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환생-33화 (33/171)

# 33

학사환생 033화

스르르.

천신우의 검이 세차게 흔들리며 수많은 잔상을 만들어냈다.

잔상들이 겹쳐지며 천신우를 중심으로 하나의 영역을 형성해간다.

천신우 발밑의 흙모래가 소용돌이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

공세를 펼치던 천무흔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공격보다 방어에 치중한 대응.

‘아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겠다는 것이냐.’

비로소 천신우의 의도를 알아차린 천무흔이다.

‘오냐. 내가 한번 뚫어보마.’

천무흔의 검이 천신우가 만들어낸 영역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경쾌한 천무검법이 천무흔의 칼끝에서 펼쳐진다.

솨솨솨솨!

천신우가 만들어낸 영역을 향해 사방에서 천무흔의 검이 휘몰아쳤다.

바로 그 순간.

쩌엉!

쩌렁쩌렁한 울림과 함께 천무흔의 검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폭풍처럼 맹렬한 기세는 이미 사라진 상태.

천무흔의 칼끝에 맞닿아 있는 것은 천신우의 검이었다.

회심의 일격이 너무도 간단하게 막힌 것.

“과연 대단하구나.”

천무흔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밀어붙였다.

스가가가각!

천신우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차차차차창!

검과 검이 엇갈리며 서로의 급소를 향해 매섭게 날아든다.

남들 눈엔 목숨 걸고 싸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천무흔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오랜만에 부담 없이 검을 휘두르는 그였다. 지금만큼은 가주로서 짊어진 책임감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부딪치고 상대의 실력에 놀라고 감탄하며 새로운 해법을 모색한다.

무인으로서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상대.

그게 아들이라서 더 좋았다.

“자아! 한 번 더 간다!”

마치 어린 아들과 놀아주던 젊은 날처럼 천무흔이 활기차게 외쳤다.

그러나 그의 검마저 가볍진 않았다. 지금까지완 사뭇 다르게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움직였다.

그걸 바라보는 천신우의 눈이 반짝였다.

‘확실히 실마리를 잡으신 모양이군.’

천무검법의 상승경지는 바로 조화에 있었다.

가벼움과 무거움.

빠름과 느림.

물론 말은 쉽다.

직접 깨닫고 익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

‘그렇다면 보여드려야겠지.’

천신우는 천무흔의 검보다도 오히려 느리게 검을 휘둘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천신우와 천무흔의 검이 서로를 향해 내리그어진다.

물론 두 사람의 속도는 같지 않았다. 누가 봐도 천무흔의 검이 빨랐다. 그래봐야 느리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러나 마지막 순간, 두 사람의 검은 약속한 것처럼 급격하게 빨라졌다.

솨악!

따당!

거의 동시에 들려오는 충격음!

그러나 천신혁과 천씨세가 무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천무흔만이 옆으로 밀려난 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파르르 떨리는 칼끝을 따라 손목에 저릿한 통증이 전해진다.

‘방금 그건…….’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단지 짐작할 뿐이다.

천신우가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가 다시 회수하며 자신의 검을 쳐냈을 거라고.

만일 이게 실전이었다면?

천무흔은 영락없이 가슴을 베였을 것이다. 반대로 천신우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겠지.

“아주 훌륭하다.”

천무흔은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나저나 너는 천무검법을…….”

“아닙니다.”

천신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천무흔의 얼굴에서 아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전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8성의 벽을 천신우가 깨뜨린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고생 많았다. 내가 한 수 배웠구나.”

“저야말로 한 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신우와 천무흔은 서로를 향해 미소 지으며 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철컥.

비로소 숨죽이고 지켜보던 천신혁이 달려왔다.

“아버님!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시비 난정도 공손히 다가와 천신우에게 수건을 건넨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리고 총관이 뵙기를 청합니다.”

천무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가봐라.”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천신우는 공손히 인사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이제 총관을 만나 그간의 진행사항을 보고받을 시간이었다.

* * *

“대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무인의 보고에 총관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총관이 사람 좋은 미소로 천신우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천무흔이 가주가 되고 나서부터 천씨세가의 살림을 도맡아 한 총관이었다.

‘천신혁이 가주 자리를 물려받은 후에도 천씨세가를 위해 일했지. 능력은 물론 충성심까지 갖춘 인물이니 가까이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실 원래 몸의 주인인 천신우는 총관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망나니이던 그는 항상 총관에게 유흥비 명목으로 무리한 금액을 요구했기에.

하지만 지금 총관과 마주한 천신우의 태도는 무척 정중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내년 대홍수를 대비한 곡물 매입은 단심회 상단을 통해 진행 중이다.

따라서 총관에게 맡긴 업무는 세력 확장에 관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예산 관련.

“가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한수 지역 진출계획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총관이 탁자 위에 두툼한 서류뭉치를 올려놓았다.

“지금부터 직접 설명 드리도록 하지요.”

“아니요. 잠시만 기다려주겠습니까?”

“……?”

의아해하는 총관에게 천신우가 덧붙였다.

“설명은 자료를 검토하고 듣겠습니다.”

천신우는 숫자와 도표로 도배된 서류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과연 꼼꼼하군. 작은 변수 하나조차 빠뜨리지 않았어.’

죽은 대장로 천패극이 숱하게 비리를 저질렀음에도 천씨세가의 재정이 파탄 나지 않았던 이유.

바로 눈앞의 총관이 수완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자료에도 총관의 능력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탁.

마침내 서류를 덮은 천신우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에 확 들어오는군요. 진출에 들어가는 비용과 그로 인해 기대되는 수익까지. 숫자만 놓고 보면 추진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습니다. 입지도 추후 필요에 따라 확장이 가능한 곳이라 아주 적합하고요.”

천신우는 구체적인 숫자까지 언급하며 계획에 대해 평가했다.

처음엔 미심쩍어하던 총관의 눈동자에도 이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신우가 강해졌다는 소문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러나 눈앞의 서류를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

‘대체 대공자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총관은 그것이 궁금했다.

“좋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로 드러나지 않는 위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이를테면 공사를 방해하는 세력이라든가.”

무림의 사업을 숫자만으로 판단해선 곤란하다.

이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면 필연적으로 무력이 개입된다.

이때, 힘싸움에서 밀리면 아무리 완벽한 계획이라도 엎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천씨세가의 한수 진출이 번번이 실패했던 것처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사실 터를 닦기 위해 사람들을 미리 보내두었는데, 벌써부터 훼방을 놓는 자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알아본 바로는 낭인들이라고.”

“세가 무인들도 파견했을 텐데. 그들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아직 정면으로 충돌이 발생한 건 아니지만, 고충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파견한 무인의 수를 대폭 늘리자니 비용뿐만 아니라 문제가 많아서…….”

“어차피 경비인원을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감히 낭인들 따위가 천씨세가의 행사를 방해할 턱이 없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지 않고서야.

“경비인원을 늘리면 분명 지금보다 위협의 강도가 강해질 겁니다. 그때는 낭인이 아니라 주변 흑도방파를 움직일 테고. 그걸로 부족하다면 살수조직에 청부를 넣을 수도 있겠지요.”

천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결국 배후세력을 응징하지 않고선 한수 진출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신우의 눈빛을 마주한 총관은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설마 대공자께선 배후세력의 정체를 짐작하고 계시는 겁니까?”

천신우가 되물었다.

“천씨세가가 한수에 진출할 경우 가장 피해를 보는 곳이 어딜까요? 인근의 표국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표국 사업에 진출하지 않는 이상, 오히려 그들 입장에선 손 안 대고 코 푸는 꼴입니다. 한수 근방의 물길을 이용하면 운송비용이 대폭 절감될 테니까요. 그럼 근처에 자리 잡은 흑도방파?”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 천신우다.

“흑도방파야 불만은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천씨세가의 행사에 직접 개입하지 못합니다. 발각되는 순간 문파 문을 닫게 될 테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남는 건, 천씨세가의 한수 진출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 세력. 그들 중에서 천씨세가와의 전면전을 감수할 곳은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천씨세가와 오랜 앙숙이라면 한 곳뿐이지요.”

천신우가 쐐기를 박았다.

“바로 황보세가. 그들이 배후일 겁니다.”

“…….”

총관은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물론 그라고 황보세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지 천신우가 황보세가를 직접 언급했기에 놀란 것이었다.

총관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천신우가 말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황보세가와의 전면전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한수를 차지하고 나아가 영역을 넓혀나가려면.”

총관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사람 좋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냉철한 눈으로 천신우를 바라본다.

“그렇게 되면 계획뿐만 아니라 적임자도 중요해집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이번 일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 테니 말입니다. 혹시 생각해둔 사람이 있으십니까?”

천신우는 가슴에 손을 얹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진심이십니까? 따위의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었다.

천신우의 눈빛은 전에 없이 진지했으니까.

유흥비를 내놓으라며 총관에게 행패 부리던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렇기에 총관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두신 계획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최대한 발을 맞춰보겠습니다.”

천신우는 준비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 총관은 몇 번이나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내 천신우의 이야기가 끝나자 총관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무엇보다 대공자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제가 하려는 겁니다. 대공자라서 위험하고 궂은일을 피하기만 한다면, 누가 천씨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겠습니까.”

“……!”

총관은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치밀어 오름을 느끼며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천신우의 눈은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