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학사환생 037화
황보세가 가주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천신우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그러나 표정관리를 한다고 해서 속내를 완전히 감출 수 있는 건 아니다.
황보세가 가주는 웃고 있었지만 입술만큼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지?’
방금 전력을 다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 정도는 됐다.
실제로 중재 역할을 맡은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고수들도 긴장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천신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세를 억눌러버렸다.
천신우가 황보세가 가주보다 고수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
‘그럴 리가 없다.’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황보세가 가주에게 천무흔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황보 가주.”
“오랜만이외다.”
눈이 마주친 두 가주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기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천무흔이었다.
“자자. 다들 앉으시지요.”
남궁세가 외당주 남궁인이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아직 회담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신경전이 치열하다.
과연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게 될까.
남궁인은 그것이 궁금했다.
모두의 예상대로 먼저 포문을 연 쪽은 황보세가였다.
황보세가 가주는 자리에 앉자마자 강력하게 항의했다.
“천 가주.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소이다.”
강경한 태도에도 천무흔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세가 무인들의 죽음은 유감이오.”
“유감?”
황보세가 가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한 마디로 지금 상황을 무마하겠다는 거요?”
예전의 천무흔이라면 이쯤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천무흔은 달랐다.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황보세가 무인들이 왜 우리 영역에 통보도 없이 나타났는지. 그것부터 설명해야 하는 게 순서 아니오?”
간신히 화를 억누르던 황보세가 제검단주 황보성이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럼 지금 천 가주께서는 이번에 천씨세가에서 한 일이 정당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아우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무흔은 대답 대신 천신우를 돌아봤다.
황보성이 나섰다면 천신우도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대에 부응하듯 천신우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천씨세가의 영역을 허락 없이 침범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응징할 겁니다. 그게 누구든.”
천신우의 대답은 정론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건 천씨세가와 황보세가를 동일선상에 놓아야 성립되는 주장.
당연히 황보세가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감히……!”
분개한 황보성을 천신우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화내라고 두 분 가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자리는 아닐 텐데요.”
황보성보다 연륜에서 한참 뒤처짐에도 전혀 양보하지 않는 천신우.
남궁세가 외당주 남궁인이 서둘러 상황을 무마했다.
“자자. 이제 양쪽의 생각은 다들 아셨을 테니 협상을 진행하시지요.”
황보세가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감정싸움은 무의미하다.
“좋소. 우리 황보세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하지.”
황보세가의 요구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공식사과와 막대한 배상금. 거기에 더해 한수 지역 진출 철회.
제3자인 남궁인이 보기에도 황보세가가 내건 조건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황보세가 가주는 천무흔을 재촉했다.
“천 가주 생각은 어떠시오?”
천무흔은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소.”
“……뭣이?”
황보세가뿐만 아니라 남궁인도 깜짝 놀랐지만, 천무흔은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만 했다.
“설명까지 해야 하오?”
황보세가 가주가 으르렁거렸다.
“정말 이렇게 나올 거요?”
“설마. 아직 안 끝났소. 우리 천씨세가 제안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
“먼저 사과하시오. 천씨세가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한 것. 뒤에서 공작을 꾸민 것.”
황보세가 가주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러나 천무흔은 멈추지 않았다.
변한 것은 천신우만이 아님을 보여주듯 천무흔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천씨세가에 책임을 전가하려 한 것! 확실히 사과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지시오.”
“어이가 없군.”
황보세가 가주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천무흔을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천씨세가가 모든 조건을 받아들일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내가 거절하면 어쩔 생각이오?”
천무흔이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신뢰가 가득한 얼굴로.
“황보 가주에게 전해드려라. 우리 천가의 뜻을.”
천신우는 흔들림이 없는 눈으로 황보세가 가주를 응시했다.
“가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무림의 규율에 따라 문파대전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허!”
황보세가 가주의 입가가 비틀렸다.
“지금 문파대전이라고? 문파대전이 뭔지 알고나 입에 올리는 것인가?”
반면 천신우의 표정엔 미소가 가득했다.
“설마 모르고 말씀드렸겠습니까?”
문파대전의 기본규칙은 다음과 같다.
먼저 서로 합의에 따라 3명의 고수를 선발한다. 이때 3명의 고수 가운데, 빈객은 1명만 포함시킬 수 있다. 나머지 2명은 반드시 문파의 일원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선발된 3명의 고수는 순서를 정해, 상대편 고수들과 1대1 비무를 벌이게 된다.
비무는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더 이상 싸움을 지속할 수 없을 때 끝나며.
문파대전의 승패는 한쪽의 모든 고수가 패했을 때, 비로소 결정 난다.
그렇게 정해진 승자는 문파대전 전에 양측이 합의한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이상입니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천신우의 이야기를 들은 남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제대로 알고 있군. 그래. 황보 가주께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문파대전을 거부하면 황보세가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가뜩이나 한수 지역에서 황보진의 죽음으로 평판에 타격을 입은 상황.
황보세가 가주로선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받아들이지.”
선뜻 응하긴 했지만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천씨세가에서 먼저 문파대전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황보세가 가주는 천무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심한 천무흔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설마 저놈을 그렇게 믿는 건가?’
자연스레 천무흔의 시선이 천신우에게로 향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으로 보건대, 천신우가 후기지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문파대전엔 최소 3인이 참가한다.
그런데 천씨세가엔 천신우 말고는, 황보세가 고수들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혼자서 셋을 전부 상대하겠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만용도 그런 만용이 없다.
아무리 1대1 비무라고 하나, 지친 상태에서 세 명의 고수를 연거푸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력을 드러내게 되니, 비무가 진행될수록 불리해지는 건 당연한 일.
자연히 황보세가 가주의 얼굴에 자신감이 묻어났다.
“오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요.”
“그 말, 기억하고 있겠소.”
끝까지 기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천무흔이었다.
남궁인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문파대전의 장소와 일시를 정하고, 무림맹에 공증을 요청하겠습니다.”
무림맹 인사가 문파대전의 공증을 맡는 건 오래된 관례였다.
“양측의 문파대전 참가인원은 문서에 기록해 밀봉한 상태로 보관될 것입니다.”
문파대전 참가자 신원이 사전에 노출될 경우, 대비가 가능해진다.
그 비밀을 엄수하는 것 역시, 무림맹 공증인의 몫이었다.
“이만 일어나겠소. 문파대전에서 봅시다.”
천무흔을 시작으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황보성이 천신우를 노려보았다.
“무조건 문파대전에 나와라.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내 동생을 죽인 죗값을 치르게 해줄 테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겁니까? 동생이란 작자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황보성의 입가가 씰룩였지만 천신우는 개의치 않았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면 헛다리 짚은 거고. 알고도 그러는 거면 답이 없는 거고. 어느 쪽입니까?”
물론 천신우는 알고 있었다.
황보성 역시 동생 황보진과 똑같은 놈이란 사실을.
단지 황보성이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황보세가 내부에서 쉬쉬할 뿐이다.
“대답은 문파대전에서 듣기로 하지요.”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천신우.
그를 바라보는 황보성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보는 눈만 없었다면 당장 가서 머리를 터뜨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면 남궁인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당주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넌지시 물어온 것은 모용세가를 대표해 중재자로 나선 패검단주 모용훈. 바로 절명곡에서 후기지수들을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남궁인은 모용훈의 질문에 담긴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볼 때마다 성장하는구려. 솔직히 이젠 무서울 정도요.”
“그 말씀은…….”
모용훈의 눈길이 멀어져가는 황보세가 일행에 머물렀다.
“오대세가의 한 자리가 바뀔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원래 오대세가의 한 자리는 천씨세가의 것이었다.
만일 천씨세가가 그 자리를 되찾게 된다면 전적으로 천신우의 공이라고 봐야 했다.
“그건 천 공자의 수완에 달려 있을 거요.”
“수완이라면?”
“지금 천 공자라면 황보세가와의 문파대전에서 능히 한 사람 몫을 당당히 해낼 터. 하지만 알다시피 혼자서 문파대전을 승리로 이끌기란 쉽지 않소.”
불가능하진 않다.
그러나 분명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황보세가의 고수 하나가 작정하고 천신우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략으로 비무에 임한다면?
밑천이 드러난 데다 부상까지 입은 천신우는, 황보세가의 남은 고수들을 이겨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천 공자를 받쳐줄 고수가 필요하단 말씀이군요.”
“그렇소. 하지만 내가 알기로 천씨세가엔 그만한 실력자가 없소이다.”
남궁인은 천무흔과 천패극의 얼굴을 떠올렸다.
먼저 가주인 천무흔은 관례에 따라 빠질 가능성이 높다. 가주가 직접 비무에 임했다가 패배할 경우, 천씨세가가 입을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기에.
그리고 대장로 천패극은 얼마 전에 죽은 상황.
“또한 빈객들의 면면도 황보세가가 훨씬 화려하오. 당장 혈염자가 황보세가 대표로 나선다면 누가 그를 상대할 수 있겠소이까?”
남궁인의 물음에 모용훈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혈염자와 맞먹는 고수를 빈객으로 영입한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겠지.”
모용훈은 비로소 남궁인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파대전까지는 길어야 한 달.
천씨세가는 그 짧은 기간 동안 혈염자에 필적하는 고수를 영입할 수 있을까?
인맥을 동원할 만한 장로원은 사실상 무너진 상태.
자금동원력 면에서도 천씨세가는 황보세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댈 곳은 천신우의 수완뿐인 것이다.
“천 공자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다고 하나, 아직 나이가 어리고 무림 경험이 적습니다. 아무리 수완을 발휘하더라도 혈염자 수준의 빈객을 영입하긴 어려울 겁니다.”
인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궁인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오. 천 공자가 그 일마저 해낸다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끼는 모용훈이었다.
* * *
황보세가와의 회담이 끝나자 천무흔은 천신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생 많았다. 네 덕에 내가 요즘 어깨를 펴고 다니는구나. 그래, 자신은 있느냐?”
“물론입니다.”
자신이 없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나도 문파대전에 참가할 생각이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네가 현재 우리 천씨세가에 머무는 빈객들의 수준을 모르진 않을 터. 따로 생각해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당장 천신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을 천신우는 지금 당장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아버님. 풍뢰권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그렇게 묻는 천신우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