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학사환생 029화
순간 주위에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직접 듣고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모두가 기억하는 팽우경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이 있었기에.
“험험.”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연장자인 패검단주 모용훈이었다.
그제야 후기지수들도 콧등을 문지르거나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돌린다.
물론 팽우경의 나약한 모습은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선명히 기억된 후였다.
“부상의 여파가 심한 모양이군. 당장 한림표국에 지원을 요청해 부상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게. 그리고…….”
모용훈이 천신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보다시피 사상자가 너무 많아. 조사를 위해 많은 인원을 파견하기 힘드네.”
“인원이 부족하다면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때를 놓칠지도 모르니까요.”
모용훈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천신우의 의견이 옳았다. 패퇴한 적들은 흔적부터 지울 것이다.
“알겠네. 지원자 위주로 조사대를 꾸려보지.”
“감사합니다.”
모용훈이 상태가 멀쩡한 후기지수들을 모아두고 설명했다.
“이상이네. 혹시 자원할 사람 있나?”
“제가 가겠어요.”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유설화였다. 아직 사촌여동생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으니 예상된 반응이었다.
그녀에 이어 제갈휘까지 천신우 곁에 섰다.
“저도 가지요.”
“이런. 다들 그렇게 가버리면 여기 수습은 누가 하나.”
모용비의 물음에 천신우와 제갈휘는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모용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도저히 당해내질 못하겠군. 알겠네. 여긴 걱정 말고 다녀오게.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아직 놈들의 잔당이 남아 있으니 말이야.”
세 사람 외에 더 이상의 지원자는 없었다.
이제 후기지수들도 깨달은 것이다. 실전의 무서움을.
결국 조사대는 천신우와 제갈휘, 그리고 유설화로 구성됐다.
거기에 그들이 속한 문파의 무인들이 더해졌다.
“다녀오겠습니다.”
제갈휘가 조사대를 대표해 고개를 숙이자 모용훈이 격려를 건넸다.
“조심하게.”
이어 천신우를 바라보는 모용훈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모용훈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천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워 있는 부상자도, 그를 돌보던 무인도, 하나같이 천신우를 힐끔거렸다.
특히 남궁세미는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천신우는 그대로 지나쳤다.
“갑시다.”
그렇게 천신우 일행이 협곡을 떠나 3번길로 향한 그때.
팽우경이 뒤늦게 의식을 되찾았다.
“쿨럭!”
피를 토해낸 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온몸에서 격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
“여긴?”
그를 돌보던 하북팽가의 무인이 대답했다.
“아직 절명곡입니다.”
팽우경은 기절하기 전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떨어지는 바위를 쪼개고 협곡 위로 뛰어올라 괴인들을 쓰러뜨린 것까진 기억난다. 강한 적이 등장해 무인들을 쓸어버리던 광경도 생생하다.
그런데 이후의 상황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술에 잔뜩 취해 잠들었다가 막 깨어났을 때처럼.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팽우경이 물었다.
“적들은?”
“대부분 제압했지만 일부가 달아나 현재 추격 중입니다.”
뒤늦게 패검단주 모용훈을 발견한 팽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 대협이 상황을 정리한 건가.’
걱정이 사라진 팽우경은 한결 여유로운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그을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협곡에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괴인들만큼이나 아군의 시체도 많았다.
‘한심한 놈들.’
죄책감 따윈 없었다. 여전히 팽우경은 1번길로 선회한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 여겼기에.
‘그나저나 통증이 너무 심하군. 설마 나도 놈에게 당한 건가?’
압도적인 힘으로 세가 무인들을 썰어버리던 사내를 떠올린 팽우경이다.
아마도 자신은 사내와 싸우다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상대는 정말이지 굉장한 고수였으니까.
물론 궁금하다고 아무한테나 물어볼 수는 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던 팽우경은 한참 만에 황보도준을 발견했다.
알아보는 데 오래 걸린 이유가 있었다. 황보도준은 수염이 홀라당 타고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린 상태였기에.
“도준아.”
“아아. 형님.”
대답하는 황보도준의 태도는 평소와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다.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던 녀석인데.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함이 느껴진다.
“어째 대답이 늦다?”
바로 험악해지는 분위기.
황보도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형님.”
넙죽 고개까지 숙이는 모습.
기분이 한결 나아진 팽우경이었지만 황보도준의 속내는 달랐다.
‘센 척은. 방금 전까지 때리지 말라며 울먹이던 주제에.’
그렇다고 대놓고 팽우경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형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물론이지. 아주 멀쩡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황보도준의 머릿속으로 다시금 방금 전의 광경이 떠올랐다.
양팔로 얼굴까지 가려가며 울먹이던 팽우경의 모습을 어찌 잊겠는가.
“그게…….”
주위의 이목이 집중됐다.
우물쭈물하는 황보도준과 근엄한 표정의 팽우경.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말았겠지만 오늘만큼은 반응이 달랐다.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거나 어색하게 헛기침을 내뱉는 후기지수들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황보도준이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천신우가 괴인들을 제압했습니다. 이후에 모용 대협께서 상황을 수습하셨고요.”
사실 황보도준 입장에선 최대한 팽우경을 배려한 것이었다. 팽우경의 굴욕적인 모습은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천신우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팽우경은 갑자기 벼락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물론이다.”
가까스로 대꾸하면서도 팽우경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째서 온몸에 오한이 드는지.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지.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 * *
절명곡 3번길 부근의 바위산.
가장 앞서가던 천신우가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허어…….”
제갈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지간해선 발견하기 힘든 위치에 통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군. 이걸 어떻게.”
괜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제갈휘를 납득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습니다만. 달아난 괴인들이 남긴 흔적을 보니 확신이 들더군요.”
잠시 기억을 더듬은 제갈휘가 무릎을 쳤다. 천신우의 주장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그래! 확실히 그들이 남긴 흔적은 3번길 방향으로 편중돼 있었지.”
평소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예 흔적 자체를 남기지 않았겠지.
하지만 우두머리 추혼객이 죽고 괴인들 상당수가 제압당한 상황. 서둘러 흔적을 없애야 한다는 조급함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가시지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천신우는 바위산에 가려진 통로를 따라 기척을 숨기며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멀리 수풀에 가려진 동굴이 나타났다.
천신우가 곧장 비수를 꺼내 날렸다.
휙휙휙!
거의 동시에 수풀에서 털썩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보초들을 제압한 천신우가 자세를 낮추며 동굴을 향해 전진했다.
“…….”
감탄할 새도 없이 뒤따르는 제갈휘와 유설화였다.
* * *
소리 없이 동굴을 걷던 천신우가 멈춰 섰다.
천신우와 제갈휘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동굴 안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의 수를 손가락으로 표시했다.
10명 남짓.
아까 협곡에서 놓친 괴인들의 숫자보다 훨씬 많다.
‘원래 이곳을 지키던 놈들도 있을 테니까.’
적들의 수준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다.
애초에 놈들의 우두머리인 추혼객을 쓰러뜨린 천신우다. 적어도 절명곡에 남아 있는 적들 중엔 적수가 없었다.
‘문제는 인질.’
동굴 안쪽으로 난입하는 순간 괴인들이 생존자를 노릴 수도 있었다.
‘전생엔 이곳에서 실종자들의 흔적도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나마 찾아낸 실종자들도 이미 사망한 후였지.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이른 시점이니 생존자가 남아 있을 거야.’
천신우는 제갈휘와 상의해 역할을 분담했다.
통로가 넓지 않아 모든 인원이 한꺼번에 난입하기란 불가능했다.
호위무인들이 퇴로를 확보하는 동안, 제갈휘와 유설화는 천신우를 도와 괴인들을 제압하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이윽고 천신우가 심호흡을 하며 펴고 있던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셋, 둘, 하나!
천신우가 비수를 날리며 정면으로 쇄도했다.
휙휙휙!
동시에 천신우 좌우로 제갈휘와 유설화가 흩어지며 검을 휘둘렀다.
솨아악!
픽픽픽!
비수에 급소를 저격당한 괴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모두가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다.
천신우가 질주하는 방향에 서 있던 사내는 뒤돌며 벼락처럼 검을 내질렀다.
기척을 감지하고 검을 뽑는 과정이 한 호흡에 이뤄졌다.
그러나 천신우의 움직임이 반 박자 빨랐다.
날아드는 검을 스쳐 가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힌 다음.
푸욱!
복부에 자운검을 쑤셔 넣자.
“……!”
믿기지 않는 눈으로 천신우를 노려보던 사내가 그대로 절명했다.
천신우는 사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갈휘와 유설화 역시 맡은 괴인들을 깔끔하게 처리한 후였다.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내부를 돌아보았다.
괴인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문서들이 눈에 띄었다.
내용을 확인했지만 마교 계획의 핵심이 담긴 문서는 없었다.
‘하긴 그런 기밀을 여기 보관할 리가 없지.’
전생에서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절명곡 사건의 숨겨진 내막이 밝혀졌었다.
‘그건 그렇고 실종자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린 끝에 천신우는 바닥에 깔린 가죽덮개를 찾아냈다.
‘저기 있군.’
무림맹 보고서에 따르면 이곳 지하에서 실종자들을 가둬둔 감옥이 발견됐다.
물론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는 없으니 연기가 필요했다.
벽과 바닥에 번갈아 귀를 갖다 대던 천신우가 손을 들며 제갈휘를 불렀다.
“형님. 이쪽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데요?”
제갈휘보다도 유설화가 빨리 달려왔다.
가죽덮개를 치우자 육중한 철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할게요.”
천신우는 유설화의 도움을 마다하고 철판을 들어 올렸다.
철판 밑에 숨겨져 있던 것은 인공적으로 파 내려간 공간이었다.
제갈휘가 구석에서 찾아낸 사다리를 가져왔다.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거대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에서 다시 사방으로 통로가 뻗어져 나간다.
천신우가 재차 벽에 귀를 갖다 댔다.
멀리서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앞서 괴인들의 것과는 달랐다.
지치고 굶주린.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숨결이었다.
벽에 걸려 있던 횃불을 챙겨 든 천신우가 통로를 따라 걸었다.
일렁이는 불빛이 통로 양쪽으로 쇠창살로 막아놓은 석실을 비췄다.
비어 있는 방이 많았지만 간혹가다 시체가 방치된 방도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이다. 미처 처리 못한 거겠지.’
그렇게 십여 개의 방을 지나쳤을 무렵.
천신우가 우뚝 멈춰 섰다.
쇠창살 안쪽을 바라보는 그의 입에서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