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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36화 (36/171)

# 36

학사환생 036화

따당!

황보진이 힘겹게 천신우의 검을 쳐냈다.

황보진의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놈……!”

그는 단번에 깨달았다.

천신우가 후기지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내리쳐지는 검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댄다.

차차차차창!

검을 몇 번 섞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지고 손이 꼬였다.

“미친!”

황보진은 이를 악물며 천신우의 어깨를 찔러갔다.

허점을 발견해서가 아니다.

이대로 가다간 손도 못 쓰고 당한다는 위기감이 그를 공세로 전환하게 만든 것이다.

쉬익!

황보진의 검이 천신우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신우는 오히려 간격 안으로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챙챙챙챙!

천신우와 황보진의 검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언뜻 보기에 속도와 위력 모두 비슷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천신우의 검은 위력을 더해가는 반면, 황보진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단상 바로 밑까지 몰린 황보진이 멈칫하는 순간.

솨악!

천신우의 검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황급히 허공으로 솟구친 황보진이 한참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

황보진은 말없이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한다고 피했건만 결국 천신우의 검에 베인 것이다.

“돌겠군.”

너무 쉽게 생각했다.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낭인들을 움직이면 된다고.

하지만 예상 밖의 변수가 등장했다.

심지어 전력을 다해도 감당하기 힘든 변수.

황보진이 천신우를 노려보았다.

“우리 다시 생각해 보자고.”

대화를 위해 황보진은 대치 중이던 부하들마저 뒤로 물렸다.

“다시 생각해? 뭘?”

천신우는 피식 웃었다.

수백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황보세가는 하북팽가와는 다르니까.’

전생에서 하북팽가는 팽우경의 무능함 때문에 무림맹에 피해를 입혔을지언정, 마교와 손을 잡진 않았다.

하지만 황보세가는 마교의 우세가 점쳐지자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마교와의 전쟁을 틈타 은밀히 다른 세가들의 영역을 야금야금 집어삼킨 것이다.

하물며 눈앞의 황보진은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

‘당장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하고 있던 짓만 봐도 용서할 가치가 없는 놈이지.’

지금도 황보진은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이 지껄이고 있다.

“심정은 이해해. 나라도 화가 났을 거야. 뒤에서 수작을 부렸으니. 하지만 어디 세상일을 기분대로만 처리해서야 되겠나.”

천신우의 침묵을 협상의 여지로 해석한 것일까.

황보진은 먼저 제안을 꺼내기까지 했다.

“아무리 황보세가가 먼저 도발했다지만 여기서 나를 죽이면 문제가 커져.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럼 서로 다칠 텐데. 차라리 원하는 바를 말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한수 진출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 아니면 이번 일에 대한 공식사과? 뭐든 말만 하라고.”

황보진의 제안을 잠자코 듣기만 하던 천신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유언은 그걸로 끝?”

“……!”

황보진이 눈을 부릅떴다.

커진 눈동자로 천신우의 검이 날아드는 광경이 보였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너, 이 자식!”

황보진은 천신우가 처음부터 자신을 갖고 놀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분노할 새도 없이 목이 잘려 나가며 피분수가 솟았다.

푸아악!

목이 잘린 황보진의 시체가 바닥에 철퍼덕 무너져 내렸다.

“이런 미친 새끼가!”

황보진의 죽음에 격분한 부하들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천씨세가 무인들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채채채챙!

천씨세가 무인들과 황보세가 무인들 사이에 일전이 벌어졌다.

황보세가 무인들은 천씨세가에 비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개개인의 실력만 놓고 보면 오히려 앞서는 편이었다.

하지만 숫자에서 차이가 났다.

게다가 이미 지휘관인 황보진이 죽은 상황.

황보세가 무인들은 숫자에서 밀리고 기세에서 밀렸다.

마침내.

푸우욱!

마지막 황보세가 무인의 죽음을 끝으로 장내에 정적이 찾아왔다.

“대공자님. 모두 해치웠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았다. 그리고…….”

천신우가 시중들던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저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

상상도 못했던 천신우의 선언에 여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들 모두가 납치되거나 팔려 다닌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주인이 바뀌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건만.

“저, 정말이신가요?”

여인 하나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기에.

“그래.”

간단한 말 한 마디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천씨세가의 대공자로서 하는 말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복 받으실 거예요. 흐흐흑…….”

자유의 몸이 된 여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몇 번이고 숙이는가 하면,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감정의 홍수 속에서 아까 황보진이 눈독 들였던 소녀가 천신우에게 다가왔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연다.

“저기…….”

“말해.”

“저는 돌아갈 곳이 없어요. 그러니까…….”

납치당한 여인들이야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부모가 직접 딸을 팔아넘긴 경우라면 얘기가 달랐다.

집으로 돌아간들 다시 다른 곳으로 팔려나갈 운명인 것이다.

소녀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처지의 여인들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왔다.

천신우가 부하를 돌아봤다.

“세가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했었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천신우의 건의로 무인들의 편의를 위한 시설을 확충하면서 일손이 달리는 상황이었다.

“원하는 사람에 한해 세가로 보내도록. 집으로 돌아갈 사람이라 해도 여비는 챙겨주고.”

“알겠습니다. 뒤처리는 어떻게 할까요?”

“챙길 거 챙기고 버릴 건 버리고 이곳은 폐쇄해. 그리고 황보세가 무인들의 시체는 관에 담아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이미 가주 천무흔에게 전권을 위임받았기에 거침없이 지시를 내리는 천신우였다.

부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사실 숨기려 한들, 결국 황보세가에서 황보진의 죽음을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

그렇다곤 해도 저절로 밝혀지는 것과 대놓고 도발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만일 시체를 관에 담아 보낸다면 황보세가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천신우가 물었다.

“두려워?”

“아, 아닙니다.”

고개를 내저은 부하가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만졌다.

황보세가와 일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맥박이 날뛰고 있었다.

천신우는 그걸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떨림, 조만간 두근거림으로 바뀌게 될 거야.”

천신우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 마무리하고 돌아간다!”

* * *

천씨세가를 제치고 오대세가로 발돋움한 황보세가의 전경은 화려했다.

고고하게 솟은 전각과 건물들은 물론, 잘 꾸며진 정원 또한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황보세가의 분위기는 아름다운 풍경과는 정반대였다.

“감히……!”

천씨세가에서 보내온 관들을 확인한 황보세가 가주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미 황보진의 죽음을 보고 받았지만 당연히 시체를 직접 확인한 지금이 훨씬 충격이 컸다.

죽은 황보진의 친형 황보성은 아예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당장 명을 내려주십시오! 천가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여줘야 합니다! 황보세가를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많은 이들이 황보성의 분노에 동조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합니다.”

“냉정? 지금 냉정이라고 하셨소?”

“그렇소만.”

황보성의 불같은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중년인은 혈염자.

황보세가의 빈객인 그는 황보성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고수였다.

혈염자의 조언에 황보세가 가주는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친동생을 잃은 황보성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가주인 그는 입장이 다르다. 감정에 치우쳐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혈염자.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혈염자는 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적의 피로 수염을 적신다 하여 혈염자로 불리는 그였다.

“일단 천씨세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합니다.”

황보진의 죽음을 은폐해도 모자랄 판에 관에 담아 황보세가로 보냈다.

도발 말고는 해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황보세가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을 그냥 넘겼다간 황보세가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응징해야 합니다. 문제는 방법이지요.”

서신을 보내 항의하기엔 이미 정도를 넘었다.

서신 한 통에 사과하고 요구조건을 들어줄 거라면 지금처럼 도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먼저 국지전을 벌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인들을 파견해 한수 지역을 초토화시키는 겁니다. 한수는 원래 천씨세가의 영역이지만 명분이 있으니 문제가 커지진 않겠지요.”

“하지만 그래선 체면이 서지 않네.”

현재 황보세가는 천씨세가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받은 만큼 되돌려준다면 천씨세가와 동급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혈염자는 가주의 반박을 예상했다는 듯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전면전을 벌이는 방법도 있습니다. 최소한의 방어병력만 남기고 진격한다면 천씨세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누가 봐도 현재 황보세가의 객관적인 전력은 천씨세가보다 우위였다.

사실 예전에도 전면전을 벌였다면 황보세가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황보세가 가주는 탐탁지 않은 반응이었다.

“지금 전쟁을 시작하면 여름이 오기 전에 천씨세가에 깃발을 꽂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고 나선?”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현재 흑도방파들을 제외한 무림의 거의 모든 문파가 무림맹에 소속돼 있다.

황보세가와 천씨세가도 마찬가지.

그것은 무림맹의 규율에서 자유롭지 못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림맹은 소속된 문파끼리의 전면전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천씨세가를 공적으로 선포하지 않는 이상, 전면전을 벌였다간 우리 황보세가도 끝장이네.”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무림맹의 힘은 막강하다.

오대세가를 포함해 세가연합 모두가 힘을 합치더라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그렇기에 황보세가 가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림맹이 개입하는 사태는 원치 않았다.

비로소 혈염자는 미소와 함께 마지막 방법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먼저 천씨세가에 회담을 제안하십시오. 무리한 요구를 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문파대전을 제안하면 됩니다.”

문파대전이란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황보세가 가주의 고개가 마침내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리 하지.”

* * *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수에서의 일을 두고 천씨세가와 황보세가 사이에 회담이 열렸다.

장소는 중립지역.

회담이 열리는 장소에 커다란 천막이 설치되고 탁자와 의자가 놓였다.

천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천씨세가와 황보세가의 무인들이 철통처럼 경계를 펼쳤다.

언제 충돌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하지만 실상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었다.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단주급 인사들이 중재자로 나와 있었으니까.

회담장소에 먼저 도착한 것은 황보세가 가주와 그를 수행하는 무인들이었다.

가주를 필두로 황보세가 제검단주 황보성이 불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등장했다.

양쪽 문파에서 가주를 포함해 2인이 참석하는 회담.

황보세가 가주는 회담에 측근이자 제검단주인 황보성을 동석시켰다.

황보성은 천신우에게 죽은 황보진의 친형.

이번 회담을 강경하게 이끌겠다는 황보세가 가주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천 가주는 아직 멀었나?”

황보세가 가주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휘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척척!

도열했던 천씨세가 무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양쪽으로 갈라진다.

무겁게 깔린 침묵 속에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황보세가 무인들은 물론이고 가주와 황보성. 그리고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중재자들까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

검은 장포를 걸친 천신우가 가주 천무흔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천신우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함께 움직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중재자들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천신우의 대단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전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그새 또 성장했단 말인가?

그들이 의문을 떠올리던 그때, 황보세가 가주는 눈매를 좁혔다.

뚜벅.

천신우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죄여오고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경험이 없진 않았다.

오대세가 가주회합에 처음 참석하던 날. 그리고 무림맹 고위인사와 마주했을 때도 지금과 느낌이 비슷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천신우.

아들 황보도준과 동년배인 천신우에게 위축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황보세가 가주의 몸에서 살벌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가까이에 있던 남궁세가와 모용세가의 중재자들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연 오대세가의 한 축을 담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세였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천신우가 어떻게 대응할지.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천신우는 천천히 걸어왔다.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그러나 그가 주먹을 손바닥으로 포개는 순간.

거짓말처럼 황보세가 가주의 기세가 사그라졌다.

“……!”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천신우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가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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