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등하불명 (38/43)

제5장 등하불명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으로, 가까이에 있는 물건이나 사람을 잘 찾지 못함을 이르는 말.

  태평문을 나선지 보름여 만에 대륙의 젖줄인 장강에 도착한 송현은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지류들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장강후랑최전랑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  

 저도 모르게 한 구절을 읊조린 송현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잠시 땀을 식혔다.  그때,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온 인기척에 송현의 전신이 굳어졌다.  

  "하하하, 멋진 표현입니다. '화무십일홍' 이니 이런 식의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장강후랑최전랑이라, 캬하~!"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는지 술 냄새가 진하게 묻어 나왔다. 상대에게서 적의가 없음을 확인한 송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로 까치집을 지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상당한 거리였다. 이 정도 거리에서 송현이 작게 읖조린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상대 역시 절정의 고수라는 뜻 이었다.

  송현은 전신에 끌어올린 기운을 풀지 않고 있었다.

  아무 일 없듯이 불을 지피는 송현에게 다가오는 인영은 모습이 쾌나 요상했다. 등에는 거적을 둘둘 말아서 메고 있었고 허리에 매달고 있는 호리병들은 방울 마냥 덜렁거렸다. 게다가 얼마나 씻지 않았는지 역한 냄새가술 냄새와 뒤섞여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냄새가 고약해!"

   송현의 뒤에 매달려 장난을 치고 있던 당소혜가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렸다. 송현이 태평문을 나설 때 떨어지지 않으려 얼마나 떼를 쓰는지 결국 두 손을 든 송현이 당 소혜를 데리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당소혜가 음식에 연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송현은 당소혜를 보통 아이들처럼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음은 급하지만 걸음을 멈추고 당소혜를 위해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접근하는 이가 있었으니 송현은 조심스럽게 무극무해의 기운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지! 한마디로 거지 중에 상거지였다. 다리 한쪽도 바지춤을 걷어 올린 채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더니 송현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털푸덕! 소리를 내며 앉아 버린 사내는 거침없이 트림을 토해 냈다. 

 기겁한 당소혜가 송현의 뒤로 숨자 사내는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더 크게 트림을 해댔다.

  "꺼억! 옛사람은 가고, 새로운 사람이 오는구나! 이런 뜻이지요?“

 말뜻에 숨겨진 속내를 잘 풀이해 낸 거지 사내를 송현은 미소로 반겼다.

  "글쎄요, 그저 자고 고루한 것들은 언제고 새롭고 참신 한 것에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는 슬픈 이야기 일지도 모르죠."

   송현이 나뭇가지로 불을 뒤집자 불똥들이 튀어 오르며 재를 날렸다. 불똥들이 도망가지 않고 나뭇가지를 따라서 맵도는 것이 마치 도깨비불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익숙하게 재를 골라내는 솜씨에 거지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마 이런 광경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일 테니 당 연한 반응이었다.

  "와아!"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모습에 송현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오죽하면 당소혜마저 그런 사내를 보 며 한숨을 내쉴 지경이었다.

  나뭇가지로 불꽃을 가위로 잘라내듯이 들어 올리자 그 아래에 남겨진 재들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송현이 나뭇가지를 흔들어 털어내자 '퍽' 소리가나며 한순간에 불꽃이 꺼져 버렸다.  다시 나뭇가지를 들어 잿더미 속을 뒤집자 그 속에서 공처럼 생긴 흙덩어리들이 나타났다. 대여섯 개의 흙덩어리를 나뭇가지로 '툭툭' 치니 금세 금이 가며 깨져 버렸다.

  그 안에서 나온 것들은 작은 새들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산새들을 잡아서 진흙을 발라 구운 것이다.

   "와아!"

  당소혜가 코를 벌름거리며 고소한 냄새에 취한 듯 눈을 감고 황홀해 했다. 진흙을 걷어내니 고소한 냄새가 더 짙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킁! 킁!"

  체면 따위는 애초에 없었는지 그는 코를 벌름 거리며 냄새라도 먹어치우겠다는 듯 덤벼들었다.

  “맛 좀 보시겠소?" 

 송현이 하나 건네니 거절할 줄도 모르고 덥석 잡아든다.

  "뜨거울 텐......“

 주의를 주려던 송현이 무색해질 정도로 거지 사내는 어느새 새의 살들을 발라먹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당소혜는 손에 든 새구이를 먹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신기한 듯 사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송현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통에 그의 손이 벌써 세 개 째 집어 들고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이 새 구이를 먹어치운 거지 사내는 송현의 몫까지 먹어치우고도 아쉬움이 남는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입맛을 다셨다.

  "살짝 아쉽게 먹었군."

 손에 묻은 기름기마저 쪽쪽 빨아먹기를 주저하지 않는 뻔뻔함에 송현은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내가 슬쩍 당소혜가 들고 있는 새구이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자 당 소혜가 혀를 내밀며 얼른 송현의 뒤에 숨었다. 뒤늦게나 마 송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는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하하하, 제가 좀 식성이 좋아서......“

  좀 좋은 정도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송현은 그만 두었다. 잿더미를 더 헤집자 그 안에서 다른 진흙덩 어리들이 나왔다. 새로운 것들이 나오자 거지 사내의 눈빛이 또 다시 빛을 냈다. 그 모양을 보고 쓴웃음을 지어 보인 송현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나뭇가지에 내력을 집어넣었다. 

   '톡! 톡!' 

  마찬가지로 뜨거운 열기에 굳어 버린 진흙이 깨어지며 잘 익은 감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거지 사내의 손이 재빠르게 뻗어 왔다.

  획!

 그러나 이번에는 애석하게도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분명히 손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던 감자는 송현의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송현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 나 감자는 많았고 사내는 다른 목표물을 찾아 눈빛을 번뜩였다.

   획!획!

  손과 나뭇가지가 감자를 사이에 두고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소혜는 옆에서 둘의 모습을 보고는 박수를 치며 꺄르르 웃었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재미난 놀이처럼 보였기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유치한 장난처럼 보이겠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기류는 절대 장난이 아니었다.

  '금나수!'

 손가락을 갈고리 마냥 구부려 살괭이가 먹이를 노리듯 집요하게 파고드는거지 사내의 손짓이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한 송현의 예상대로 그는 무공을 사용할 줄 아는 무림인이었다. 상대가 내력을 돋우자 송현의 손길도 분주해 졌다. 이내 구운 감자를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은 점점 그 열기가 뜨거워졌다. 

  "하아, 하아."

   거지 사내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감자에 대한 욕심 따위는 없어 보였다.

    오로지 투지! 투지만이 남아 있었다.

  투쟁심이란 인간에게 내재된 오래된 본능이다. 양손의 소매를 걷어 올린 사내의 얼굴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거, 이거...... 시나 잘 짓는 서생인 줄 알았더니 붓 속에 칼을 숨기고 계셨구만,"

  목을 좌우로 꺾으며 심기일전하는 거지 사내에게 구운 감자를 하나를 반으로 조개서 입에 넣은 송현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쪽이야 말로 거렁뱅이 주제에 금나수라니 가당키나 하오?”

  일부러 상대의 마음을 자극하는 언사를 사용했지만 거지 사내는 히죽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정도 얕은 수에는 넘어가지 않는 노련한 사내였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 안후명이라고 하는데 댁은 어찌 돼슈?“

 한쪽 코를 막고 아무렇게나 코를 풀어낸 사내를 보며 송현도 손에 감자의 흔적을 틸어내고 다시 마주 앉았다.

  "송현이라고 하오."

  간략한 소개에 안후명의 눈빛이 잠시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평상심을 되찾은 안후명은 언제 그랬냐 싶게 특유의 실실거리는 웃음과 함께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거 살면서 구운 감자를 이렇게 탐하게 될 줄은 내 짐작도 못했소이다그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안후명의 기세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 압력이 고스란히 전해지자 송현도 힘을 끌어 올렸다.

  “나 역시 감자 하나 지키기가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소 이다."

  송현이 맞장구치자 안후명은 호리병 하나를 꺼내 마개를 뽑았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라 흘러나왔다.

  "크흑!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이 맛에 이놈을 끊을 수가 없다니까!"

 대충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낸 안후명이 호리병을 건넸다. 송현이 사양하지 않고 자신이 입을 댄 주둥이에 서슴없이 입을 가져가는 것을 보며 안후명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 그럼 목도 축였겠다. 본격적으로 해 볼까요?”

  안후명이 손바닥을 비비며 즐거운 놀이를 앞둔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를 내자 송현도 미소로 답했다. 그 순간 당 소혜가 끼어들었다.

  "거지 아저씨 내 소개도 들어야지. 난 당소혜라고 해!"

  입가에 기름을 묻힌 어린 소녀의 당찬 소개에 안후명은 예의를 차리고 인사를 받았다. 마치 명문가 자제들이 인사를 나누듯 깍듯이 대하는 태도에 송현은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았다. 아이에게 대하는 모습으로 보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잠시 송현이 방심하는 틈을 타고 벼락처럼 움직이는 안후명의 금나수를 송현은 얇은 나뭇가지 하나로 물샐 틈 없이 막아 내었다.

  이내 주변은 바람 부는 소리만 들렸다. 곧 사위가 어둑어둑해졌지만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운 감자 하나를 놓고 온갖 무공 초식을 겨루는데 여념이 없었다.

  밤사이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비록 남녀사이는 아니지 만 안후명과 송현은 다소 유치하기까지 한 장난을 하면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밤새 그와 손을 섞으면서 그가 개방의 사람임을 눈치 챈 송현은 강호에서 가장 정보에 뛰어난 개방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처지를 털어 놓았다.

  분명히 안후명이 개방사람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태평문의 문주라는 것쯤은 쉽게 눈치 챘을 거라 믿고 먼저 손을 내민 것이다. 보통 무림인들과 다른 송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안후명은 뜻밖의 소식에 놀라워했다.

  "이럴 수가...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젓가락으로 머릿속의 가려움을 해결하던 안후명은 저 간의 강호 사정을 송현에게 들려주었다. 영호인의 소식에 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송현에게도 안후명이 들려주는 강호의 사건은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것이 영호인의 실종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무림맹총회가 끝난 후 귀로하던 정팍 무인 들이 실종되었단 뜻입니까?”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안후명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송현은 이번 사건에 뭔가 큰 내막이 있음을 직감했다.

  한편, 송현이 강호의 정사에 어두운 것이 의외였는지 안후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안후명도 태평문에 관해서 알기보다는 신진고수의 출현이라는 면에서 송현의 무공, 즉 남궁휘를 상대로 승리한 점에만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사실, 태평문은 무림보다는 상계에서 더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태평문은 강호의 정보를 수집하기보다는 상계와 정계의 정보를 취합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강호의 정세에는 그만큼 어두운 편이었다. 무림맹의 사공혜미로부터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그나마 요사이 송현은 영호인을 찾는 일이 몰두하느라 책상에 올라온 보고서를 살펴볼 여력이 없었다.

  안후명의 말을 듣고 난 송현은 그 보고서들을 살피지 않았음을 후회했지만 이미 지난 일들이었다. 천우신조인 지 개방의 정보통인 안후명을 만났으니 이제 그의 도움을 받아 실종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나서야 할 때였다.

  마침 안후명 역시 실종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마침 서로 비슷한 또래라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이 의문의 사건에 함께 나서기로 했다.  

  그것은 개방의 문도인 안후명의 자유로운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고 허례허식을 극도로 싫어했다. 송현 역시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에 두 사람은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방의 동지들이 모아온 정보에 의하면 그날을 전후로 이상한 무리들이 소주 일대에 머물고 있었다고 하더군."

 "이상한 무리라면?”

  송현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안후명은 호리병에서 독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재차 설명을 해 주었다. 부연 설명을 통해서 송현은 무림맹총회가 열리는 동안 인근 지역에서 쾌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개방뿐 아니라 화산에서도 그 뒤를 쫓고 있었네."

  “화산파가?”

  송현은 화산파라는 말에 화산일검 악소군을 떠올렸다.

  그는 당문의 사건 이후로 당사륭의 후예들을 쫓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그 무리를 쫓았다는 것은 안후명이 지적하는 무리가 당사릉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송현은 바짝 긴장했다. 

 "혹시...... 화산일검 악소군을 만났나?"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송현에게 안후명은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어떻게 알았냐는듯이 되물었다. 송현은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그와 친분이 있을 뿐이라며 얼버무렸다. 안후명도 뭔가 속내가 있음을 눈치 챘지만 송현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은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무튼 화산파와 개방이 같은 자들을 쫓고 있음을 알 게 되었고, 그때 악소군이 내게 제의를 해 왔네."

  "그게 뭐지?“

 안후명은 누가 듣는지 주변을 슬쩍 살핀 뒤에 입을 열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실은 개방과 화산이 이 일을 위해 잠시 손을 잡았네,"

 화산은 다른 문파와 쉽게 왕래를 하지 않는 곳이라, 송현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악소군의 성품을 보아서도 그것 은 파격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 역시 악소군 그 양반의 성정을 아는 편이라서 의외 였지. 그런데 왜나 절박해 보였어."

  머리를 긁적이며 그때 생각을 떠올린 안후명은 뭐가 잘 풀리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박하다니 뭐가?“

  늘 냉정하고 공명정대한 악소군에게 절박한 일이 무엇일까 송현도 머릿속에 그려보았지만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 자세히 묻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내 느낌으로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했다고 해야 하나?“

  "쫓겨? 쫓기다니? 천하의 화산일검 악소군이 누구에게 쫓기다니! 그게 말이 되나?”

  고개를 가로 젓는 송현을 보며 안후명도 코끝을 찡그리며 불편해 했다.

  "뭐, 단순히 내 느낌이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굳이 그 대단한 분이 내게 그놈들의 추격을 맡길 리가 없잖아?“

  "뭐? 정말?“

  악소군은 당문의 비역에서 나온 이후 객잔에서 겨울을 보낼 때 소림과 화산이 공동으로 당사륭의 후예들을 찾기 위해서 공조를 했다. 그중 화산일검 악소군이 가장 적극적으로 임무에 임했다. 그러던 중 몇 달 전부터 연락이 끊겼다는 사공혜미의 걱정에 송현도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안후명에게 그의 소식을 듣다 보니 걱정이 앞섰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신세를 진터라 송현으로 서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어디로 간다고 하시던가?“

  안후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품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라, 이게 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놀랍게도 안후명의 품속에서는 갖가지 물건이 튀어 나왔다. 어떻게 사람의 옷 안에 그 많은 물건이 들어갈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 찾았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찾아낸 것을 꺼내 들었다. 안후명의 손에 들린 것은 구겨지기는 했지만 분명히 서신이었다. 

 송현이 잡으려 하자 뒤로 살짝 빼더니 실실 거렸다.

  "이건 사실 맹주님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받은 건데 말이야......“

  말꼬리를 흐리며 송현의 애를 태우던 안후명은 쩔쩔거리며 서신을 송현에게 건네주었다.  "뭐, 맹주님과 자네의 관계를 보건데 보여 주어도 괜찮겠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어 보인 안후명의 손에서 서신을 낚아채다시피 빼앗은 송현은 이미 누군가 읽은 흔적을 발견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서둘러 읽어 보았다.  

 진하

  단 두 글자가 급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진하라는 것은 언덕 아래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었다.  

  '뭐지? 뭘까? 도대체 무슨 말을 전하려고 하는 거지?‘

  송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강호인들의 실종, 그 즈음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악소군이 남긴 실마리가 무엇인지 송현은 머리를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악 대협은 이번 일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런 열정이라면 분명히 놈들의 꼬리를 잡았을 것이 틀림없다. 무림맹 근처에 숨어 있던 놈들이 당사륭의 후예들이고 놈 들 가까이 접근한 악소군이 두려움을 느껴서 마침 조우한 개방의 안후명에게 암시를 남긴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머릿속을 정리하자 풀리지 않던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듯했다. 안후명은 그런 송 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신이 풀지 못한 것을 송현을 통해서 얻어 보려는 속셈이었다. 송현은 차근차근 자신이 보았으되 미처 간과한 일은 없는지 되새기고 있었다. 그림판을 맞추듯 송현은 수없이 연상되어 떠오르는 장면들을 이리저리 옮기며 의문점을 풀어나갔다.

  "응?“

  갑자기 송현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소리치자 안후명이 덩달아 놀라서 기겁했다.

  "왜? 뭐야?”

  안후명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송현은 그에게 실종자 명단을 달라고 했다. 안후명은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있냐며 대신 어느 파의 누가 사라졌는지를 구술해 주었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송현의 마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졌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의 이름이 불리자 송현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대단한 집중력이로군. 이 친구가 뭔가 실마리를 찾아 내준다면 좋겠는데...... 응?”

  어른들의 지루한 대화에 지쳐 잠이 든 당소혜를 보며 안후명은 미소를 지었다. 잠든 모습이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뺨에 입을 맞춘 안후명은 어린 소혜가 감기에 들 까봐 자신의 거적을 꺼내어 덮어 주었다. 그는 내심 뿌듯해 보였지만 잠에서 깨어난 당소혜가 기뻐할지는 모를 일 이었다.

  안후명은 송현이 방해 받지 않도록 그를 지켰다. 송현은 명상에 빠진 듯 숨소리마저 잦아들며 조용해졌다.  

  그날 밤, 소주의 무림맹에도 잠 못 이르고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강호의 정보를 취합하는 사공혜미의 처소였다.

  그년의 처소에는 수많은 전서구들이 가져온 정보들이 분류되고 요약되어 그녀의 책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곽무헌이 떠난 지 벌써 이레나 흘렸다.

  그녀는 정파의 고수들을 모아서 떠날 것을 종용했지만 곽무헌은 고집을 피우며 무림맹의 수신호위단만을 대동하고 떠났다. 그들의 무위가 결코 낮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는 괴수들을 조정하는 무서운 집단이었다.

  그러나 곽무헌은 무인들의 속성을 너무나 두려워했다.

  만에 하나 정파 무인들이 괴수의 제조비법을 알기라도 한다면 강호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손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물론 곽무헌이 그렇게 자신하는 데는 송현이라는 막강 한 조력자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공혜미는 왠지 모 르게 밀려오는 불안감에 줄곧 초조한 마음이었다.

  "총군사, 화산파와 연락이 탕지 않습니다." 

 전서구를 담당하는 연락관이 낭패한 표정으로 보고를 하자 그녀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때 헐레벌떡 달려 온 다른 연락관의 표정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이것을!"

 서둘러 서신을 받아든 사공혜미는 비명을 지르듯 입을 크게 벌렸다.  

  

  소림지화

  소림에 큰 변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곽무헌과 함께 당사륭의 후예를 쫓는데 뜻을 같이 한 문팍들에게서 변고가 생긴 것이다.

  사공혜미의 혜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산과는 연락이 되지 않고 소림에는 변고가 생겼다. 그것도 하필이면 맹주가 자리를 비운 시기와 일치하는 건 우연일까?’

  그때 그녀의 눈에 기삼에게 받은 목합이 들어왔다. 곽무헌은 목합 안에 든 책자의 내용만 믿고 길을 떠났다.

  '설마......‘

  갑자기 떠오른 불길한 생각에 몸서리친 사공혜미는 수신호위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늦은 밤 총군사가 자신들을 불렀다면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기에 무장한 수신호위들이 얼굴에도 긴장이 서려 있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호위대 정예만 불러 주세요."

 총군사의 수신호위는 그녀의 명에 따라서 무공이 높은 이들로 추려서 채비를 꾸렸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무림맹의 비밀 통로를 통해서 마차 한 대와 십여 명의 무리가 몰래 빠져나갔다.  

  아침이 되어 당소혜가 안후명에게 악을 쓰며 소리치는 통에 명상에서 깨어난 송현은 거적을 들고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밤새 가부좌를 틀고 있던 송현은 두 사람의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안후명이 당소혜에게 잡혀서 머리카락을 한 움큼 뽑히고 나서야 아침의 소동이 멈췄다. 통쾌하게 복수를 한 당소혜는 의기양양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나 자신의 뺨에 입술 모양의 숯검뎅이가 묻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어제 구워 놓은 감자를 맛나게 먹고 있는 당소혜를 보며 송현은 그녀가 무서운 독정이라기보다 여느 어린아이와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그녀의 뺨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의외로군 태평문의 문주가 이렇게 다정다감한 위인이 었다니 정보를 수정해야겠군.' 

 안후명은 밤새 그를 살펴본 결과 개방의 정보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눈으로 보이는 정보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는 격언을 다시 한 번 되새긴 안후명은 밤사이 송현이 어떤 추론을 이끌어 냈을지 궁금해서 그 좋아하는 음식도 거들떠보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송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당소혜가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시간이 안후명에게는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이 흐르고 떠날 채비를 끝내자 안후명은 송현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건가?“

  안후명의 질문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정보만 가지고 북경으로 향하는 스스로의 정보에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는 은연중 송현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송현이 손을 들어 햇살을 가리고 고개를 들었다.

  "숭산...... 소림으로 간다!"

  낮지만 강한 어조에 안후명은 크게 놀랐다.

  "소림? 북경이 아니고?“

  어리둥절해 하는 안후명을 세워 두고 송현은 당소혜의 손을 잡고 길을 떠났다. 그는 북경을 향하는 길과 숭산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송현을 보며 갈등했다. 십만 개방도 들의 모아온 정보는 북경의 한 왕부를 지칭하고 있었다.

  지금껏 개방의 정보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 자신감이 송현의 앞에서는 작아만 졌다.

  "숭산 소림이라...... 방주님쩨서는 항상 자신의 발아래에 난 구멍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하셨지."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안후명은 호리병에서 독주 한 모금을 털어 넣은 다음 송현의 뒤를 쫓아 뛰었다. 오로지 자신의 직감을 믿고 내린 결정에 후회는 없어 보였다. 따가 운 햇살 속으로 뛰어가는 안후명의 얼굴에는 다시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가득했다.

  "여어, 당 소저! 이 안후명이 같이 가자구!"

 연인을 부르듯 애절하게 외치며 따라오는 안후명에게 당소혜는 혀를 내밀어 보였다. 생각지 못한 길동무에 때문에 조용하던 여정이 시끄러워졌지만 송현은 당소혜에게 말동무가 생걱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서로 감시하는 처지지만 적어도 등 뒤에서 비수를 들이 댈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불편한 동행을 허락한 것이 다. 어쨌든 안후명이 아니었다면 송현도 북경의 주왕부로 향했을 것이다.  현재 겉으로 드러난 모든 증거들은 북경의 주왕부가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납치된 이들이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서 목격되었고 안후명이 알려준 정보를 취합해 보아도 결론은 주왕 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제 안후명을 만나서 생각을 되짚어 본 결과 그동안 간과한 것들이 의외로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몸서리치게 만든 무서운 얼굴을 그 흐릿한 기억 속에서 찾아내고 말았다.

  "제발 당신이 아니길 빌겠소...... 내 추측이 잘못된 것 이기를 빌고 또 빌어 봅니다."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송현은 티격태격 하는 안후명과 당소혜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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