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학사환생 004화
천신우는 사내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명패.”
천씨세가 소속임을 증명하는 명패를 내보이라는 뜻.
“그게…….”
말끝을 흐리던 사내가 체념한 얼굴로 대답했다.
손가락 한 마디만 칼이 더 들어와도 숨통이 끊길 상황.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우리는…… 천씨세가 소속이 아니다.”
천씨세가를 사칭했다는 소리였다.
그 순간 천신우의 검이 방향을 틀었다.
서걱!
깔끔하게 잘려 나간 사내의 팔이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는 사내를 바라보는 천신우의 눈에서 동정심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안내해라. 네놈들 본거지로.”
천신우는 이번 일이 눈앞의 사내들의 단독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닌 천씨세가의 영역이다.
이곳에서 천씨세가를 사칭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누군가 뒤를 봐주지 않고서야.’
팔이 잘려 나간 상처를 움켜쥐며 사내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아까 천신우가 팔을 부러뜨린 남자가 쭈뼛쭈뼛 뒤를 따라온다.
상점가를 벗어나 얼마나 걸었을까.
아직 초저녁인데도 한밤중처럼 으슥한 거리가 나타났다.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던 무인이 사내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뭐야? 어떤 놈한테……!”
말끝을 흐린 것은 천신우를 발견한 탓이었다.
“배짱 한번 두둑하군. 우리 식구한테 칼침 놓은 걸로도 모자라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형님…… 조심하십시오. 보통 놈이 아닙니다.”
나직한 경고를 끝으로 사내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죽은 것은 아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혼절한 것뿐.
무인은 발로 사내 얼굴을 툭툭 차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죽이기 전에 물어나 보자. 우리 식구, 왜 이렇게 만든 거냐?”
천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그놈은 천씨세가를 사칭해 상점주인을 갈취했다.”
“그게 다야? 난 또 네 부인이라도 덮친 줄 알았네.”
휘이익!
무인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패거리로 보이는 무인들이 골목에서 하나둘 걸어 나왔다.
“어쨌거나 각오는 했겠지?”
어느새 천신우 뒤쪽으로도 무인 둘이 나타났다.
퇴로를 차단하려는 속셈.
하지만 천신우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저벅.
밤거리의 무인들을 향해 걸어간다.
아니. 저들은 무인이 아니다.
약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일 뿐.
죄책감은 없었다.
슁!
천신우의 검이 서늘한 밤공기를 갈랐다.
가장 앞에 있던 무인이 순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목을 매만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음 순간.
푸아악!
잘려진 목이 아래로 떨어지며 피분수가 솟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무인들의 동요가 느껴졌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휘파람을 불었던 무인이 고함쳤다.
“뭐해! 죽여!”
놈이 책임자인 모양인지 다른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천신우는 피하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저벅.
그저 같은 보폭, 같은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오히려 천신우를 향해 달려들었던 무인들이 목을 움켜쥐며 나가떨어졌다.
저벅.
양옆으로 나 있는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무인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왔지만, 누구 하나 천신우의 옷깃 하나 건들지 못했다.
천신우 뒤로 시체들만 쌓여갔다.
“오, 오지 마!”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무인이 창백해진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천신우는 상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
자신을 지나쳐가는 천신우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무인의 눈에 천신우의 무방비한 등이 들어왔다.
가끔 있다.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도 자만한 탓에 목숨을 잃는 머저리들이.
숨을 삼킨 무인이 은밀히 천신우를 뒤따랐다.
거리를 좁히고 단숨에 목을 따버릴 생각이었다.
‘지금!’
그러나 그 순간 천신우가 뒤를 돌아보았고, 무인은 그만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너희 같은 놈들은 항상 이런 식이야.”
천신우는 싸늘한 눈으로 무인을 노려보았다.
“조금만 틈이 보여도 승냥이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지.”
천신우의 눈빛을 마주한 무인이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사, 살려줘…….”
천신우가 물었다.
“너는 지금까지 살려달라는 자들에게 어떻게 말했지?”
무인의 눈앞에 지금까지 죽였던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이 스쳤다.
그들은 울며불며 애원했다. 가진 걸 다 줄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그들 중엔 임신한 아낙도 있었고, 노모를 부양하는 외아들도 있었으며, 갓 혼인한 청년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든 그가 했던 대답은 똑같았다.
그냥 뒈져.
“그게 바로 내 대답이다.”
그 말을 끝으로 천신우는 등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정확히 세 걸음 째.
무인의 목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숨소리마저 사라진 밤거리엔 정적이 가득했다.
저벅.
천신우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
밤거리의 끝자락.
커다란 대문이 보였다.
음습한 뒷골목엔 어울리지 않는 문이었다.
“여기군.”
천신우는 주저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대문이 사선으로 쪼개지며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의 분내와 역한 체취가 뒤섞인 그곳에서 헐떡이던 신음이 멈췄다.
방마다 장지문이 열리며 바지춤도 제대로 올리지 않은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천신우는 한눈에 그들의 무위를 알아보았다.
“그나마 밖에 있던 놈들보단 낫군.”
물론 학사 시절 무림맹에서 봐온 고수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검을 늘어뜨리고 다가가는 천신우.
얼굴에 칼자국이 선명한 사내가 주먹에 권갑을 끼우며 물었다.
“뭐하는 놈이냐.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설치는 거냐.”
천신우는 대답 대신 주위를 훑었다.
그는 천씨세가 대공자.
천씨세가의 무인이라면 그의 얼굴을 알아 마땅했다.
하지만 천신우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방금 뛰쳐나온 놈들 중에는.
“감히 내 앞에서 한눈을 팔다니!”
자존심이 상했을까.
권갑을 착용한 사내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사내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가볍게 피해낸 천신우가 검을 휘둘렀다.
쉬잉!
경쾌한 바람 소리와 함께 투두둑 소리가 들려왔다.
검에 잘려 나간 사내의 주먹이 권갑과 함께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
사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남들처럼 숟가락질만 하는 손이 아니었다.
저 주먹으로 때려눕힌 상대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앞으론 그럴 일이 없을 터였다.
“이이이익!”
뒤늦게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때는 사내뿐만 아니라 다른 무인들마저 모조리 천신우에게 당한 후였다.
“…….”
본능적으로 눈을 내리까는 사내를 천신우가 지나쳐간다.
붉은 등불이 어지러이 흔들리는 복도를 걸어가며 닫혀 있는 문들을 차례차례 걷어찼다.
쾅! 쾅! 쾅!
마침내 가장 크고 화려한 방에서 천신우는 찾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공자?”
기녀들 품에 파묻혀 술을 마시던 중년인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는 원래 몸의 주인 천신우의 기억 속에 있는 인물.
“비천부대주.”
천씨세가에 소속되어 외곽지역을 관리하는 무인으로.
흑도방파의 악인들로부터 힘없는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그의 임무였다.
그걸 알기에 천신우의 눈빛은 전에 없이 차가웠다.
“힘없고 무고한 백성을 착취한 자는 어떻게 다스리는가?”
천신우가 재차 물었다.
“흑도방파와 결탁하여 천씨세가의 이름을 더럽힌 자는 어떤 벌을 받는가?”
그 순간 비천부대주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너머를 향하는 것을, 천신우는 놓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둘러진 천신우의 검이, 뒤를 급습하려던 무인의 얼굴을 반으로 쪼개놓았다.
촤악!
여전히 천신우의 시선은 비천부대주의 얼굴에 고정된 상태.
무릎 높이로 늘어뜨린 검에서 시뻘건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천씨세가 대공자를 살해하려 한 죗값은 무엇으로 치러야 하는가?”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그곳에서, 천신우의 낮고 굵은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