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학사환생 014화
석무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길 혼자 왔다고?”
믿기지 않았지만 천신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군.”
흑표가 나서려는 것을 석무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깐.”
석무해가 천신우를 쳐다보았다.
“불상은 어디서 얻었지?”
그렇게 사람을 풀어도 찾지 못했던 불상이 어째서 천신우의 손에 있는 것일까.
석무해는 그것이 궁금했다.
천신우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서.”
석무해가 눈알을 굴렸다.
“그럼 얼마 전에 이곳을 습격한 것도 불상을 찾기 위해?”
그렇게 단정 짓더라도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애초에 천신우가 불상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부터 수상했다. 내부에서 정보가 새지 않고서야…….
그러나 석무해는 그에 대해 묻는 대신 문제의 본질을 짚었다.
“하나만 더 묻지. 어째서 이따위 일을 벌인 것이냐?”
천신우는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돈이 필요하니까.”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석무해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들을 알고 있는 천신우다.
‘심지어 훗날 마교에 투항해 자금을 대는 놈이다. 그전에 제거해야 후환이 없겠지.’
물론 굳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이유는 없었다.
“돈이라고?”
석무해가 실소했다.
“오냐! 듬뿍 챙겨주마. 저승길 노잣돈으론 차고 넘칠 만큼.”
석무해의 눈짓을 받은 흑표와 백호가 앞으로 나섰다.
물론 천신우는 이미 그들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석무해가 꺼내 들 수 있는 최고의 패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네놈들은 흑표와 백호겠군.”
석무해가 눈매를 좁혔다.
“……쓸데없이 많이도 알고 있구나.”
사실 천신우가 아는 것은 단지 흑표와 백호의 정체만이 아니었다.
흑표와 백호가 어떤 무기를 다루고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심지어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기에 전략을 세우기도 쉬웠다.
‘흑표부터 해치운다.’
천신우가 벼락처럼 쇄도했다.
“!”
흑표가 눈을 부릅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이었다.
여기까지 혼자 뚫고 왔으니 보통 놈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빠를 줄이야.
까앙!
간신히 검을 들어 막아냈지만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큭!”
신음을 흘리는 흑표를 향해 천신우의 공격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계속되는 공방에도 천신우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면 흑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백호가 가세했지만 치열한 공방 속에서도 천신우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따다다당!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백호의 도를 튕겨내는 천신우를 보며 흑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그 순간 흑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천신우의 검에 심장을 관통당한 것이다.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 천신우의 판단이 주효했다.
“이놈!”
백호가 고함을 지르며 매섭게 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새 검을 회수한 천신우는 흑표의 머리통을 밟고 날아올랐다.
흑표의 시체가 앞을 가로막는 상황.
달려들던 백호가 멈칫했다.
“젠장!”
뒤늦게 도를 휘둘렀지만 천신우의 검은 이미 옆구리를 베어왔다.
서걱!
백호의 도는 한발 늦게 천신우가 있던 공간을 베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 백호의 옆구리에서부터 허벅지까지 길게 선이 그어졌다.
마지막으로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가 뽑자 핏물이 쏟아졌다.
검에 묻은 피를 촤아악 털어내며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 보고서에서 읽은 그대로군.’
백호의 전우애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흑표부터 노린 것이었다.
만일 백호를 먼저 노렸다면 흑표는 망설임 없이 천신우를 베었으리라. 동료가 어떻게 되든 말든.
‘이제 네 차례다.’
천신우의 시선이 석무해를 향했다.
부하들이 모두 쓰러졌음에도 석무해는 웃고 있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하룻강아진 줄로만 알았더니 실은 늑대였구나. 감히 내가 기르는 개들을 물어 죽였단 말이지.”
웃음도 잠시. 검을 고쳐 쥐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방금 전까진 상인처럼 계산적인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무인에 어울리는 야성이 느껴졌다.
천신우는 그런 석무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이런 상황에서 도망조차 가지 못했을 것이다.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기만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스윽.
앞으로 나서는 천신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으로.
서류상의 석무해와 눈앞의 석무해는 어떻게 다를까.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파파파팟!
빠르게 앞으로 쇄도한 천신우가 자운검을 휘둘렀다.
따당-!
검과 검이 부딪치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천신우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자운검이 잔상을 만들어내며 석무해를 압박해간다.
솨아아아악!
석무해도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확실히 그는 앞서 천신우가 상대한 부하들과는 달랐다.
검에 힘을 실으며 천신우의 검을 받아친다.
차차차창!
그림처럼 펼쳐지는 공방전에 아직까지 살아 있던 석무해의 심복이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석무해가 얼마나 강한지는 이미 알았다. 하지만 천신우가 이렇게 강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내공과 검법.
어느 하나 석무해에 밀리지 않았다.
도저히 스무 살 청년이라곤 믿기지 않는 실력이었다.
그래도 결국은 석무해가 승리할 거라 예상했다.
실제로 석무해의 검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심복이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 순간 천신우는 석무해가 초조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 초조할 거야.’
이미 석무해는 전력을 쥐어짜 내고 있었다.
남들에게 감췄던 본신의 실력을 드러내면서까지.
하지만 천신우가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서진 못했다.
오히려 전생에 읽었던 보고서보다도 떨어졌다.
‘하긴 지금으로부터 7년 후의 석무해를 분석한 보고서니 당연하겠지.’
7년……. 그때쯤이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즐거운 상상에 몸을 맡기며 천신우가 검을 휘둘렀다.
차차차차차창!
천신우의 검에 가속도가 붙었다.
숨까지 참아가며 천신우를 몰아붙이던 석무해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허!”
방금의 공격은 정말 위험했다. 방심한 것도 힘을 아낀 것도 아닌데 하마터면 목이 잘려 나갈 뻔했다.
간담이 서늘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장 날아드는 검을 향해 석무해가 검을 내질렀다.
까아앙!
손목이 끊어지는 충격에도 그는 이를 악물며 받아쳤다.
차아아앙! 채채채챙!
검과 검이 사냥감을 두고 맞붙은 맹수처럼 뒤엉켰다.
천신우의 검이 석무해의 가슴을 노렸고, 석무해의 검은 천신우의 목을 찔러갔다.
슥!
천신우가 목을 비틀며 석무해의 검을 피해냈다. 한발 앞서 내질러진 그의 검은 석무해의 옆구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숨을 돌리지도 않고 천신우가 그대로 검을 가로로 그었다.
쩌어엉!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난 석무해가 눈을 치켜떴다.
손목을 울리는 충격에도 끝까지 검을 놓지 않은 대가는 끔찍했다. 손아귀가 길게 찢어진 것이다.
그러나 석무해는 다른 손으로 검을 고쳐 잡는 대신 천신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천신우도 당황하지 않고 날아드는 검을 쳐냈다.
이번만큼은 석무해도 버티지 못했다.
허공을 날아간 검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석무해는 검을 다시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뼈가 드러난 손아귀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석무해가 천신우를 향해 도약했다.
분노가 실린 주먹이 공간을 찢어발길 듯이 날아든다.
하지만 천신우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오히려 석무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게 석무해의 무공 석영권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보고서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
다음 순간, 석무해의 주먹이 천신우의 뺨을 스쳐 갔다.
콰앙!
뒤쪽 벽이 무너져 내렸지만 간격 안으로 파고든 천신우는 거의 타격을 입지 않았다.
퍼억!
천신우의 발차기가 석무해의 무릎 안쪽 오금에 내리꽂혔다.
아래로 숙여지는 턱을 검의 손잡이로 올려친 다음. 그대로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검을 내려쳤다.
쉬익!
석무해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팔을 뻗었다.
검과 주먹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스가가각!
“크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이 석무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천신우의 검은 주먹을 부수고 팔과 어깨를 베고도 멈추지 않았다. 몸통을 대각선으로 가르며 반대편 골반에서 빠져나왔다.
몸이 반으로 쪼개진 석무해가 바람 빠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를 죽인들 네가 원하는 돈은 얻지 못할 것이다.”
천신우가 피식 웃었다.
“알아. 석가장이 껍데기라는 사실 정도는. 단심회가 진짜잖아.”
“네놈이 단심회를 어떻게!”
절규를 무시하며 천신우는 석무해의 왼손을 잘라냈다.
오른손이 찢어발겨져도 석무해가 끝끝내 왼손을 쓰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의수인 동시에 단심회주의 인장이었으니까.
“지옥에서 지켜봐. 내가 단심회를 접수하는 모습을.”
절망에 빠진 석무해의 목을 천신우는 가차 없이 베었다.
바닥에 떨어진 석무해의 머리통은 심복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히이익!”
학사처럼 백건을 머리에 두른 석무해의 심복이 벌벌 떨며 애원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백준. 금산 출생.”
오래전에 읽은 무림맹 보고서 내용을 천신우는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고향에서 짝사랑하던 여인을 겁탈하려다 실패하자 일가족을 살해하고 야반도주. 그러고도 뉘우치기는커녕 석무해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여인을 강간.”
“어떻게 그걸…….”
충격에 휩싸인 심복을 향해 천신우가 검을 들어 올렸다.
“너는 다시 태어나지도 마라.”
서걱!
천신우의 검이 바람을 갈랐다.
* * *
천신우는 석무해의 시체를 뒤져 찾아낸 불상을 하나로 합쳤다.
불상은 단심회의 비밀금고를 여는 열쇠였다.
열쇠 없이 강제로 열려다간 비밀금고가 파괴되기에, 석무해가 그토록 애타게 불상을 찾았던 것.
물론 정말 중요한 물건은 따로 있었다.
석무해가 죽는 순간까지도 애지중지하던 의수.
‘이게 바로 단심회주의 인장.’
단심회의 구성원들은 회주의 얼굴을 모른다. 내려오는 지시만 수행할 뿐이다. 그리고 그 지시를 내릴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 바로 이 단심회주의 인장이었다.
그건 다시 말해.
‘내가 단심회주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
단심회가 쌓아올린 부. 그리고 단심회가 운영하는 상단과 여러 사업체들까지 천신우의 손에 들어온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일단 세가와 거래조건부터 수정해 볼까.’
물론 그전에 증거부터 인멸해야 했다.
화르르!
천신우는 순식간에 불길로 뒤덮여가는 만곡산장을 바라보았다.
워낙 인적이 뜸한 장소.
사람들 눈에 띄었을 때는 모든 것이 불태워진 후일 것이다.
* * *
세가지연 마지막 날.
천신우는 수정된 계약서를 받아볼 수 있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군.’
이전보다 천씨세가에게 훨씬 유리해진 거래조건.
석가장이 이런 조건에 동의한 이유는 간단하다.
천신우가 단심회주의 인장을 이용해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방법도 간단했다.
단심회 비밀지부건물에 들어가 회주의 인장으로 기관을 작동시킨다. 그런 다음 지시내용이 적힌 명령서를 기관에 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그럼 단심회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명령서의 지시내용을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아버지가 기뻐하시겠어.’
물론 이번 일은 맛보기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생겼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세가로 돌아가는 길에 비밀금고도 열어봐야겠지.’
오직 불상으로만 열 수 있는 단심회 비밀금고.
천신우조차도 지금 시점에선 그곳에 얼마나 값진 보물들이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서 그곳의 존재가 알려진 시점은 마교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였기에.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지?”
계약서를 집어넣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휘였다.
“별일 아닙니다.”
“표정이 진지해서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했다네.”
전생처럼은 아니어도 제갈휘와 어느 정도는 얼굴을 익힌 천신우였다.
“하하하. 걱정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올라가시지요.”
마지막 날이라 후기지수들 모두가 참가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아마도 오늘만큼은 마음껏 마시고 떠드는 편한 자리가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술집 4층으로 올라간 천신우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와서 앉아 있는 우락부락한 사내를 발견한 것이다.
‘팽우경?’
틀림없었다.
하북팽가 대공자 팽우경이었다.
모용비와 호각을 이룰 정도로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
그러나 판단력이 떨어지고 누구보다 고집이 셌다.
‘그로 인해 그릇된 판단을 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천신우는 팽우경이 무림맹에 입힌 피해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촌동생만 보이고 정작 저놈은 안 보여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어째서 지금 나타난 거지?’
때마침 팽우경도 천신우를 노려보았다.
무슨 이유인지 천신우와 눈이 마주친 그의 표정엔 적의가 가득했다.
“너 이 자식, 마침 잘 왔다.”
팽우경이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