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학사환생 024화
천신우가 내미는 계약서를 천무진은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석가장 이놈들 제정신인가?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혀서 이따위 계약을?’
무림에서 모든 종류의 계약은 힘의 논리로 결정된다.
압도적인 힘을 갖춘 문파가 아니라면 이렇게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은 불가능했다.
‘여기 도장을 찍었다간 처가에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아.’
차라리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때려치울까.
“형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렇게 운을 띄우면서 천무진은 형의 눈치를 살폈다.
가주 천무흔은 덤덤하고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우유부단하단 뜻이기도 했다.
그런 천무흔의 성격이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장로 천패극과의 권력다툼이었다.
천패극이 점점 영향력을 키워감에도 천무흔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만일 당시 형님이 과감하게 대처했다면 숙부도 그렇게 쉽게 세가를 장악하진 못했을 것이다.’
천무진과 여동생 천무혜가 무리한 요구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천무흔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지 못했고 결국 재산을 나눠주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은 가주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동생들과 매제가 버릇없이 날뛰는데 제대로 제지조차 하지 않는 꼴이라니.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소. 없던 일로 합시다.”
천무진은 확신했다. 이렇게 말해도 천무흔은 밀어붙이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지금 눈앞의 천무흔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동생과 매제가 날뛰는 것을 보고도 천무흔이 가만히 있던 것은 천신우의 역량을 믿었기 때문.
과연 천신우는 기대에 부응했다.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천무진과 강한성을 입맛대로 요리한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천무흔 스스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말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천무진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천무흔이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자 복도로 통하는 문들이 드르륵 열리며 천씨세가의 정예무인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천무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지금 협박하는 거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어떻게 형님이 나한테…….”
“나는 형이 아니라 가주로서 너와 거래를 논의했다. 따라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천씨세가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천무진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진심이오? 진정 감당할 자신 있소?”
처가인 정검문을 믿고 마지막으로 배짱을 부려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천무흔의 의중을 헤아리고 거리를 좁혀오는 무인들.
팽팽한 긴장감을 견디다 못한 천무진이 결국 꼬리를 내렸다.
“잠깐! 알겠소. 알았으니까 여기까지 합시다.”
천무흔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신우가 붓을 건넸다.
“숙부님. 붓은 여기 있습니다.”
“……고맙다.”
천무진은 붓을 잡았다.
계약서를 보고 있자니 눈앞이 하얘진다. 유산을 챙기려 왔다가 오히려 돈을 뜯기게 될 줄이야.
“계약은 일단 단발성으로 하고 추가거래에 대해선 나중에 논의해도 되겠소?”
천무진이 내건 최후의 안전장치였다. 이렇게 하면 그나마 손실이 줄어든다.
처가에서 한소리 듣겠지만 쫓겨날 정도까진 아닌 것이다.
“그렇게 해주마. 어차피 네 역량으론 그 정도가 한계일 테니.”
천무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형은 그가 처가에서 어떤 위치인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여기 있소.”
계약서를 돌려주며 천무진은 손아귀가 축축하게 젖어 있음을 느꼈다.
지금껏 형을 상대하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마치 한 마리 맹수 같구나.’
맹수는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지금 형의 모습이 그러했다.
비로소 천무진은 깨달았다. 천무흔이 마침내 맹수의 본능을 자각했음을.
그때, 남편에게 끌려 나갔던 천무혜가 돌아왔다.
밖에 나가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녀는 아까보다 훨씬 얌전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술자리 분위기도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도열한 무인들.
그 사이에 위축된 표정의 천무진.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전에 없이 위압적인 모습의 천무흔이었다.
“너희도 와서 앉아라.”
강한성이야 당연하고 천무혜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녀라고 눈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까진 혈육의 정을 생각해서 너희의 오만방자한 행동을 지켜보았다만. 이 시간부로 천씨세가의 일에 개입하려 든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뭐라 입을 열려던 천무혜는 천무흔의 싸늘한 시선을 받자 눈을 피해버렸다.
오빠가 저렇게 변한 데다 방패 역할을 해줄 남편마저 쭈그러든 상황.
아무리 제멋대로인 천무혜라도 입을 다물고 천무흔의 선언을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천무진과 천무혜 남매에겐 가시방석이었을 자리가 끝나고.
천신우만 남은 그곳에서 천무흔이 입을 열었다.
“아비로서 못난 모습만 보이는구나. 모두가 내가 부족한 탓이다.”
천무흔은 다짐하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앞으로는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네게 물려줄 천씨세가는 지금과는 다를 것이야.”
사실 이미 천씨세가 내부의 문제는 모두 정리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권을 휘두르던 장로원이 무너졌으며.
각종 비리를 척결하고 새로운 제도를 확립했다.
호시탐탐 천씨세가에 개입할 기회를 노리던 친척들에게도 일침을 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후환거리가 아주 없진 않았다.
“둘째와 막내 모두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다. 언제고 다시 문제를 일으키겠지. 그때는 분명 인척들까지 동원할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정검문 정도의 문파는 우리 천씨세가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든든하구나. 절명곡 조사 건도 걱정할 필요 없겠어.”
천신우가 눈을 빛냈다.
무림에서 오랜 세월 모습을 감췄던 마교가 처음으로 개입한 절명곡 사건.
전생에선 서류로만 참상을 전해 들었지만 이번엔 직접 개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네가 부담된다면 절명곡 조사는 동생에게 맡기고…….”
“제가 하겠습니다.”
절명곡에서 희생당할 수많은 무인들을 구하기 위해선 천신우가 직접 가야 했다.
‘전생에서 밝혀진 내막에 따르면 절명곡 사건은 단순한 실종사건이 아니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거기에 더해 현재 시점에서 마교가 보유한 전력을 확인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절명곡 사건에 투입된 무인들은 마교 직속이 아니긴 하지만.’
이미 마교는 무림 곳곳에 퍼져 있다.
전생에서 절명곡 사건을 주도한 이들은 바로 마교의 추종자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마교에 충성을 맹세한 자들.
물론 그들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천무흔은 흐뭇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오냐. 그럼 그렇게 알고 있으마. 다른 문파들의 명단은 확보하는 대로 전해주겠다.”
“감사합니다.”
사실 천신우 입장에선 명단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절명곡 사건 조사에 투입되는 무인들의 명단이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들 중에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았는지조차 기억하고 있는 천신우였다.
‘절명곡은 오대세가의 영역. 전생에선 오대세가를 주축으로 문파마다 일정인원을 차출했다. 부득이하게 불참한 문파에선 자금과 물자를 지원했고.’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절명곡 실종사건을 조사하려 투입됐던 무인들이 참사를 당하면서다.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절명곡으로 출발하는 것은 앞으로 보름 후.
그전에 장로원에서 얻은 단서를 통해 천무검법을 9성까지 익히는 것.
천신우가 설정한 목표였다.
물론 그것 말고도 할 일은 많았다.
“아버님. 이제 세가 내부도 안정됐으니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기대감을 갖고 천신우를 바라보는 천무흔.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풍경이었다.
“한수 지역에 본격적으로 세가의 영역을 구축했으면 합니다.”
“한수 지역이라.”
한수는 강을 끼고 있는 데다 사방으로 트여 있어, 그곳을 장악하면 외부로 진출이 용이했다.
천씨세가의 지배영역을 넓힐 발판인 셈이다.
“전대 가주님들께서도 한수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지.”
천씨세가의 세가 커지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
그들은 온갖 술수를 부려가며 천씨세가의 세력확장을 막았다.
그렇게 진척이 없다가 천무흔 대에 와서는 세가 내부의 상황까지 겹치면서 흐지부지된 상황이었다.
“맡겨만 주신다면 절명곡 사건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소자가 추진해 보겠습니다.”
“좋다. 네가 돌아오기 전에 기반이라도 닦아놓으마.”
“감사합니다!”
천신우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 * *
어느덧 보름이 흘렀다.
천씨세가를 강타했던 폭풍의 흔적이 서서히 옅어질 무렵.
“드디어……!”
천신우는 수련의 성과를 확인했다.
천무검법 9성에 도달한 것이다.
아버지조차 이뤄내지 못한 경지.
심지어 무공비급이 없음에도 일궈낸 성과였다.
물론 요행은 아니었다. 천신우의 천재성에 장로들이 남긴 기록이 더해진 결과였다.
기쁜 얼굴로 개인연공실을 빠져나온 천신우를, 그보다 훨씬 환한 얼굴로 동생 천신혁이 맞았다.
“형님! 축하드립니다!”
말하지 않아도 형제 사이엔 통하는 것이 있는 법.
천신혁은 천신우가 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고맙다.”
천신우는 동생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수련하느라 바쁘셔서 얼굴도 제대로 못 뵈었는데, 내일 절명곡으로 떠나신다니. 솔직히 섭섭합니다.”
“하하. 그럼 오늘 함께 술이라도 마시면 되지 않겠느냐.”
“정말이십니까?”
천신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럼. 오랜만에 형제끼리 술잔을 부딪쳐보자꾸나.”
“이럴 때가 아니지.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좋은 술을 받아오겠습니다!”
잔뜩 들떠서 가주 천무흔을 찾아가는 천신혁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천신우가 고개를 돌렸다.
천씨세가 무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감찰단주로 임명된 진충이 추천해 준 무인이었다.
“알아봤어?”
“말씀하신 인상착의의 노인을 봤다는 증언은 여럿 확보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풍뢰권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풍뢰권은 전생에서 권왕의 스승이었던 무림고수.
권왕의 잠재력을 폭발시키고 세가 무인들을 성장시키려면 그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제보해 온 지역이 각각 어떻게 되지?”
무인의 보고를 들은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춘 지역으로 범위를 좁혀보도록.”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전생의 행보를 돌이켜 보면, 풍뢰권이 있을 곳은 조춘 주변일 가능성이 높았다.
“알겠습니다.”
그가 물러가자 천신우는 다른 무인을 불렀다.
“운경은 요즘 어떻게 지내?”
운경은 권왕의 이름이었다.
“예전 그대로입니다. 사냥으로 생계를 꾸리고 남는 시간엔 수련을 하며 보냅니다.”
“그렇군.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켜보도록.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도 잊지 말고.”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고서야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얼음을 녹이는 것과 같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도 햇빛을 비추다 보면 녹아내리듯 언젠가는 인간관계도 풀리게 마련.
‘그러고 보니 추수철이 지났군. 자금도 준비됐겠다. 슬슬 곡물을 사들여야겠어.’
내년 여름, 홍수로 곡물값이 폭등하기 전에 충분한 물량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단심회를 장악해 상단을 수중에 넣은 상황이라 곡물을 매입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 * *
그날 저녁. 거창한 환송회 대신 동생과의 조촐한 술자리를 택한 천신우다.
“형님.”
술에 취했기 때문일까.
천신우를 바라보는 천신혁의 눈빛은 평소보다 뜨거웠다.
“저도 형님께 힘이 되고 싶습니다. 가문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안 저는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렇잖아도 천신우 역시 천신혁을 천씨세가의 기둥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성정이 바르고 실력도 갖춘 만큼 투자가치는 충분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게 과제를 내주마.”
현재 천신혁은 천무검법 6성에서 막혀 있는 상태.
천신우는 동생이 7성으로 나아가는 깨달음을 얻도록 과제를 내줬다.
전생에도 천무검법 8성에 도달한 천신혁이다.
7성쯤이야 쉬울 것이다.
“과제를 완수하면 아버님께 말씀드려 네게도 활약할 기회를 주마. 물론 그것과는 별도로 상도 줘야겠지.”
앞으로 얻을 영약과 보물들.
취할 것은 취하고 남는 것은 천신혁을 비롯한 천씨세가의 무인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같은 영약은 중복해서 먹어봐야 효과가 거의 없으니까.
“약속 지키시는 겁니다!”
“물론이지.”
천신우는 시비 난정을 시켜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했다.
‘아버지께도 선물 하나 드려야지.’
달빛 아래 써내려간 것은 천무검법 9성을 달성하면서 얻은 깨달음.
이게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성취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걸 아버님께 전해드려라. 내가 전해드려도 되지만, 그럼에도 굳이 너를 통해 전하는 마음을 알리라 믿는다.”
“당연하지요! 형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아버님을 자주 찾아뵙고 말동무를 해드리라는 뜻이 아닙니까!”
“바로 맞췄다. 누구 동생인진 몰라도 정말 똑똑한데?”
“하하하.”
환하게 웃는 동생을 보며 천신우도 마음이 가벼웠다.
전생에선 죽은 아버지와 형을 대신해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진 천신혁.
그러나 천신우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그의 운명도 덩달아 바뀌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천신혁은 지금, 지난 삶보다 행복할까?
‘약속하마. 적어도 지난 생보단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동생을 위해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천신우가 술잔을 들었다.
“마시자.”
술잔이 몇 차례 돌고 나니 어느새 천신혁은 곯아떨어졌다.
형과 달리 술이 약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었는데.’
학사 진현과 달리 천신우의 몸은 술이 아주 강했다.
한두 병 비운 것 갖곤 자세조차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기에 천신우는 술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좋은 날 술을 마시는 건가. 취기가 오르는 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천신우는 살짝 취기가 오른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았다.
“드디어 내일이군.”
절명곡으로 떠날 생각을 하니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인들의 목숨을 구하고 예정된 미래를 바꾸는 것.
모든 것이 천신우의 손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