빙한다면 무명에 소속된 거물들과도 친분을 쌓을 기회가 생긴다. 그러니 이번 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각오를 다지는 천신우에게 부하가 보고했다.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천신우 앞에 서 있는 것은 담장에 둘러싸인 건물이었다.
가장 먼저 정문에 내걸린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태풍무관이라.”
들어본 적 없는 곳이다.
은퇴한 무인이 소일거리 삼아 아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평범한 무관들 가운데 하나겠지.
‘그러고 보면 풍뢰권은 무림에 있는 무관들을 샅샅이 뒤졌었다지.’
풍뢰권에게 이미 이름이 알려진 인재는 의미가 없다.
‘직접 발굴한 원석을 다듬고 싶을 테니까.’
재물과 권력에 관심이 없는 풍뢰권의 유일한 욕망.
그걸 채워준다면 풍뢰권 영입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이곳에서 보름 전부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부하의 보고에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만나보지.”
* * *
조춘이라는 소도시에 자리 잡은 태풍무관 내부.
연무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마당에서 아이들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얍!”
조그만 주먹이 힘없이 허공을 가른다.
마루에 앉아 그걸 지켜보던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쯧쯧. 이번에도 허탕이군.”
지인의 소개로 찾아온 이곳 역시 눈에 차는 아이가 없었다.
물론 한둘은 그의 지도를 받으면 어지간한 문파의 후기지수들 못지않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갖곤 지인들 앞에서 면이 서질 않는다.
“젠장. 황가 그놈은 어디서 그런 재목을 찾아낸 건지.”
얼마 전에 제자를 거둔 지인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찌나 우쭐대던지 머리를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하여간 나이를 뒷구멍으로 먹어가지고 말이야.”
늙으면 오히려 애처럼 변한다더니.
물론 노인은 알지 못했다. 본인 역시 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노인이 투덜거리며 옷을 털고 일어나던 그때였다.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풍뢰권 어르신 되십니까?”
“그러는 네놈은?”
풍뢰권의 신경질적인 태도에도 천신우는 예를 다했다.
“천씨세가 대공자 천신우라고 합니다.”
“천씨세가? 오호라. 나와 만나고 싶다던 그놈이구나.”
풍뢰권은 천신우를 스윽 훑어보았다.
단련된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차분한 기도.
절로 입맛이 다셔진다.
‘이런 놈이 제자라면 황가 그놈의 콧대를 눌러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이미 일정 수준에 오른 천신우를 제자로 들일 수는 없는 법.
풍뢰권은 툴툴거리며 물었다.
“용건이 뭐냐.”
격식이나 절차를 따지지 않는 풍뢰권다웠다.
보통은 어째서 그를 알고 있는지부터 물었을 텐데.
천신우도 풍뢰권의 성격에 발맞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르신께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풍뢰권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천씨세가가 아니라 어떤 문파라도 나를 만족시킬 제안을 하진 못할 것이야.”
허언이 아니었다. 풍뢰권은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천신우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과연 그럴까요? 어르신께서 이름이 없는 친우들과의 모임에서 하신 내기에 관한 제안입니다만.”
귀찮아하던 풍뢰권의 표정이 돌변했다.
“네놈같이 새파란 애송이에게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구나.”
“제가 어떻게 무명에 대해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풍뢰권이 굳이 파고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던진 물음이었다.
“일없다. 보나 마나 입 싼 노인네 하나가 나불거렸겠지. 그보다.”
예상대로 풍뢰권은 제안 그 자체에 관심을 보였다.
“내기와 관련된 제안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제겐 보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보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풍뢰권은 천신우가 하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정말이냐? 만일 나를 기만하는 것이라면…….”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건 내가 보고 판단할 것이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풍뢰권은 벌써부터 몸이 단 듯했다.
“먼저 제안을 끝까지 들어주시겠습니까?”
“오냐.”
성격이 유별나긴 해도 풍뢰권은 알려진 대로 악인이 아니었다.
성정이 악했다면 천신우는 처음부터 그를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풍뢰권이 마룻바닥을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여기 앉아라.”
그로선 최고의 호의를 베푼 셈이었다.
“어르신. 차라도 가져다드릴까요?”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태풍무관 관주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사실 그는 풍뢰권이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는 몰랐다. 다만 풍뢰권을 소개시켜준 사람의 지위로 보건대 평범한 인물은 아닐 거라 짐작할 뿐이다.
“됐으니까 가서 일 봐라.”
“알겠습니다요.”
멀어져가는 관주를 보며 풍뢰권이 혀를 찼다.
“사람만 좋아가지고.”
무인으로 실패해 무관에서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처지.
당연히 풍뢰권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래. 제안이나 퍼뜩 지껄여봐라.”
“천씨세가의 빈객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빈객?”
싫은 티가 팍팍 났다. 한곳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풍뢰권이기에.
“그렇습니다. 천씨세가에 머물면서 무인들을 봐주시면 됩니다.”
“빈객에 교관 노릇까지?”
풍뢰권이 호탕하게 웃었다.
“푸하하하! 욕심하고는. 오냐! 들어주마. 대신 이 거래는 네가 가진 원석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빛나고 커다랄 경우에만 유효하다. 자신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당장 보러 가자.”
과연 풍뢰권은 시원시원했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 *
마차를 달려 천신우가 풍뢰권과 함께 도착한 곳은 당연하게도 권왕의 집이었다.
권왕은 위령제에 참석한 이후 천씨세가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천신우조차 권왕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쾅쾅!
“누구요?”
문을 두드리자 전과 달리 노부인 대신 권왕이 문을 열었다.
그러다 천신우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린다.
“대공자? 여긴 어쩐 일이오?”
물론 오늘만큼은 권왕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천신우가 풍뢰권을 돌아봤다.
“어떠십니까?”
풍뢰권은 대답 대신 대뜸 몸을 날렸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풍뢰권의 주먹이 권왕의 배에 꽂혔다.
퍼억!
복부를 가격당한 권왕이 허공을 날아가 마당에 쌓아둔 장작더미에 처박혔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도 의식이 날아가기에 충분한 위력.
그러나 다음 순간 장작더미가 들썩이더니 권왕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런 씨발!”
욕설로 끝나지 않았다.
권왕은 엄청난 기세로 풍뢰권에게 날아들었다.
물론 결과는 같았다.
콰앙!
이번에도 장작더미에 처박힌 권왕.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재차 달려든다.
풍뢰권이 껄껄 웃었다.
“고놈 아주 싱싱하구나.”
퍽퍽퍽!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마침내 기진맥진한 권왕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강렬하게 풍뢰권을 노려보고 있었다.
풍뢰권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 공자.”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천신우를 부르는 호칭까지 바뀔 정도였다.
“말씀하시지요.”
“저놈 이름이 뭔가?”
권왕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
“운경이라고 합니다.”
“운경이라…….”
풍뢰권은 권왕의 본명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만큼 권왕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아주 마음에 들어. 천 공자의 제안 말이야. 기꺼이 받아들이겠네.”
그제야 천신우와 풍뢰권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갔음을 깨달은 권왕이다.
“이런 개자식! 감히 나를 팔아넘겨?”
이번엔 천신우에게 달려드는 권왕이었으나 당연히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권왕은 아직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빌어먹을!”
아예 바닥에 철퍼덕 누워 숨을 헐떡이는 권왕을 보며, 풍뢰권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운경이라고 했느냐?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천 공자를 혼쭐내주고 싶겠지.”
권왕이 이를 바득 갈았다.
“젠장! 대공자! 저 노인장은 누군데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행패를 부리게 하는 거요?”
천신우가 피식 웃었다.
“아까는 개자식이라더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요! 아버지 때문이라면 이제 됐소. 위령제도 끝났고…….”
천신우가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위령제 따위로 아버지의 넋을 위로할 수 있다고?”
권왕이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떴다.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고 싶은 거요! 위령제를 지내자고 한 건 대공자 당신이잖소!”
“그랬지. 그게 내가 감찰단주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니까. 하지만 넌 달라.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하지.”
“…….”
“운경. 잘 들어.”
천신우는 전에 없이 강렬한 시선으로 권왕을 바라보았다.
“네겐 재능이 있다. 네가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있다면, 그래서 무림에 명성을 드높이게 된다면. 누구나 네 아버지를 기억할 것이다. 네가 같잖게 생각하던 위령제보다 그게 훨씬 아버지를 위한 길이 아닐까?”
전생에서 돈만 보면 혈안이 됐던 권왕이다. 오죽하면 돈만 밝힌다 하여 그를 전왕이라 부르는 이들까지 생겨났을까.
하지만 천신우는 얼마 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사실 그런 권왕의 이면엔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일화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충성하던 천씨세가로부터 누명을 쓰고 죽었기에. 권왕은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고 오직 돈만을 좇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제 와서 나더러 아버지를 죽인 천씨세가에게 개처럼 충성하라고?”
악에 받친 목소리로 울분을 토해내는 권왕을 바라보며, 천신우는 나직이 대꾸했다.
“충성할 필요 없어.”
“……뭐?”
권왕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풍뢰권조차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켜봐. 앞으로 천씨세가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아버지가 꿈꾸던, 그리고 네가 상상하던 것과 일치하는지. 결정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권왕이 코웃음을 쳤다.
“천씨세가에서 여전히 썩은 내가 진동한다면?”
“그럼 네가 직접 나를 죽이고 천씨세가를 멸문시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테니.”
권왕은 더는 비웃지 못했다.
천신우가 내뱉는 한 마디마다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분히 가라앉은 권왕의 눈빛을 보며 천신우는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았다.
“운경! 예를 올려라! 이분이 바로 오늘부터 네게 가르침을 주실 풍뢰권 어르신이시다.”
머뭇거림도 잠시.
마침내 권왕은 풍뢰권을 돌아보았다.
풍뢰권 역시 흡족한 얼굴로 권왕을 마주봤다.
전생에서 무림을 격동시킨 사제지간의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