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학사환생 016화
서슬 퍼런 팽우경의 기세에 다른 후기지수들이 썰물처럼 갈라진다.
그렇게 생겨난 공간을 팽우경이 비집고 들어오며 도를 휘둘렀다.
쏴아아앙!
방금 전까지의 주먹질과는 격이 달랐다.
‘과연 하북팽가. 도법 하나는 일품이군.’
천신우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에 그가 있던 자리로 팽우경의 도가 내려쳐졌다.
콰앙!
탁자와 의자를 부수고도 팽우경의 기세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맹렬해졌다.
솨아악! 솨악!
팽우경의 도가 천신우를 집어삼킬 듯이 날뛰었다.
스치기만 해도 죽거나 크게 다칠 만한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천신우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두려움이 아닌 경멸이었다.
‘사실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달려드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머리 나쁜 놈이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 휘두르는 도에 내가 맞아 죽기라도 한다면 어쩔 생각이지?”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는 와중에도 팽우경은 비릿하게 웃었다.
“어차피 버러지 하나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말.”
그 순간,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은 뺨에 스쳐오는 바람을 느꼈다. 깃털처럼 부드럽지만 서릿발같이 차가운.
착각이 아니었다.
천신우의 발밑에서 시작된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대로 돌려주지.”
다음 순간, 천신우가 한참 떨어진 탁자 옆에 나타났다.
“아니!”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신우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친 것이다.
쏟아지는 도를 모조리 피하는 것을 보고 짐작이야 했다. 천신우가 그들보다 뛰어남을.
하지만 천신우의 무위는 그들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고 있었다.
경악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천신우가 끌러두었던 자운검을 뽑았다.
스르릉.
지켜보던 후기지수들뿐만 아니라, 제갈휘의 귀에도 검이 뽑혀져 나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칼집에서 칠흑의 칼날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불빛마저 흡수해 버리는 완전무결한 어둠에 숨을 죽인 것도 잠시.
후기지수들은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저렇게 느리게 보이는 거지?’
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달려드는 팽우경은 저렇게나 빠른데.
천신우가 검을 뽑는 광경은 너무나 느리게 보였다.
미처 검을 뽑기도 전에 팽우경의 도에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팽우경이 천신우에게 접근하는 순간, 그 사실은 명확해졌다.
팽우경의 도가 느릿하게 천신우의 머리를 향해 떨어진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천신우의 검은 초승달 모양의 궤적을 그리며 원래 위치로 돌아온 후였다.
물론 그 광경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갈휘는 물론이고 당사자인 팽우경마저도.
가장 먼저 이변을 느낀 것은 팽우경이었다.
‘뭐지? 어째서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냐?’
이번에야말로 천신우의 머리통을 쪼개버리리라 생각했건만.
팽우경의 도는 허공에 멈춰있었다.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엄청난 충격음이 들려왔다.
콰콰콰쾅!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 팽우경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너머로 산산조각 날아가는 파편들이 눈에 들어온다.
‘……설마 이놈 짓인가? 대체 어느 틈에?’
팽우경의 얼굴엔 불신이 가득했다.
그는 천신우의 검을 육안으로 확인조차 못했다. 벽이 뚫린 광경 역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팔다리에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큭!”
팽우경이 도를 바닥에 내리꽂으며 무릎 꿇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함.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고꾸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팽우경.”
천신우는 무릎 꿇은 팽우경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여기서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이 있나?”
팽우경이 순간 멈칫했다.
떠오르는 사람이야 있었다.
하지만 죽고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잠…… 잠깐!”
다급히 외치는 팽우경의 머리를 향해 천신우의 검이 떨어졌다.
솨악!
“헉!”
모두가 깜짝 놀랐지만 천신우의 검은 팽우경의 뺨을 스쳤을 뿐이다.
피잇! 피가 튀는 뺨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팽우경이 뒷목을 매만졌다.
솜털이 곤두서 있었다. 뒷목을 만지는 손에 땀이 묻어난다.
그가 태어나 처음 느낀 죽음의 공포였다.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못하는 팽우경을 뒤로 하고 천신우가 몸을 돌렸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전생에 팽우경이 저지른 실책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무력과 용맹을 높이 샀다.
어떻게든 올바른 길로 인도해 마교의 침공을 막을 방패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무를 숭상하는 하북팽가 출신이니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주면 통제할 수 있겠지.
그게 그릇된 생각이라는 걸, 이제 확실히 알았다.
‘수틀리니까 나를 죽이려 드는 놈이다. 내가 놈보다 약했다면 죽거나 반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비단 천신우만이 아니다. 자신보다 만만한 상대라면 또다시 저따위로 행동하겠지.
‘차라리 죽는 게 무림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치명상을 입혔으니 앞으로는 절대 예전처럼 날뛰진 못할 거다.’
천신우가 멀어지자 뒤늦게 황보도준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이 팽우경에게 모여들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번만큼은 팽우경도 아까처럼 난동을 피우지 못했다. 그저 후기지수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할 뿐이다.
바로 그때.
장내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있었다.
“이런……!”
개인적인 일을 마치느라 한발 늦게 도착한 모용비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게 말일세.”
제갈휘가 나서서 설명했다.
상황을 파악한 모용비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세가어른들이 오고 계시는데 난동을 피웠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금이라도 수습을…….”
모용비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황보세가주를 필두로 가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의 등장에 모용비를 필두로 후기지수들이 앞다투어 인사했다.
“가주님들을 뵙습니다!”
부하로부터 상황을 보고받느라 황보세가주는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이윽고 보고를 들은 황보세가주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오. 귀한 손님들을 배웅하는 자리에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당장 다른 장소를 수배할 테니 그리로 옮기시지요.”
“허허허. 아이들끼리 싸우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앞으로 나서며 너털웃음을 터뜨린 것은 하북팽가의 가주 팽산월이었다.
그는 이미 아들 팽우경과 천씨세가 대공자 천신우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과연 현장에 도착해 보니 탁자와 의자가 박살 나고 벽에 커다란 구멍까지 뚫려 있었다.
팽산월은 눈앞의 광경이 아들의 소행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 잘했다. 호랑이는 토끼 하나를 잡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지.’
마음속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팽산월이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 이곳에서 일어난 피해는 모두 팽가에서 배상하겠소이다. 그리고 천 가주.”
오대세가 가주들보다 조금 뒤처져서 걷던 천씨세가 가주 천무흔이 말을 받았다.
“말씀하시구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지 않소. 세가지연도 좋게 마무리된 마당에 문제 삼지 맙시다. 물론 당연히 치료비는 팽가에서 전액 부담하겠소.”
부탁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다들 할 말은 있으나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모습.
팽산월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마 누가 죽기라도 했는가?”
천신우가 죽었다면 얘기가 또 달랐다. 적당히 무마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후기지수들이나 현장을 지키던 황보세가 무인들 표정으로 봐선, 누가 죽은 것 같진 않았다.
“무슨 일이기에 다들 표정이…….”
거기까지 말하던 팽산월이 멈칫했다.
모여 있던 후기지수들 어깨너머로 무릎 꿇고 있는 팽우경을 발견한 것이다.
“이게 무슨…….”
그 순간, 팽우경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이, 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팽우경을 보고 팽산월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런 팽산월을 제지한 것은 놀랍게도 천씨세가 가주 천무흔이었다.
“목소리 낮추시구려. 세가지연도 좋게 마무리된 마당에.”
“지금 나더러 하는 소리요?”
“물론이외다. 가주께서 분명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지 않았소이까.”
“…….”
워낙 들은 사람이 많았기에 이제 와서 발뺌할 수도 없었다.
“혹시 치료비가 부담되는 거라면 우리 천가에서 지불하지요. 그러니 화를 푸시구려.”
모두의 시선이 팽산월에게 향했다.
당장에라도 고성을 내뱉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팽산월이 대꾸했다.
“천 가주가 착각한 모양인데……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