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학사환생 007화
세가지연이 열리는 무한으로의 출발을 앞둔 밤이었다.
“형님.”
동생 천신혁이 천신우의 방을 찾아왔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뭐야. 이건.”
천신혁이 진심 어린 인사에 이어 건넨 것은 두툼한 가죽주머니였다.
“아우가 용돈을 조금씩 모은 것입니다.”
“여행경비라면 충분해.”
“그러지 말고 넣어두십시오. 밖에 가면 쓰실 일이 많을 겁니다.”
천신혁이 덧붙였다.
“형님은 천씨세가의 대공자시니까요.”
돈은 먹고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품위와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천신혁은 그런 점까지 염두에 두고 돈을 건넨 것이다.
당연히 액수는 중요치 않았다.
“고맙다.”
진심이 담긴 한 마디에 천신혁의 표정이 환해진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천신혁이 돌아가고 나서 천신우는 탁자 위에 올려둔 가죽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괜스레 미소가 번졌다.
* * *
천씨세가를 출발한 마차는 10일 만에 중간지점에 이르렀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지.”
가주 천무흔이 무인을 시켜 마차를 세웠다.
이곳, 위수는 작은 도시였다. 이름난 문파도 없고 특산물도 없어, 스쳐 지나가면 금세 잊혀지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천신우에게만큼은 이 작은 도시가 각별하게 다가왔다.
학사 진현의 기억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도시는 바로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전생의 내가 이곳을 떠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
그 말은 학사 진현이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나는 천씨세가 대공자 천신우가 되었다. 그렇다면 원래의 나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까진 미뤄왔지만 결국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문제였다.
천신우는 가주 천무흔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들를 곳이 있습니다.”
“알겠다.”
천무흔이 눈짓했다.
호위무인 둘이 거리를 두고 천신우를 뒤따랐다.
이곳은 천씨세가의 영역이 아닌 만큼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한 조치였다.
번잡한 거리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풍경이 천신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골목과, 엿장수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지나쳐…….
울퉁불퉁한 흙길에 이르자 천신우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급기야 달리기 시작하는 그였다.
개울가를 지날 때는 새벽마다 물을 길어다 날랐던 기억이, 기와로 뒤덮인 지붕을 봤을 때는 소나기를 피해 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그렇게 어린 날의 기억을 거슬러 당도한 곳은 허름한 고서점이었다.
청운서점.
오래된 나무간판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후우.”
심호흡 끝에 천신우는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고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장부를 살피던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전생의 진현을 거둬들여 글을 깨우치고 공부까지 하게 해준 은인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학사 진현이 존재할 수 있었다.
“찾는 책이 있으신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나 무서웠던 목소리건만 지금은 너무도 무기력하게 들렸다.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과 얼굴에 피어 있는 검버섯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전생에서 노인은 진현이 무림맹 학사가 됐다는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연스레 천신우의 목소리가 숙연해졌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진현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진현?”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천신우에겐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처음 듣는 이름이네만.”
“……그렇군요.”
천신우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거짓말을 하는 위인이 아니다.
어린 진현은 사실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전생의 나는 이곳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지냈으니…….’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천신우는 몇 권의 책을 골랐다.
전생에서 노인이 그에게 골라준 책들이었다.
책값을 치르며 천신우가 넌지시 말했다.
“혹시 요즘 가슴이 답답하고 손발이 차지 않으십니까?”
노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가?”
“제가 의술을 익혀 안색만 봐도 병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르신의 병은 기력이 쇠해 생긴 것이니, 아침과 저녁에 안개투구꽃과 도라지뿌리를 달여 드시면 차도가 있을 겁니다.”
물론 의술을 익혔다는 것은 거짓말. 처방 또한 전생에서 신의를 만나 노인의 병세를 전하고 받은 것이었다.
‘전생에 약재를 구해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천신우에게 노인이 감사를 표했다.
“고마우이. 아랫동네 의원은 방법이 없다 하여 포기하고 있었는데. 보답을 어찌해야 할지…….”
“괜찮습니다.”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노인이 아니라 천신우였기에.
“그럼 이만. 많이 파십시오.”
덕담을 건넨 천신우가 고서점을 빠져나왔다.
입구에서 기다리던 호위무인들이 다가왔다.
“용무는 끝나셨습니까?”
“그래.”
“그럼 모시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천신우는 고서점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낮에는 서점 일을 돕고 밤에는 달빛 아래 책을 읽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만일 그때의 진현이 지금 천신우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붓을 내려놓은 모습을 보고 실망하리라. 당시 진현은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으니까.
천신우는 과거의 자신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쉬워 마라. 이번 삶은 무림맹 학사보다 훨씬 값지게 사용할 테니.’
그렇게 과거의 자신을 떠나보낸 천신우는 고서점을 바라보며 기원했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돌아선 천신우의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이제 가지.”
* * *
그로부터 열흘.
천신우는 세가지연이 열리는 무한에 도착했다.
이 일대를 지배하는 황보세가는 천씨세가와 앙숙이었다.
천씨세가를 밀어내고 오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한 가문이 바로 황보세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마중 나온 황보세가 무인들과 천씨세가 무인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물론 일가의 수장을 계속 세워둘 수는 없는 법이다.
황보세가 무인들이 천무흔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천무흔은 무덤덤하게 대꾸했지만 호위무인들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천씨세가의 격에 맞지 않는 부단주급 인사가 마중 나온 탓이다.
“대공자께선 저를 따라오시지요.”
이제부턴 가주 천무흔과 동행할 일이 많지 않았다.
천무흔은 가주회의를 비롯한 굵직한 행사에 참석하는 반면.
천신우는 후기지수들과 어울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주들이 참석하는 세가지연과 차이를 두고자 후기지수들의 모임은 용봉연이라 불렸다.
“나중에 보자꾸나.”
“그럼 가보겠습니다.”
“대공자. 이쪽으로.”
황보세가 무인은 천신우를 호수가 내다보이는 객잔으로 안내했다.
황보세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객잔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출입조차 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여기에 앉으십시오.”
천신우에게 배정된 것은 전망이 나쁜 구석자리.
천신우를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느껴지는 자리배치였다.
그걸 알아차렸음에도 천신우는 기분이 상하기보다 웃음이 나왔다.
‘유치하긴.’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많은 후기지수들이 먼저 도착한 상태였다.
천신우의 정혼자였던 남궁세미 역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천신우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옆에 앉은 다른 세가의 후기지수들과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물론 천신우 입장에선 반길 일이었다.
‘그래도 조용한 건 마음에 드네.’
천신우가 만나보고 싶은 인물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
혼자 조용히 차나 마실 생각이었다.
* * *
남궁세미는 천신우를 힐끔거렸다.
의도적으로 관심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젠 아는 척도 안 하네?’
이를 바득 가는데 웬 시커먼 놈이 아는 척을 해왔다.
“누구 보고 있어?”
남궁세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진가장의 이공자 진유백.
진가장은 남궁세가와 비교해 위세가 떨어지는 데다 얼굴도 별로여서 말도 섞기 싫은 상대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정혼자 보고 있었지?”
“정혼자?”
남궁세미가 눈을 흘기자 진유백이 손사래를 쳤다.
“맞다. 파혼했지. 미안.”
피식거리며 진유백이 술잔을 건넸다.
“사과하는 의미로 한잔 따라줄게.”
남궁세미는 기가 막힌 얼굴로 진유백을 쳐다봤다.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수작 부리는 거야?’
이딴 놈들 집적거리라고 파혼한 게 아니다.
오대세가인 하북팽가나 제갈세가 정도는 돼야 상대해 줄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생각 없어요.”
“그러지 말고 딱 한 잔만.”
꺼지라고 쏘아붙이려던 남궁세미가 멈칫했다.
눈앞의 머저리를 떼어내고 천신우도 골탕 먹일 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때마침 천신우는 방금 화장실에 들어간 상태.
남궁세미가 진유백을 쳐다보며 은근히 물었다.
“같이 한잔하면 뭐해줄래요?”
진유백은 생긴 것과 다르게 눈치 하난 빠른 인간이었다.
남궁세미의 시선과 표정을 통해 정확히 그녀의 심리상태를 읽어냈다.
“지금 화장실 들어간 새끼 골탕 먹이고 싶은 거지?”
다른 후기지수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는 진유백.
남궁세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속내를 알아차린 진유백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잠시만 기다려.”
사실 진유백은 오래전부터 남궁세미를 짝사랑해 왔다.
당연히 정혼자인 천신우는 눈엣가시. 혼담이 깨진 지금도 천신우를 향한 악감정은 여전했다.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마침 잘됐어. 놈도 손봐주고 세미 마음도 얻고. 이런 게 꿩 먹고 알 먹기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 진유백은 문부터 걸어 잠갔다.
덜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을 것임에도, 서서 소변을 보던 천신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진유백은 천신우를 향해 조용히 다가갔다.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오줌통에 처박을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진유백의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발길질을 하려는 찰나.
천신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어느 틈에 진유백 뒤에서 나타난 천신우가 머리채를 붙들었다.
“!”
천신우의 무위에 놀랄 틈도 없이 진유백이 황급히 소리쳤다.
“뭐, 뭐하려는 거야?”
“네가 방금 하려던 거.”
그러고는 진유백의 얼굴을 오줌통에 처박는 천신우였다.
푸하푸하!
한 번 오줌통에 담가졌다 나온 진유백이 황급히 배후를 실토했다.
“세, 세미가! 그 계집애가 시킨 거야!”
천신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진유백의 얼굴을 처박았다.
푸욱!
이번엔 아까보다 길었다.
숨이 막힌 진유백은 천신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무슨 놈의 힘이 이렇게.’
진유백이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고 나서야, 천신우는 놈의 목덜미를 건져 올렸다.
“사, 사실대로 말했잖아! 그런데 왜!”
“나는 그만한다고 한 적 없다만.”
“…….”
할 말을 잃은 진유백의 얼굴이 다시 오줌통에 담가졌다.
“어때? 시원하지? 명심해. 다음에 또 개수작 부리면 그땐 여기가 아니라 저기야.”
똥통에 들어가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진유백은 온몸에 오한이 일었다.
“그렇다고 너무 겁먹진 말고.”
천신우가 피식 웃으며 목덜미를 놔주자, 진유백은 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으아아아!”
하지만 문을 여는 순간, 진유백은 한 여인과 부딪치고 말았다.
콰당!
진유백과 충돌해 바닥에 넘어진 여인은 바로 남궁세미였다.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자 궁금해진 나머지, 화장실 문에 귀를 대고 있다 봉변을 당한 것.
설상가상이라고, 자빠진 그녀 위로 진유백의 몸이 포개졌다.
옷을 적셔오는 축축한 느낌에 남궁세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이게?”
뒤이어 밀려드는 지독한 악취.
“서, 설마…….”
그녀의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준 것은 뒤이어 화장실에서 나온 천신우였다.
그는 남궁세미 곁을 지나치며 코를 틀어막았던 것이다.
거기다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기까지.
“이, 이, 이!”
남궁세미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형편없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