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학사환생 019화
황화루.
기녀들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이곳에 천신우가 들어섰다.
조금 나이가 들었음에도 미모가 여전한 여인이 다소곳하게 천신우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공자님. 우리 가게는 처음이신가요?”
“아니.”
“그럼 혹시 찾는 아이가 있으신지요?”
“차련.”
여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없는데 다른 아이들을 보여드릴까요?”
“그럼 흑월을 불러줘.”
여인이 방금 전보다 훨씬 긴장한 태도로 물어온다.
“귀공은 누구신지요?”
“천신우.”
“천신우라면…… 천씨세가의?”
“그래. 선화초의 행방을 알고 있다고 전해.”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이 문을 닫고 나갔다.
‘확실히 무림맹에 남아 있던 기록대로군.’
무림맹엔 무림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이 기록으로 남겨진다. 무림의 문파와 고수들에 대한 기록도 남는다.
학사 시절. 천신우는 무림맹에 존재하는 일급기밀을 제외한 모든 기록을 읽었고, 그중 대부분을 기억했다.
살수조직 흑살문에 관한 기록 또한 천신우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곳 황화루는 흑살문의 접선장소. 차련은 청부를 의미하지. 흑월은 문주와 만나겠다는 뜻이고.’
물론 은어를 안다고 반드시 문주와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천신우는 문주와의 만남을 확신했다. 흑살문주가 필요로 하는 물건의 행방을 알고 있었기에.
‘그나저나.’
흑살문주를 기다리면서 천신우는 천씨세가 장로원을 생각했다.
‘어쩌다 일가의 장로원이 이렇게까지 타락했는지……. 내막을 아는데도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군.’
천씨세가 장로원은 가문의 원로들로 구성된 자문기관.
천가의 핏줄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세가에 오랜 세월 몸담았던 고수들로 채워졌다.
‘기록에 따르면 장로원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장로원이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전대 가주의 이복동생 천패극이 장로가 되면서부터다.
야심이 컸던 천패극은 형을 대신해 가주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결국 야망을 이루지 못한 그는 평생을 형의 그늘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다 형이 죽고 천패극은 장로가 되면서 억눌러왔던 야심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세가의 각종 이권에 개입해 부를 축적했지.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경쟁자들을 제거해 장로원을 완전히 장악했고.’
세가회의의 안건을 멋대로 주무르며 영향력을 확대해갔다.
오늘날에 이르러선 천씨세가의 중대사 대부분이 천패극의 손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씨세가의 힘이 약해진 것은 단지 천무검법이 실전되었기 때문만이 아니야.’
천씨세가의 몰락엔 천패극의 부정부패도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천패극의 개인금고를 채우느라 천씨세가의 곳간이 비었으며. 장로원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고수들이 세가를 등지는 통에 전력이 약화됐다.
‘장로원이니 뭐니 해봐야 다른 장로들은 천패극의 거수기에 불과하다.’
사실상 천패극 혼자서 천씨세가를 좀먹고 있는 것이다.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천패극이 살아 있는 이상 천씨세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한시라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천패극의 무공은 당대 가주 천무흔과 비슷하다.
따라서 지금의 천신우도 충분히 상대 가능했다.
문제는 명분.
‘그래서 내가 여기 와 있는 거지.’
장로원에서 흑살문에 청부한 증거.
그것만큼 확실한 명분도 없다.
그리고 그걸 천신우에게 내어줄 인물이 지금 모습을 드러냈다.
드르륵.
별실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온 것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었다.
앞서 천신우를 안내한 여인보다 훨씬 젊음에도 기품을 갖춘.
“처음 뵙겠습니다.”
말과 행동에서도 고귀함이 묻어났다.
겉모습만 봐선 청부살인으로 먹고사는 흑살문의 수장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름이 가월이었던가.’
그녀 뒤로 도열한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보였다. 모두 아름다웠지만 은발에 새하얀 피부의 여인이 특히 눈에 띈다.
천신우의 시선을 따라간 흑살문주가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취향에 맞게 고르시지요. 원하신다면 전부를 취하셔도 좋습니다.”
“됐어.”
천신우는 이내 시선을 거뒀다.
수도자처럼 여색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색욕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칠 정도로 분별력이 없진 않았다.
더불어 전생에서 천하제일미라 불리는 여인을 직접 봤었던 천신우다.
어지간한 미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시다면야.”
흑살문주가 눈짓하자 여인들이 물러났다.
“그런데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천신우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화초.”
흑살문주가 멈칫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가요?”
전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어째서 선화초를 찾고 있는지.
하지만 그걸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당신이 선화초를 반드시 얻으려 한다는 것쯤은 알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천신우는 병풍을 돌아보며 경고했다.
“그렇다고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말고.”
“……!”
흑살문주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오른다.
병풍 뒤에 은신한 살수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란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고선 불가능했기에.
그러나 놀라는 것도 잠시.
그녀가 손뼉을 부딪쳤다.
이윽고 병풍 뒤의 기척들마저 사라지고 나자 흑살문주가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매혹적인 목소리에도 천신우는 덤덤하게 반응했다.
“나와 거래를 하지.”
“거래라 하심은?”
“조만간 우리 천씨세가의 장로원에서 의뢰가 들어올 거야. 어쩌면 벌써 들어왔을지도 모르겠군.”
흑살문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장로원이 청부한 내용을 내게 넘겨. 이번 건뿐만 아니라 이전에 의뢰한 청부들도. 그럼 선화초의 위치를 알려주지.”
면사에 가려져 있었지만 흑살문주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고민하고 있겠지. 지금 그녀에겐 선화초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난치병에 걸린 그녀의 어린 딸을 살리는 유일한 치료제. 그게 바로 선화초였다.
따라서 흑살문주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전생에도 선화초를 얻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던졌던 그녀이기에.
‘애초에 흑살문은 그리 대단한 살수조직이 아니다. 문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만큼 작은 문파지.’
당연하다. 기껏해야 천씨세가 장로원 따위와 거래하는 수준이니.
솔직히 천신우로선 천무흔이나 진충이 장로원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림맹의 거물들에 비하면 장로원의 실세 천패극 따윈 송사리에 불과했기에.
한참의 시간이 흐른 끝에 흑살문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선화초의 위치를 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지요?”
이럴 때는 설명보다 증거.
천신우는 미리 준비한 선화초의 잎사귀를 탁자 위에 꺼내놓았다.
잎사귀를 바라보는 흑살문주의 눈이 이채로 물들어간다.
살수조직의 수장이기 전에 그녀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건 분명…….”
“알고 있겠지만 잎사귀만으론 아무 효과가 없어. 필요한 것은 꽃과 열매지.”
흑살문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청부내용을 넘기면 저희 문파는 끝이에요. 누구도 청부자를 밝힌 문파에게 청부를 맡기지 않을 테니까.”
“그럼 당신 손으로 직접 끝내. 대신 당신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도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을 마련해 주지. 물론 보복당할 염려도 없을 거야.”
천신우는 소리 없이 자운검을 뽑았다.
천신우의 검이 황화루의 벽을 쪼개는 광경을 흑살문주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천신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조만간 장로원도 이렇게 만들 테니까.”
무너져 내리는 벽을 보며 천신우가 자운검을 도로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두면 정보가 새어나가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거야. 흑살문이 털렸다고 생각하겠지.”
“…….”
한참 만에 흑살문주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 * *
장로원의 계획대로 흑살문이 천신우를 암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천신우에게 장로원의 청부가 기록된 장부가 전달됐다.
장부를 확인한 가주 천무흔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설마 이렇게까지 장로원이 썩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현실인데.
“아버지.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세가의 무인들을 소집하십시오. 지금 당장.”
시간을 끌면 흑살문이 아닌 다른 살수조직에 청부를 넣을 수도 있다.
그럼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장부를 내려놓은 천무흔이 물었다.
“어쩔 생각이냐?”
“곧바로 장로원으로 들이닥칠 겁니다. 가담한 장로들을 잡아들이고 장로원을 수색해 증거물을 압수해야겠지요.”
“으음! 장로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특히 숙부는 절대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이다.”
천무흔의 표정에서 천패극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숙조부님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천무흔이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표정에서 주저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름대로 각오를 마친 것이다.
“자신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됐다. 가자.”
* * *
가주 직속의 호위대와 가주에게 충성하는 정예무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거기에 진충이 이끄는 새로운 감찰대의 무인들까지.
천신우와 가주 천무흔을 필두로 장로원 앞에 도착한 그들이었다.
장로원의 문은 언제나 그렇듯 굳게 닫혀 있었다.
장로원을 지키는 무인들이 싸늘한 시선으로 천신우와 천무흔을 바라본다.
“대장로님의 허락 없이는 이 문을 지나실 수 없습니다.”
천신우가 천무흔을 돌아보았다.
천무흔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천신우가 입을 열었다.
“이곳은 장로원이기 전에 천씨세가의 영역. 누구도 가주님을 막을 권한은 없다.”
그럼에도 장로원을 지키는 무인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대공자께서 뭐라 한들 제게는 대장로님의 명이 우선입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는 천씨세가의 무인인가. 아니면 장로원의 하수인인가.”
“그건…….”
천신우는 더는 두고 보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엄청난 힘이 파도처럼 무인에게 휘몰아쳤다.
“우웃!”
주변의 무인들까지 움찔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
퍼어엉!
충격음과 함께 뒤로 날아간 무인이 문을 박살 냈다.
꽈아아앙! 꽈앙!
문을 뚫고 바닥에 처박힌 무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천신우가 외쳤다.
“모두 들어라! 오늘 천씨세가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