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학사환생 008화
“방금 저쪽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그러게. 무슨 일이지?”
다른 후기지수들이 관심을 보이자 남궁세미는 황급히 진유백을 떨쳐내고 그곳을 벗어났다.
얼떨결에 홀로 남겨진 진유백을 향해 다가오던 후기지수들이 멈칫했다.
“우웩! 이게 무슨 냄새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진유백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는 사이 천신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눈에 띄는 인간이 없군.’
방금 응징해 준 진유백은 물론이고 다른 후기지수들 역시 눈에 차지 않았다.
‘하긴 그러니까 마교의 침공이 시작되자마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지.’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후기지수들은 마교의 침공이 시작되면 1년을 버티지 못한다.
단둘을 제외하고.
때마침, 그 두 사람이 다른 후기지수들과 함께 객잔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리 가운데서 앞장서 걷고 있는 미남자가 바로 모용비.
오대세가 후기지수들 중에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받는 고수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새하얀 얼굴의 청년이 보인다.
그를 보는 순간 천신우의 눈앞에 지난 기억이 스쳐 갔다.
‘휘 형님. 오랜만입니다.’
천신우는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세가의 다른 후기지수들과 달리 눈앞의 제갈휘만큼은 전생에 인연이 깊었다.
무림맹 학사로 근무하면서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제갈세가의 자제답게 학식이 깊음은 물론. 의외로 검에도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자자. 다들 모인 건가?”
모용비는 등장하자마자 바로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반면 제갈휘는 조용히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남들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챙겨주길 좋아하는 그다웠다.
“식사부터 하지. 도준 아우.”
모용비가 옆을 돌아보자 황보도준이 손뼉을 쳤다.
“요리를 내오너라!”
요리사들이 수레 위에 거대한 생선을 싣고 나타났다. 얼핏 봐도 사람보다 훨씬 크다.
“오오!”
후기지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체면도 잊고 자리에서 일어나 생선을 구경하는 이들도 보인다.
“이곳 무한은 생선이 신선하고 맛있기로 유명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대어를 준비해 봤습니다.”
후기지수들의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황보도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지금부터 황보세가에서 특별히 초청한 요리사가 대어를 이용한 요리를 선보일 것입니다.”
황보도준이 눈짓하자 요리사가 앞으로 나섰다.
“소인은 종리문이라고 합니다. 무림의 젊은 영웅들께 요리를 선보이게 되어 영광입니다.”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종리문?”
“설마 무림맹 산미각에서 명성을 날리던 그 종리문?”
“맞네! 나 산미각에서 저 사람 본 적 있어. 전에 거기서 식사했었거든.”
모두가 들뜬 모습이었지만 천신우는 씁쓸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지금도 밖에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이들이 허다하건만. 여기 있는 후기지수들에겐 다른 세상 이야기인 것이다.
쓱쓱.
요리사가 능숙한 솜씨로 생선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뼈를 발라낸 다음 두툼하게 썰어낸 살점이 접시 위에 올라간다.
꿀꺽.
몇몇 후기지수들이 체면도 잊고 침을 삼키는 소리였다.
“이런 자리에 좋은 술이 빠질 수가 없지요.”
짝!
황보도준의 손뼉 치는 소리에 하인들이 술병을 쟁반에 받쳐 들고 나타났다.
꽤나 고급스러운 술이었지만 천신우는 반응이 없었다. 가주 천무흔과 함께 마셨던 무상보다는 등급이 떨어지는 술이었기에.
“무림의 평화를 위하여!”
“이곳에 모인 세가들의 화합을 위하여!”
곳곳에서 건배사가 울려 퍼지고 다들 술기운이 오르는 가운데.
모용비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 자리를 마련해준 황보세가의 번영과 도준 아우의 성공을 위해 건배하지.”
“황보세가를 위하여!”
그 순간 천신우는 보았다.
황보도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우쭐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황보세가와 천씨세가가 숙적관계라더니 이렇게 티를 내나 싶다.
물론 천신우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황보세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에.
그때, 모용비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맛있는 요리, 오래된 술, 좋은 사람들, 모든 게 있는데 딱 하나가 빠졌군.”
모용비의 시선이 제갈휘를 향한다.
“이런 날에 자네의 멋진 시를 볼 수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나.”
후기지수들. 특히 여인들의 눈에 선망이 차오른다.
모용비와 더불어 제갈휘는 오대세가를 대표하는 인재들. 게다가 미남이기까지 하다.
당연히 여인들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갈휘는 고개를 저을 뿐이다. 시를 즐겨 짓는 그지만 이런 떠들썩한 자리는 부담스러운 것이리라.
분위기가 자칫 가라앉을 수도 있었지만 모용비는 능숙하게 대처했다.
“하긴 자네가 나서면 다른 후기지수들은 붓을 들기도 민망하지. 검도 검이지만 자네의 글재주는 가히 무림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모용비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이건 어떤가? 후기지수들이 시를 짓고 자네가 평가하는 걸세. 그게 부담스러우면 여협들과 함께 평가해도 좋고.”
“좋은 생각 같아요.”
어느새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타난 남궁세미의 대답이었다. 화장을 고치고 향수까지 새로 뿌린 모습.
“하하. 남궁소저 얼굴을 봐서라도 부탁하네.”
거듭되는 제안에 제갈휘도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지.”
수락을 받아낸 모용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결정된 걸로. 도준 아우.”
앞으로 나서는 황보도준의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무엇을 겨루든 상품이 없으면 참가자도 관객도 재미가 없는 법. 해서 미리 준비해놨습니다.”
시비가 비단에 싸인 작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기지수들은 크게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사실 재물이라면 가질 만큼 가진 그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달칵.
황보도준이 상자를 여는 순간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저건 설마!”
모두의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황보도준은 설명에 뜸을 들였다.
“맞습니다. 황보세가 비전의 연성환입니다.”
흥분한 후기지수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이야? 상품으로 연성환을 주겠다고?”
“잠깐만. 연성환은 황보가주님의 허락 없인 외부로 유출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쏟아지는 질문세례 속에 황보도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버님께서 오늘 자리를 위해 특별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호.”
달아오른 분위기에 불을 지핀 것은 모용비였다.
“상품이 연성환이라면 자네도 불참이 아쉽겠는데?”
제갈휘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쉽긴 하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지. 대신 다들 각오하게. 아주 엄격하게 심사해 줄 테니. 어지간한 글재주로는 연성환의 주인이 되지 못할 거야.”
“하하. 다들 들었지?”
모용비의 웃음을 흘리며 천신우는 주위를 돌아봤다.
모두의 눈빛에서 반드시 연성환을 차지하겠다는 열의가 느껴졌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연성환은 체질에 상관없이 내공을 증진시켜주는 단약.
천신우가 먹었던 설삼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음은 분명했다.
‘애들 놀이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 연성환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같은 종류의 영약을 복용하는 것은 효과가 거의 없다.
이미 설삼의 기운을 흡수한 천신우에겐 오히려 설삼보다 연성환의 가치가 높은 셈이다.
천신우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가운데.
어느새 창가 자리가 비워지고 붓과 벼루와 먹과 종이가 준비됐다.
모두의 시선이 모용비에게 모여든다.
“하하. 너무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말라고. 휘가 빠졌으니 나도 빠질 거야. 대신 시제 하나는 내가 정하지.”
모용비는 창문 너머로 펼쳐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역시 무한이라면 저 천년호가 빠질 수 없겠지. 도준 아우. 자네도 시제 하나 말해주게.”
황보도준은 미리 생각해뒀는지 바로 대답했다.
“가을이 어떻겠습니까.”
“가을. 좋지. 그럼 시제는 천년호와 가을로 하고. 누가 먼저 시작할 텐가?”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후기지수 하나가 자신 있게 나섰다.
무공에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글재주가 제법 있는 걸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후기지수들이 다투어 나섰다.
그때마다 지켜보는 여인들은 탄성을 자아내기도 실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느새 탁자 위엔 후기지수들이 시를 적은 종이가 쌓여갔다.
“이제 끝인가?”
주위를 돌아보는 모용비.
주최자 격인 황보도준과 무를 절대적으로 숭상하는 하북팽가의 후기지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아니지. 한 사람 남긴 했네.’
천신우.
희대의 망나니로 알려진 그가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봤을 때완 분위기가 완전 다르군. 예전이라면 술에 취해 난동을 피웠을 텐데.’
술을 마셨음에도 천신우의 눈빛은 여전히 맑고 깊었다.
지금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그가 천천히 창가를 향해 걸어오더니 입을 연다.
“저도 부족한 재주나마 보여드리겠습니다.”
태도는 정중했으나 자신감이 넘쳤고,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물론 천씨세가에 악감정이 있는 황보도준은 코웃음을 쳤다.
‘아주 망신을 당하려고 작정했군.’
모용비나 제갈휘의 눈에 들기 위해, 최대한 조신한 척하던 남궁세미조차도 속으론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웃겨. 편지 하나도 개발새발 쓰던 인간이 시는 무슨.’
쪽팔려서 누구한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천신우가 그녀에게 전했던 편지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내용은 물론이고 글씨체조차 형편없었던 것이다.
그런 천신우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를 짓는다니?
기가 막힐 수밖에.
‘하긴 잘됐네. 이참에 개망신이나 당하라지.’
그렇듯 부정적인 시선을 받아내며 창가 자리에 앉은 천신우.
“아까도 말했지만 뒤에 나선 사람들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남들보다 생각할 시간이 많았으니까.”
모용비의 목소리는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신우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호수 위를 미끄러지는 나룻배,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낙엽, 귓가를 스쳐오는 바람.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먹을 갈았다.
이어 붓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전생 내내 함께했던 물건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오고 나선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검을 수련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고, 의식적으로 멀리한 탓도 있었다.
그럼에도,
익숙했다.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한 느낌.
‘내가 너무 극단적으로만 생각했구나. 붓에는 붓만의 쓰임새가 있는 법인데.’
검과 붓, 어느 하나 버릴 필요가 없는 거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천신우가 붓을 쥐었다.
비어 있는 새하얀 종이 위를 천신우의 붓이 활보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유려한 서체를 자랑했던 학사 진현.
거기에 무공을 익히며 얻은 호방함이 더해진다.
거침없이 써져 내려가는 필치에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어느새 웅성거리던 후기지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누군가는 눈을 동그랗게 떴으며, 누군가는 그저 멍한 표정만 지었다.
“……!”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모용비의 눈에 이채가 번져간다.
더욱 극적인 변화는 모용비 뒤에 앉아 있던 제갈휘에게서 일어났다.
앞서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시를 짓는 광경을 무심하게만 바라보았던 제갈휘다.
솔직히 무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의 글재주는 눈뜨고 봐주기 힘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천신우는 달랐다.
꼿꼿한 자세부터 시작해 진지한 눈빛.
그리고 손끝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필치.
그는 문자 그대로 지면을 희롱하고 있었다.
끼이익.
자신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제갈휘였다.
그러나 누구도 의자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모두가 천신우의 일거수일투족에 빠져들어 있었다.
마침내 천신우가 마지막 점을 찍는 순간.
사라락.
거짓말처럼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낙관이라도 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