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학사환생 026화
“다들 알다시피 1번길은 양쪽이 협곡에 둘러싸인 형태입니다. 적이 협곡 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습격해 오면 대처가 어렵지요. 그뿐만 아니라 중간에 샛길도 없어 퇴로를 봉쇄당하기도 쉽고요.”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정론이다.
생존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작성된 무림맹 보고서에 따르면, 제갈휘도 상당히 유사한 의견을 냈었다.
그럼에도 채택되지 않았던 이유는 팽우경의 고집 때문.
그러나 지금 팽우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침묵하는 중이다. 움켜쥔 주먹만이 파르르 떨리는 가운데.
모용비와 제갈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 있는 의견이야. 그럼 대안은?”
천신우는 미리 생각해둔 계획을 차분히 설명했다.
“먼저 2번길과 3번길로 인원을 나누어 조사한 다음. 만일 단서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모두 함께 1번길을 수색하면 좋을 듯합니다. 물론 그때는 협곡 위쪽의 수색도 동반되어야겠지요.”
사실 1번길을 조사할 필요조차 없다.
3번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놈들의 근거지가 숨겨져 있으니까.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정확한 위치를 기억하는 천신우였다.
‘전생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해가며 알아낸 장소다.’
이번에 천신우가 실패한다면 또다시 희생이 되풀이될 것이다.
‘절대 그렇게 되게 놔두지 않아.’
그러려면 먼저 모두를 설득해야 한다.
천신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사실 모용비나 제갈휘를 설득하는 거야 어렵지 않다.
세가지연 당시 충분히 친분을 쌓아놨으니까.
팽우경 역시 혼쭐을 내준 탓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천신우가 모용비와 동행한 고수를 돌아보았다.
정돈된 자세. 깊은 눈빛.
확실히 후기지수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때마침 모용비가 상대의 조언을 구했다.
“단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후기지수들이 경험 많은 대주급 무인과 동행한 데 비해. 모용세가는 모용비에게 대주보다 높은 단주급 무인을 붙여줬다.
천신우도 그가 누군지 알았다.
‘모용세가 패검단주 모용훈.’
전생에서도 절명곡 실종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움직였던 인물이다.
‘당시 모용훈은 주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후기지수들에게 조사를 일임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모용비에게 힘을 실어줘서 전공을 쌓게 해주려는 의도도 있겠지.’
사실 지금 시점에선 모용훈뿐만 아니라 오대세가의 수뇌부 모두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마교가 개입한 건지 꿈에도 모르니까.
‘어쨌든 여기서 모용훈이 반대하면 피곤해지는데.’
다행히 모용훈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괜찮아 보이네. 그렇다고 팽 소협의 의견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야. 명문세가의 무인이라면 자고로 저런 패기 정도는 있어야 하는 법이지.”
팽우경의 자존심까지 챙겨주는 모습이 과연 무림세가의 어른답다.
모용훈이 뒤로 물러나자 모용비가 다시금 손뼉을 부딪쳤다.
“그럼 지금부터 인원을 나누지.”
모용비를 조장으로 하는 1조.
팽우경이 조장인 2조.
천신우는 제갈휘가 조장인 3조에 편입됐다.
‘유설화는…… 2조군.’
하북팽가와 유가장의 우호적인 관계를 감안해 그렇게 편성한 듯했다.
정작 유설화는 팽우경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지만.
“다들 주의사항은 충분히 숙지했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신호탄을 쏘아 올려.”
“알았네.”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제갈휘와 달리 팽우경은 성의 없게 고개만 끄덕였다.
모용비가 모두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럼 여기서 갈라지지. 모두 행운을 비네!”
1번길은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했으니 조사할 곳은 2번길과 3번길.
먼저 2번길은 모용비의 1조가 조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3번길은 팽우경의 2조와 제갈휘의 3조가 구역을 나눠 조사하기로 결정됐다.
3번길은 워낙 갈림길이 많고 지역이 넓어 조사인원도 그만큼 많이 필요했기 때문.
“우리는 3번길이군.”
3조 조장을 맡은 제갈휘가 천신우를 시작으로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절명곡은 초행일 테지. 설령 와본 적이 있더라도 1번길을 이용했을 거고.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는데 이곳 지리를 알고 있는 사람 있나?”
천신우는 주위를 돌아봤다.
과연 후기지수들과 대주급 무인들은 물론이고. 호위무인들 역시 반응이 없다.
‘당연하겠지. 이번 실종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진 1번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으니까.’
사냥꾼이나 약초꾼이 아니고서야 3번길을 이용할 일이 없는 것이다.
“역시 없군.”
제갈휘는 예상했다는 반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길안내는 전문가에게 맡길 생각이네. 채 표사.”
뒤에서 대기하던 한림표국의 표사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무림의 젊은 영웅들을 안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혹시라도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질문해 주십시오.”
물론 절명곡 지리에 밝은 한림표국 표사라도 3번길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진 못하다.
그래서 그는 사냥꾼과 약초꾼 몇을 수배해 길잡이로 삼았다.
길잡이들이 앞장서는 가운데 시작된 조사.
천신우는 머릿속으로 지도상의 위치를 떠올렸다.
‘처음부터 그곳을 목적지로 정하고 움직이면 편하겠지만 남들을 납득시킬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미래를 안다고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유도하면 되겠지.’
천신우는 제갈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초행인 건 변하지 않는다.
한눈팔다간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저벅저벅.
경사진 협로를 따라 걷던 제갈휘가 주의를 줬다.
“조심하게. 길이 험해 발을 헛디디기 쉬우니.”
“형님도 조심하시지요.”
대꾸하는 천신우의 눈이 빛났다.
‘여기다!’
드디어 근거지로 통하는 길목을 발견한 것이다.
‘바위산에 가려져 있다더니 과연 위치가 절묘하군.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겠어.’
현지인 길잡이들도 모르고 지나갈 정도니.
‘이제 남은 것은 자연스럽게 이 사실을 알리는 일뿐.’
천신우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퍼퍼퍼펑!
반대편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다른 후기지수들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하늘로 올라가는 붉은 연기가 보인다.
습격당했다는 신호.
방향으로 미루어 신호탄이 쏘아진 위치는 1번길이었다.
‘설마…….’
천신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팽우경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껏 전생과 다르게 조사계획을 바꿔놨건만. 기어이 그놈이 일을 벌인 건가.’
물론 현장에 가보지 않고선 모를 일이었다.
천신우는 걸음을 돌리려다 근거지로 통하는 길목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돌아서면 저곳에 있는 단서들을 확보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천신우는 미련을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먼저지.’
사실 팽우경이나 황보도준은 죽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특히 유설화는 반드시 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마교와의 전쟁에 필요한 인재니까.
때마침 제갈휘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문제가 생긴 듯싶네. 아무래도 일단 돌아가야겠어.”
모두들 동의를 표하는 가운데 천신우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제갈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천신우는 그대로 절벽을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신호탄이 쏘아진 방향으로 달려가는 천신우!
지켜보던 후기지수들과 무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렇게 빠를 수가……!”
어느새 후기지수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천신우였다.
서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모용비와 패검단주 모용훈은 합류가 늦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조사하는 2번길은 신호탄이 쏘아진 지점과 상대적으로 멀었다. 천신우가 있는 3번길에 비해.
게다가 전생과 달리 조사단이 3개의 조로 나눠진 상태.
한시라도 빨리 지원하지 않으면 전멸할지도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과거로 돌아온 이래 지금처럼 답답한 적은 처음이었다.
답답함을 떨쳐내듯 천신우가 바닥을 박찼다.
열 걸음도 넘는 거리를 날아 반대편 절벽을 향해 팔을 뻗었다.
터억!
손을 걸치는 순간.
투두둑!
체중을 견디지 못한 지반이 무너져 내렸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천신우는 이미 몸을 날려 안전한 곳에 착지한 후였다.
‘원래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이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단축하는 수밖에.’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천신우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 *
1시간 전쯤.
길잡이들도 제쳐놓고 앞장서서 걷던 팽우경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뒤따르던 황보도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형님?”
팽우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이건 바보 같은 짓이다.”
“무슨 뜻입니까?”
“너도 봤겠지. 여긴 약초꾼 나부랭이나 지나다니는 길이다. 이런 곳에서 무슨 단서를 찾느냔 말이다.”
황보도준은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모용비 그놈이 천신우와 짜고 개수작을 부렸어. 나를 3번길로 내몰고 혼자서 가능성이 높은 2번길을 조사해 전공을 독차지할 셈이겠지.”
“하지만…… 형님은 1번길로 가야 범인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지금 1번길로 가려는 거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어차피 단서를 발견하지 못하면 1번길을 조사하기로 하지 않았더냐. 헛수고를 더는 것뿐이야.”
팽우경은 동의도 구하지 않고 돌아섰다.
당연히 수습은 황보도준의 몫이었다.
“들으셨다시피 경로를 바꾸려고 합니다.”
이미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팽우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강요는 하지 않아.”
범인들이 누구든 하북팽가의 무인들만으로도 당해낼 자신이 있었다.
얼마 전에 천신우에게 당한 부상도 엄청난 돈을 들여 거의 회복한 상태.
물론 그때의 정신적 충격은 여전히 팽우경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내가 흥분만 하지 않았어도 묵사발을 내줬을 텐데.’
자위한들 짓밟힌 자존심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이번에 공을 세워 주위의 평가를 바꿔야 한다.’
그런 다음 기회를 봐서 천신우를 박살 내주리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 팽우경 뒤로 다른 후기지수들과 무인이 뒤따랐다.
하북팽가와 팽우경 눈치를 보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들 역시 3번길을 수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가장의 유설화조차 같은 생각이었다.
‘방식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확실히 이러는 게 시간낭비는 덜하겠지.’
결과적으로 팽우경의 예측은 옳았다.
그들이 1번길에 들어서고 얼마나 지났을까.
협곡 위에서 일단의 괴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명백한 적의였다.
그럼에도 앞장서던 팽우경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도를 뽑아 들었다.
“개뼈다귀 같은 놈들.”
팽우경이 뒤를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내가 여기가 놈들의 본거지일 거라고 했지!”
그러나 황보도준은 웃고 있지 않았다.
“형님! 저길 보십시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던 팽우경이 눈을 부릅떴다.
“……!”
쿠구구구궁!
굉음과 함께 공처럼 둥근 바위들이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구름도 없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다.
하늘을 빽빽하게 메운 것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바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