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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3화 (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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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 003화

천씨세가의 정원은 화려하진 않지만 소탈한 멋을 지닌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을 거니는 남궁세가 차녀 남궁세미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표정 풀어라. 그러다 얼굴에 주름 생긴다.”

짓궂은 농담을 건네는 중년인은 남궁세미의 숙부이자 남궁세가 외당주 남궁인.

남궁세미가 어려워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어차피 혼담은 파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숙부님…….”

“후회되느냐?”

“그건 아니에요.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은…….”

남궁인은 조카의 자존심이 잔뜩 상했음을 알아차렸다.

남궁세가에서 금지옥엽으로 떠받들어지며 키워진 남궁세미다.

아름다운 외모 덕에 또래들의 관심까지 독차지하지 않았던가.

무신경함을 넘어서 냉담한 천신우의 반응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하긴 나도 의외이긴 하구나. 소문에 따르면 대공자는 지난 1년 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다고 들었는데.”

소문과 달리 천신우에게서 나태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한 자루 명검처럼 잘 벼려진 느낌.

남궁세미도 어렵사리 천신우에 대해 평가를 내놓았다.

“……확실히 달라졌어요.”

그녀가 1년 전에 만난 천신우는 능력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마음마저 옹졸한 작자였다.

그래서 집안에서 파혼 얘기가 슬금슬금 흘러나올 때도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은근히 동조했었다.

하지만 오늘 목격한 천신우의 모습은 확실히 그때와는 달랐다.

“가자. 자식의 변화는 부모가 가장 잘 안다고 하지 않더냐. 가주를 만나보면 대공자가 정말 변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연못에 위치한 정자.

남궁세미와 그녀의 숙부 남궁인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천무흔이 나타났다.

“오랜만이오.”

남궁인과 남궁세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안하오. 손님을 모셔놓고 늦었소이다.”

“아닙니다.”

남궁인은 웃는 얼굴로 곧장 천신우를 언급했다.

“오히려 가주님보다도 대공자가 바빠 보이더군요.”

그러면서 천무흔의 눈치를 살피는 남궁인이었다.

천씨세가 가주 천무흔은 자기관리가 철저한 인물.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과거 천신우가 대공자의 격에 맞지 않는 언행을 보였을 때도 그랬다.

속이 썩어 들어갈 것임에도 겉으로 보이는 태도는 무덤덤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그 아이라면…….”

천신우를 언급하는 천무흔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남궁인은 놓치지 않았다.

“도저히 미루기 힘든 용무가 있다고 들었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자리에…….”

“어차피 이미 결단은 내렸소이다. 나도, 그 아이도.”

“무슨 말씀이신지?”

“내게도 눈이 있고 귀가 있소. 남궁세가에서 그 아이와의 혼약에 관한 말이 많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지.”

“이미 알고 계시다니 마음의 부담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군요. 맞습니다. 실제로 세가 내에서 혼약을 두고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천무흔은 시비가 내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찬성이오.”

“……찬성이라 하심은?”

“파혼, 받아들이겠소이다.”

“……!”

대화를 나누던 남궁인뿐만 아니라 옆에서 차를 홀짝이며 듣고 있던 남궁세미 역시 깜짝 놀랐다.

설마 이렇게 순순히 파혼을 받아들일 줄이야.

‘저 태도는 마치 파혼을 기다렸던 것 같지 않은가. 어째서?’

남궁인이 의문에 사로잡힌 그때.

천무흔은 남궁세미를 돌아보았다.

“1년 사이에 더 아름다워졌구나. 너를 며느리로 삼지 못해 안타깝지만, 무림 후기지수들 중에 너와 더 어울리는 짝이 있을 것이다.”

비로소 남궁인은 확신했다.

천무흔은 전혀 안타까워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남궁세가와의 혼담에 미련이 없다는 것을.

1년 전에만 해도 남궁세가와의 혼담에 긍정적이던 천무흔이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만든 것일까.

남궁인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공자.’

천신우.

그가 천무흔의 심경을 변화시킨 장본인이 분명했다.

‘무슨 용건으로 오늘 세가를 비웠는지 알아봐야겠군.’

* * *

천신우는 재악산을 오르고 있었다.

“과연 산세가 험한데?”

전생에선 재악산을 직접 찾아온 적이 없다.

그저 보았을 뿐이다.

재악산 제7봉에서 영약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을.

심지어 그 위치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림맹 장서각 학사로 근무하면서 누구보다 기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그때만 해도 검에 재능이 없으니 붓으로나마 무림맹에 도움이 되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붓은 검을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명문의 글을 지어봐야 무림맹 수뇌부의 생각을 바꿀 수도, 마교의 침공을 막아낼 수도 없다.

“힘.”

죽었다 깨어나도 그것뿐이었다.

“세상엔 두 종류의 힘이 있지.”

개인의 힘.

그리고 세력.

천신우는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생각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본신의 무력을 키우고 나아가.

“천씨세가의 가주가 된다.”

천씨세가를 무림의 어떤 가문보다 강하게 키울 것이다.

무림맹의 저력을 하나로 모아 마교에 대항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재악산 제7봉에 숨겨진 설삼이었다.

“이런 곳에 있으니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지.”

햇빛이 들지 않아 겨울에 내린 눈이 아직도 녹지 않은 절벽.

그곳에 숨겨진 동굴을 발견한 천신우다.

기록대로 동굴 깊숙한 곳엔 설삼이 자라고 있었다.

천신우는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설삼을 캐냈다.

복용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내공을 쌓게 해준다는 전설의 영약.

과연 그 존재감은 지금껏 봐왔던 시시한 약초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게 50만 냥에 거래됐었지.”

전생에서 학사로 일하며 받았던 월급이 이백 냥이다.

50만 냥이면 평생 숨도 안 쉬고 모아도 손에 쥐기 힘든 거금.

하지만 천신우는 설삼을 팔아치울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이걸 처음 발견한 약초꾼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초꾼은 약재상이 고용한 낭인들에게 살해당한다. 약재상 역시 낭인들에게 목숨을 잃고.

그러고도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어가며 마침내 50만 냥에 거래된 것이었다.

“오죽하면 혈삼이라고 불렸겠어.”

하지만 이번 생에선 설삼이 오명을 뒤집어쓸 일은 없다. 약초꾼도 죽지 않을 것이며, 월성문주가 설삼을 구매하기 위해 50만 냥을 지출할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꽈득!

천신우가 설삼을 씹었다.

온몸으로 설삼의 정순한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번 생에서 일어날 일은 오직 하나뿐.

천신우가 엄청난 내공을 얻고 하산한다.

그게 전부였다.

* * *

동굴에서 설삼의 기운을 갈무리하던 천신우가 눈을 떴다.

“됐어.”

단전에서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이 정도 힘이라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하산하는 천신우였다.

재악산에서 내려온 천신우가 당도한 곳은 인근 마을이었다.

천신우가 이곳을 찾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외출한 김에 천씨세가의 영역을 둘러보려는 의도.

‘천씨세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서류상의 정보뿐.’

서류상에 나와 있는 몇 줄의 설명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은 한계가 있었다.

직접 맞부딪치고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다.

천신우는 거리를 따라 걸었다.

한층 확장된 감각을 통해, 물건 파는 아낙이, 짐을 들고 바쁘게 뛰어가는 소년이, 장작 패는 사내가 들어온다.

이 마을 역시 또 하나의 무림이었다.

마을을 전쟁터 삼아 저마다의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상점가를 거니는데 눈살 찌푸리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허리가 꺾이도록 고개를 숙이는 상점주인.

“죄송하지만 정말 돈이 없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그리고 그에게 위협을 가하는 무인들.

“야야. 이 인간, 저번에도 똑같은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막내야, 그때 우리가 어떻게 했더라?”

옆에 삐딱하게 서 있던 남자가 킬킬거리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걸로 딸내미 옷깃 좀 찢어주니까 없던 돈이 생겨났지 않습니까. 하하하.”

“크하하하. 그랬지. 어디 보자. 벌써 그게 한 달 전이니까 고새 더 예뻐졌겠네?”

“크크큭.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이 아우가 당장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눈이 뒤집힌 주인이 남자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아,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털썩!

바닥에 밀쳐진 주인이 흐느끼며 주위를 돌아봤지만, 당연하게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무림에선 흔한 일이다.

흑도방파뿐만 아니라 일부 명문정파에서도 세금이니 보호비니 명목으로 상인들을 갈취했다.

방해하는 이들에게 철저히 보복이 가해짐은 물론이다.

천신우 역시 학사 시절, 폭행당하는 상인을 구하려고 나섰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천신우는 지금부터 할 행동에 대해 후회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만하지.”

앞으로 나선 천신우가 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습니까?”

“괘, 괜찮습니다.”

상점주인은 천신우의 손을 잡고 일어나면서도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아무 관계 없는 천신우에게까지 피해가 끼칠까 걱정하는 것이다.

“뭐야? 이 새끼는.”

남자가 천신우의 위아래를 훑더니 등에 멘 검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현재 천신우는 재악산을 오르내리느라 꼴이 말이 아닌 상태. 우습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오호라. 무림인이시군. 가던 길 가쇼. 괜히 천씨세가의 행사를 방해했다가 피 보지 말고.”

“천씨세가?”

돌아서는 천신우의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남자 옆의 사내는 이상징후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래. 아무리 뜨내기라도 천씨세가의 위명 정도는 들어봤겠지.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보내줄 때 가라.”

“정말 천씨세가 소속인가?”

이어진 천신우의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아, 그렇다는데 새끼가 말이 많아! 그냥 확!”

천신우를 향해 들어 올렸던 남자의 팔이 정반대 방향으로 꺾였다.

우두둑!

“끄아아악!”

남자가 비명을 질러대는 가운데 사내는 입가를 비틀었다.

“하? 이 새끼 봐라?”

그러나 천신우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너희 모두 천씨세가 소속이 맞는가?”

“맞으면 어쩔 건데. 감당할 자신은 있고?”

사내가 박도를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기세에 상점주인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들조차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천신우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천씨세가 소속이라면 세가의 규율에 따라 다스릴 것이다. 만일 천씨세가 소속이 아니라면 사칭한 죗값을 치러야겠지.”

그제야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사내가 멈칫했다.

“너 뭔데? 뭐하는 놈인데 천씨세가 규율을 들먹여?”

천신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학사 시절 충분히 경험했다.

무림에선 백 마디 말보다 한 자루 검이라는 사실을.

쩡!

경쾌한 울림과 함께 사내의 박도가 튕겨져 나갔다.

“큭!”

신음을 토하는 사내의 목젖에 차가운 칼날이 와닿았다.

그것이 바로, 천신우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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