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학사환생 015화
천신우가 술집에 도착하기 30분 전.
폐관수련 때문에 세가지연 막바지에나 얼굴을 비친 팽우경이다.
“형님! 여깁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황보도준이 팽우경을 반겼다.
“그래, 도준이구나. 그런데 너 꼴이 왜 그래?”
황보도준은 손에 헝겊을 칭칭 감고 다리까지 절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황보도준이 팽우경의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게 말입니다…….”
천신우와의 비무에서 황보도준은 손에 부상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주인 아버지에게 몽둥이찜질까지 당했다. 황보세가의 위신을 추락시켰다며.
반드시 만회해 보이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돌아온 것은 세가지연이 끝날 때까지 자중하란 경고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팽우경이 폐관수련을 마치고 세가지연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황보도준은 이거다 싶었다.
무력만큼은 모용비와 맞먹는 팽우경이다. 그러나 머리가 나쁘고 성질이 급해 섣불리 일을 그르치곤 했다.
그런 팽우경의 성격을 잘만 이용한다면, 천신우에게 전날의 치욕을 갚아줄 수 있으리라.
“천신우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 천씨세가 망나니 아니냐. 설마…… 널 그렇게 만든 놈이?”
팽우경은 거기까지만 듣고도 멧돼지처럼 콧김을 뿜어댔다.
황보도준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미리 생각해둔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이 안 계시니 기가 살았는지, 천신우 그놈이 술자리에서 소저들에게 집적거리더군요. 적당히 넘어가기엔 도가 지나쳤습니다.”
팽우경이 맞장구를 쳤다.
“워낙 쓰레기 같은 놈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지.”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더니 다짜고짜 비겁한 술수를 썼습니다. 손에 이 상처가 바로 그때 당한 겁니다.”
“그럼 당장 묵사발을 내줬어야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땐 그러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기상점에서 다시 시비를 걸어오는 겁니다. 또다시 남들 안 보는 틈을 타 술수까지 쓰면서.”
팽우경이 가슴을 탕탕 쳤다.
“듣는 내가 답답하구나! 그렇게 당하고도 그냥 놔뒀단 말이냐?”
후기지수들의 사소한 일들까진 아직 전해 듣지 못한 팽우경이다.
전적으로 황보도준의 진술에 의존해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비 형님의 제안으로 비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상을 당한 몸이라 그만…….”
황보도준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분해서 재대결을 제안했지만 놈에게 조롱만 당했습니다.”
다분히 왜곡된 황보도준의 진술.
그러나 팽우경은 곧이곧대로 믿고 같은 탁자에 앉아 있던 남궁세미에게 물었다.
“세미야. 도준이 말이 사실이냐?”
남궁세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을 뿐이다.
옆엔 다른 세가 후기지수들도 앉아 있었지만, 황보도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침묵들을 무언의 동의로 해석한 팽우경이 주먹을 쥐었다.
“그래,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놈이 그따위 짓을 벌였단 말이지? 오냐, 맹세하마. 내 오늘 그놈을 여기 꿇어 앉혀 네게 사과하게 만들겠다.”
황보도준은 속으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짐짓 걱정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모용비 형님이 알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오늘이야 다른 일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는 했지만요.”
황보도준의 승부수는 제대로 먹혔다.
“모용비?”
팽우경은 모용비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녀석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내가 천신우를 응징하는 걸 막는다면,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팽우경이 남궁세미를 돌아봤다.
“세미야. 아무리 네 정혼남이라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제…… 아니에요. 그와는 이미 파혼했답니다.”
처연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남궁세미였다.
“그래? 그럼 인정사정 봐줄 필요 없겠군.”
그때, 마침 천신우가 술집으로 들어섰다.
* * *
천신우는 볼 수 있었다.
팽우경 뒤에서 간사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보도준.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이쪽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남궁세미를.
‘대충 짐작이 가는군. 어째서 이놈이 멧돼지처럼 날뛰는 것인지.’
팽우경이 천신우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인다.
“도준이에게 들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쓰레기 짓을 하고 다닌다지? 내가 분명히 전에 경고했을 텐데.”
천신우와 동행한 제갈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형님. 괜찮습니다.”
“하지만…….”
천신우를 바라보는 제갈휘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무리 황보도준을 꺾었다고 하나 팽우경은 수준 자체가 달랐다.
제갈휘 본인은 물론이고,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모용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대.
그러나 천신우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신우까지 그렇게 나오자 제갈휘는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해 같은 소리 하네.”
팽우경이 우두둑 깍지를 꼈다 풀었다.
“분명히 말했다. 다시 내 귀에 네놈과 관련된 소문이 들어온다면, 그땐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고.”
허풍이 아니었다. 팽우경은 실제로 천신우에게 경고했었다. 지레 겁먹은 천신우는 그날 이후 팽우경을 피해 다니게 됐고.
하지만 지금의 천신우는 그때와는 달랐다.
모든 면에서.
그렇기에 당시의 천신우처럼 팽우경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천신우가 피식 웃었다.
“머리 나빠서 남한테 휘둘리는 건 여전하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한참 후에야 팽우경이 중얼거렸다.
“……뭐?”
“황보도준 말을 믿어?”
“크큭!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만. 내가 설마 사실 확인도 안 했을까. 네 정혼녀였던 세미조차 네가 개짓거리를 하고 다녔다고 인정했거늘.”
“그러니까 당사자인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다른 쪽 말만 듣고 판단하고 있는 거잖아. 지금.”
“너 같은 쓰레기의 변명은 들을 필요조차 없지. 그나저나, 못 본 새 말이 짧아졌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팽우경이 살벌한 기세를 피어 올리자 다른 후기지수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천신우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됐고. 결론.”
“으하하하하!”
돌연 팽우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런 식으로 나와 주면 나야 고맙지. 괜히 세가 어른들 눈치 보느라 피곤하던 참이었는데.”
팽우경이 황보도준을 가리켰다.
“무릎 꿇고 도준이에게 사과해라. 그러면 명치 한 대로 넘어가 주지.”
“싫다면.”
“죽기 직전까지 맞는 수밖에. 너희 아버님도 이해해 주실 거다. 망나니는 두들겨 맞아야 버르장머리가 고쳐지는 법이니까.”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살아보니 맞아야 정신 차리는 인간들이 많더라고.”
천신우는 마음을 굳혔다. 팽우경을 참교육시켜주기로.
단지 팽우경이 시비를 걸어서가 아니다.
‘팽우경은 그대로 놔두면 무림맹에 막대한 피해를 끼칠 놈이다. 그렇다고 성정 자체가 악하진 않아. 지금부터 바로잡는다면 무림맹의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천신우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팽우경은 주먹으로 콧등을 문질렀다.
“비겁한 술수를 써서 도준이를 이겼다고 기세등등한 모양인데. 나한텐 안 통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황보도준이 팽우경이 식탁에 끌러두었던 도를 가져왔다.
“형님. 여기 있습니다.”
“필요 없어. 저딴 놈은 주먹만으로 충분해.”
그 말을 들은 천신우는 조용히 자운검을 끌러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제갈휘의 얼굴엔 불안감이, 팽우경의 표정엔 비웃음이 떠올랐다.
“하! 이 자식 봐라? 기껏 인정을 베풀어줬더니만.”
그에 반해 천신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팽우경이 맨주먹으로 나선 이상 자운검을 써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무의미했다. 놈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물론 요 며칠, 한 몸처럼 들고 다니던 자운검을 내려놓으니 허전하긴 했다.
그렇다고 불안하진 않았다.
‘과거로 돌아와 수련한 것은 검만이 아니니까.’
육체 역시도 착실히 단련해 왔다.
영약과 수련으로 단련된 천신우의 육체.
거기에 학사 진현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
팽우경에게 밀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지면 무릎이라도 꿇고 사과해 주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크크큭. 오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도 지면 사과해 주마.”
“사과할 필요 없어. 너의 몸이 알아서 고갤 숙일 테니까.”
지금까진 그럭저럭 평정심을 유지하던 팽우경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 개자식이! 한 방 맞고도 그따위 건방진 소릴 지껄이나 보자!”
팽우경이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자, 다른 후기지수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피했다.
제갈휘, 그리고 남궁세미와 황보도준의 표정이 엇갈리는 가운데.
천신우는 달려드는 팽우경을 바라보았다.
타고난 몸에 혹독한 수련까지 해온 팽우경은 분명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럼에도 왜일까.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기 힘든 것은.
‘단순하게 무력만 비교하면 얼마 전에 상대한 석무해보다 팽우경이 확실히 낫다. 하지만 오히려 상대하긴 편해.’
팽우경은 다혈질인 데다 아직은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실전경험만 놓고 보면, 석무해에 한참 뒤처지는 것이다.
게다가 비록 무인으로선 실패한 인생이었으나, 지난 삶의 기억을 간직한 천신우였다.
그 기억들 속엔 팽우경보다 강인한 육체와 폭발적인 힘을 지닌 고수들이 수두룩했다.
‘권왕, 풍뢰권, 무적신권. 당장 떠오르는 고수들만 해도 이렇게나 많은데.’
천신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틀어 달려드는 팽우경의 주먹을 피했다.
‘고작 너 따위의 주먹이 두렵게 느껴질 리가.’
연거푸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자 팽우경의 숨이 거칠어졌다.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피하기만 할 거냐! 정면으로 붙잔 말이다!”
그 순간.
천신우가 딱하고 멈췄다.
지켜보던 제갈휘가 신음을 흘렸다. 도발에 넘어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천신우는 도발에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저 팽우경에 대한 평가를 끝냈을 뿐.
이제 남은 것은 응징뿐이었다.
턱!
날아드는 팽우경의 주먹을 왼손으로 붙잡은 천신우가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천신우가 손에 힘을 주자, 우두둑,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밀려들었다.
팽우경이 괴성을 내지르며 다급히 천신우의 팔을 떨쳐냈다.
하지만 숨을 돌릴 틈도 없이 팽우경은 보고 말았다.
어느새 천신우의 반대편 주먹이 날아드는 광경을.
빠악!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팽우경의 턱이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
동시에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의 표정도 불신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고개 들어.”
휘청거리는 팽우경을 향해 천신우의 주먹과 발차기가 쏟아졌다.
빠바바박!
얼굴이 연거푸 좌우로 돌아갔고 허리가 접히고 무릎이 꺾였다.
팽우경은 그러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반격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느덧 양팔로 얼굴을 막기 급급해진 팽우경의 배로 천신우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빠아아악!
구경하던 사람이 몸서리칠 만큼 강력한 일격!
한참을 날아간 팽우경이 창문을 박살 내며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헉!”
“형님! 괜찮으십니까?”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이 뒤늦게 창가로 몰려드는 순간.
“비켜! 개새끼들아!”
창문틀을 잡고 올라온 팽우경이 후기지수들을 닥치는 대로 밀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탁자 위에 끌러둔 도를 찾아낸 팽우경은 칼날을 감쌌던 천을 찢어발겼다.
늘어뜨린 칼날 끝을 따라간 그의 시선이 천신우에 닿았다.
“죽인다! 개자식!”
섬뜩한 살기를 뿜어내며 팽우경이 천신우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