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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34화 (3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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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 034화

천신우가 돌아간 후에도 총관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수많은 생각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가주 천무흔이 찾아왔다.

“날세. 들어가도 되겠는가?”

“가주님?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신지…….”

총관은 직접 문을 열며 천무흔을 맞이했다.

“어쩐 일이긴. 우리가 반드시 용건이 있어야만 얼굴 보는 사이던가.”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어서 들어오시지요. 차라도 준비시키겠습니다.”

“됐네.”

천무흔은 자리에 앉자마자 아들 얘기부터 꺼냈다.

“그보다 신우는 잘 만나봤는가?”

“예, 형님.”

천무흔과 총관은 사석에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만큼 총관을 향한 천무흔의 신임은 누구보다 두터웠다.

“그래, 어떻던가?”

“아주 총명해졌더군요. 술값을 내놓으라며 으름장 놓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하하하. 그랬었지. 그때만 해도 반쯤 포기했었는데 이렇게 변할 줄이야.”

천신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천무흔뿐만 아니라 총관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자식이 없는 총관에게 천신우는 아들 같은 존재였기에.

“그런데 형님.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이번 한수 진출계획, 신우가 직접 나서겠다고 합니다.”

“난 또 뭐라고. 지금까지 해낸 일이 몇 갠데 그게 대순가.”

“형님, 그게 말입니다…….”

총관의 걱정 어린 이야기를 듣고도 천무흔은 미소만 지었다.

“하하하! 신우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인가? 대공자이기에 오히려 위험하고 궂은일을 맡아야 한다고?”

“마냥 좋아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우가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지만…….”

“그러니까 자칫하다간 신우가 황보세가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단 소리잖나. 그거야말로 걱정할 필요 없네. 전면전으로 치닫는다면 피해를 입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황보세가일 테니.”

거기까지 말했을 때, 천무흔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녀석은 내심 전면전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 * *

한수는 강을 끼고 있는 데다 사방으로 트여 있는 요충지.

그러나 천씨세가의 진출이 번번이 실패하면서 발전이 느려졌다.

그러던 한수에 다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천씨세가가 새롭게 한수로의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지금 한수에선 천씨세가의 자금이 투입된 선착장 확장공사가 한창이었다.

인부들이 수레로 목재를 실어 나르고 사방에서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땅땅땅-!

천신우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행색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허름한 옷차림에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상태.

누구라도 그가 천씨세가 대공자임을 알아보기란 불가능했다.

“자자! 이쪽으로!”

작업반장의 외침에 천신우는 군말 없이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흙모래가 가득 담긴 수레는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지만, 천신우에겐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수레의 흙모래를 전부 쏟아부은 천신우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눈가로 햇살이 쏟아졌다.

어느덧 봄이었다.

“다들 고생했어! 잠시 쉬었다 하자고!”

작업반장의 외침에 인부들이 나무그늘 아래로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햇볕에 그은 얼굴에 근육질 체구다.

하다못해 인부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양 노인마저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풍채를 자랑했다.

“젊은 친구가 아주 요령이 좋아. 덕분에 오늘 일도 빨리 끝나겠어.”

요 며칠 사이 인부들 속에 완벽하게 섞여든 천신우였다.

특히 눈앞의 양 노인과 가장 가까워졌다.

병든 아내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일손을 놓지 못한다는 양 노인은 틈만 나면 천신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예의도 바르고 말이야.”

물을 마시던 천신우가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던 그때였다.

슬렁슬렁 걸어온 작업반장이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뿌연 담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간다.

“이거야 원, 이번 달 안에 뼈대공사는 끝내야 하는데.”

“그게 생각대로 되겠수? 거, 저번에도 그 개잡놈들이 우리 술 마시는 데까지 와서 깽판 치지 않았소.”

인부 하나가 저 멀리 있는 무인을 힐끔 쳐다봤다.

당연히 천씨세가에서 파견 나온 무인이다.

“공사현장만 감독하면 뭐하냐고. 정작 인부들은 어디 한군데씩 부러져서 일도 못 나오는데.”

양 노인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무인들이 고작 인부들 지켜주자고 술자리까지 쫓아다닐 순 없잖나.”

“말이 그렇다는 거요. 이러다 인부들 다 드러누우면 공사는 어찌할지.”

작업반장이 소리쳤다.

“자자! 잡담 그만하고 일어들 나지! 오늘은 위에서 다들 고생한다며 쩐 좀 챙겨줬으니, 얼른 마무리하고 마시러 가자고!”

“오오! 알겠소!”

술 마시러 가잔 소리에 인부들이 벌떡 일어났다.

하루하루 고된 삶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술은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양 노인도 무릎을 두드리며 일어났다.

“자네도 이따가 같이 갈 텐가?”

“물론이지요.”

“허허. 술 좀 마시나 보군.”

양 노인의 말에 천신우는 웃기만 했다.

어차피 중요한 건 술이 아니지만, 굳이 그걸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 * *

그날 저녁.

천장이 낮고 어둑어둑한 술집 안으로 천신우가 인부들과 함께 들어섰다.

탁자 위마다 매달린 등불은 기름이 다 떨어져 가는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래된 탁자에선 시큼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작업반장이 호기롭게 외쳤다.

“자자! 다들 맘껏 마셔!”

인부들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술병을 비우기 시작했다.

빈 술병이 쌓여가고, 얼큰하게 취하기 시작하자, 인부들은 아예 노름판까지 벌였다.

술에 취했음에도 서로를 노려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

침까지 꿀꺽 삼켜가며 인부 하나가 손에 쥔 패를 술상 위에 내던졌다.

“여덟 끗!”

“에헤이! 어디서 여덟 끗 가지고 입을 놀려! 나는 이땡이야! 이땡!”

또 다른 인부가 판돈을 쓸어 담으려는 찰나.

얼굴에 화상자국이 있는 인부가 껄껄 웃으며 그의 손을 붙들었다.

“잠깐.”

툭하고 던진 패가 바닥에 깔리는 순간, 희비가 엇갈렸다.

“이런.”

“오땡? 이게 말이 돼?”

인부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화상자국 인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흐흐. 속고만 살았나.”

그때, 양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자네는 패 안 까나?”

인부들의 시선이 천신우에게 집중됐다.

천신우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패를 깠다.

두 끗.

네 명중에 가장 낮은 패였다.

“……험험.”

양 노인이 민망한 헛기침을 내뱉는 가운데, 인부들이 천신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젊은 친구는 일하는 재주는 있어도, 도박엔 영 소질이 없군. 이만 일어나지그래. 개평은 챙겨줄 테니…….”

그때였다.

덜컹!

술집 안으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일제히 들어섰다.

앞장선 대머리 거한은 머리를 숙이고 문을 통과해야 할 정도로 키가 컸다.

그들을 알아본 인부가 흠칫했다.

“저, 저놈들은······!”

대머리 거한이 인부들을 보며 스산하게 웃었다.

“여기들 있었군. 찾아다니느라 고생했잖아.”

어느새 대머리 거한의 부하들이 인부들 주위를 빙 둘러쌌다.

너나 할 것 없이 무기를 꼬나들고 흉악한 기세를 흘리는 그들이었다.

“좋게 말하니까 우리가 우스워 보이지?”

대머리 거한이 탁자를 걷어찼다.

와장창!

술상이 엎어지며 그릇이 깨지고 음식이 쏟아졌지만 누구도 항의하지 못했다.

힘깨나 쓰는 인부들이지만 무장한 낭인들 상대론 속수무책이었다.

겁에 질린 그들 속에서, 양 노인이 천신우에게 넌지시 일렀다.

“자네는 뒤로 빠지게. 일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봉변을 당해서야 되겠는가.”

“아뇨. 괜찮습니다.”

천신우와 양 노인의 대화를 들은 대머리 거한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얼씨구? 공사 때려치우라고 했더니 신입을 받아?”

대머리 거한이 또 다른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반으로 쪼개지는 탁자를 보고도 양 노인은 애써 의연한 척했다.

“우리는 천씨세가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일세. 우릴 함부로 건드렸다가 천씨세가에서 알게 되는 날에는······.”

양 노인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봤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천씨세가? 그깟 놈들이 뭐라고.”

허풍이 아니었다.

실제로 대머리 거한은 천씨세가 일반 무인들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이런 곳에서 인부들과 드잡이나 하기엔 아까운 실력을 지닌 그였다.

그럼에도 공사현장을 습격하는 대신, 인부들을 쫓아다니며 난동을 피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머리 거한의 고용주가 정면충돌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

어쨌거나 이곳 한수는 천씨세가의 영역. 무턱대고 전면전을 벌였다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

“천씨세간지 개뼈다귄지 하는 놈들에게 가서 전해. 자꾸 여기 얼쩡거리면 박살 내버리겠다고.”

물론 오늘은 경고로 그칠 생각이 없었다.

팔다리를 부러뜨려도 협박이 먹히지 않는다면, 한두 놈 정도는 숨통을 끊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대머리 거한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양 노인을 향해 우악스럽게 팔을 뻗었다.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자랑하는 양 노인이라고 하나, 결국은 일반인.

대머리 거한이 목을 잡아 비트는 순간 목뼈가 부러질 터였다.

그러나 대머리 거한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신입인부가 사내의 팔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천신우였다.

물론 그걸 알 리 없는 대머리 거한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분위기 파악 안 되지? 적당히 한두 놈만 조지고 끝내려 했더니만.”

서슬 퍼런 목소리에도 천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너희는 지금 천씨세가의 행사를 방해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뭐?”

천신우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며 대머리 거한의 팔을 인정사정없이 꺾어버렸다.

우두둑!

팔이 부러진 대머리 거한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미친 새끼! 죽여!”

달려드는 낭인들을 바라보는 천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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