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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20화 (20/171)

# 20

학사환생 020화

천씨세가가 세워지고 200년.

지금껏 수많은 위기가 세가에 들이닥쳤음에도 장로원만은 풍파를 비껴갔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천신우로부터 시작된 사정의 칼날이 장로원 심장부를 겨누기 시작한 것이다.

장로원의 실세 천패극 역시 목을 죄어오는 칼날을 느꼈다.

“어르신. 저희는 어떻게 해야…….”

안절부절못하는 장로들을 보며 천패극은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복종하는 꼭두각시들로만 장로원을 채워놨더니 위기가 닥쳐도 아무것도 못한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천패극이 역정을 내자 장로들은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당장 장로원 직속의 무인들을 집결시켜라!”

무림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존재한다.

어떤 권모술수를 꾸민들 결국 모든 것은 힘의 논리로 결정된다.

천패극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힘이 없었기에 형을 제치고 가주가 되지 못했으며. 힘이 있었기에 조카 천무흔을 제치고 실세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사태를 주도한 천신우만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

천패극은 몸을 일으켜 벽에 걸린 검을 천천히 뽑았다.

차아앙.

칼날에 비치는 그의 얼굴은 젊은 시절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만큼 늙어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오히려 그때보다도 강렬한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천씨세가는 나만의 것이다. 절대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야.’

천패극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 * *

장로들이 기거하는 전각에 가까워지자 무장한 무인들이 천신우 앞을 가로막았다.

“대장로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소이다.”

앞으로 나선 것은 날이 시퍼런 검을 어깨 위에 짊어진 무인이었다.

그를 알아본 누군가 외쳤다.

“저자는 풍사검……!”

그러나 천신우의 기억엔 상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무림맹에 기록이 남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미미하단 의미였다.

“우리 천씨세가 무인 같진 않은데.”

진충이 대답했다.

“장로원이 외부에서 초빙한 고수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천신우는 풍사검에게 경고했다.

“천씨세가의 행사다. 물러나도록.”

“웃기는 소리!”

코웃음 치는 풍사검을 보며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네놈은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다. 진충. 전부 쓸어버려.”

“명을 받듭니다!”

천무흔도 명을 내렸다.

“쳐라!”

“와아아아!”

가주 휘하의 무인들이 달려 나가며 장로원 무인들과 백병전을 벌였다.

차차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고 피가 흐른다.

‘여긴 내가 나설 필요 없겠군.’

잠시 교전상황을 지켜보던 천신우가 천무흔을 돌아봤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스스스.

천신우의 발밑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며 옷깃이 휘날렸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천신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각 최정상. 뒷짐을 지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대장로 천패극과 천신우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 순간 천신우의 몸이 바람에 휩싸여 사라졌다.

다음 순간, 천신우가 나타난 곳은 대장로 천패극 바로 뒤였다.

“숙조부님.”

“……!”

흠칫한 천패극이 검을 뽑아 들며 뒤돌았다.

그러나 천신우는 스르르 뒤로 물러나며 천패극의 간격에서 벗어났다.

뒤늦게 다른 장로들이 천신우를 향해 달려든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천신우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운검을 뽑았다.

천신우의 검에서 폭풍이 휘몰아쳤다.

쏴아아아앙!

검의 폭풍에 휩쓸린 장로들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너부러졌다.

비명조차 사라진 그곳에서…….

천신우는 피로 물든 자운검을 늘어뜨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한때는 천씨세가를 위해 힘써주신 분들이니 고통 없이 보내드렸습니다.”

천패극은 경악했다.

아무리 꼭두각시라고는 하나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갖춘 장로들이다. 천신우는 그런 자들을 일격에 베어버린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씨세가 이름에 먹칠만 하고 다니던 망나니가 말이다.

“……네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아느냐?”

“물론입니다. 숙조부님이 망치신 세가를 바로잡고 있는 중이지요.”

천신우가 사전에 확보한 증거자료들을 꺼내 보였다.

“보십시오. 세가에서 정한 세율보다 훨씬 많이 거둬들인 세금이 전부 어디로 흘러들었는지를.”

침묵하는 천패극.

천신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밖에도 무기부터 식자재에 이르기까지 각종 비리를 통해 막대한 자금이 장로원으로 들어갔더군요. 그게 어디에 쓰였는지는 숙조부님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겠지요.”

결정타는 흑살문에 청부한 사실이 담긴 장부였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전임 감찰단주. 전임 장로들. 이들 외에도 세가의 수많은 무인들이 단지 장로원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당했습니다.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지요. 바로 숙조부님이 내리신 명령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천패극이 스산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천패극은 화려한 전각 내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형님이 죽기까지 오십 년을 기다렸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차지한 자리다! 손에 피를 묻히면서 움켜쥔 권력이다! 네깟 놈에게 내줄 것 같으냐!”

천신우는 온몸으로 천패극의 광기를 느꼈다.

“다르지 않군.”

천패극은 무림을 침공한 마교의 마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광기와 탐욕에 사로잡힌 모습이란.

그때 장지문을 열고 가주 천무흔과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보았다.

바닥에 난자한 장로들의 시체를.

천패극과 대치하고 있는 천신우의 등을.

“숙부님…….”

천무흔의 시선을 마주한 천패극이 섬뜩하게 웃었다.

“그래! 네놈을 살려두지 말아야 했다. 아예 천가의 씨를 말리고 내가 가주가 되었어야 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천패극이 천무흔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스윽.

천신우가 자운검으로 천패극을 막아 세웠다.

천패극이 분노의 고함을 내질렀다.

“이노오오오옴!”

“하실 말씀은 그것뿐입니까? 좋습니다.”

까아앙!

달려드는 천패극의 검을 튕겨내며 천신우가 덧붙였다.

“무고하게 죽은 이들에 대한 죗값은 제가 직접 받아내도록 하지요.”

천신우는 자운검을 천패극의 목을 향해 겨눴다.

“이 검으로 직접.”

“건방진! 천무검법 따위로 나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나 천패극은 신음을 삼켜야 했다.

“음!”

곧바로 날아드는 천신우의 검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천패극이 끝끝내 뛰어넘지 못했던 형의 검을 보는 듯했다.

황급히 검으로 받아치려 했지만 천신우의 검은 기묘하게 휘어지며 천패극의 옆구리를 베었다.

“이놈이!”

거칠게 휘두른 천패극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러는 사이 천신우의 검이 천패극의 발목을 잘라냈다.

스가각!

발목이 끊긴 천패극이 바닥에 무릎 꿇었지만 천신우는 멈추지 않았다.

양발로 무릎을 인정사정없이 짓밟았다.

빠악!

거침없는 발길질에 천패극의 무릎이 완전히 바스러졌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천패극의 양쪽 어깨를 천신우가 붙들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우두둑!

어깨뼈를 탈골시킨 다음 무릎으로 천패극의 얼굴을 찍었다.

꽝꽝꽝!

코뼈가 부러지고 광대뼈가 내려앉은 채로 천패극이 개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천씨세가를 배후에서 멋대로 움직이던 대장로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천패극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그가 천신우를 노려보았다.

“이건 천씨세가의 무공이 아니다! 네놈이 사악한 마공을 익혔구나!”

“아니오. 제가 사용한 것은 천무검법과 천무권. 모두 천씨세가의 무공입니다. 숙조부님이 그토록 무시하고 깔아뭉개던.”

과거 천패극은 천씨세가의 무공으론 형을 뛰어넘지 못함을 깨닫고 다른 문파의 무공을 익혔다.

그날 이후로 그는 천씨세가의 무공에 대해 비난을 일삼았다.

천씨세가 무인들의 자부심마저 짓밟았던 것이다.

그랬던 천패극이 지금 천씨세가의 무공에 무릎 꿇은 것이다. 다름 아닌 천신우에 의해.

물론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다.

천신우가 다가오자 천패극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을 기었다.

불과 5분. 천패극이 체면과 자존심을 내팽개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천신우의 변함없는 표정을 보자 천패극은 다급히 외쳤다.

“돈을 주마! 전 재산을 주겠다! 지금껏 모은 무기들과 무공비급도……!”

“틀렸습니다.”

고개를 젓고는.

꽈득!

손가락 마디마디를 차례로 밟아나간다.

“숙조부께서 하셔야 할 말은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입니다. 그딴 헛소리가 아니라.”

꽈드득!

“크아아악!”

천패극의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

천무흔이 손을 들어 제지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세가에서 죄를 짓는 이가 있다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모든 손가락 마디를 밟아 부러뜨리고 나자.

천패극은 거품을 물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의식이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천신우가 뒤로 돌아 정중히 고개 숙여 보였다.

“모든 증거물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주님께서 직접 판단하시고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무인들이 장로원 곳곳을 들쑤시며 새로운 증거자료들을 가져왔다.

그중엔 멀쩡한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은 정황자료까지 있었다.

천패극의 악행들을 낱낱이 확인한 천무흔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실권을 빼앗긴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힘을 이용해 이따위 일을 벌이다니.

천무흔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착잡했으면 이런 상황에 술이라도 마시려는 것일까.

그러나 모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콸콸콸!

독한 술이 졸도한 천패극의 얼굴에 퍼부어졌다.

강제로 의식을 되찾은 천패극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그런 천패극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천무흔이 검을 들어 올렸다.

죽음을 직감하자 천패극은 오히려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후회할 거다. 내가 죽으면 그들이 두고 보지 않을 것이야.”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누구든.”

천무흔이 천신우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천씨세가는 오늘을 계기로 크게 도약할 것입니다. 그 어떤 세력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만큼.”

천무흔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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