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학사환생 013화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혈견과 청사를 천신우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석무해가 불상을 회수하기 위해 보낸 해결사들.
굳게 다물린 입으로 보건대 처음부터 대화할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거겠지.
천신우가 불상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슥.
그들의 눈빛이 바뀐다.
추측에서 확신으로.
눈짓을 주고받은 그들이 먼저 움직이려는 찰나.
천신우는 불상을 허공에 집어 던졌다.
“……!”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혈견과 청사가 멈칫하는 순간.
천신우가 탁자 위를 미끄러지며 검을 뽑았다.
차아앙!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검을 찔러 넣었다.
뒤늦게 혈견이 쇠사슬을 감은 주먹을 내질렀다.
깡!
그러나 자운검과 맞부딪치는 순간, 혈견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끄아아악!”
자운검은 쇠사슬뿐만 아니라 혈견의 손가락까지도 잘라냈던 것이다.
비틀거리는 혈견을 향해 천신우의 검이 내리그어졌다.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혈견이지만, 이어진 공격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서걱!
베어져 나간 어깨에서 피가 솟았다.
“네놈은 대체……!”
대꾸조차 않고 천신우는 혈견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빠각!
고꾸라지는 혈견을 내버려 두고 천신우는 반동을 이용해 도약했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때마침 불상을 낚아채려던 청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청사의 대응은 나쁘지 않았다.
세검을 내지르며 천신우의 공세를 늦추려 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천신우는 공중에 떠오른 채로 몸을 뒤집으며 자운검을 역수로 쥐었다.
쏴아앙!
내려쳐지는 자운검을 받아내기 위해 청사도 세검을 가로로 세웠지만.
세검은 속절없이 잘려져 나갔다.
청사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세검은 일반적인 검보다 날이 얇다. 그만큼 탄력성도 좋아서 휘어지기는 해도 부러지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건만 천신우의 자운검을 당해내진 못했다.
거의 바닥에 떨어지려는 불상을 발등으로 받아낸 천신우가 피식 웃었다.
불상이 천장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짧은 시간 동안에 석무해가 보낸 해결사들을 제압했다.
그만큼 그가 강해졌다는 증거였다. 자운검이 명검이라는 증거이기도 했고.
다시금 쇄도하는 천신우를 보며 청사가 이를 악물었다.
혈견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
‘혼자서 어떻게든.’
부담감으로 인해 생겨난 아주 작은 빈틈을 천신우는 놓치지 않았다.
벼락처럼 내지른 자운검이 청사의 손목을 베었다.
“큭!”
그녀는 황급히 다른 손으로 검을 바꿔 쥐었지만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천신우는 반대쪽 손목마저 베어버렸다.
촤아악!
이어진 공격에 배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청사는 상처를 돌볼 생각도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너는……!”
천신우는 말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복면이 반으로 쪼개지며 청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천신우는 그 얼굴을 어렵지 않게 알아봤다.
“너는 청사군.”
“그걸 어떻게……?”
이번에도 천신우는 대답 대신 자운검을 휘둘렀다.
솨악!
거침없는 일격에 심장이 갈라진 청사가 그대로 숨을 거뒀다.
마지막까지도 천신우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엔 경악만이 가득했다.
“그럼 너는 혈견이겠지.”
천신우는 혈견의 복면을 벗겨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다가오는 천신우를 보며 혈견이 다급히 외쳤다. 천신우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돈을 주지! 경매대금의 다섯 배를 주겠다!”
“필요 없어.”
“돈이 필요 없다면 어째서…… 설마 처음부터 우릴 노리고?”
솨앙!
거침없이 휘둘러진 천신우의 검이 혈견의 얼굴을 베었다.
반으로 쪼개진 혈견은 천신우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핏물이 묻은 칼날을 내려다보던 천신우가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칼날에서 털어낸 핏물이 벽에 뿌려지며 글귀가 되었다.
내일 자정, 마곡산장.
철컥.
칼집에 자운검을 도로 꽂아 넣은 천신우가 몸을 돌렸다.
폐가 밖으로 걸어 나오자 비로소 눌러놨던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혈견과 청사라니.’
천신우는 그들이 누군지 알았다.
학사 시절 무림맹 수배자명단에서 봤기 때문이다.
둘이 한 조를 이뤄 청부받은 살인을 저지르는 악인들.
그들의 손에 죽어 나간 희생자들의 숫자만, 수십 명에 달했다. 밝혀지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세 자릿수를 훌쩍 넘길 것이다.
그런 흉악한 놈들을 방금 베어버린 것이다.
‘이 두 손으로.’
확실히 느낌부터 달랐다. 지난번에 흑도방파 한곳을 쓸어버렸을 때와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기분.
천신우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인이 되어가고 있음을.
* * *
“……이곳입니다.”
부하의 안내를 받아 폐가 안으로 들어선 석무해가 눈매를 좁혔다.
혈견과 청사.
오랫동안 그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살인을 저질러온 그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정말 석무해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닥에 뿌려진 핏물은 글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우연의 산물일 리는 없었다. 글귀가 의미하는 바가 명확했으니까.
“내게 보내는 전언이군. 감히……!”
천신우는 혈견의 피로 전언을 남겨놓았다.
약속시간은 내일 자정.
약속장소는 마곡산장. 전에 천신우가 불상을 털어간 석무해의 은신처였다.
석무해의 눈치를 보며 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피로 쓰인 글귀를 바라보던 석무해가 입을 열었다.
“적검대를 소집하도록.”
적검대는 석가장의 정예무인들이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는 부하에게 석무해의 지시가 이어졌다.
“흑표와 백호도 불러라.”
부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흑표와 백호까지 말씀이십니까?”
흑표와 백호는 석무해가 거느린 부하 중에 가장 강한 고수들.
그들까지 부른다는 것은 석무해 역시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뜻이었다.
“물론이다. 나를 도발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지.”
사실 단지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라면 석무해가 직접 나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불상이 반드시 필요했다.
‘오냐. 내가 직접 불상을 회수하고 이따위 개수작을 부린 놈의 목을 비틀어주마.’
석무해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이글거렸다.
* * *
세가지연이 막바지인 황보세가로 돌아온 천신우.
그를 가주 천무흔이 찾았다.
“부르셨습니까.”
그곳은 차를 마시는 다루였다.
벽에는 서화가 걸려 있었고 실내에 꽃과 진귀한 식물까지 심어 흥취를 한껏 돋웠다.
다루 주인이 내온 찻주전자와 찻잔들 역시도 무척 고급스러웠다.
“앉아라. 일단 차부터 한잔하자.”
천무흔이 덧붙였다.
“무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공만이 아니다. 차를 즐기는 다도 역시도 무인의 덕목 가운데 하나지. 그러니 오늘은 네가 한번 따라보아라.”
천신우는 천씨세가의 대공자.
당연히 다도를 배운 경험이 있었다.
‘지랄 맞은 성격 때문에 금방 때려치웠지만.’
학사 진현은 달랐다.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대신 차를 즐겼던 그다.
“이 향은…… 용현차로군요.”
천신우는 잠시 제갈휘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난했던 자신이 이런 고급차를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친하게 지내던 제갈휘 덕이었기에.
“호오. 알고 있었느냐.”
감탄하는 천무흔. 그러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차를 우려낸 물 또한 훌륭하군요.”
다루 주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금산의 깊은 샘에서 자정에 끌어올린 물입니다.”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주전자를 들었다.
쪼르륵.
다른 찻잔으로 옮겨가는 와중에도 찻물이 끊어지지 않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마침내 차를 따라낸 천신우가 천무흔의 허락을 받고 찻잔을 들었다.
먼저 향을 음미하고 혀를 굴려 차를 맛보는 모습.
천무흔도 차를 맛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하다.”
“과찬이십니다.”
“아니다. 네 덕에 웃을 일이 하나 늘었구나.”
천신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천무흔은 다루 주인을 물러가게 지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너도 장차 세가를 이끌어나가야 하니 알아둬야겠지. 이번에 석가장과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석가장 말씀입니까?”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그래. 너도 석가장이 운영하는 석화상단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들어보다마다. 오히려 천무흔보다 석화상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천신우였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석가장이 아니라 단심회의 사업체 가운데 하나지.’
천무흔이 숫자가 적힌 종이를 꺼내 보였다.
“거래조건은 이러하다. 세부조건이야 조율 가능하지만 여기서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게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요.”
“이대로 추진해도 괜찮겠느냐?”
세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주의 몫이다.
그럼에도 천무흔은 천신우의 의중을 묻고 있었다.
그만큼 천신우를 신뢰하는 것이다.
기대에 부응하듯 천신우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시간을?”
“제가 석가장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무흔은 석가장 후기지수들을 생각했지만, 천신우가 이 순간 떠올린 건 석무해의 얼굴이었다.
“하루만 시간을 주시면 그와 만나 좀 더 좋은 조건을 논의해 보겠습니다.”
“오냐.”
천무흔은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 천신우가 계약조건을 좋게 바꿀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어차피 천신우가 만날 수 있는 인물은 석가장 내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을 터.
그럼에도 천신우에게 하루의 시간을 준 것은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감사합니다.”
천신우라고 천무흔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됐다.
만일 자신이 지금보다 월등한 거래조건을 들고 온다면 천무흔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 * *
자정이 되기 한참 전에 약속장소인 마곡산장에 도착한 석무해다.
당연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석가장의 정예조직 적검대 무인들이 산장을 철통같이 경계했다.
거기에 석무해 곁엔 흑표와 백호가 각각 검과 도를 차고 서늘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물론 석무해가 믿는 건 바로 석무해 본인. 석가장을 대표하는 고수인 그는 상대가 누구라도 감당해 낼 자신이 있었다.
“슬슬 자정이군.”
심복이 고개를 조아렸다.
“숨어들 만한 길목마다 무인들을 배치해두었습니다. 놈들은 여기까지 오지도 못할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심복의 말을 부정이라도 하듯, 엄청난 충격음이 울렸다.
“저 방향은……?”
착각이 아니었다. 충격음은 분명 산장의 정문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설마 정면으로 돌파해 오겠다는 건가?”
석무해는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정면에 배치된 무인의 숫자가 훨씬 많다.
문파끼리의 전쟁이 아니고서야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명백한 현실이었다.
쾅쾅쾅!
충격음의 진원지가 점점 가까워진다.
석무해가 끌러두었던 칼집을 집어 들었다.
다음 순간.
꽈아아앙!
그가 있는 별실의 문이 박살 나며 천신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신우의 얼굴을 알아본 석무해가 눈을 부릅떴다.
“너는 천씨세가의……!”
비로소 모든 의문이 머릿속에서 맞춰진다.
“그랬군! 천씨세가에서 이번 일을 꾸몄구나!”
하지만 단 하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석무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 천씨세가의 다른 무인들은 보이지 않는 거지?”
“나 혼자야. 그러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운검을 들어 올리며, 천신우가 덧붙였다.
“더 기다릴 것 없이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