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학사환생 023화
위령제와 합동장례식은 경건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천씨세가의 무인들과 유족들은 물론, 세가에 머무는 빈객들까지 전부 참석하는 자리였다.
권왕도 어머니와 함께 참석했다.
천신우는 무인들에게 그들을 특별히 신경 써주라고 일러두었다.
권왕을 끌어들이는 물밑작업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천신우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참석자들 대부분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어 그런지, 하품하는 손님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들은 천신우의 친척들이었다.
숙부 천무진. 그리고 고모 천무혜와 그녀의 남편 강한성이다.
‘아무리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아도 그렇지. 저렇게 대놓고 티를 내나.’
그들의 노골적인 행보는 가주 천무흔이 마련한 술자리에서 정점에 달했다.
“다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돌아가신 숙부님께서도 기뻐하실 게다.”
천씨세가에서 대외적으로 발표한 대장로 천패극의 사인은 노환.
물론 천신우의 숙부 천무진과 고모 천무혜 모두, 대장로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남도 아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소.”
“맞아요. 작은 오라버니.”
점잔을 빼는 천무진보다 천무혜가 훨씬 노골적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큰 오라버니, 하나만 물어볼게요.”
천무흔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천무혜가 넌지시 물었다.
“숙부님이 남기신 유산이 제법 되는 걸로 아는데.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수백만 냥에 이른다고…….”
천무진뿐만 아니라 천가의 핏줄이 아닌 강한성조차 눈을 빛낸다.
그들의 방문목적이 결국 천패극의 재산에 있음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그거 전부 어쩔 생각이에요?”
불편한 질문에도 천무흔의 반응은 담담했다.
“오늘 위령제에 참석한 유족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할 생각이다.”
“……뭐라고요?”
천무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전부요?”
“그래.”
천신우는 고모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내가 이런 촌구석까지 찾아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기나 해요? 억울해서라도 빈손으론 못 돌아가요!”
너무 노골적인 표현에 남편이 헛기침을 했지만 천무혜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끼어들지 마요. 지금 이게 그냥 넘어갈 문제에요? 아니, 숙부님이 남기신 유산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인간들한테 나눠주겠다는데?”
마흔이 가까운 나이라곤 믿기기 힘든 발언들이 쏟아졌다.
“나는 동의 못 해요. 적어도 내 몫은 확실히 가져가야겠어요. 여보! 당신도 뭐라 말 좀 해봐! 그러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잖아!”
“크흠.”
강한성이라고 천무혜와 생각이 다르지 않은지,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도 결국은 속내를 드러냈다.
“어르신의 유산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천무흔 역시 정면으로 대응했다.
“천씨세가의 일이네. 외부인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네만.”
“외부인?”
천무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라버니, 진심이야? 정말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웃겨, 정말.”
천무흔은 막내 여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렸을 적에 오냐오냐했더니 나이 먹고도 저러고 있다.
“분명히 둘째와 막내, 너희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너희 상속분을 떼어주면 천씨세가의 일에 관심을 끊겠다고.”
천무혜가 눈을 피하며 난처한 표정으로 변명한다.
“그건 말만 그렇게 했던 거고요.”
천무흔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희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장심방과의 충돌이 있을 때도, 청수검객과 시비를 가릴 때도, 너희는 구경만 했었지.”
“사내대장부가 이제 와서 다 지난 얘기를…….”
뻔뻔한 여동생의 시선을 천무흔은 피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두마. 숙부님의 유산뿐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천씨세가의 재물을 너희와 나누는 일은 없을 것이야.”
질끈! 입술을 깨문 천무혜가 남편을 흘겨봤다.
정말 가만히 있을 거냐고 묻는 듯이.
강한성도 더는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는지 입을 열었다.
“신중하게 생각하시지요.”
강한성은 말로만 그치지 않고 무력시위에 나섰다. 그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탁자가 흔들리며 술잔들이 요동치자 천신우의 숙부 천무진은 눈매를 좁혔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중견문파 정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실력을 키운 천무진이다.
실세인 대장로 천패극도 죽었겠다. 이제 형을 제치고 천씨세가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심에 불타던 참이다.
당연히 여동생 따윈 안중에도 없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눈앞에서 확인한 매제의 실력은 생각 이상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뭐지?’
천무진은 주위를 무겁게 누르던 기운이 급격히 밀려남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당사자인 강한성 역시 자신을 압박해오는 무형의 기운을 느꼈다.
‘감히……!’
강한성은 더욱 힘을 끌어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이, 이럴 수가?’
해일처럼 밀려든 무형의 기운은 강한성의 기운을 집어삼킨 걸로도 모자라, 본체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크으윽!’
가까스로 신음을 참아냈지만 온몸에 밀려드는 격통까지 견뎌내긴 힘들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가는 강한성에게 천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모부. 괜찮으십니까? 제가 한잔 올리려 했는데 안색이 창백해 보이셔서.”
“그, 그래…….”
처조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
강한성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 우리 조카님이 따라주는 술잔 한번 받아볼까.”
천신우가 공손한 태도로 술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거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잔이 채워지는 순간.
치이이익.
엄청난 열기가 강한성의 얼굴까지 확 올라왔다.
‘이 무슨!’
하마터면 잔을 떨어뜨릴 뻔한 강한성은 황급히 기운을 내보내 열기를 다스리려 했다.
그러나 강한성의 시도는 이번에도 실패했다. 계속해서 강해지는 열기에 살이 익을 지경이었다.
‘서, 설마……?!’
강한성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조카를 바라보았다.
천신우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 천신우의 입가에 떠올라있는 것은 미소였다.
“정말 괜찮으신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오지만 강한성은 알 수 있었다.
천신우가 경고음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방금 전의 일들이 모두 천신우의 소행이라는 것을.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망나니였던 처조카가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하지만 설마 자신을 압박할 정도의 무력을 지녔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그래. 괜찮다.”
강한성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해도…….”
천무흔을 압박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꼬리를 만 꼴이었다.
“그럴까요.”
천신우의 말 한마디에 강한성을 압박하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강한성이었다.
이미 가주 천무흔을 압박해 대장로의 유산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
한시라도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천무혜는 눈치 없이 강한성의 등을 자꾸만 떠밀었다.
“기가 막혀. 지금이 술이나 마시고 있을 때예요?”
“…….”
천무혜가 답답한지 가슴을 쳤다.
“입이 장식이 아니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지금 이러다 유산 다 뺏기게 생겼는데!”
등쌀에 못 이겨서라도 한마디 더 할 법도 하지만 강한성은 끝끝내 침묵했다.
“크흠.”
천신우 눈치를 슬쩍 보고선 괜히 애꿎은 헛기침만 해댄다.
“너도 그래. 지금 어른들 중요한 얘기 하는데, 술이나 따르고 말이야.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급기야 천신우를 비난하기 시작하는 천무혜.
등줄기가 서늘해진 강한성이 황급히 천무혜를 잡아끌었다.
“자, 잠깐만. 우리 밖에 가서 따로 얘기 좀 하자고.”
“지금껏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다가 조카 버릇 좀 고쳐주려니까 끼어드네. 입 다물고 지켜보기나 해요. 내가 예의가 뭔지 알려주려니까.”
결국 강한성은 가주 천무흔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천무혜는 끌려나가면서도 천신우에게 삿대질했지만.
“너, 운 좋은 줄…… 웁웁!”
강한성이 천무혜의 입을 틀어막고 빠르게 장내를 벗어났다.
한바탕 소동이 진정되고 나자 천무흔이 천신우를 바라봤다.
부자간에 무언의 시선이 오갔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천무흔이 천무진을 돌아보았다.
더 큰 권력과 부를 얻고자 데릴사위로 들어갈 만큼 야심이 큰 둘째 동생이다.
아직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막내 여동생 천무혜보다 욕심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터.
“너도 숙부님의 유산에 관심이 있는 것이냐?”
“그 얘기는 다 같이 있을 때 합시다. 지금은 다른 얘길 하고 싶은데.”
천무진이 넌지시 물어온다.
“형님이 석가장 쪽과 거래를 추진한다는 소문을 들었소.”
천무흔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이다.”
“형제 좋다는 게 뭐요. 내가 거래처 하나 소개해 주겠소. 석가장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거래할 수 있을 거요.”
천신우는 숙부의 목적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기려는 거겠지. 어쩌면 숙부가 차명으로 운영하는 사업체일지도 모르고.
물론 어느 쪽이든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천신우가 단심회주가 되면서 석가장과의 거래조건을 대폭 상향시켜 놨으니까.
천무흔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석가장과의 거래는 이미 시작했다만.”
“그거야 위약금 물어주고 무르면 되잖소. 어차피 보다 나은 조건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면 위약금 정도야…….”
거기까지 말하던 천무진이 멈칫했다.
좀처럼 감정표현이 없는 천무흔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가장의 거래조건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그보다 더 많이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냐?”
통상적인 거래조건을 알고 있는 천무진이다.
그것보다 조건을 올려주면 당연히 이익이 조금밖에 남지 않지만, 남겨 먹을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두 번째 거래부터 불량품을 섞어 납품하면 되니까.’
천무흔의 웃음이 걸리긴 했지만 천무진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까짓거, 계약서 가져와 보시오. 내 이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새로 계약서 한 장 써드리리다. 당연히 기존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천무흔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이젠 뱉은 말을 책임질 나이지.”
총관을 시켜 가져온 계약서가 천무진 앞에 놓였다.
‘기껏해야 통상적인 조건보다 아주 살짝 나은 정도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천무진은 계약서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계약서에 적힌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조건이었다. 거래할수록 막대한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얼마나 놀랐는지 계약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런 천무진더러 들으라는 듯, 천신우가 입을 열었다.
“두 분, 계약서 초안 준비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