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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21화 (2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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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 021화

뚝뚝…….

피로 물든 검을 내려다보는 천무흔의 표정에 복잡한 심정이 묻어났다.

아무리 천패극이 세가를 말아먹은 악인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피가 섞인 혈육이다.

마음이 착잡하지 않다면 그것도 이상하겠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천무흔을 천신우가 불렀다.

“찾았습니다. 내려가시지요.”

전대 가주가 죽고 서서히 천씨세가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천패극이다.

그때부터 천패극이 쌓아올린 부는 천씨세가의 재정을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바닥에 깔린 돌부터 벽에 걸린 그림까지. 어느 하나 값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층계를 내려와 천신우가 거대한 철문 앞에 섰다.

“이곳입니다.”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았기에 이토록 커다란 금고가 필요했을까.

금고 외부엔 이중삼중의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먼저 천패극이 갖고 있던 열쇠.’

누구도 믿지 않았던 천패극은 금고열쇠를 항상 본인 수중에 보관했다.

천신우가 그걸 자물쇠에 넣고 돌리자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 하나가 끌러져 나갔다.

‘다음은…….’

천신우는 이중잠금장치를 살펴본 끝에 금세 허점을 파악했다.

‘마홍이 제작한 잠금장치에 비하면 이건 상당히 조잡하군.’

마홍은 무림맹 최고의 기술자였다.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기관과 잠금장치는 마교의 습격에도 쉽게 뚫리지 않았다.

그런 마홍이 설계한 잠금장치의 도면을 줄곧 봐왔던 천신우다.

눈앞의 잠금장치를 푸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철컥. 드르륵.

천신우의 조작에 의해 잠금장치가 차례로 풀려나가자 천무흔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네게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앞으로도 세가의 힘을 키우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배울 생각입니다.”

천신우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천무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이다. 자아. 들어가자.”

금고 내부는 창고라 불러도 좋을 만큼 넓었다.

그렇게 드넓은 금고 안에 금괴와 은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옆으론 수북하게 쌓인 전표도 보였다.

천신우가 전표에 찍힌 직인을 확인했다.

“전부 만수전장의 전표로군요.”

만수전장은 무림 최대의 전장. 수백 년에 걸쳐 쌓인 신용 덕에 만수전장에서 발행한 전표는 현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천패극이 모은 재물은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벽면 한쪽을 장식한 무기고에 이어 영약들이 가득한 작은 금고까지 발견됐다.

“무기와 영약 모두 고가는 아니지만 충분히 세가의 살림에 보탬이 되겠군요.”

천신우의 평가에 천무흔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모습.

“가주님.”

천신우가 천무흔을 돌아보았다.

“전에 소자가 했던 건의를 기억하십니까?”

“물론이다.”

천신우는 세가의 무인들이 전투에서 사망하면 유가족의 생계를 지원해 주자고 건의했었다.

“이제 자금도 확보됐으니 세가회의를 거쳐 보상제도를 만들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소자는 거기에 더해 보상제도를 소급해서 적용했으면 합니다.”

“소급이라면?”

“장로원의 횡포로 죽은 희생자들의 유가족이 아직까지도 고통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외면하고 제도만 신설한다면 절반의 효과밖에 거둘 수가 없다는 것이 천신우의 생각.

물론 그들을 전부 구제해 주려면 엄청난 예산이 필요했다.

어쩌면 천패극으로부터 회수한 자금 대부분을 날리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천무흔은 결단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하자꾸나.”

사실 천무흔이라고 장로원의 횡포에 피해 입은 이들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다만 이처럼 빠른 결정은 천신우가 보기에도 의외였다.

천신우는 깨달았다.

천무흔도 변해가고 있음을.

어쩌면 천패극을 베는 순간, 천무흔은 그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장로원에 결탁하여 비리를 저지른 자를 색출할 것이며. 반대로 피해를 입은 무인들에 대해선 충분히 보상할 것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이것이 앞으로 천씨세가가 나아갈 길임을.

그래서일까.

진충을 비롯한 무인들의 표정은 사뭇 경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 * *

천신우가 대장로 천패극과 장로들을 제거한 날을 기점으로.

천씨세가에선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다.

숙청대상은 장로원과 결탁해 요직을 차지하고 이권을 주무르던 무인들이었다.

당연히 적잖은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데다 버팀목이던 장로원까지 무너진 상황. 결국 비리에 연루된 무인들은 직위를 박탈당하고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토해냈다.

그렇게 가주 천무흔의 주도 아래 천씨세가의 질서가 바로잡히던 그때.

천신우는 천씨세가를 떠나 외딴 마을에 이르렀다.

“이곳입니다.”

안내를 맡은 무인이 허름한 판잣집 앞에 마차를 세웠다.

천신우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판잣집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전임 감찰단주의 가족들이 사는 집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천신우가 알기로 감찰단주는 마음만 먹으면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자리였기에.

‘장로원에 의해 임명된 현직 감찰단주는 받아먹은 뇌물만 수만 냥에 달했는데.’

무인이 전임 감찰단주를 회상했다.

“단주님처럼 청렴한 분은 지금껏 보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점심식사조차 접대 받는 일이 없으셨지요. 게다가 월급을 쪼개 형편이 어려운 부하들을 도와주실 정도로 마음이 따뜻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서류를 통해 전임 감찰단주의 청렴결백을 확인한 천신우다.

하지만 이렇게 부하였던 무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들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사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드렸지만 절대 받지 않으시더군요. 이곳으로 이사한 이유도 지인들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인 걸로 압니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들어가지.”

쾅쾅.

무인이 문을 두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무인의 얼굴을 알아봤다.

“사람하고는. 바쁠 텐데 여기까지 찾아오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날도 추운데 들어와서 따뜻한 숭늉이라도…….”

노부인이 말을 멈췄다.

무인 뒤에 서 있는 천신우를 발견한 것이다.

“그쪽은 분명…….”

그녀가 천신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털썩.

천신우가 노부인 앞에 무릎 꿇었다.

노부인을 보니 떠올랐던 것이다. 전생에 마교와 싸우다 죽은 무인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기억이.

그때 유가족들의 표정이 저랬다.

한없이 슬프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죄송합니다.”

노부인은 물론 천신우를 수행하는 무인조차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공자님!”

무인이 부축했지만 천신우는 무릎 꿇은 채로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가의 잘못으로 부군께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세가를 대표해 사과드립니다.”

본인의 책임이 없음에도 진심으로 사죄하는 천신우.

그를 바라보는 노부인의 눈가로 남편이 죽던 날의 기억이 스쳐 갔다.

눈이 내리던 새벽. 결연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던 남편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나중에야 알았다. 감찰단주였던 남편이 장로원 파벌의 비리를 파헤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봐도 남편을 암살한 배후는 명확했다.

하지만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남편의 죽음은 사고사로 처리됐다. 심지어 저지르지도 않은 비리혐의까지 뒤집어씌워졌다.

‘평생을 천씨세가를 위해 헌신했음에도…….’

돌아온 것이라곤 얼마 되지 않는 장례식 비용이 전부였다.

사실 보상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 혼자 힘으로도 자식을 키워나갈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땅에 떨어진 남편의 명예는 어찌해야 할까.

노부인은 남편의 명예를 되찾고자 사방팔방으로 뛰었지만 헛수고였다. 가주 천무흔조차 하지 못한 일을 그녀 혼자 해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결국 체념한 그녀는 자식과 함께 천씨세가를 떠났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천씨세가와 인연을 맺는 일이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녀 발밑에 천씨세가의 사람이 무릎 꿇고 사죄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대공자가!

도대체 그녀가 떠나온 동안 천씨세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가슴 깊숙한 곳에서 사무치는 감정을 느끼며 노부인이 물었다.

“설마…… 대장로가 급사라도 했나요?”

평생을 정정당당하게 살아온 남편의 목숨을 빼앗은 걸로도 모자라, 명예까지 시궁창에 처박은 대장로 천패극.

그가 죽지 않고선 이런 일은 불가능하단 사실을 알고 있는 노부인이었다.

천신우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장로원의 장로들이라면 세가의 규율에 따라 처단했습니다.”

“아아…….”

그녀는 무인의 아내다.

무공을 익히진 않았지만 무림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았다.

피는 피로 갚는다.

불가능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정의가 실현될 줄이야!

그러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만간 장로원의 사주로 희생당한 넋들을 기리는 위령제를 치를 겁니다. 또한 희생자의 유족들에겐 충분한 보상과 더불어…….”

이어지는 천신우의 목소리에 노부인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편이 이따금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리던 소망들. 그녀가 마음속으로 바랐던 일들.

천신우는 그것들이 모두 실현될 거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천씨세가까지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천신우의 말에 노부인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늙어서 그런가. 정신이 이렇게 없네. 일단 들어와요. 대접할 거리는 변변치 않지만 따뜻한 물이라도…….”

갑자기 노부인이 반색했다.

“마침 우리 아들이 오네요. 짐이 많은 걸로 봐서 사슴이라도 잡은 모양인데.”

노부인은 천신우에게 요리를 만들어주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천신우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과연 길을 따라 젊은 청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천신우는 두 눈을 의심했다.

‘설마……!’

몇 번을 다시 봐도 틀림없었다. 상대는 천신우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전생에서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던 그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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