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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9화 (9/171)

# 9

학사환생 009화

천신우는 붓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주위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종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후기지수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눈동자에 담긴 것은 수많은 감정들이었다.

경의와 찬사. 시기와 질투…….

천신우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제갈휘에게 다가갔다.

남들이야 아무래도 좋다.

제갈휘만 자신을 인정해 준다면.

“여기 있습니다.”

천신우가 건넨 종이를 제갈휘가 손을 내밀어 받아들었다.

제갈휘의 외모는 전생에서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전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종이를 건네받은 제갈휘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종이에 가려서 보이지 않지만 천신우는 왠지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이 됐다.

‘그렇게 놀라실 것까지야.’

속으로 중얼거리던 천신우는 문득 모용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교와의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고도 다시 검을 들었던 영웅.

그가 천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채로운 눈빛으로.

이내 몸을 돌린 모용비가 제갈휘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종이에 구멍 뚫리겠어.”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제갈휘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종이 위의 글자들에 머물렀다.

“하하하. 자네가 어떤 시를 가장 으뜸으로 뽑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모용비는 천신우가 적은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호수는 천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데 그때 거닐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구나.”

잠자코 있던 제갈휘가 이어받았다.

“사람은 사라지고 이름만이 남으니 이를 덧없다 할 것인가.”

모용비가 환하게 웃는다.

“하하하. 물론 아니지. 정진하여 후세에 이름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천신우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진현이란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을까.

물을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었다.

기억하는 사람 하나 없이 잊혔으리라.

‘이번 삶은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각오를 새로이 하는 가운데 모용비가 입을 열었다.

“오늘만큼은 나도 휘와 같은 생각인데. 지켜보신 소저들의 마음은 어떠신지?”

사실 모용비가 눈을 감고 아무 종이나 집어도 그게 최고의 시라고 칭송할 여인들이다.

그저 모용비와 눈이라도 한번 마주칠 생각에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결정된 걸로. 도준 아우.”

평소 모용비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황보도준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도준 아우?”

거듭 부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 황보도준이 대답했다.

“예? 아, 네. 형님. 듣고 있습니다.”

“하하하. 도준 아우도 시의 여운에 빠져 있었던 겐가. 그럴 만도 하지.”

물론 전혀 아니었다.

황보도준은 돌아가는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던 것뿐.

‘어떻게 받아낸 연성환인데…….’

용봉연에서 주목을 받기 위해 아버지에게 조르고 졸라 받아온 연성환이다.

사실 과정은 나쁘지 않았다.

모용비와 제갈휘마저 연성환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하필이면 그 귀한 연성환이 천신우 손에 들어가게 생긴 것이다.

솔직한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

황보도준은 이를 악물며 연성환이 들어 있는 상자를 천신우에게 내밀었다.

“……축하한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심정은 오죽할까.

“고맙다.”

구슬 크기의 연성환을 받아든 천신우는 그걸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졌다.

“헙!”

특히나 황보도준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오늘 밤에라도 사람을 보내 연성환을 회수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약을 올리듯 천신우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은데? 과연 명성 그대로야.”

사실 연성환이 올려주는 내공은 다른 영약들과 비교해 결코 높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체질에 상관없이 복용이 가능한 데다 기운을 흡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몹시 짧았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천신우는 주저 없이 연성환을 복용했던 것.

한층 깊어진 천신우의 눈빛을 보자 황보도준은 도저히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젠장!’

욕지거리를 참은 것은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일 보는 눈이 없었다면 진작 천신우의 멱살을 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자자. 이제 장소를 옮기지.”

모용비의 목소리는 황보도준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천신우에게 영약을 내준 것도 분하지만 아버지가 걱정이었다.

숙적인 천씨세가의 대공자에게 가문의 영약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황보도준은 그것이 두려웠다.

* * *

“천 공자 말이야.”

예전이라면 뒷담화의 소재가 되었을 천신우다.

하지만 지금 세가 여인들 사이에서 천신우는 모용비와 제갈휘만큼이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지금 보니 잘생기지 않았니?”

“솔직히 얼굴은 원래 봐줄 만했어. 평소 행실이 지랄 맞아서 그렇지.”

“이젠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방금 붓 잡기 전에 이지적인 표정 봤어? 어쩜…….”

세가의 여인들이라고 취향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사내다운 모습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학구적인 모습을 동경하는 여인들도 많았다.

그녀들의 눈에 비친 천신우의 모습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야야. 조용.”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에 돌아보니 남궁세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

하지만 그녀들은 알 수 있었다.

남궁세미가 다 들었다는 사실을.

여자끼리의 감이었다.

“화난 거 같은데?”

“뭐, 어떠니. 이제 정혼자도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파혼했다는 거, 진짜였어? 헛소문이 아니고?”

“그래. 천 공자, 이제 임자 없는 몸이야.”

“그럼 나도 기회가 있는 거네?”

“꿈 깨셔. 천 공자도 여자 보는 눈은 있을 테니까.”

쉬지 않고 계속되던 여인들의 수다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바보 아냐?”

“누가 아니래. 보는 눈이 없어도 유분수지.”

주어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들이 누구를 비웃는지는 분명했다.

그때, 누군가 남궁세미 옆으로 다가왔다.

“세미야. 남들 하는 얘긴 신경 쓰지 마.”

위로를 건네온 것은 제갈휘의 동생 제갈수연.

대외적으론 오빠와 마찬가지로 차분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는 그녀였다.

“나는 네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

솔직히 맞장구쳐줄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갈수연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맞다. 아까 보니까 우리 오빠가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던데.”

“……정말이야?”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니? 어, 마침 저기 오빠 온다. 내가 잘 말해볼게.”

과연 제갈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남궁세미는 서둘러 손거울을 꺼내 들고 화장을 고쳤다.

제갈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천신우 따위 거들떠볼 필요조차 없었다.

신나게 씹어대던 여인들도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제갈휘가 다가오자 남궁세미는 다소곳이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구?”

초면은 아니었지만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제갈휘답게 남궁세미를 기억하지 못했다.

남궁세미가 자존심도 내던지고 자기소개를 다시 하려던 그때였다.

“오늘 오빠 마음 사로잡은 그 사람 있잖아.”

제갈휘가 곧바로 되물었다.

“천신우?”

“그래, 오빠. 여기 세미가 바로 그 사람 정혼녀야.”

“……!”

남궁세미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뒤늦게 제갈수연이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어쩜 좋아! 파혼했다는 얘기를 하는 걸 깜빡했네.”

멀찍이 떨어져서 엿듣던 여인들이 쿡, 웃음을 터뜨린다.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남궁세미의 꽉 쥔 주먹은 모멸감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 * *

예정에도 없던 연성환을 얻어 내공을 증진시키고, 제갈휘에게 눈도장도 찍었겠다.

내친김에 천신우는 무한의 밤거리로 나왔다.

당초 정해뒀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검성.’

어느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무림을 주유하며 명성을 날렸던 희대의 무인.

그가 말년에 사용했던 명검 ‘자운검’은 놀랍게도 무한의 저잣거리에서 얻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정확히 검성이 언제 어디서 자운검을 얻었는지는 모른다.’

사실 오늘 무한의 시장바닥을 둘러본들 시간만 낭비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굳이 천신우가 수고를 마다치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내게 자운검만큼 어울리는 무기는 없다.’

자운검은 겉으로 보기엔 정말이지 볼품없는 검이다.

‘덕분에 대놓고 들고 다녀도 의심을 사거나 시선 끌 일이 없지.’

명검을 노리는 무인들에게 습격당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이다.

게다가 자운검과 다른 명검들과의 차이점은 겉모습만이 아니었다.

내공을 주입하면 진면모를 드러내는 자운검은 주인과 함께 성장한다고 알려졌다.

검성이 마교의 정예인 수라혈검대를 몰살시킨 후, 본인도 숨을 거두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자운검을 완성시켰다면 마교 교주인 천마조차 자신 앞에 무릎 꿇었을 것이라고.

‘내 손에 자운검이 들어온다면, 나는 과연 자운검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신우는 거리를 걸었다.

한밤중임에도 무한의 밤거리는 대낮처럼 환했다.

상점 처마마다 매달린 등불들.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행인들.

‘저기부터 들어가 볼까.’

그 속에서 무기상점 한곳을 발견하고 발을 들이려는 순간이었다.

“!”

수상한 기척을 느낀 천신우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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