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학사환생 035화
빠악!
천신우가 가볍게 내지른 주먹에 앞장선 사내의 턱이 날아갔다.
“개자식!”
뒤이어 달려드는 덩치의 배엔 발차기를 꽂아준 천신우였다.
콰아앙!
한참을 날아가 벽에 처박힌 덩치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절명한 것이다.
앞서 턱이 날아갔던 사내도 마찬가지.
“……!”
낭인들이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여덟 명이 당한 후였다.
천신우는 맨주먹만으로 중무장한 낭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다, 달아나야…….”
뒤돌아 도망가려던 낭인들은 술잔 깨지는 소리와 함께 숨이 끊겼다.
와장창!
천신우가 술잔을 날려 그들의 머리를 깨부순 것이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대머리 거한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묻지도 않았는데 그의 입에서 자백이 흘러나왔다.
“혈랑! 혈랑이 시킨 일입니다! 그놈이 인근에서 활동하는 낭인들을 죄다 불러놓고 선착장 공사를 방해하면 돈을 준다고…….”
물론 그런다고 멈출 천신우가 아니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인부들을 죽였을 놈이 아닌가.
저벅저벅.
대머리 거한의 눈엔 다가오는 천신우가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제발 목숨만이라도…….”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거한이었으나 천신우는 냉정했다.
“이따위 일을 벌였으면 각오는 했겠지.”
퍼억!
천신우는 발로 거한의 얼굴을 걷어찼다.
대머리 거한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목뼈가 부러진 머리가 가장 먼저 바닥에 닿으며 쿵! 소리를 냈다.
대자로 뻗은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주위는 고요했다.
천신우 덕에 목숨을 건진 인부들은 물론, 막대한 재산피해를 입은 술집주인조차 입을 열지 못했다.
장내에 내리깔린 침묵 속에서 천신우가 숨을 고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나중에 제대로 대접하겠습니다.”
술이 확 깬 인부들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신우는 술집주인을 안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가에서 무인들이 나와 보상할 거요.”
그 말을 남기고 술집을 나서는 천신우.
양 노인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자, 자넨 도대체 누군가?”
모두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술집 문을 덜컹 열고 나가자 중무장한 천씨세가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에, 천신우를 따라나섰던 양 노인과 인부들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이게 대체 무슨…….”
물론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공자님! 보고 드리겠습니다!”
대주급 무인이 천신우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다른 쪽도 전부 처리했습니다. 인부들도 모두 무사합니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이놈들을 고용한 건 역시 우리가 예상한 대로 혈랑이더군.”
총관으로부터 누군가 낭인들을 고용해 공사를 방해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천신우다.
천씨세가 무인들이 지키고 있는 곳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그 즉시 천신우는 일거에 낭인들을 소탕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지난 며칠 동안 천신우가 공사현장에서 인부들과 부대낀 것조차 계획의 일부였다.
계획을 세운 보람이 있게, 이후 벌어진 일들은 모두 예상대로 진행됐다.
사전에 파악한 정보대로 낭인들은 오늘 일제히 움직였고, 천신우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었다.
물론 낭인들을 일거에 소탕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지금부턴 낭인들을 직접 움직인 혈랑과 그에게 사주한 배후를 응징해야 한다.
“지금쯤 혈랑은 낭인들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부하가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혈랑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혈랑을 움직인 배후도 그 자리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혈랑의 본거지로 가지. ……잠깐. 그전에…….”
천신우가 뒤를 돌아보자 양 노인과 인부들은 사색이 됐다.
천신우의 정체를 이제야 알게 된 그들이었다.
천씨세가 일반무인들조차 두려움의 대상인데 대공자라니!
하지만 정작 그들을 바라보는 천신우의 표정은 호의로 가득했다.
“부하들을 차출하여 이분들을 숙소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명을 받듭니다!”
천신우가 양 노인에게 나직이 덧붙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천씨세가는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길.”
그 말을 남기고 천신우는 무인들과 함께 밤거리로 사라졌다.
남겨진 양 노인과 인부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 고작 말 한 마디일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한 당사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천씨세가의 대공자.
그런 거물이 자신들을 위해 저토록 신경 써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 * *
혈랑은 한수 지역 낭인들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다.
한수에서 활동하는 낭인들은 모두 혈량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술을 따르는 혈랑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황보 대협!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상석에 앉은 상대가 황보세가의 고수 황보진이기 때문이었다.
방계긴 해도 황보세가의 핏줄. 심지어 황보진의 친형은 황보세가에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일개 낭인에 불과한 혈랑으로선 그저 굽실거릴 수밖에.
이제 나이 마흔이 가까워져 오는 황보진은 채워진 술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은?”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즐기시지요. 얘들아! 뭐하고 있느냐! 어서 황보 대협을 즐겁게 해드리지 않고!”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황보진의 시중을 들었다.
과일을 깎아 황보진의 입에 넣어주기까지 했다.
“이것도 드셔보셔요.”
미녀 싫어하는 남자 없다고 황보진의 태도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황보진의 친형은 천씨세가의 한수 지역 진출을 막는 데 성공하면, 본가의 요직으로 불러들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만큼 이번 일은 중요했다. 천씨세가의 진출을 내버려 두면 황보세가를 턱밑까지 추격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황보진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촌구석에 한 달 이상 처박혀 있다 보면 따분해지게 마련.
지금 그는 누구보다 술과 여자가 절실했다.
그런 황보진의 마음을 알아차린 혈랑이 오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 덕에 흥이 올라 여인들을 마음껏 희롱하던 황보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 너.”
황보진의 부름에 앳된 얼굴의 소녀가 파르르 떨었다.
“그래 너. 몇 살이냐?”
“오, 올해…….”
소녀의 대답을 들은 황보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상적인 기루에선 나이가 찬 여인들만 손님을 시중들게 한다.
지금처럼 어린 소녀는 정말이지 만나보기 힘들었다.
“이리 오너라.”
가까이서 보니 더 어려 보였다.
이제 겨우 열여섯이나 됐을까.
그러나 잔뜩 흥분해 소녀의 몸을 더듬으려던 황보진은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오는군.”
외부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친형만큼은 아니지만 황보진도 나름 황보세가에서 알아주는 고수.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심상찮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마 일을 마치고 복귀한 낭인들일 겁니다.”
혈랑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그때.
콰앙!
정문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혈랑의 눈매가 좁아졌다.
낭인이라면 감히 그의 영역에서 이런 난동을 피우지 못한다.
다른 누군가 침입한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떤 놈이……! 당장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호기롭게 대답하며 사라진 부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소음만 가까워졌다.
쾅! 쾅! 쾅!
“…….”
혈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출입문마다 이중삼중으로 부하들을 세워두었는데.
상대는 마치 제집 드나들 듯이 혈랑과 황보진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막아서는 모든 것을 박살 내며.
‘이렇게 되면…….’
입가에서 미소를 지운 혈랑의 눈동자가 날이 시퍼런 박도에 닿았다.
그 순간!
콰아앙!
마침내 연회장의 문을 부수며 나타난 것은 천신우였다.
천신우는 칼날에 묻은 피를 툭툭 털어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혈랑이 박도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어이가 없군.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선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상대가 누군지를 떠나 기죽는 모습을 보인다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악명을 내팽개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알기에, 혈랑의 직속부하들도 앞다투어 천신우에게 달려들었다. 입구를 지키던 낭인들보다 훨씬 강한 그들이었다.
“감히 어딜!”
그들이 휘두른 칼날이 천신우를 뒤덮었다.
물론 그들의 칼은 천신우에게 닿지 못했다.
촤아아악!
천신우의 검이 그들의 몸을 반으로 쪼개는 순간.
드러난 시야로 혈랑이 보였다.
연회가 벌어지는 단상 위에서 단숨에 천신우가 있는 곳까지 도약해 온 것이다.
“죽어어어!”
고함을 지르던 혈랑의 입이 쭉 찢어졌다.
촤악!
그대로 얼굴이 잘려 나간 혈랑은 천신우에게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천신우는 혈랑의 시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고개를 들어 단상 위를 올려다봤을 뿐이다.
천신우와 눈이 마주친 황보진이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혈랑을 단칼에 베다니. 제법이군.”
천신우의 옷차림은 여전히 허름했다. 머리도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상태.
그럼에도 황보진은 천신우의 얼굴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이내 고개를 내저은 황보진이 피식 웃었다.
“대충 예상은 가는군. 다른 놈들은?”
때마침 천신우 뒤로 천씨세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낭인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합류한 것이다.
그 숫자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황보진은 피식 웃으며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저놈들 목부터 따고 나서 귀여워해 주마.”
이곳에 도착한 이래 처음으로 천신우가 입을 열었다.
“역시 황보세가에서 꾸민 일이었군.”
천신우는 황보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세가지연에서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기에.
동시에 황보진도 천신우가 누군지 기억해 냈다.
“그렇군. 천씨세가 대공자였어.”
요즘 천신우에 대한 소문을 수도 없이 들은 황보진이었다.
정보통에 따르면 한수 진출 계획도 천신우가 건의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설마 천신우가 직접 한수까지 와서 작전을 진두지휘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우리 도준이가 신세를 많이 졌다던데. 내가 되갚아주는 것이 삼촌으로서 도리겠지.”
황보진은 동행한 황보세가 고수들에게 턱짓했다.
자신이 천신우를 쓰러뜨릴 동안, 다른 천씨세가 무인들을 상대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래. 어디 소문만큼 대단한지 볼까.”
황보진은 느긋하게 계단을 내려와 천신우와 마주 섰다.
“죽이진 않으마. 대공자인 너를 죽였다간 문제가 커질 테니.”
“그래? 나는 죽일 건데.”
“……뭐?”
황보진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천신우가 내지른 자운검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