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학사환생 017화
두두두!
대로를 달리는 말들의 발굽 소리가 경쾌했다.
세가지연이 끝나고 천씨세가로 돌아오는 마차 안.
가주 천무흔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팽우경, 그 아이는 당분간 요양이 필요하다더구나.”
어쩌면 다시 도를 쥐지 못할 수도 있었다. 재기하더라도 다시는 예전 같은 괴력을 되찾지 못하겠지.
“하북팽가 쪽에서 이번 일을 두고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그냥 넘어가겠다고 알려왔다.”
천신우로서도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하북팽가에서 이번 일을 문제 삼긴 힘들 것이다.
가주 팽산월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뱉은 발언 때문이라도.
“그러나 절대 이대로 끝내진 않을 것이다. 하북팽가는 특히나 자존심이 강한 가문.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오대세가들 중에서도 하북팽가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작은 원한이라도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기에.
“더불어 다른 가문들도 이제 우리 천씨세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많아졌으니 앞으로는 세가의 행사를 견제하는 빈도도 늘어날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세가의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무림의 어느 세력도 천씨세가를 쉽게 대하지 못하도록.”
천무흔이 천신우를 보았다.
엄격한 가주로서가 아니라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으로.
“그것이야말로 나뿐만 아니라 전대 가주님들 모두가 꿈꿔왔던 일이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천무흔이라고 세가를 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경쟁문파들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건만 천씨세가는 내부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개혁을 추진할 때마다 저항에 부딪쳐 좌절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천무흔은 지쳐갔다.
그렇게 쌓인 피로감을 천신우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이해합니다.”
이어진 천신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가에서 출발하기 전에 제게 해주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세가지연이 끝날 때까지 일단 지켜보자고 했지 않느냐.”
비천부대주의 개인비리로 일단 종결됐던 흑사방 사건.
하지만 비천부대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비천부대주가 처벌받은 지금도 천씨세가 내부는 적폐세력으로 가득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세가의 대의 따위는 뒷전인 자들.
과거 천무흔이 추진했던 개혁들이 미봉책에 그친 것도 그들의 격렬한 저항 때문이었다.
“이번에 세가로 돌아가면 본격적인 개혁을 건의 드리려고 합니다. 세가 내의 썩은 싹들을 도려내고 미흡한 제도들을 손봐야겠지요. 그것이 세가의 힘을 키우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천무흔은 한참을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사실 천신우가 비천부대주의 비리를 파헤쳤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들이 후계자다운 면모를 보여준 것만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천신우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너는…… 진심으로 세가를 바꿀 생각이구나.”
깊은 한숨을 토해낸 천무흔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네가 상대할 적들은 비천부대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오랫동안 쌓아온 자금력과 영향력은 솔직히 가주인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네가 이 싸움을 시작하겠다면.”
천무흔이 천신우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힘을 실어주마. 비록 그들에 비하면 미력한 힘에 불과할지라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들이라 함은 장로원을 이르시는 것이 맞는지요?”
천무흔은 놀라움과 의문이 한데 섞인 눈으로 물었다.
“……알고 있었더냐?”
“그렇습니다.”
천신우는 전생의 학사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천씨세가 이공자 천신혁. 그는 전생에서 천무흔의 뒤를 이어 가주가 되자마자 고강도 조사를 지시했다.
아버지가 마교와의 전쟁에서 죽는 과정에서 석연찮은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비록 마교의 급습으로 인해 흐지부지됐지만 사건과 관련된 기록은 무림맹에 남았다.
‘천무흔의 죽음엔 장로원이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밝혀졌지.’
천씨세가 원로들의 합의체 장로원.
원래는 자문역할만 해야 하는 곳이지만 언젠가부터 세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천씨세가 내부의 곪아 터진 문제들은 대부분 장로원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장로원을 박살 내지 않고선 천씨세가의 재도약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장로원에서 동의하지 않는 안건은 세가회의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천무흔의 물음에 천신우가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중대한 사안에 한해선 가주의 직권으로 세가회의 통과가 가능하단 사실도.”
“……거기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놀랍구나. 하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규정이다.”
“그러나 아직 폐기된 규정도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진정으로 장로원과 맞설 각오를 하신다면 언제고 사용할 날이 오겠지요.”
가주의 직권을 사용한다는 것은 장로원과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이미 장로원에 좌절한 경험이 있는 천무흔으로선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천신우를 보고 있자면 불가능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냐.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네게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말해보아라. 세가로 돌아가면 어디부터 시작할 생각이냐?”
“먼저…….”
천신우는 이미 머릿속으로 정리해둔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 *
천신우가 천씨세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바탕 소동이 벌어져 있었다.
천씨세가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
창고장은 창고로 이어지는 수레의 행렬을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게 전부 무엇인가?”
“대공자께서 구입하신 무기들입니다.”
“이걸 전부?”
멀리 황보세가까지 갔다 왔으니 마음에 드는 비수 한두 자루 사올 수는 있다.
하지만 수레 10대 분량의 무기라니?
“대공자 혼자서 이걸 전부 사용하실 리는 없을 테고. 설마 전쟁이라도 일으키시려는 건가?”
“전쟁이랄 것까지야.”
창고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천신우였다.
천신우의 등장에 창고장을 비롯한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를 뵙습니다!”
원래도 하급무인인 그들 입장에선 천신우는 하늘 같은 대공자다.
하물며 진가를 드러내며 세가 내에서 입지를 키워가는 지금이야.
“평시라 하더라도 미리미리 양질의 무기를 준비해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창고장은 말끝을 흐렸다.
천신우가 넌지시 물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나 보지?”
“아, 아닙니다!”
창고장이 부인해도 천신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무기보급과 관련해서도 비리가 엄청나단 사실을.
“아니기는. 그래. 마침 저기 오는군.”
천신우의 시선을 따라간 창고장이 움찔했다.
물자보급을 담당하는 보급대주가 휘하 무인들을 거느리고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누구 허락 받고……!”
“내가 허락했다만.”
뒤늦게 천신우를 발견한 보급대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자께서 여긴 어쩐 일로?”
“내가 허락했다니까. 여기 있는 무기들 일단 창고에 보관해두라고.”
“아무리 대공자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도 절차를 밟지 않고 무기를 도입하는 것은 규정에 어긋납니다. 무엇보다 자금집행절차도 확실치 않은 마당에…….”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보급대주.
천신우가 피식 웃었다.
“공금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내가 세가 무인들을 위해 쌈짓돈을 털었다. 이만하면 설명이 될까.”
엄밀히 따지면 자비는 아니었다.
애초에 천신우가 가진 돈은 동생 천신혁이 여행경비로 사용하라며 건네준 것이 전부.
지금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용한 돈은 단심회의 자금이었다.
천신우는 단심회주의 권한을 이용해 무기를 사들였던 것이다.
물론 단심회의 일 처리는 워낙 은밀했기에 자금 출처를 들킬 일은 없었다.
“그러시다면야…… 하지만 굳이 이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무기구입을 위한 예산이 책정되어 있습니다만.”
“알아. 300자루의 도검과 100상자의 비수를 구입하기 위한 예산이 5만 냥 책정돼 있다는 사실 정도는.”
천신우가 보급대주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사용처가 없어진 예산 5만 냥은 다른 용도로 쓰면 되겠지. 물론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정말 필요한 곳에.”
“…….”
할 말을 잃은 보급대주를 지나쳐 천신우가 창고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이만한 무기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 장부상으론 창고에 이미 엄청난 수량의 무기가 보관되고 있던데.”
“기다리십시오! 아무리 대공자시라 하더라도 함부로 창고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습니다. 감찰단이 정기적으로 창고상태를 점검해 왔으니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그쪽에 요청하여 보고서를 받아보심이.”
천신우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고 한번 둘러보자는데 규정까지 들먹이며 강하게 제지한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지 않고서야.
“보고서보다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빠르고 확실하지.”
“그래도 규정은 지키셔야…….”
“여기.”
천신우가 건네는 문서를 확인한 보급대주가 입을 다물었다.
가주 천무흔이 창고점검을 허락한 이상 더는 따질 수가 없었다.
창고장의 안내를 받아 창고 안을 돌아본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상자 수는 맞아떨어지네.”
보급대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그런데 말이야.”
천신우의 창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
“내용물은 어떨까.”
보급대주와 창고장이 말릴 새도 없이 천신우는 상자를 열어젖혔다.
투두둑.
바닥에 떨어진 것은 날이 녹슬거나 뒤틀린 비수들이었다.
한마디로 불량품들.
보급대주와 창고장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정기점검 때에 걸렸으면 전적으로 그대들 잘못이지만. 지금껏 수많은 정기점검에도 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천신우가 차갑게 웃었다.
“감찰단의 잘못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으니까.”
“대공자님……!”
변명하려는 보급대주에게 천신우가 쐐기를 박았다.
“보급대주.”
낮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
움찔한 보급대주가 황급히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 모든 창고를 폐쇄하라. 가주님과 감찰단이 도착해 확인하기 전까지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혹시라도 지시를 어기는 자가 있거든.”
천신우가 주위를 돌아보며 선언했다.
“세가의 규율로 다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