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학사환생 002화
“오늘도 하루 종일 천무각에 머물렀다고?”
천씨세가 가주 천무흔은 감정표현이 드문 인물이다.
지금 세가 무인에게 묻는 그의 목소리 역시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습니다.”
원래라면 여기서 끝났어야 하는 대화다.
천무흔은 맏아들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으니까.
하지만 천무흔은 눈으론 서류를 검토하면서도 여전히 천신우를 향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며칠째지?”
“내일이면 보름입니다.”
서류를 넘기던 천무흔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다물린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보름이라…….”
아들이 무슨 생각으로 천무각을 드나드는지 모르나 길어야 하루이틀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느덧 보름이 흘렀다. 무인들의 보고에 따르면 단지 천무각에 머물기만 하는 것도 아니란다.
낮엔 천무각에선 무공비급을 정독하고 밤엔 연공실로 가서 수련하는 나날의 연속.
“그뿐만이 아닙니다. 술도 일절 끊었습니다.”
어쩐지 요즘 세가가 잠잠하더니만. 천신우가 얌전한 덕이었다.
“직접 보시겠습니까?”
무인의 물음에 천무흔은 서류에 고개를 파묻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전에도 천신우에 대한 보고를 듣고 나면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던 천무흔이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미묘하게 달랐다.
무인은 생각했다.
어쩌면 천씨 부자의 케케묵은 갈등이 조만간 해결될지도 모르겠다고.
* * *
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천신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천씨세가의 내공심법인 천무심결이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그 증거로 단전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이렇게 쉬울 줄이야.’
천신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학사 진현의 두뇌. 천신우의 육체.
거기에 무공비급이 더해진 결과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불과 한 달 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내공을 축적한 것이다.
당연히 흡수되지 못하고 천신우 몸속을 떠돌던 영약 기운 덕도 컸다.
천씨세가 대공자이니만큼 가주 천무흔의 지시로 어려서부터 수많은 영약을 먹어왔던 것이다.
‘이제 기초는 다졌으니 움직이자.’
사실 천신우의 가장 큰 무기는 미래를 안다는 것이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지난 한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은 천신우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미래도 천신우가 알고 있는 대로 펼쳐질 터였다.
‘내가 바꾸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되겠지.’
물론 천신우는 미래가 그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마교에게 무림맹이 멸망하는 미래뿐만 아니라.
당장 몇 년 후 인근 재악산에서 발견될 예정인 영약 역시.
‘내가 독식한다.’
지난 한 달의 수련은 그 준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담으려면 그릇뿐만 아니라 담는 기술도 필요하다.
그 모든 걸 갖춘 지금이 바로 천신우가 움직일 때였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난정입니다. 식사 준비됐습니다.”
“들어와.”
천신우는 시비 난정이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고기와 나물이 다채롭게 섞인 식사.
전생에 먹었던 주먹밥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난정은 그런 천신우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원래 음식이 조금만 입맛에 맞지 않아도 숟가락을 집어 던지던 천신우였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불만·불평 하나 없이 마지막 밥풀까지 뚝딱 먹어치우는 것이다.
“수고했어.”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항상 미소와 함께 건네는 인사까지.
그게 듣고 싶어서라도 식사시간이 기다려지는 난정이었다.
“가주님께 기별을 넣어. 내가 뵙길 청한다고.”
이 또한 달라진 변화였다.
예전엔 절대 먼저 가주를 찾아가는 법이 없었기에.
“알겠습니다.”
난정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1시간 후.
천신우는 가주전에서 가주 천무흔과 마주 앉았다.
오늘도 바쁜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는 천무흔.
하지만 천신우는 알 수 있었다.
분명 한 달 전 봤을 때보다 천무흔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음을.
툭하고 던지는 목소리마저도 그때와는 달랐다.
“무슨 일이냐.”
“잠시 세가를 떠나 있고자 합니다.”
“용건은?”
천신우는 미리 준비한 이야기를 청산유수처럼 쏟아냈다.
“예로부터 재악산은 하늘과 땅의 정기가 모이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근래 깨달은 바가 있어 한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무공을 수련하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코웃음 쳤을 일이었다.
용돈이나 뜯어내 유흥에 탕진하려 한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천무흔의 반응은 진지했다.
“필요한 것은?”
그리고 천신우는 그런 천무흔의 기대에 부응했다.
“보름치의 식량이면 족합니다.”
돈이나 재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허락을 받기 위해 천무흔을 찾은 것뿐.
천무흔은 허공을 응시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변했구나.”
천신우는 의미 모를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에 말했다시피 남궁세가에서 손님이 방문할 것이다. 닷새 전에 남창에 당도했다고 소식을 전해왔으니 아마 오늘이나 내일이면 도착하겠지.”
남창은 천씨세가에서 닷새 떨어진 곳으로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용건은 역시 제 파혼입니까?”
요즘 세가에서 가장 큰 화제가 변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파혼이란 것을 모를 리 없는 천신우였다.
남궁세미.
원래 몸의 주인 천신우와 태중혼약으로 맺어진 여인.
바로 그녀가 파혼을 통보하기 위해 천씨세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지금의 몸을 진현이 차지하기 전까지 천신우가 술독에 빠져 지낸 것도 남궁세미의 냉담해진 태도가 컸다.
1년 전, 방문했던 남궁세가에서 그녀로부터 이별통보를 받고 충격에 빠졌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천신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처리해 주십시오.”
“정녕 파혼해도 괜찮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좀처럼 감정표현이 없는 천무흔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신우가 남궁세미에게 품은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기에.
“네 뜻마저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겠지. 하지만 남궁세가와의 혼담이 무산된다면 부담이 큰 게 사실이다.”
남궁세가와 천씨세가가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 있었을 때 맺어진 태중혼약.
하지만 남궁세가는 나날이 번성한 반면 천씨세가는 좀처럼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그 차이는 결국 일방적인 혼담파기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세가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급속히 싸늘해질 것이다. 세가의 힘이 그만큼 약해졌다고 생각하겠지.”
“저는 오히려 이번 일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기회?”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친구와 적을 가려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천신우는 마교에 가담할 문파와 무인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네 생각이 그렇게 깊은 줄은 내 미처 몰랐구나.”
아들을 바라보는 천무흔의 눈엔 어느새 이채가 떠올라 있었다.
철없는 망나니인 줄만 알았던 아들에게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확실히 하나하나 따져보면 파혼이 무조건 손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네 생각은 알겠으니 다녀오너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신우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지 않고. 혹시 생각이 달라질지 아느냐.”
“쓸데없는 일에 감정 소모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천신우를 바라보며 천무흔은 생각했다.
파혼으로 인해 손해를 입는 것은 천씨세가가 아니라 오히려 남궁세가일지도 모른다고.
* * *
여분의 옷 한 벌. 보름치 식량. 약간의 노잣돈.
거기에 검 한 자루.
세가를 나서는 천신우의 차림은 굉장히 단출했다.
그래서 때마침 천씨세가를 방문한 남궁세가의 손님들이 천신우를 알아보기까진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라버니?”
마차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여인은 바로 천신우의 정혼녀 남궁세미였다.
그러나 천신우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애정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천신우가 남궁세미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년 전.
하지만 과거 진현의 몸으로 남궁세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무례한 뿐만 아니라 무능하기까지 한 여자였지.’
설령 남궁세미가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린다 해도 혼인할 생각이 없는 천신우였다.
그런데 알아서 파혼해 준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으며 천신우는 가던 길을 갔다.
“그럼 이만.”
“어어?”
당황한 나머지 남궁세미는 말까지 더듬었다.
이미 파혼은 기정사실.
하지만 이런 그림은 곤란했다.
천신우가 매달리고 그녀가 매몰차게 걷어차는 그림이어도 모자랄 판에.
아쉬울 것 하나 없이 갈 길 가는 모습이라니?
“당장 붙잡아…… 아니. 데려오세요.”
남궁세미가 황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아무리 남궁세가의 위세가 대단하다곤 해도 천씨세가를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소문이란 것이 있기에.
“명을 받듭니다.”
지시를 받은 남궁세가 무인이 천신우를 향해 다가갈 때까지만 해도, 남궁세미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인 자신의 호위를 맡을 만큼 실력이 뛰어난 무인.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망나니 천신우가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천신우의 반응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심지어 남궁세가 무인조차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천신우의 서슬 퍼런 시선에 흠칫한 무인이 어깨를 향해 뻗던 손을 거둬들였다.
‘무슨 놈의 눈빛이……!’
무인이 위축된 사이 천신우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천씨세가의 대공자. 내 몸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게, 무슨 의민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움찔한 무인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가와 남궁세가는 오랜 우방. 가주님 얼굴을 봐서라도 지금의 죗값은 묻지 않겠다. 하지만 또다시 이런 개수작을 부린다면 그때는 경고로 넘어가지 않는다.”
“저, 저, 저…….”
어안이 벙벙해진 남궁세미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천신우가 정문을 지키는 천씨세가 무인들을 불렀다.
“뭣들 하고 있어. 손님을 안으로 모시지 않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천씨세가 무인들이 남궁세가의 마차를 향해 우르르 몰려왔다.
“모시겠습니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평소보다 박력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그들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안으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남궁세미는 천신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천신우는 남궁세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저 가던 길을 갈 뿐.
남궁세미 인생에 있어 손에 꼽힐 만큼 굴욕적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