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학사환생 010화
“하하! 역시 자네였군!”
환하게 웃으며 천신우를 향해 다가온 사람은 모용비였다.
당연하게도 모용비 뒤로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보였다.
천신우와 눈이 마주친 황보도준이 입술을 바득 깨문다. 아직도 연성환이 눈에 아른거리는 모양.
다시 고개를 돌리자 모용비가 무기상점을 가리키며 물었다.
“혼자서 여긴 무슨 일로?”
천신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한번 둘러볼 생각입니다. 혹시나 손에 맞는 검이 있을까 해서.”
“그래? 그럼 어디 나도 둘러볼까.”
모용비가 넌지시 물어온다.
“그건 그렇고 글재주가 그리 뛰어난 줄은 미처 몰랐군. 제갈휘, 그 친구도 놀라던데.”
역시 이게 목적이겠지.
“미천한 솜씨를 다들 좋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 겸손하기까지.”
모용비가 웃으며 덧붙였다.
“마음에 드는 검이 있으면 골라봐. 오늘 멋진 시를 보여준 보답으로 하나 사주지.”
뒤따르던 후기지수들의 얼굴에 부러움이 스쳤다.
앞날이 창창한 모용비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일이었기에.
무기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상점주인이 고개를 조아린다.
“어서 오십시오! 천천히 구경하시지요.”
천신우는 주인의 안내를 받아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상점 안은 무척이나 넓었다.
진열대에 각종 무기가 놓여 있었고 벽면의 진열장에도 병장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던지는 비수에서부터 거대한 도와 기다란 창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무기를 구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대한 천신우의 감상은.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그렇다고 이거다! 싶은 무기는 없었다. 저런 무기 정도야 천씨세가 무기고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괜찮은 무기들이 제법 보이는데. 고르기 힘들면 도와줄 수도 있어.”
호의를 보이는 모용비.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천신우의 눈에 들어온 광경이 있었다.
벽면의 진열장 사이에 자리 잡은 작은 문을 발견한 것이다.
“저긴 뭐하는 곳이지?”
주인이 난색을 표했다.
“이곳에 비해 다소 격이 떨어지는 무기들을 진열해둔 곳입니다.”
아무래도 손님들 수준에 맞춰 무기를 보여주는 듯했다.
“저기도 보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주인이 열어준 문으로 천신우가 들어섰다.
과연 주인의 설명대로였다.
그곳에 있는 무기들은 확실히 수준이 떨어졌다.
모용비를 뒤따라온 후기지수가 빈정거린다.
“어이가 없군. 이걸 무기라고 파는 건가?”
안색이 창백해진 주인을 천신우가 안심시켰다.
“내가 보여달라고 했으니 책임도 내가 진다. 걱정 말도록.”
그러면서 진열된 무기들을 하나하나 훑는 천신우였다.
‘확실히 눈에 띄는 무기는…… 잠깐!’
천신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곳에서도 구석에 진열된 한 자루의 검이었다.
길이도 칼날의 형태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천신우는 알고 있었다.
검성의 자운검이 바로 이런 형태라는 것을.
물론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생긴 검은 정말이지 흔해 빠졌기에.
‘어디 볼까.’
투박한 손잡이를 움켜쥐자 천신우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균형이 맞지 않는군.’
겉모습은 검을 평가하는 기준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보다 중요한 요소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칼날의 무게균형은 많은 무인들이 중시하는 것이었다.
특히 고수들은 아주 미세한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째서 여태껏 안 팔렸는지 알겠군.’
그럼에도 천신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은밀히 내공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손잡이를 통해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우웅!
천신우의 가슴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틀림없어! 자운검이다!’
명검이 아니고선 주입되는 내공을 버텨내지 못한다. 칼날이 박살 나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천신우가 손에 쥔 검은 내공을 버텨내는 걸로도 모자라, 공명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자운검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했다.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천신우가 모용비를 돌아봤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모용비가 웃는다.
“설마 나를 배려해 그걸 고른 겐가? 비싼 검을 고르면 내가 난처하기라도 할까 봐? 하하하.”
다른 후기지수들도 덩달아 웃었다.
그러나 황보도준은 웃지 않았다.
“글재주는 있을지 몰라도 검을 보는 안목은 형편없군.”
참지 못하고 도발한 것은 역시 천신우가 삼켜버린 연성환 때문.
모용비도 황보도준의 견해에 동의했다.
“솔직히 내가 봐도 좋은 검으론 생각되지 않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고르지그래. 액수는 얼마가 돼도 괜찮으니까.”
거듭되는 권유에도 천신우는 확고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저는 정말 이게 마음에 듭니다.”
“본인이 마음에 든다면야.”
모용비가 황보도준을 돌아봤다.
“그건 그렇고 도준 아우 생각은 다른가 보군. 그럼 아우도 하나 골라보지그래.”
“저라면.”
황보도준은 앞서 봐뒀던 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고민할 필요조차 없이 이걸 선택하겠습니다.”
지켜보던 다른 후기지수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럴 것이 황보도준이 선택한 검은 이곳에서만큼은 단연 최고였다.
이름난 명검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비싼 값을 받을 만한 물건.
상점주인도 손을 싹싹 비비며 추임새를 넣었다.
“과연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황보도준은 우쭐해하며 위로 향하게 세운 칼날 위에 머리카락을 떨어뜨렸다.
솨아악!
칼날에 닿는 순간 머리카락이 깔끔하게 잘려져 나간다.
그걸 지켜본 모용비가 천신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 고른 무기가 너무 차이 나는데. 정말 괜찮겠나?”
“어차피 검이란 머리카락 자르는 물건이 아니잖습니까.”
천신우의 응수에 황보도준이 발끈했다.
“그럼 머리카락조차 자르지 못하는 검은 어디에 써야 할까.”
지켜보는 후기지수들 표정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천신우와 황보도준의 신경전이 어디까지 치달을지 궁금한 것이다.
하지만 모용비는 분위기가 험악하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만. 언제까지 무의미한 설전을 계속할 셈인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검 보는 안목을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평소와 달리 쉽게 물러나지 않는 황보도준이었다.
‘연성환을 놈에게 내준 실수를 만회하려면 지금뿐이다.’
황보도준의 뜻을 알아차린 진유백도 거들고 나섰다. 화장실에서 천신우에게 당한 앙금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검은 맞대보기 전엔 모른다지만 그래도 이건 좀…….”
모용비가 황보도준과 천신우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자네들 생각도 그런가?”
황보도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이번 기회에 천 공자에게 좋은 검이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습니다.”
명백한 도발.
천신우는 피하지 않았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유는 많았다.
먼저 천신우는 황보도준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또한 자운검을 실전에서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그가 속한 천씨세가는 황보세가에 밀려 오대세가의 자리에서 내려온 상황.
천씨세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라도 황보세가를 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식으로 기선제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 순간, 황보도준 역시 천신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천신우를 꺾는다면, 연성환을 내준 실수를 만회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황보세가가 천씨세가보다 오대세가에 적격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 될 것이다.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도 이번만큼은 칭찬해 주시겠지.
당연히 천신우를 꺾을 자신도 있었다.
‘내가 모용비와 제갈휘에게 가려서 그렇지, 절대 다른 놈들에게 밀리는 수준은 아니지. 상대가 천신우 저놈이라면 더더욱.’
애초에 천신우는 황보도준보다 무공수준이 훨씬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연성환이야 나도 이미 오래전에 복용했고.’
게다가 결정적인 차이는 무기.
천신우가 고른 검은 누가 봐도 평범함 그 자체였다.
황보도준이 선택한 검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실력이 조금 뒤처져도, 무기의 차이로 극복할 수 있는 법인데.’
하물며 실력과 무기 모두 상대에 비해 앞서는 지금, 대결을 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용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의견이 일치하니 내가 할 말이 없군. 좋아. 가볍게 비무라도 해보지. 주인장. 여기 계산서 가져오게.”
“알겠습니다요.”
계산을 끝낸 모용비가 앞장섰다.
“여기는 도저히 비무할 만한 곳이 아니니 장소를 옮기지.”
황보도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멀리 가실 필요 없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요.”
황보도준의 지시를 받은 황보세가 무인들이 곧바로 거리로 뛰쳐나갔다.
노점상들을 치우고 행인들의 통행을 통제했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노점상들에게 몇 푼 쥐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무한의 밤거리 한복판에 무대가 만들어졌다.
“그럼 내가 공증인으로…… 하하. 그럴 필요 없겠군.”
모용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비가 후기지수들을 대표해 고개를 숙였다.
“남궁인 선배님을 뵙습니다!”
오대세가의 실무자들과 실무회의를 끝내고 연회를 위해 이동하던 남궁인이다.
그런데 상황을 보아하니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는 듯했다.
“그래. 오랜만일세. 그런데 무슨 일인가?”
“그것이…….”
모용비의 설명을 들은 남궁인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하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남궁인은 동행한 인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비무의 공증인이 되어주겠네.”
천신우와 황보도준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남궁인 정도 되는 고수가 공증인이 되어준다면 사실상 공식비무나 마찬가지였다.
“명심하게. 비무는 비무일 뿐. 혹시라도 살수를 쓴다면,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야.”
천신우와 황보도준 모두 각자 가문의 유력한 후계자.
남궁인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라도 문제가 될 일은 막을 생각이었다.
모용비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남궁인 선배님께서 그토록 신경 써주시니, 후배들은 마음 놓고 비무를 지켜봐도 되겠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남궁인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사실 무림의 선배로서 나섰다기보다는, 개인적인 호기심이 컸다.
얼마 전, 흑도방파 하나를 혼자서 궤멸시킨 천신우다.
그런 그가 황보세가의 기대주 황보도준을 상대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천신우와 황보도준의 비무가 갖는 의미는 컸다.
“천씨세가와 황보세가. 과거의 오대세가와 현재의 오대세가의 대결이라…….”
남궁인과 동행한 인사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아주 흥미로운 비무가 되겠군요.”
“누가 이기든 지는 쪽은 타격이 적지 않을 겁니다.”
후기지수들도 초유의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남궁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준비들 하게.”
* * *
비무를 준비하는 황보도준의 표정은 아주 여유로웠다.
반면 천신우는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긴장으로 몸이 굳어지거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은 아니다.
‘이런 날이 오다니.’
전생에 학사 시절. 무림맹 서고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천신우는 이따금 상상했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사를 두고 겨루는 일검승부를.
항상 상상으로만 끝났던 그 광경이, 지금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급조된 단상 위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는 남궁인과 오대세가의 주요인사들.
그리고 저마다 자세를 취하고 지켜보고 있는 후기지수들.
방금 전까지 행인으로 북적거리던 무한의 밤거리가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 이곳은 전장이었다. 두 무인, 나아가 두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 전쟁이 벌어지는.
“시작하지.”
남궁인의 목소리를 끝으로 모든 소리가 천신우의 귀에서 사라졌다.
후기지수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숨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마저도.
모든 광경이 지워진다.
지켜보는 사람들, 무한의 밤거리, 밤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달빛까지도.
이제 천신우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황보도준뿐이었다.
“아주 박살을 내주마.”
황보도준이 자신 있게 거리를 좁혀온다.
들어 올린 검이 천신우를 매섭게 휘몰아쳐 왔다.
하지만 천신우의 눈엔 그 일련의 동작이 너무도 느리게 보였다.
스윽.
몸을 틀자 황보도준의 검이 뱀처럼 휘어지며 쫓아온다.
독사처럼 집요한 추격에도 천신우는 계속해서 피해냈다.
고개를 틀며, 가슴을 젖히며.
마치 그 움직임은 춤을 추는 듯했다.
실제로 천신우는 즐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래서 무인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검을 놓지 못하는구나.’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법.
‘이제 끝내자.’
천신우의 기도가 바뀌었다.
우우우웅.
자운검이 천신우의 내공에 공명한다.
그 신비스러운 현상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황보도준이 이죽거렸다.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지?”
황보도준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에도 천신우는 피하는 게 고작이었기에.
‘이제 끝낸다.’
쏴아앙!
수직으로 내리긋는 황보도준의 검은 아까보다 훨씬 매섭고 빨랐다.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이 탄성을 자아낸다.
“맙소사!”
“저렇게 빠르다고?”
물론 모용비가 보기에 놀랄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뭐, 저 정도는 보여줘야 정상이지. 그나저나 천신우, 너도 지금까지처럼 피하기만 해서는…….’
그 순간, 모용비는 잠시 생각을 중단했다.
쩌어어엉!
경쾌한 금속성이 무한의 밤거리에 울려 퍼졌다.
천신우의 검이 좌우로 기묘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황보도준의 검과 맞부딪친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무기 자체의 성능은 황보도준의 검이 우월하다.
그렇다면 천신우 입장에선 정면대결은 무조건 피해야 할 터.
‘지금까지 잘하고 있다가 갑자기 왜?’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모용비는 보았다.
황보도준의 몸이 뒤로 밀려나는 광경을, 그가 쥐고 있던 검에 생겨나는 균열을.
‘둘의 실력 차이가 이렇게 크다고? 무기의 우위로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사실 모용비는 천신우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음을 알고 있었다.
글재주는 물론, 무위 역시도.
하지만 싸구려 검으로 황보도준을 압도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잠깐만, 방금 전, 천신우의 검이 기묘한 색을 띠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다시 보니 아니었다. 천신우의 검은 아까 상점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착각이었나. 하긴 성능이 떨어지는 무기라도 정교하게 사용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좋은 목수는 연장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니까.’
검이 맞부딪친다고 해서 둘의 실력이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충돌의 순간,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실력이다. 이를테면 상대의 무기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를 타격한다든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용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신우, 대단하군.’
한편 한참을 뒤로 밀려난 끝에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황보도준은 눈을 부릅떴다.
엄청난 충격을 받고도 끝끝내 검을 놓지 않았건만, 알고 보니 부질없는 짓이었다.
황보도준의 손에 남겨진 건 손잡이뿐.
칼날은 동강 난 채로 바닥에 볼썽사납게 처박혀 있었다.
고개를 들자, 이미 검을 칼집에 넣고 몸을 돌리는 천신우가 보인다.
무거운 침묵이 장내에 내리깔렸다.
황보도준은 직감했다.
이 침묵이 끝나는 순간, 남궁인이 천신우의 승리를 선언할 것이라고.
‘그럴 순 없다!’
마침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비무 전 끌러둔 검이 보였다.
이성적인 판단은 이미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비무를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뿐.
뒤돌아선 천신우를 급습해서라도 말이다.
‘죽인다!’
황보도준이 내공을 한계까지 쥐어짜 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쥐고, 다시 천신우를 향해 달려드는 일련의 과정이 한 호흡 만에 이뤄졌다.
그러나 황보도준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뭐하는 짓인가? 분명히 살수는 금지한다고 했을 텐데?”
“도준 아우. 실망이군.”
지켜보던 모용비와 남궁인이 거의 동시에 장내에 내려서며, 그를 막아선 것이다.
황보도준이 이를 갈았다.
‘젠장!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몇 걸음만 더 가면 천신우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데 말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황보도준에게 모용비와 남궁인이 경고했다.
“당장 검을 내려놓고 패배를 시인…….”
바로 그 순간, 모용비와 남궁인은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착각을 느꼈다.
“……!”
촤아앙!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벼락같이 검을 뽑아 들며 돌아선 모용비와 남궁인.
그러나 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천신우의 검이 정확히 손가락 한 마디만큼 칼집에서 빠져나와 있을 뿐.
‘뭐지? 어느 틈에 검을?’
모용비와 남궁인이 의아해하는 순간, 철컥, 천신우의 검이 칼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주위를 압도하던 살기가 자취를 감추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들이 저마다 손을 내려다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손끝에서 온몸으로 전해지는 강렬한 느낌, 그것은 분명 전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