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극중 악인
극중악인
-오역, 즉 형제를 해하고, 부모를 해하고 하는 큰 죄를 지은 지극히 악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장강을 넘어 하남성 등봉현 숭산 소실봉의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중원 무림의 태산 북두 소림사.
자고로 숭산은 중원 오악의 하나이며, 중원 오악은 동악 태산 서악 화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이다. '상서'에서 숭산을 외방이라고 했고, '사기'에서는 태실, '산해경'에 서는 반석산이라고 하였고, 그중 숭산은 태실봉과 소실봉으로 나뉘는데, 소림사는 소실봉의 계곡 에 있기 때문에 소림사라고 불린다고 알려져 있다.
그 소실봉에 이남일녀가 출현하자 고요하던 정적이 깨어졌다. 이들은 정말이지 쉬지도 않고 티격태격하면서 떠들어 댔다. 오죽하면 소나무 위에서 쉬고 있던 새들도 두 사람을 참지 못하고 날아갔다.
그 사람 좋은 송현의 이마에도 주름살이 더 이상 생길 곳이 없을 정도였다.
“쳇!”
“흥!”
싸움의 발단은 주먹밥 하나 때문이었다. 등봉현에 들어서면서 그 유명한 주먹밥을 사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하필 이면 주인집 아낙이 덤으로 하나 더 얹어 준 주먹밥이 문제였다.
마치 먹기 시합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입 안으로 주먹밥을 집어넣던 안후명과 당소혜는 결국 그 하나의 주먹밥을 남겨 놓고 묘한 대치 상황을 벌였다. 커다란 장한과 이제 겨우 십여 세의 소녀가 주먹밥을 놓고 벌이는 신경전은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의 좋은 구경꺼리가 되었다 송현과 안후명이 금나수와 무당검으로 구운 감자를 다투던 때와 달리 당소혜와의 싸움은 그야말로 처절한 설전 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유치해 질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이 요상하고 괴상막측한 싸움은 곧, 인근 대로변의 사람들까지 구경에 나서서 돈을 거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송현이 당소혜를 달래보고 안후명에게 화도 내 보았지만 두 사람은 세상이 두 쪽 나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며 버텄다.
유치함의 끝을 달리는 설전은 구경하던 이들 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 극한을 달렸다. 그러던 쟁반을 가지고 밀고 당기는 와중에 주먹밥이 데구루루 굴러서 바닥에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걸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흙과 먼지가 잔뜩 묻은 주먹밥을 안 후명이 집어 먹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털어낸 뒤 입에 집어넣고 너무나 행복하게 오물거리는 모습을 본 당소혜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기 시작한 것이다.
"휴!"
이젠 머리가 지근거리기 시작한 송현.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이리도 사람이 없는 거지? 소림사는 식객들만 해도 하루도 기십 명이 넘는다고 들었건만 이상한 일인걸?"
등봉현만 해도 소림사 때문에 먹고 사는 곳이었다. 수많은 속가제자들의 숙소와 장사치들로 붐비는 곳이다.
그래서 등봉현과 소림사간에 왕래가 잦은 길이라서 사람들의 오고감이 빈번하다고 들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산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상한걸?”
송현이 낯빛을 굳히며 주변을 경계했다. 자연스럽게 무 극무해의 기운이 전신에 일어나 송현을 중심으로 숲 전체로 퍼져나갔다.
실타래에 묶인 실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듯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가 더듬이처럼 사위를 흩어갔다. 저 멀리 보이는 소림사의 편액이 불안해 보이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당 소저, 싸움은 나중에 하자고 아무래도 소림사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안후명이 정색을 하자 당소혜에도 안후명에게 시비 거는 것을 멈추고 빠끔히 고개를 내밀어 소실봉을 바라보았다.
"아빠, 나 여기 온 적 있어."
당소혜가 아는 척을 하자 송현이 빙긋이 웃었다. 아마도 그녀를 돌봤던 당문의 누군가와 함께였을 것이다.
"그랬구나,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야?“
한참을 걸었는데도 땀조차 흘리지 않는 당소혜의 머리를 쓸어준 송현은 당소혜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소혜는 송현이 머리를 만져 줄 때면 눈을 감고 그 느낌을 즐겼다.
"응! 그때도 스님 할아버지가 내 피를 막 뽑았어."
흠칫! 당소혜의 피를 뽑았다는 말에 송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문이나 당사륭의 후예들이라면 실험을 위해서 그럴 수 있다지만 소림의 승려가 어째서 당소혜의 피를 뽑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발이지 내 예상은 그저 쓸데없는 기우이길......‘
이를 악다문 송현이 신형을 일으켜 계단을 오르자 안후 명이 안력을 돋우어 소림의 관문인 연청을 살폈다.
"문지기 승려들이 모두 있는 걸로 봐서는 별다른 일은 없는 듯싶은데 분위기는 여느 때와 너무 다르단 말이야."
안후명은 알쏭달쏭한 문제 앞에 선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미심쩍고 잘 풀리지 않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들이 계단을 거의 다 오르자 단아한 승복 차림의 노승이 맞이했다.
"아미타불, 빈승은 육원이라고 합니다. 본사에는 무슨 일로 들리셨는지요?”
온화한 인사에 안후명이 합장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개방의 안후명이라고 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 방장대사님을 뵙고자 합니다."
안후면의 요청에 육원이라고 소개한 노승은 쾌나 난처한 표정으로 곤혹스러워했다. 짐짓 고심하는 듯하더니 이 내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타까운 일이나 지금 일체의 외부 손님을 받지 말라는 명이 있어서 그리할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안후명은 정중하게 거절하는 육원을 실눈을 뜨고 바라 보았다. 이번에도 같이 합장을 하고 허리를 숙였던 안후 명이 허리를 들어 올리던 중육원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해졌지 소림사가?”
웃고 있는 안후명과 달리 육원의 표정은 금세 사나워졌다. 그의 기세가 달라지자 문을 지키고 있던 나한들이 봉을 세우고 달려 나왔다.
"소림은 예부터 소림을 찾는 이들을 환대해 왔소.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런 무례를 저지르는 건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호령하는 육원의 모습은 근엄한지 객당 승려처럼 무서웠다. 그러나 안후명은 귓구멍을 파내며 콧방귀를 끼었다.
"기왕지사 가짜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해야지 옷이나 제대로 입던가?”
안후명의 비웃음에 육원과 나한들이 깜짝 놀라며 서둘러 자신들의 옷을 살폈다. 그 모양을 보고 안후명은 낄낄 댔다.
"원래 개 코는 못 속이는 법이지 오늘 아침에 드신 고기 냄새가 진동을 해서 한 번 넘겨짚어 본 건데 바로 걸리셨어!"
허리춤에 찬 호리병을 손가락에 걸로 뱅글뱅글 돌리는 모습에 자신을 육원이라고 소개한 노승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스스로 화를 자초하다니 네 가벼운 입을 원망하거라!"
조금 전의 인자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인 육원이 뒤로 빠지자 나한들이 앞으로 나섰다.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한 목봉을 좌우로 비틀자 끝에서 날카로운 창날이 튀어 나왔다.
"오호라,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셨군. 그런데 말이야 당신, 후회할 짓을 했어."
안후명이 혀를 차자 육원은 콧방귀를 끼었다.
"후회는 네놈이 해야 할 것이다."
육원의 차가운 냉소에 안후명은 가지고 놀던 호리병 마개를 따고 독주를 들이 켰다.
"크흑! 당신 말이야 안쪽에 먼저 알려야 했어. 그게 문지기들의 임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쉽게 보였나 봐, 아마도 당신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인 데, 적어도 강호를 살아가는 자라면 상대의 이름 정도는 물어봤어야지 않......”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후명의 신형이 사라졌다.
"헉!"
갈지자로 보법을 밟으며 뛰어드는 안후명의 불규칙한 경공술은 순식간에 가짜 나한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잠시 시간이 멈췄다고 느낀 순간 그의 금나수가 춤을 추었다.
"윽!"
답답한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나한들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노승이 입만 뻐금거릴 때 단숨에 그 앞에 도달한 안후명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빠각!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노승은 피를 뿜어내며 뒤로 서너 장을 날아갔다.
"쯧쯧쯧, 완전히 피떡이 됐네! 그러니까 거지들은 조심해야 해!"
당소혜가 엉망이 된 채 혼절한 노승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고개를 저었다. 안후명은 머리를 툭툭 털며 히죽 어 보였다.
"자네 머리는 바위보다 단단한가 보군."
송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안후명은 몸을 비비 꼬았다.
"하하하, 그렇게 칭찬을 하니 몸둘바를 모르겠네, 아무리 내 재주가 뛰어나도 면전에서 대놓고 칭찬을 하면 어떻게 하나!"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건지 송현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송현은 더 이상 말을 섞기가 싫어서 얼른 당소혜의 손을 잡고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자아도취에 빠져 있던 안후명은 주변이 조용해지자 감았던 눈을 떴다.
"아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안후명은 어느새 산문 안의 계단 을 오르고 있는 송현과 당소혜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여 쫓아갔다.
“헉! 헉! 이보게 문을 지키는 가짜들을 보지 않았는가? 소림에 변고가 생긴 것이 틀림없으니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네. 적들은 수가 많을 것이 분명해! 우리들로는 중과부족일지 모르니 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해!"
안후명의 이야기가 옳고 사리에 맞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 말이 옳지만 시간이 별로 없네, 잘못하면 당문에서처럼 놈들의 그림자만 보게 될 뿐이야."
안후명의 제안을 거절한 송현은 다시 계단을 오르자 그는 답답한 표정으로 몇 번을 만류했다 그러나 당소혜를 안고 계단을 오르는 송현의 표정을 보고 안후명은 옷자락을 놓아주었다.
"보아 하니 쇠심줄이 따로 없구나, 끙!"
앓는 소리를 낸 안후명은 품을 뒤적뒤적 하나다 죽통을 하나 꺼냈다. 죽통 아래는 실 하나가 길게 달려 있었다.
안후명은 잠시 고민하다가 죽통을 하늘로 향하게 한 후 있는 힘껏 실을 잡아 당겼다.
퉁!
가죽 부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빛무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뱀의 꼬리마냥 흔들리며 구름이 있는 곳까지 올라간 빛무리가 소리 없이 터졌다. 일정한 형태의 모양으로 하늘에 수가 놓이는 걸 확인한 안후명은 가래침 을 한 번 바닥에 뱉은 다음 서둘러 송현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본 안후명은 푸른 소나무 숲이 바람결이 흔들리며 마치 대해와 같이 물결치는 것을 보았다.
"지...... 진하!"
소실봉의 또 다른 이름 진하봉이었다. 나루터처럼 생긴 세 개의 봉우리와 그 아래 펼쳐진 숲이 마치 나루터 언덕 아래 펼쳐진 바다와 같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었다. 행방불명된 화산일검 악소군이 남긴 서신에 적혀 있던 단 두 글자 진하!
그제 서야 소림사에 오자고 한 송현의 의중을 알게 된 안후명은 송현의 뛰어난 머리에 탄복해 마지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조각을 맞추듯 수수께끼를 풀어내다니...... 무서운 자로군!'
송현에 대해서 더 경외심이 생긴 안후명이 사라지자 곧이어 주변의 하늘에 비슷한 빛무리가 하늘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소림사의 산문 깊숙이 사라지자 맑았던 하늘 위로 갑자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휘이이!
갑자기 날씨가 바뀌면서 어둑어둑 해지자 소실봉 주변이 스산해진다. 계단을 오르면서 장난을 치는 당소혜를 보면서 송현이 다짐을 받았다.
“소혜야, 아빠하고 약속 하나만 할까?"
송현이 진지한 눈을 하니 당소혜도 제법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여본다.
그런 소혜의 머리를 쓸어 주며 송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힘을 쓰지 않기다. 알았지?”
힘주어 말하는 송현을 보며 당소혜는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아빠가 위험해도?”
당소혜가 입술을 쭈뼛거리는 걸로 보아 송현의 요구가 불만스러운 듯 싶었다. 그러나 송현은 재차 당소혜의 팔을 잡고 다짐을 받으려 했다.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당소혜의 약속을 받아낸 송현이 적이 안심하며 당소혜를 안았다. 그 부녀의 모습이 이상 한지 안후명이 호리병에서 술을 들이켜다 말고 물어본다.
"아니 부녀지간이라며 왜 성이 달라?" 손부채를 하며 더위를 식히려는 안후명에게 송현은 젖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이 아이는 분명 내 딸이네, 혈육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지만 하늘이 맺어준 사이라고 할까? 성을 바꾸지 않은 이유는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한 부모들에 대한 예의 정도라고 해 두지."
당소혜를 안고 성킁성큼 올라가는 송현의 뒷모습을 보며 안후면은 점점 모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때는 군자의 모습을, 또 어떤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냉철한 모습을 보여 주는 송현을 보며 어떤 면이 진실한 그의 모습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당씨 성이 흔치 않은 성인데, 설마 하니 그 당문의 비역에서 데려온 아이인가?"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본 안후명은 어느새 산문의 계단을 다 올랐다는 사실에 생각을 접고 모든 공부는 소림 에서 나온다라고 거창하게 적혀진 현판 아래 섰다.
"쳇! 저 현판은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실로 오만하다고 할 수도 있는 현판은 어떻게 보면 당금 무림의 현실을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해서 안후명의 기분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개개인의 무위를 따진다면 또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무공 수위를 따진다면 과연 어느 문파가 소림과 비교를 할 수 있을지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 유구한 역사와 연륜은 강호에서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무공의 종주인 것이다.
숭산소림사는 '무예의 본산‘으로 통하거니와, '강호의 무공은 모두 소림에서 나왔다'고까지 칭송된다. 천축승 달마가 중국에 들어와 소림사에 자리를 튼 것이 북위 효문제 때인 오백여 년 전이다.
면벽수련 구 년 만에 깨달음을 얻은 달마는 심신 수련 법인 역근과 세수겅을 창안하여 소림무술의 장대한 시작을 알렸다. 그 이후 유구한 세월이 흐르며 그 소림의 무공은 발전을 거듭했고, 숱한 유파가 소림의 무공을 기본으로 파생됐다. 그것이 소림의 방대함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연유다.
송현이 정통 소림무공을 구경한 것은 당문의 비역에서 본 공지대사와 백팔나한들의 출수가 전부였다. 소림의 산문에 들어선 지금 과연 중원 무공의 원류가 자부하는 소림의 진실한 힘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어때? 가슴을 짓누르는 뭔가가 느껴지지. 양 옆으로 늘어선 저 노송들 조자 적어도 기백 년이 넘은 것들뿐이지. 그만큼 소림이라는 벽은 무척 높아."
안후명의 말은 곧 강호인들이 소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면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그러나 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단한 벽을 넘은 자들이 있나 본데?”
이미 숭산 소림의 연청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던 이들과 본산에 들어섰는데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지적하자 안후명도 인상을 찌푸렸다.
"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하니 소림 이라고 실수하지 말란 법은 없겠지."
다소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안후명에게 송현은 냉랭한 말투로 대꾸했다.
"글쎄, 실수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송현이 손가락으로 정문을 밀자 가볍게 열렸다. 이 시간이면 무승들의 수련하는 소리로 산문들이 들썩 거려야 정상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독경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절이라는 마치 폐허처럼 느껴지는 스산함에 안후명의 표정도 굳어지기 시작했다.
과연 안으로 들어서니 드넓은 연무장을 지키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사천왕상뿐이었다. 이 넓은 사찰에 단 세 사람만이 있는 듯했다.
"아이고 이거 으스스해지는 걸!"
안후명이 두 팔로 몸을 감싸며 엄살을 부리자 당소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도리질 했다. "아저씨는 내 뒤에만 붙어 있어 내가 지켜 줄께!"
어린 당소혜의 말에 왠지 믿음직하게 느껴지자 안후명은 다소 어이가 없었다.
'뭐지 이 기분은 정말로 소혜가 나를 지켜줄 것 같은......에이!'
안후명은 얼른 머리를 흔들었다.
개방의 차기 방주로 거론 되는 자신이 갑자기 유약해 졌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걱정 말라며 눈을 찡긋해 보이는 당소혜가 귀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근엄한 표정을 지었던 안후명은 당소혜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풀어지고 말았다.
"끄응, 이거야 원 체면이 말이 아니네."
안후명이 더위에 지친 강아지 마냥 축 쳐져서 따라갈 무렵 송현의 낮은 음성이 울렸다. "우측 법당 아래!"
안후명의 고개가 법당 아래 분지에 시선을 주었다.
"좌측 지객당!"
지객당에서 풍겨오는 낯선 기운 안후명의 근육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올라서자 그곳에는 낯익은 사람이 송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아니길 빌었소."
착잡한 심정으로 내뱉은 송현과 달리 상대는 여유로운 웃음으로 맞이했다.
"어떻게 알았나?“
그저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투로 말하는 상대를 보며 송현의 마음속에서 작은 불꽃이 일어났다.
"몰랐소. 그대의 연기가 너무나 뛰어나서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지 그런데 며칠 전 잠시 지난 시간을 돌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당신의 모습이 몇몇 장면에서 없었소.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의문투성이더군."
점차 냉랭해지는 송현의 음성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살이 에이는 듯한 한기가 느껴지게 만들었다.
"크게 부상당했던 당신은 다시 당문의 비역으로 돌아 왔지 그때 당신은 이미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으면서 모두를 속였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지 맞나?“
당시 숨 가쁘게 돌아가던 괴수와 사투, 그리고 쓰러지는 백팔나한과 피투성이로 부상을 당해 목숨이 경각해 달 했던 바로 그를 떠올렸다.
짝! 짝! 짝!
칭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박수를 치는 그를 보며 송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정상이라면 당신은 일어나지도 못했어야 했는데 다시 돌아왔지 그 이후의 행방에 대해서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았어. 의심 많은 아미의 정인사태도 당신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품지 않았지." 송현의 추리를 들은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로소 감탄해 마지않았다.
"놀랍군!"
이번에는 그도 웃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눈으로 송현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더 이상표정에 웃음따위는 없었다.
송현이 자신의 행적을 알아낸 것이 기분 나쁜 것인지 아니면 정체가 탄로 난 것이 불쾌한지 몰라도 그에게 살기가 풍겨 나왔다.
"놀랄 일은 지금부터야, 처음에는 왜 당신이 돌아왔을까? 그것이 궁금했어. 돌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간단한 거였어."
송현과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는 눈길 사이에 불이 붙을 것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신의 실험을 감춰야 했겠지 미처 당문의 실험실을 정리도 하기 전에 곽무헌 맹주와 내가 들이 닥쳤으니 당황했겠지, 게다가 정인사태가 제자들까지 대동하고 나타났으니 급할 수밖에, 당신과 관련된 증거를 지우기 위해 돌아온 거야."
송현의 추리가 끝나자 상대방은 진심으로 탄복했는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 가지고 확신을 했다는 건 믿기 어려운데."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상대를 보며 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거기에 확증을 준 것은 실종자들의 명단이었다. 실종자 절반이 모두 소림사 근처나 소림사를 지나는 문파 들 소속이었고 결정적으로......”
"결정적으로 뭐지?”
상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송현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당신과 관계있는 사람들이었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키는 송현의 행동에 상대는 박장대소를 하였다. 허리를 붙잡고 웃어대는 과한 행동에 송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고 웃어댔다.
“하하하, 미안하네, 미안해! 자네를 조롱할 뜻은 전혀 없어. 다만 내 실수가 우스웠기 때문이야.”
상대는 손사래를 치며 사과를 했지만 사과로 해결될 만 한 일이 아니었다. 뒤에 서 있는 안후명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크게 벌린 채 얼어 있었다.
"어째서 당신 같은 사람이......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안후명은 자신이 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지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안후명에게 조소를 보낸 상대는 소매 사이로 양손을 집어넣고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끌끌글!”
가볍게 혀를 차더니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몸으로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그도 모든 것에서 초탈한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눈을 감고 시원하게 불어는 산바람에 몸을 맡긴 채 입을 열었다.
"달마 이후 역대 소림 최고수는 혜가라는 법명을 쓰는 지객승이었네. 면벽 수련중인 달마에게 제자로 받아 달라고 눈발이 날리는 동굴 밖에서 무릎 꿇고 애걸복걸 하는 볼썽사나운 짓을 한 사람이야. 우습게도 그는 달마 조사로부터 거절당하자 스스로 왼팔을 잘라 희생이라는 불제자의 공덕을 보여 주고 겨우 문하생이 되었다고 전해 지지. 그는 소림사 이대 방장으로 바로 그 유명한 백팔나 한수를 만들었다고 해."
난데없이 소림의 비사를 읊조리는 상대를 보며 송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개의 경우 자신의 악행을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송현의 기분이 어떤지 중요하지 않은지 그는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소림사에 들어왔다고 처음부터 무술을 익힐 수 있는 건 아니야."
입사 처음 삼 년간은 청소 등의 허드렛일만 해야 한다. 그 뒤에도 정식 무술수련을 하는 게 아니라 선승들이 하는 무술을 귀동냥, 눈동냥으로 흉내를 내 볼 뿐이다.
정말 물 긷고, 빨래하며 힘을 기른다는 것일까.
그러나 대사의 얘기를 듣자니 이는 무공을 배우기에 앞서 정신을 가다듬는 과정이다.
"나는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출가했네. 무공수련은 그때부터 매일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그리고 오후부터는 불경을 공부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잠들기 전까지 혹독한 수련을 하는데 십 년 동안 그 수련을 단 하루도 걸러 본적이 없었지."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지 묻지도 않은 살아온 이야기는 슬슬 지루해 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호에서 소림무공이 왜 강한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소림의 나한권은 강맹하고 파괴적인 주먹과 발차기가 두드러진다. 육체의 힘을 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외가권인 소림권, 그것은 단련된 뼈와 근육, 살갗을 통해 발휘되는 극강의 무공이다.
"그중에 말이야 소림 소홍권과 짝을 이루는 대홍권은 동작이 작고 세밀하기로 유명하지"
어느새 대웅전 뜰에 내려서더니 직접 시연을 해 보였다. 그가 보여 주는 대홍권은 보폭이 생각보다 휠씬 넓고, 주먹은 육중해 보였다.
이어지는 소림오호권!
웅크려 앉아서는 조수가 다섯 손가락을 벌려 자세를 취하자 호랑이의 기세가 엿보였다. 그야말로 대단한 내력이었다. 소림이 강한 이유는 이제 충분히 알았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후명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더니 대뜸 나한 수를 안후명에게 뻗었다.
"실제 강호에서는 나한수가 통하지 않는다."라고 중얼 거린 말이,
"소림 나한수는 별 볼일 없으니 다른 걸 보여 달라"는 말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큰일 났구나 싶었던 안후명은 무턱대고 주먹을 쳐오는 데도 그의 기도에 눌려 순간 움직이지 못했다. 물론 그에 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순식간에 안후명의 면상을 향해 날아온 주먹이 얼굴에 닿으면서는 장으로 바뀌었다.
번쩍!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힘을 죽인 장법이었지만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오른쪽, 왼쪽 뺨에 연이어 손길이 스쳐 지나갔다.
상대의 주먹이 사정을 두지 않고 터졌다. 앞차기와 좌우 연권을 쾌속하게 쏘아댄다. 자세는 땅에 붙은 듯 가라앉았는데, 빠르기는 섬전 같다. 안후명이 가세에 눌려 뒤로 물러나는 사이에도 두세 차례나 더 손과 발이 오고 갔다.
완벽한 발경!
내력의 폭발력을 극대화시키는 타격법이 최고조에 다 다른 경지였다. 실제로 이런 경지가 있다는 건 안후명도 들어보지 못했다.
소림 칠십이절예 명성에 가장 큰 무게를 실어 주는 무 공중 하나가 왜 나한수인지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대부분 할 줄 알지만 내세울 만큼 나한수를 연성한 이는 드물지."
평생을 연마해 칠십이절예 중 단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할 줄 안다면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 있다는 풍문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의 호승심이 강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강호에도 그의 호승심과 무공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무광승이라는 별명이 잘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송현에게는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어 보였다. 그러니 말투도 좋을 리 없었다. 송현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는지 안후명을 조롱하던 그의 신형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과정 역시 쾌속 그 자체였다. 온몸을 옭아매 던 기세가 사라지자 안후명은 진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소혜가 얼른 다가가 이마의 땀을 닦아 주었다.
"쯧쯧쯧, 견후 안후명의 위명이 고작 이 정도였 나? 실망이로군." 혀를 차는 그에게 송현은 지루한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1 했다. 그러자 그는 언뜻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조금은 실망이군. 자네라면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생 각했는데 말이야." 왠지 처연해 보이기도 했지만 송현의 눈빛은 변하지 않 았다. 송현을 물끄러미 바라본 그는 긴 이야기를 끝내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지루한 넋두리는 나도 질색이니까, 내가 아까 달마의 제자가 되어 소림의 이대 방장이 된 혜가대사에 대해서 말했지?왜 달마조사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기 꺼려했을까? 그 이유는 혜능대사라는 불세출의 천재가 승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못한 천재 무승 혜능, 달마조사는 혜능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갖은 고생을 한 혜가로 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지 그래서 그는 혜능 앞에서 팔을 잘라냈네. 그때 혜능의 눈에는 혜가의 팔을 자르는 것이 마치 자신의 손처럼 느껴졌겠지. 결국 큰 충격을 받은 혜능은 그날로 세상을 등지고 사라졌네. 결국 그는 팔하나와 친구를 잃은 대신 소림의 전부를 얻게 되었지." 아무도 모르는 소림의 비사를 들려준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송현을 가리켰다.
"난 자네처럼 타고난 천재들이 싫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주지 않는 다는 사실이 난 너무 싫었어. 겨우 여덟 살이었다.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느껴보지도 못한 내게 가혹한 수련을 시킨 사부라는 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능선이라는 놈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잠시 과거의 악몽이 떠오르자 견디기 힘들었는지 거칠 게 숨을 몰아쉬더니 이내 평정을 찾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 애송이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우치는 천재 였다. 내가 십 년간 이룬 공부를 그놈은 단 삼 년 만에 깨 우쳤으니, 큭큭큭!"
점점 그의 심성이 음습해지는 것을 느낀 송현이 안후명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눈짓을 했다 안후명은 재빨리 당소혜의 손을 잡고 대웅전 아래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말이야 나를 찬밥 신세로 전락시킨 것 정도는 참을 수 있었어. 하지만 그놈의 무극무해가 소림사로 왔을 때 내 사부라는 작자는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내게 그것을 익혀보라고 했네. 물론 능선 그 녀석에게는 책의 존재에 대해서 함구한 채 말이야."
오랜 세월 가슴속에 쌓아 두었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지 그는 격정을 참지 못하고 분노를 그대로 드러냈다.
"내 청춘을 다 바친 대가가 겨우 그런 거였나? 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몰래 그 녀석의 방에다 무극 무해를 가져다 놓았다. 쿡쿡쿡!"
그의 눈빛이 점차 변하는 것을 느낀 송현은 은밀하게 내력을 끌어 올렸다.
"결국 능선 녀석은 아주 볼만한 괴수로 변해서 살육을 저질렀다. 그때 사부의 표정을 자네가 봤어야 하는 건데. 크하하하!"
얼마나 즐거운지 그는 기쁨을 감추고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 같은 그의 웃음을 송현이 가로 막았다.
"세상에! 그 당시 무극무해 때문에 소림을 방문했던 정파인들의 방에도 책을 넣은 것이 당신이었군."
송현은 당시 소림의 참극이 여러 명에 의해서 벌어졌고 결국 괴수로 변한 이들을 죽인 것이 그들의 사문 식솔들 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곽무헌도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이 무극무해를 익혔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소림에서 무극무해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으니 누구도 책의 도난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제야 소림사의 참극 속에 감춰진 진실이 드러났다.
빗나간 애정을 가진 한 스승의 과한 욕심이 불러일으킨 참극이었다.
자신이 아끼는 능선에게 최고의 무공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혹시 모를 잘못된 점을 알아내기 위해 다른 제자를 희생시키려했던 과한 제자 사랑이 빛어낸 과오였다.
"후후후, 필사하여 각파의 후지기수라는 놈들의 머리 맡에 몰래 두었지. 하지만 정말 웃기는 건 말이야. 그놈들 중 누구도 그 책의 여부를 알린 놈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야. 콕콕콕!"
그는 정말이지 당시의 일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참사에 대해서는 전혀 뉘우치고 있지 않았다.
"그럼 당신이 그때 죽었다던 능안 대사로군. 지금은 뭐라고 불러야 하지? 공지대사?“
송현의 차가운 음성에 키득거리던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바로 공지대사였던 것이다. 전에 알고 있던 온화하고 공명정대하던 공지대사가 아닌 복수와 탐욕에 젖은 광인일 뿐인 공지였다.
"크하하하! 역시 똑똑하군.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지 무극무해 덕분에 난 늙지도 않아 모습을 바꿀 수도 있지."
공지라는 이름으로 소림의 신승으로 불리던 공지대사가 사실은 죽음을 가장하고 거짓 삶을 살아온 참극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안후명은 이 모든 사실에 경악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크르륵!
섬뜩한 소리가 좌우에서 들려오자 안후명은 내력을 끌어 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맙소사!"
거대한 다리 여덟 개의 괴수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가운데 벌집처럼 매달려 있는 사람의 머리들이었다. 머리카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소림의 무승들인 듯했다.
안후명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도무지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큭큭큭! 좌군사 위공은 실패작이었지만 이놈들은 달라. 자네들을 아주 맛나게 먹어 치울 거라네."
공지대사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터뜨리며 너무나 즐거워했다. 그런 공지대사를 보면서 송현은 탄식했다.
"불쌍한 사람......”
“......”
송현의 말에 공지대사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부들부들 떠는 것이 곧이라도 뭔가 사단이 날듯 했다.
"감히 내게 그 따위 말을 하다니...... 네놈도 똑같아 그 때의 능선, 그 재수 없는 녀석과 똑같아!"
아마 그의 사제 능선도 마지막 순간 그를 향해 같은 말을 했었나 보다. 공지는 과거의 기억하기 싫은 장면이 떠올랐는지 허공에 마구 헤집었다.
“난 네놈 같은 녀석들이 제일 싫다. 죽여주마! 아주 고통스럽게 살려달라고 빌게 만들어 주겠다."
공지대사가 뜰로 내려와 으르렁 거리자 그의 팔뚝이 기둥만해지면서 징그럽게 변했다. 그러나 송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소혜야!"
송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외치자 겁에 질린 안후명을 달래던 당소혜가 힘차게 대답했다.
"아까 아빠가 했던 말 취소다. 아저씨를 잘 지켜주거라!"
안후명은 지금 이 상황에서 당소혜에게 자신을 맡기는 송현이 저주스러웠다. 당장 도망쳐도 살 수 있을지 모르는 판국에 애한테 자신을 맡기다니 혹시 너무 겁에 질려 미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응! 나만 믿어!"
밝게 웃는 당소혜가 송현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다음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거지 삼촌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당소혜의 치기 어린 행동을 보며 안후명은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아흐흐흐흑, 이 젊은 나이에 장가도 못가보고 이렇게 가는구나!"
십여 마리의 괴수들이 다가오자 안후명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모한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낀 안후명이 살며시 눈을 떴다가 엄청난 광경을 보았다.
"세,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앙증맞은 소녀의 눈이 흑색으로 물들더니 엄청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괴수들이 가까이 다가오려다 당소혜가 뿜어내는 검은 기운에 닿으면 몸이 녹아내리며 괴성을 질러댔다.
당소혜가 자신을 지켜준다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던 셈이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안후명은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당소혜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당소혜의 독정이 다행이도 무극무해의 기운을 받아들인 이후로 폭주하지 않고 있었다. 독정이 소혜의 통제를 잘 따르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송현은 모든 신경을 공지대사에게 쓸 수 있었다.
눈앞의 상대는 무극무해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괴물이었다. 좌군사 위공처럼 다른 이에게 조정당하는 단순한 괴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송현의 전신으로 무극무해의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
"그럼 이제 당신의 슬픈 이야기를 끝냅시다."
한껏 가라앉은 송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에 화답하듯 공지대사의 가래 끓는 웃음소리가 대웅전 앞뜰을 덮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