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학사환생 012화
천신우가 방문을 열자 천씨세가 소속 호위무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공자님. 말씀하신 물건 구해왔습니다.”
호위무인에게서 건네받은 상자는 천신우가 무한으로 오는 길에 부탁한 물건이었다.
“수고했어.”
방문을 닫고 상자를 열어보자 두툼한 책이 나왔다.
제법 유명한 학자가 남긴 저서.
물론 천신우가 관심 있는 것은 책의 내용이 아니었다.
사라락.
천신우는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글자들을 확인했다.
‘11쪽과 17쪽의 첫 글자. 그리고 39쪽과 128쪽의 마지막 글자.’
책에 나와 있는 문자들을 조합해 정보를 전달하는 것.
무림에서 제법 유명한 정보조직 신비루의 방식이다.
그 방식에 맞춰 네 글자를 차례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았다.
‘마곡산장. 이곳이 바로 석무해가 비상상황을 대비해 준비해둔 은신처로군.’
천신우가 의뢰한 정보는 바로 첫 번째 표적으로 삼은 석가장 실세 석무해의 은신처 위치.
‘사실 석가장의 실세란 건, 석무해의 대외적인 신분에 불과하지.’
석무해의 숨겨진 실체는 다름 아닌 비밀조직 단심회의 3대 회주다.
‘단심회는 장물거래와 자금세탁 등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이는 비밀조직. 석무해는 석가장 실세와 단심회주라는 두 개의 신분을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해 왔다.’
원래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석무해가 마교에 충성을 맹세하고 나서다.
지금 시점에서 석무해의 이중신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사실상 천신우가 유일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단심회에 소속된 자들조차 회주가 누군지 모르니까.’
하지만 천신우는 석무해의 실체뿐만 아니라, 그가 2년 전 도난당한 보물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고 있었다.
‘석무해는 그 보물을 찾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발견되는 건 잃어버리고 10년이나 지나서였지.’
이유가 있었다.
보물을 훔친 범인이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물건을 훔치자마자 석무해의 은신처에 숨겼던 것.
결국 석무해는 범인을 잡아 죽이고도 보물을 회수하지 못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천신우로선 헤맬 이유가 없었다.
‘마곡산장을 뒤져 보물을 찾아낸 다음, 그걸 미끼로 석무해를 끌어낸다.’
생각을 정리한 천신우는 객잔을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산책.”
황보세가 무인들의 물음에 적당히 대꾸해 주고서.
천신우는 무한의 밤거리를 벗어나 마곡산장으로 향했다.
* * *
6시간 후.
무한 근교에 위치한 마곡산장에서 걸어 나오는 천신우의 양손엔 자그마한 불상이 각각 들려 있었다.
빙옥으로 만들어진 이 반쪽짜리 불상들은 그 자체로도 값진 보물.
그러나 진정한 진가는 두 쪽을 하나로 합쳤을 때 드러난다.
물론 천신우는 불상을 합칠 생각이 없었다.
이 불상이야말로 석무해가 그토록 찾길 바라는 보물.
‘반쪽은 내가 보관하고, 나머지 반쪽은 석무해를 유인하는 미끼로 쓴다.’
천신우는 불상을 품에 보관한 채, 빠르게 그곳을 벗어났다.
* * *
세가지연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시점.
황보세가에 여러 가문의 가주들과 후기지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였다.
가주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을 공표하는 자리.
물론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 많은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허허. 가주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천씨세가 가주 천무흔에게 접근해 오는 무인들 역시 그러했다.
안부인사로 시작해 은근슬쩍 딸이나 조카딸 이야기를 꺼낸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집안에 둘째 딸아이가 올해 열여덟입니다. 여기저기서 혼담은 많이 들어오긴 하는데 좀처럼 눈에 차지가 않아서…….”
“혹시 가주께선 대공자 신붓감으로 점찍어두신 아이가 있으신지요?”
결국은 천신우와의 혼담을 추진해달라는 부탁으로 끝을 맺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끊임없이 들어오는 혼담에 지칠 법도 하건만.
천무흔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우리 어른들 의견이 뭐가 중요하겠소. 큰아이 마음이 우선이지요. 마침 저기 오는구려.”
눈도장을 한 번이라도 더 찍기 위해 천무흔 주변을 떠나지 않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천신우가 다가와 천무흔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버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안부야 호위무인들을 통해 주고받았지만 직접 얼굴을 보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오냐. 덕분에. 그나저나 너는 조금 피곤해 보이는구나.”
“준비하는 일이 있어서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을 대로 해라.”
천무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의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소개가 늦었소. 이 아이가 신우라고, 내 부족한 자식놈이외다.”
천신우를 바라보는 무인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모용비와 제갈휘만큼이나 요즘 화제를 몰고 다니는 천신우.
과연 그들이 보기에도 과거에 망나니로 소문났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인사 드려라. 여기 이분은 모용세가의 백검단주 모용동 대협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천무흔이 천신우에게 무인들을 소개하는 데만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직접 딸을 데려와 보여주기까지 했다.
한참 만에야 소개를 마친 천무흔이 넌지시 물었다.
“너라면 이미 알아차렸겠지. 방금 소개한 무인들은 모두 세가와의 혼담을 추진하려는 이들이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짐작은 했습니다.”
“그래,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아이가 있느냐? 누구든 네가 선택한 신붓감이라면 흔쾌히 허락하마.”
남궁세가와 태중혼약을 맺었다가 파혼의 쓴맛을 경험한 천무흔이다.
그 경험을 교훈 삼아서라도 이번만큼은 천신우가 배우자를 직접 고르도록 배려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천신우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교는 침공을 위한 사전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혼인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죄송합니다. 아버님. 저는 아직 혼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자식이 결혼해 낳은 손주를 보고 싶은 것은 모든 아버지들의 공통된 마음.
하지만 천무흔은 애써 아쉬움을 달랬다.
“네 뜻이 그렇다면 나도 존중하마.”
“감사합니다.”
“앉아라. 이제 시작하는구나.”
과연 이번 세가지연을 주최한 황보세가의 가주가 단상 위로 오르고 있었다.
대화가 중단되고 무인들의 시선이 황보세가 가주에게 모여든다.
황보세가 가주의 입이 열리며 중후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번 세가지연을 통해…….”
가주회의에서 결정된 사안들이 차례대로 언급됐지만.
천신우가 관심을 보인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이때쯤이군. 절명곡에서 실종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게.’
절명곡 실종사건의 전모는 나중에야 밝혀진다.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나서.
전생에선 그저 보고서로만 확인했던 사건.
하지만 이번 생에선 직접 개입할 생각이었다.
‘불필요한 희생은 최대한 막아야겠지. 구해야 할 사람도 있고.’
물론 당장 해결할 일은 따로 있었다.
때마침 옆에 앉은 천무흔이 물어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 자선경매에 출품할 물건은 준비했느냐?”
“물론입니다.”
세가지연엔 번외행사가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석가장에서 주관하는 자선경매다.
경매대금의 일부를 빈민구제를 사용하기에 자선경매라는 명칭이 붙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본연의 목적은 퇴색되고 세가들의 재력을 뽐내는 자리로 변질돼 버렸다.
그 자선경매에 천신우가 내놓을 물건은, 며칠 전, 마곡산장을 급습해 얻어낸 불상 반쪽이었다.
‘자선경매는 석가장 주관. 내가 불상을 경매에 내놓으면 석무해는 그게 도난당한 물건임을 알아볼 거다. 그리고 나머지 반쪽을 찾기 위해 출품자 뒤를 캐겠지.’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는 이유는, 석무해가 두문불출하는 인물이기 때문.
불상처럼 확실한 미끼가 아니고선 결코 그를 끌어내기 어렵다.
‘낚싯대는 이미 던져졌고. 이제 물고기가 걸리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불상 반쪽을 만지작거리며 천신우는 이후의 계획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 * *
그날 저녁.
“이번에 보실 물건은……!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무한에 위치한 한 장원에선 자선경매가 성황리에 진행 중이었다.
경매사가 진귀한 물건을 소개할 때마다 참석자들은 눈을 빛냈다.
무기, 갑옷, 보석, 영약, 고서적.
온갖 물건들이 경매에 출품됐고 족족 팔려나갔다.
장원의 비밀공간에서 그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중년남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자선경매를 주관하는 석가장의 실세 석무해였다. 물론 그가 비밀조직 단심회의 회주란 사실은 석가장 무인들조차 알지 못했다.
“알아봤는가?”
아무도 없던 것처럼 보이던 천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불상을 출품한 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았답니다. 담당자의 보고에 따르면 물건과 쪽지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쪽지?”
“그렇습니다. 경매대금을 수령할 장소와 일시가 적혀 있었답니다.”
석무해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범인을 잡아 죽였지만 결국 불상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잃어버린 불상이 내 앞에 보란 듯이 나타나다니. 심지어 반쪽뿐이라……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엔 기묘하군.’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석무해에겐 불상이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 경매에 출품된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형태의 불상이.
“장소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폐가입니다.”
“일시는?”
“지금으로부터 4시간 후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석무해가 입술을 쓸었다.
“당장 혈견과 청사를 준비시켜 그곳으로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불상값은 후하게 계산해 주라고 일러두겠습니다.”
물론 석무해와 심복의 대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선 곤란했다.
혈견과 청사는 석무해의 부하들 가운데 암살에 특화된 고수들.
결국 석무해는 상대를 죽이고 나머지 반쪽의 불상까지 빼앗아오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사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물건을 제값 치르고 사본 적이 없었으니까.
* * *
반쯤 박살 난 문을 소리 없이 밀며 복면사내와 복면여인이 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바로 석무해의 부하인 혈견과 청사.
이곳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불상을 회수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군. 설마 함정인가?’
주위를 경계하며 문 하나를 더 열었을 때.
그들은 보았다.
방 한복판, 낡은 의자에 앉아 있는 천신우의 모습을.
복면 속 혈견과 청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신우가 버젓이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전혀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긴장한 그들을 향해 천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