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학사환생 030화
쇠창살 안쪽.
시체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분명 살아 있었다.
간헐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으니까.
“이봐요.”
“!”
천신우의 목소리에 쇠창살 안의 여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꿈틀거렸다. 부르튼 입술에서 알아듣기 힘든 신음이 흘러나온다.
천신우로선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
그럼에도 상대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녀는 유설화와 너무도 닮았기에.
‘정확히는 닮았었다고 해야겠지.’
분명 예전엔 유설화와 판박이였겠지만 지금은 사뭇 달랐다.
핼쑥하게 들어간 뺨과 부어오른 눈두덩이. 얼마나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손톱은 전부 빠져 있다.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군.’
천신우는 다른 방향의 통로를 조사하던 유설화를 불렀다.
황급히 달려온 유설화는 사촌여동생을 보더니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설아야……!”
그녀가 쇠창살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천신우는 조용히 자운검을 뽑아 들었다.
“비켜요.”
스가각!
자운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쇠창살은 수수깡처럼 잘려 나갔다.
천신우의 괴력에 놀랄 새도 없이 유설화는 석실 안으로 들어가 사촌여동생을 살폈다.
“흐흐흑.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유설화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촌여동생.
그녀가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으니까…….”
유설화는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천신우는 바로 내용물이 뭔지 알아봤다.
‘생명단이군.’
유가장은 무공보다도 의술로 유명한 전통의 문파다.
그런 유가장 비전의 치료약이 바로 생명단이었다.
‘죽어가는 이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하여 생명단이라 불리지.’
마교와의 전쟁 당시, 무림맹 요인들에게만 보급됐을 정도로 귀한 약재이기도 했다.
천신우는 유설화가 물에 녹인 생명단을 환자의 입에 넣는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제갈휘도 숨죽이고 지켜본다.
마침내 환자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일단 급한 고비는 넘긴 것이다.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가기까진 시간이 걸리겠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유설화.
제갈휘도 참았던 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천 아우. 저쪽에도 생존자들이 있네.”
천신우는 제갈휘와 함께 살아 있는 실종자들을 구해냈다.
생존자들은 유설화의 사촌동생 유설아까지 합해 17명.
실종된 인원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였다.
제갈휘가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이들 외에 납치된 다른 사람들은 죽은 듯싶네. 대체 어떤 자들이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천신우도 제갈휘의 감정에 공감했지만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지요. 생존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물론이네. 서두르지.”
위에서 대기하던 호위무인들이 생존자들의 구출을 도왔다.
“일단 다들 응급처치는 했어요.”
사촌여동생에 이어 생존자들을 돌보느라 지친 유설화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어요. 이제 여기서 잠시 기다리지요.”
절명곡 작전의 책임자인 패검단주 모용훈이 현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후 조치도 그에게 맡기면 되리라.
천신우가 동굴 밖으로 나와 적당한 곳에 앉아 있는데 유설화가 다가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질끈 묶으며.
“아까는 경황이 없어 말을 못했는데 정말 고마워요.”
평소 접근해 오는 후기지수들을 냉랭한 표정으로 대했던 그녀다.
하지만 지금 천신우를 바라보는 유설화의 얼굴은 그때와는 정반대였다. 이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나 싶을 정도로.
“동생은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유설화의 표정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죽었을 거라 반쯤 체념한 사촌여동생과 다시 만났으니 기쁠 수밖에.
“다행이네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진 못했어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사실 천신우는 실종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마교는 절명곡에서 납치한 무인들을 상대로 실험을 진행했지.’
구체적인 실험내용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럼에도 진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사실 말할 수도 없지.’
지금 마교가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천신우는 암살당하고 결국 무림은 예정대로 마교의 발밑에 놓일 것이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전생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때도 마교의 움직임을 감지한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엔 무림맹 고위층도 있었지.’
하지만 그들의 의견은 공론화되지 못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마교에서 손을 썼기 때문이다.
‘마교는 이미 무림 곳곳에 뿌리를 뻗어놓은 상태. 힘을 키우지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마교를 언급했다간 살아남지 못한다.’
그렇다고 오늘 소득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종자들을 구했고 마교의 계획에 훼방을 놓았다.
‘오늘 일로 인해 마교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겠지.’
지금은 그것으로 족했다.
뒤따르는 명성이야 덤으로 생각하면 되겠지.
“그리고…….”
유설화는 아직 할 말이 남은 얼굴이었다.
“사과를 받아주시겠어요?”
“뭘 말입니까?”
“헛소문 따위를 곧이곧대로 믿고 천 공자에게 선입견 가졌던 거. 진심으로 미안해요.”
헛소문이 아니라 진실이지만 굳이 정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거.”
유설화가 공손히 건넨 것은 약병에 담긴 생명단이었다.
“설아의 목숨을 구해주신 보답이에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천신우는 사양 않고 생명단을 받아 챙겼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제고 요긴하게 사용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천신우를 바라보는 유설화의 눈가에 미소가 스쳤다.
* * *
현장에 도착해 상황을 보고받은 패검단주 모용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최악의 경우 실종자 전원이 사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다.
일부라도 살아남았다니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그렇다고 위안이 되진 않았지만.
“구출한 생존자들은 부상자들과 함께 조심해서 후송하고. 이곳에 남아 있는 단서들은 빠짐없이 수거하여 옮기도록.”
후속조치를 지시한 모용훈이 천신우를 치하했다.
“어쨌든 정말 고생 많았네. 앞서 전투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천 공자의 공이 아주 크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겠네.”
그는 천신우가 작성한 보고서를 휙휙 넘겨보며 덧붙였다.
“그나저나 이건 그냥 이대로 무림맹에 올려도 되겠는데?”
천신우는 대답 대신 속으로만 미소 지었다.
그럼 내가 누군데.
무림맹에서 10년 가까이 학사로 근무한 천신우다.
보고서 작성쯤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 * *
절명곡 사건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막을 내렸다.
물론 천신우가 기억하는 전생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절명곡을 무대로 활동하는 한림표국이 정상화됐으며.
유설화의 사촌여동생을 포함해 17명의 생존자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팽우경이 엄청난 비난을 받고 하북팽가에 항의가 쏟아진 것도 전생과 달라진 점이었다.
‘팽우경은 다시는 예전과 같은 힘을 찾지 못할 것이다.’
설령 생명단을 복용하더라도.
물론 팽우경이 힘을 회복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 한 가지의 방법이 존재했다.
‘만일 팽우경이 그 방법을 택한다면…….’
천신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땐 누가 말리더라도 팽우경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그나저나 피곤하군.’
강행군을 계속해서인지 몸이 확실히 무거웠다.
생각 같아선 천씨세가로 돌아가서 느긋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멀리까지 나온 김에 해결할 일들이 있었기에.
‘드디어 단심회의 비밀금고에서 확보한 자금을 사용할 때가 왔군.’
전에 열어본 비밀금고엔 기대 이상의 자금이 들어 있었다.
다만 진귀한 영약이나 보물은 찾지 못했다.
‘아쉬워할 필요는 없지. 돈을 주고 구입하면 되니까.’
정말 진귀한 영약과 보물은 천금으로도 손에 넣지 못한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이맘때쯤 열리는 비밀경매.’
천신우는 그곳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들일 생각이었다.
워낙 고가의 물품들이 거래되는 비밀경매이니만큼 탐나는 물건들이 많겠지만.
이미 천신우의 표적은 정해져 있었다.
‘청빙환.’
청빙환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내공을 축적시켜주는 영약이다.
하지만 청빙환의 진정한 가치가 알려지는 건, 지금으로부터 5년이 지나서다.
‘청빙환은 신단수 뿌리와 함께 달여 먹을 경우, 효과가 2배가 되지.’
신단수 뿌리에 청빙환의 흡수를 돕는 약효가 있기 때문.
다만 신단수 자체의 독성이 매우 강해 충분한 내공을 갖춘 후에 복용해야 한다.
천신우가 지금까지 청빙환 구입을 미룬 이유이기도 했다.
천신우는 마차를 모는 무인에게 일렀다.
“송산으로 가지.”
송산은 대나무가 많이 나는 지방으로 이번에 비밀경매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송산 말씀이십니까?”
무인이 의아하게 물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래.”
“모시겠습니다.”
무인은 더는 토를 달지 않고 다시 마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 * *
송산에 도착하자마자 천신우는 객잔을 잡고 호위무인들에게 넉넉하게 돈을 쥐여줬다.
“혼자 다녀올 곳이 있으니 눈치 보지 말고 쉬어.”
그럴 수는 없다는 호위무인들을 간신히 떼어내고 상점가로 나온 천신우다.
직접 경험한 적은 없다.
하지만 비밀경매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는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무림맹 보고서에서 읽었기에.
‘사실 무림맹 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은 정보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천신우는 상점가 구석진 곳에 위치한 포목점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점원이 그를 친절히 응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
천신우는 기억해 낸 암구호를 말했다.
“붉은 비단 12필과 푸른 비단 22필을 주게.”
원래 이렇게 말하면 한번 보시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미리 약속한 대화가 진행되는 식이다.
하지만 더벅머리 점원은 멀뚱멀뚱 천신우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푸른 비단을 22필씩이나요? 죄송하지만 없는데요.”
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