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학사환생 011화
원래 모용비와 남궁인은 폭주하는 황보도준으로부터 천신우를 구하고자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깨닫고 말았다.
사실 그들이 구한 것은 천신우가 아니라 황보도준이란 사실을.
만일 그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황보도준이 천신우의 간격 안으로 들어갔다면…….
‘그대로 베였겠지.’
실제로 천신우가 피어 올린 살기는 모용비와 남궁인마저도 긴장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천신우는 황보도준의 접근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
그 순간, 모용비와 남궁인은 새로운 가정을 떠올렸다.
‘설마 일부러 허점을 보인 다음, 황보도준이 가까이 오기까지 기다린 것은 아니겠지?’
‘천신우가 황보도준의 접근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선제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황보도준을 정당하게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런 상황에서라면 천신우가 황보도준을 죽이더라도 지켜보던 모두가 증언해 줄 테니까. 황보도준의 기습에 대응하다 생긴 불행한 사고였다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모용비와 남궁인은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돌아서는 천신우를 보자 그런 생각은 쏙하고 들어갔다.
천신우는 모용비와 남궁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남궁인이 손을 들었다.
“인사는 됐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자네 힘만으로 제압이 가능했을 테니.”
“아닙니다. 제 미흡한 실력으론 대응하는 과정에서 분명 상대에게 부상을 입혔을 터. 그랬다면 저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겁니다.”
슬쩍 떠보는 남궁인이었다.
“진심인가? 솔직히 천씨세가와 황보세가는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잖나.”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과거에 만들어진 악연일 뿐.”
천신우는 맑은 눈으로 남궁인을 바라보았다.
“저희 세대에선 그 악연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신선한 관점에 남궁인은 작은 충격마저 느꼈다.
천씨세가와 황보세가는 예전부터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아니던가.
그런데 천씨세가의 후계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미래엔 구도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내가 자네를 잘못 생각했었나 보군.”
모용비 역시 잠시나마 천신우의 의도를 의심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신우 아우.”
오늘 전까지 모용비와 천신우는 결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용비는 지금 천신우를 아우라 부름으로써 호감을 드러냈다.
“내가 책임지고 도준 아우를 타일러 사과하도록 시키겠네.”
“감사합니다만 황보도준이 제게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는 비무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이니까요.”
남궁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
이 순간 모용비와 남궁인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가문의 후계자들이야 숱하게 만나온 그들이다. 천신우 정도의 실력자도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천신우처럼 인성까지 갖춘 이는 극히 드물었다.
‘일개 민초를 위해 흑도방파를 쓸어버리는 정의로움. 경쟁관계인 가문의 후계자를 포용하는 넓은 마음. 천 공자는 실로 모든 것을 갖췄구나. 아아. 어찌하여 나는 적극적으로 파혼을 막지 않았던가.’
뒤늦은 후회를 삼키며 남궁인이 선언했다.
“혹시라도 오늘 비무로 인해 문제가 생기거든 남궁세가의 이름을 걸고 내가 무마해 주겠네. 더불어 황보도준의 잘못을 묻고 싶다면 증인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야.”
모용비 역시 덧붙인다.
“나중에라도 도준 아우와 자리를 만들어주지. 그때는 절대 오늘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없을 것을 약속하겠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천신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군.’
황보도준을 죽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황보도준이 죽는다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
아무리 많은 이들이 사고라고 증언하더라도, 후계자를 잃은 황보세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려 들겠지.
그런 무리수보다는 적절한 대응으로 황보도준을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나아가 모용비와 남궁인의 호감을 사는 것.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그들에게 천신우는 관용을 베푸는 실력자로 기억될 것이다.
‘시대를 풍미한 절대자들의 일대기를 섭렵했던 경험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는군.’
전생에 학사 시절. 그는 과거 무림에 군림했던 절대자들의 일대기들을 수도 없이 읽었다.
책에 기록된 역사가 말해주었다. 지금껏 무림엔 수많은 절대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음을.
그들의 공통점은 강하다는 것이었다. 막강한 무공을 익혔기에 남들 위에 군림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녔더라도 정치적 수완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가능한 많은 이들을 천씨세가의 우호세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영원한 아군은 없다는 사실 또한 잊어선 안 되겠지.’
그 사실을 명심하며 장내를 벗어나는 천신우.
그런 그를 지켜보며 단상 위의 무인들은 저마다 생각했다.
‘백 년의 웅크림을 끝내고 천씨세가가 드디어 비상하는가.’
‘황보세가의 후계자가 저리 비겁한 위인일 줄은 몰랐군. 그에 반해 천 공자는 알려진 것과 다르게 차분한 성정의 소유자구나. 저런 상황에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다니.’
‘천씨세가…… 앞으로 주시할 필요가 있겠어.’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천신우가 피어 올린 살기를 확인하진 못했다.
그저 황보도준을 꺾은 상황만 보고 판단을 내렸을 뿐.
물론 그것만으로도 천신우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바꾸기엔 충분했다.
그런 가운데 황보세가의 무인만이 굳어진 얼굴로 자리를 떴다.
‘미치겠군. 가주님의 진노를 어찌 감당할지.’
세가지연 개최로 인해 잔칫집 분위기였던 황보세가다. 하지만 이번 일로 초상집 이상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을지도 몰랐다.
황보세가의 무인은 그게 걱정이었다.
* * *
세가지연 첫날.
후기지수들에게 제공된 숙소는 천년호 옆의 객잔.
바로 천신우가 글재주로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었던 그곳이었다.
사실 천신우와 황보도준의 대결을 지켜본 후기지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저녁식사 이후론 각자 시간을 보냈기에.
하지만 직접 목격한 후기지수들은 물론, 다른 후기지수들 역시 천신우를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시와 경멸이 시기와 질투로.
무관심이 관심으로. 비호감은 호감으로.
수많은 감정의 변화 속에 천신우만이 평소와 같았다.
일찌감치 배정된 방으로 돌아온 천신우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런 다음 자운검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보면 정말 평범한 검인데. 검성은 어떻게 자운검을 알아봤을까.’
어쩌면 정해진 운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마교에게 무림이 멸망하는 것이 정해진 운명이라면, 나는 운명을 거부할 것이다.’
천신우는 최선을 다해 미래를 바꿀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무기도 얻었겠다. 이제 자금을 확보할 차례군.’
지금 천신우에게 돈은 아무리 있어도 모자랐다.
‘세가의 제도를 개선하고 무인들을 양성하기 위한 자금. 그리고…….’
천신우는 다가올 미래를 떠올렸다.
내년 여름이 되면 홍수로 인해 곡물값이 크게 뛴다.
그전에 충분한 자금을 확보해 곡물을 사재기할 계획이었다.
물론 그것을 통해 물질적 이득을 챙기려는 것은 아니다.
‘빈민들을 구제하여 명망을 얻는다. 더불어 천씨세가에 우호적인 세력들에겐 저렴한 값에 곡물을 풀어 동맹을 강화한다. 그러려면 그전에 충분한 자금을 확보해놔야겠지.’
천신우는 이미 물망에 올려둔 대상들을 떠올렸다.
‘금와전장의 장주 만금소. 석가장의 실세 석무해. 남해검문의 문주 유일성. 팔룡도문의 문주 장수기.’
그밖에도 물망에 올려둔 대상은 많았다.
근거지와 신분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두 가지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먼저 다들 돈이 많지.’
그들 모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 부를 쌓기 위해 무고한 이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 낸 놈들이기도 하고.’
심지어 마교가 침공해 오자 재산을 바치고 목숨을 보장받은 기회주의자들이기도 했다.
전 재산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더라도 한 줌의 동정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쓰레기들.
천신우는 마교의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을 전부 털어 막대한 자금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이놈들 중에 지금 내 실력으로 압도할 수 있는 자는 석가장의 실세 석무해 정도.’
마침 석가장의 위치는 이곳 무한에서 매우 가까운 편이었다.
물론 석무해는 무턱대고 접근한다고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덥석 물게 만들 미끼가 필요하지. 그러니 일단은 미끼를 구하는 것부터.’
천신우가 생각을 마무리하던 그때였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