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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지록위마 (35/43)

제2장 지록위마

  지록위마-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우기다. 고의로 진상을 가리고 억지를 써서 시비를 뒤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말 

  한동안 주인이 사용하지 않아서 먼지가 쌓인 탁자를 손을 쓸어 보니 뽀얗게 일어난다. 단촐하지만 정갈하게 정리된 가재도구들이 주인의 성격을 말해 주는 듯 보였다.

 무림맹 내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전각은 바로 좌군사 위공이 사용하던 거처였다. 그가 떠나고 주인 없이 버려진 전각을 찾은 송현은 그의 손때가 묻어 있는 책상에 잠시 앉아서 기억을 떠올렸다.

  아무리 좋은 추억을 찾아보아도 그와는 늘 악연뿐이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그와는 은원을 고리를 풀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송현은 굳게 닫힌 창문을 밀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빡빡해진 창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한 바람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깊이 들이마시니 폐부를 찌르는 상쾌함이 정신을 깨웠다.

  사락! 

  부드러운 비단이 스치는 소리에 송현이 뒤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사공혜미가 환한 미소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굳이 이곳을 고집하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공혜미는 송현의 마음을 모르겠다며 다시 한 번 처소를 옮길 것을 권했다. 그러나 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총군사는 이곳이 꺼림직한가 보네요." 사공혜미가 가져온 차를 마시는 송현은 넉살 좋게 웃어 보였지만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리가 없지요. 게다가 그와는 좋지 않은 인연이었으니 편하지 않습니다. 사실 전 이곳을 없애 버리고 싶었어요. 맹주님의 명이 아니었다면 벌써 불타 없어졌을 거라구요."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님을 깨달은 송현은 입 안이 쓰게 느껴졌다.

 사공혜미 같은 여인에게 저리 독한 마음을 품게 만든 좌군사 위공이 생전에 어떠하였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저는 이곳에 있으니 정신이 맑아집니다."

 다소 엉뚱한 대답에 사공혜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송현은 웃고 말았다. 찻잔을 내려놓은 송현은 뒷짐을 진 채 창가에 다가가 시원한 바람을 몸으로 느쪘다.

  "그와 저는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듯 송현의 음성이 몽롱해져 갔다.

  "관직에 뜻을 두고 어린 나이에 입신의 길에 들어섰지만 중앙의 정치란 우리의 뜻과 달리 환관들의 입김에 의 해 좌지우지되는 곳이었죠. 그래서 그는 무림맹으로 저는 상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가진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도 때와 운이 맞지 않으면 평범한 졸부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이 학자라는 이의 삶인가 봅니다."

  슬픔이 진하게 묻어 있는 송현의 넋두리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사공혜미의 굴곡진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좌군사 위공이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누대에 걸쳐 칭송을 받을 영웅호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요." 사공혜미는 송현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악하게 태어나는 이는 없다는 성선설이 아니더라도 송현의 논리는 그녀를 이미 설득시키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애석하게도 그의 뜻과 반하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대립하고 싸우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면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이 대목에 가서는 왠지 처연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송현의 음성에는 허무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의 삶은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거처에서 묵기로 한 겁니다. 잠시라도 내 자신이 나태 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이지만 사공혜미에게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송현의 말은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크다! 이 사내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람이다.‘

   진정으로 탄복하게 된 사공혜미는 송현이라는 사내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인간으로서 송현이란 사내의 인격에 존경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때 거칠게 문이 열리며 굳은 표정의 곽무헌이 안으로 들어섰다.   

  "달갑지 않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가타부타 없이 성질부터 내는 곽무헌의 표정으로 보아 계획에 지장을 줄 만한 거물임이 틀림없었다. 사공혜미 역시 당황하며 명단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곽무헌이 그 수고를 덜어 주었다.

  "무슨 꿍꿍이 속셈인지 남궁세가 놈들이 기어 들어왔다."

 뜻밖의 이야기에 사공혜미는 물론 송현 역시 크게 놀랐다. 남궁성현의 사건과 남궁휘의 죽음 이후로 봉문이라도 한 듯이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침묵하던 그들이 왜 하필 무림총회에 나타났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상대가 남궁세가라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나 음모와 사건 뒤에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좋지 않은 관계인 송현으로서도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연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정주부에서 보여 준 그의 잔혹한 성정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충격 적인 광경이었다. 자신의 명분과 목적을 위해서 친혈육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죽인 냉혹한 인간이었다. 그런차 라면 어떤 흉계를 꾸밀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 그런 일이? 소녀의 불찰이옵니다.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다니 이런 실수가 없습니다." 

  사공혜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획을 수립했다고 자신했지만 의외의 변수 중에 남궁세가라는 변수는 너무나 컸다. 자신의 실수에 입술을 깨물며 질책하는 것을 보며 곽무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세상일이란 끝이 날 때까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건 총군사의 탓이 아니야. 그들의 출현이 문제 가 아니라 왜, 무엇을 위해 이곳에 나타났는가? 그것이 문제일 뿐이지." 눈매를 좁힌 곽무헌이 신경을 곤두세우자 송현은 틱밑을 매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송현의 물음에 곽무헌은 손가락을 흔들며 질문이 틀렸 다고 했다.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만나고 있느냐가 중요한 점이지." 그랬다. 지금 무림맹에는 총회 때문에 무림의 알만한 유명 인사들과 각 문파의 대표들이 머물고 있다. 남궁세 가가 어려운 걸음을 했다면 반드시 목적이 있을 테고 그 목적을 위해서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확실히 연륜이 앞서는 곽무헌이 제일 빨랐다. 사공혜미는 미처 대비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곽무헌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손뼉을 가볍게 쳤다.

  "자, 자! 지금 이렇게 시무룩해 있을 때가 아니다. 문제란 언제 어느 때고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를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 갈 것인가? 그것에 집중해야 해."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공혜미와 달리 임기응변에 능한 곽무헌답게 그는 전체를 보며 상황에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지금 남궁연 그놈은 정인사태가 주도하는 무리들과 함께 있다."

 "역시나, 맹주님을 무림맹에서 끌어내려는 속셈일까요?“

 송현의 물음에 곽무헌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공혜미 역시 그건 아니라며 강하게 부정했다.  단순히 그런 목적으로 남궁연 가주가 이곳으로 행차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는 결코 쉽게 움직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자신의 형님인 남궁휘가 무림맹에서 사망했음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냉혈한입니다. "

   남궁휘가 언급되자 송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품에서 죽어 가던 남궁휘의 마지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멍에일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 이후로 송현의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잠시 좋지 않았던 기색은 금세 사라졌다.

  "그동안 남궁가의 행보로 보았을 때 남궁연 가주가 직접 나섰다는 건 뭔가 대단한 계획이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

   사공혜미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서 설명하니 곽무헌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래야 총군사답지, 이럴 때일수록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해야 해. 그래야 실수를 줄일 수 있고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법이야." 곽무헌은 사공혜미가 냉정을 되찾자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궁세가가 무슨 목적으로 무림맹 총회에 참석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미 흐름은 우리 쪽에 있으니 그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곽무헌이 자신감을 드러내자 사공혜미의 표정이 밝아졌다.

  "학산과 소림이 결정을 내렸군요." 들뜬 사공혜미를 보며 곽무헌은 씨익 웃어 보였다.

  "화산과 소림, 무당, 개방 거기에 청성파도 내 쪽에 서기로 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나 했더니 곽무헌이 물밑 작업을 제법 잘 해낸 것이다. 더구나 청성파까지 끌어 들였 다니 대단한 성과였다. 

  "그렇다면 저쪽은 아미, 곤륜, 하북팽가, 점창, 형산, 종남, 공동파로 압축이 되는군요." 사공혜미가 세력을 가늠하며 힘의 균등을 점치자 곽무헌이 이를 갈았다.

  "아니, 하나 더 보태야겠지 남궁세가!" 지난날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나는 곽무헌을 보며 사공 혜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죠!"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사공혜미를 보며 곽무헌은 필승 을 다짐하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이것으로 오 할 이상의 승부를 점칠 수 있게 되었다.

  남궁가 놈들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이 판은 우리가 짜 놓은 장기판이니 놈들도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게야. 암!" 곽무헌은 지나치게 자신감으로 뭉쳐 있었다. 물론 대업을 이루는 데 자신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지나쳐도 걱정이었다. 송현이 보기에 곽무헌과 사공혜미의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더 불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뭘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송현은 두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을 감추고 애써 웃어 보였다. 세 사람은 내일 다가올 무림맹 총화에서 대업을 성공시키리라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졌다. 그렇게 잠 못 드는 길고 긴 밤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각자의 사연을 간직한 밤도 고개를 내미는 아침 햇살에 조용히 물러가고 새 아침이 밝았다. 다른 날과 달리 십 년 만에 벌어지는 무림맹 총회로 새벽부터 무림맹은 소란스럽게 시작했다.

  식객들이 늘어났으니 주방은 이른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고 허드렛일을 하는 잡인들도 맹 내를 깨끗이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분주한 맹의 분위기와 달 리 각 문파의 거처는 긴장감이 흘러넘쳤다.

  주방의 숙수들이 정성 들여 아침 식사를 준비한 보람도 없이 아무도 음식을 들지 않아 새벽부터 고생을 한주방 일꾼들의 볼멘소리를 뒤로 하고 총회를 알리는 종소리에 죽은 듯이 조용하던 각 처소는 비로소 침묵을 깨고 나왔다.  

  비선당! 무림정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모인 십 인의 명숙들에 의해 무림맹이 탄생했음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각 에는 세월이 흘러 그때의 숭고했던 명분 따위는 잊어버린 후예들이 눈빛을 번뜩이며 가슴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숨죽이며 들어섰다 각자가 자리에 위치한 후 상석의 태사의에서 몸을 뗀 곽무헌이 포권지례의 자세로 사방위에 고했다.  "여러 무림 동도들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맹주는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만면에 미소를 띠운 곽무헌은 뒷짐을 진 채 아래로 내려섰다. 단상에 자리한 무림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냉랭하여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이들은 없었다.

  불원천리 마다하고 단숨에 달려온 이유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이들의 눈길은 오로지 곽무헌의 입을 보고 있었다. 비선당에 흐르는 묘한 기류가 마음에 들었는지 곽무헌은 내심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곽무헌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저 자식이!' 곽무헌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앞으로 뻗을 뻔했다. 손끝이 저릿하게 지려 오는 걸 애써 참아 낸 곽무헌의 흰 자위로 붉게 핏발이 섰다.

  '이유가 뭐냐? 남궁연!' 곽무헌이 노려보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이는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연이었다. 근자에 들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그가 불현듯 문림맹에 나타난 것이 곽무헌은 못내 불쾌했다.

  '뭐야? 이 내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는 건가? 자신이 지나치게 남궁연을 의식하고 있음을 깨달은 곽무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해묵은 감정으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세운 계획에 남궁연이라는 존재가 불안 요소가 되어 차질을 빚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공혜미와 송현에게는 그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그는 적잖이 남궁연을 의식하고 있던 것이다.

  '아냐, 아냐 그렇지 않아. 모든 계획은 완벽하다 제 놈이 아무리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이번 일은 내 뜻대로 될 것이다.' 한기를 내뿜는 눈길을 거두고 남궁연에게서 시선을 돌린 곽무헌은 예의 다시 미소 가득한 얼굴로 군웅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청했다.

  "응?곽가 놈이 변했구나!" 팔짱을 낀 채 침묵하고 있던 남궁연이 다소 놀란듯이 입을 떼자 남궁성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놀랄 일은 남궁연의 탄성이 아니라 너무나 달라진 남궁성현의 모습 이었다.

  여인네들의 방심을 흔들어 놓았던 수려한 외모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살수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튀어 나온 광대뼈와 그로 인해 두드려져 보이는 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들 정도로 험악했다. 

  "소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남궁성현의 음성에 남궁연은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곽가 놈에 대해서 잘 알 리가 없으니 당연 한 말이겠지. 내가 아는 곽가라면 나를 본 순간 주먹부터 휘둘렀어야 한다. 물론 내심 그걸 원했던 것도 사실이다."

   남궁연은 비선당을 한바탕 뒤집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어젯밤 정인사태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오늘의 무림총회를 엉망으로 만들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같은 성정을 가진 곽무헌이 의연하게 대처하니 그로서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쉽지 않을 거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남궁성현의 말에 곽무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팔짱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이름만 대면 아는 쟁쟁한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는 남궁연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좋은 물건들을 상하지 않게 얻으려 했건만, 세상일이 란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라 이 말인가?“ 

  씁쓸하게 혀를 차는 남궁연 뒤로 뺨에 큰 상처가 있는 사내가 조용히 다가와 귀엣말을 속삭였다. 남궁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나타날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모두 준비가 된 모양이군요." 남궁성현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남궁연은 대답 대신 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미련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으로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가 아쉬운 판국에 저 미련한 놈이 머리를 굴린 답시고 꾀를 내는 바람에 나만 곤란해졌어." 눈살을 찌푸린 남궁연이 군웅들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입맛을 다시자 보다 못한 남궁성현이 입을 열었다.

  "요즘 황궁에 흐르는 공기가 미료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희의 뒷배였던 오광효 대인이 예전만 못합니다."

  남궁성현의 걱정거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남궁연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만 못하다?“

  여유가 넘치는 미소에 남궁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린 나이지만 간계가 뛰어난 모사꾼이었다. 특히나 무림 맹의 뇌옥에 투옥되고 숙부인 남궁휘의 죽음을 목도한 다음부터는 남궁성현은 더욱 치밀한 성격으로 변했다.

  두 번 다시 실수 따위로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진중한 음성으로 남궁연의 마음을 돌리려는 듯 간청했다.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선수를 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가의 전력을 황궁 쪽에 집중해야 합니다."

  남궁성현의 간언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궁연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팔짱을 다시 끼었다. 굳게 다문 입술에 서 완고해 보이는 그의 고집이 묻어 나왔다.

  "좋다! 아깝기는 하지만 후환을 남겨 둔 채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남궁연이 자신의 간청을 받아들이자 남궁성현은 크게 안도했다. 곽무헌의 열변을 토하는 것을 지켜보던 남궁성 현은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버지 말씀대로 아깝기는 하군." 아버지 남궁연보다 더 탐욕스러운 눈길로 비선당 안의 군웅들을 훑어보던 남궁성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상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두 손을 들어 빈손을 들여다본 남궁성현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움켜쥐려는 듯 아귀를 쥐었다 풀었다 해 보였다. 그걸 바라보는 두 눈에는 이글거리는 욕망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이 손에 천하가 들어온다.....‘

   순간, 남궁성현의 입가에 소름끼치는 무서운 미소가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남궁연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군웅들을 향해 열변을 토하는 곽무헌을 향해 무의미한 시선을 던졌다.

  탕!

  곽무헌이 사천당문에서 일어난 참극에 대하여 요목조목 따져 가며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자 이를 참지 못한 아미파의 정인사태가 탁자를 내리쳤다.

  “맹주는 지금 무림 동도들을 모아 놓고 희롱하시는 겁니까?”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곽무헌을 비난하는 정인사태의 언사는 거침이 없었다. 곽무헌의 설명과 전혀 다른 내용을 쏟아내는 정인사태의 무례한 태도에 몇몇 무림인 사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일부러 헛기침을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곽무헌의 말에 신빙성이 없다며 더 이상 얕은 속임수를 쓰지 말라고 격하게 반응했다.  거기에 그녀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문파들의 기세가 보태어지니 곽무헌에게 가해지는 무언의 압력이 상당했다. 

  정인사태가 언성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비선당의 기류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정인사태와 뜻을 같이하는 무리였고 또 다른 하나는 사태의 추이를 살피며 안위하는 나머지 무리들이었다. 물론 그 중심에 곽무헌이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정인사태가 하는 일을 묵묵히 지켜보던 곽무헌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곽무헌의 얼굴에는 슬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곽무헌의 슬픔이 진실되게 비춰졌다. 물론 정인사태에게는 그 모든 것이 연기로만 보였다.

  "정인사태,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요? 많은 이들이 죽었소. 제아무리 당문이 조정에 큰 잘못을 저지르고 봉문을 하였다고 하지만 무림맹의 한 축이었고 본인과는 특별한 친분이 있는 곳이었소. 내가 설마하니 친인들의 죽음을 욕되게 하고 있단 뜻이오." 괄괄한 성격의 곽무헌답지 않게 진중한 태도에 정인사태는 크게 당황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평소의 곽무헌이 라면 상소리도 서슴지 않고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퍼부을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곽무헌은 침중하고 진중했으며 위엄을 잃지 않았다. 이건 무척이나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일이 흘러간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그 녀와 그년의 조력자들이 결코 원하는 흐름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곽무헌의 마음을 분동시켜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게 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맹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죄를 물어서 곽무헌에게서 듣고 싶은 비밀을 듣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고문을 가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려면 곽무헌을 무림의 공적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 구실로 사천당문에서의 보여 준 곽무헌의 미심쩍인 행동들이 제격이었고 정인사태는 이 모든 일을 계획하며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더니 일은 사람이 꾸며도 결과는 하늘에 달렸다는 말처럼 비선 당에서의 무림맹 총회는 그녀의 기대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닥쳐요! 어디서 그런 가증스러운 연기를 배웠는지 몰라도 맹주 그대는 천산에서 벌어진 괴사와 당문을 멸문시킨 흥수 즉 그 괴수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숨겼소. 더구나.... 그녀는 숨겨 두었던 비밀을 어렵게 꺼내어 놓는 얼굴로 입술을 잠시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표독스러운 눈으로 곽무헌을 노려보았다.

  "소림사에서의 악몽을 다시 끄집어냈어요!" 그녀가 소림사의 악몽이라는 말을 꺼내자 장내는 순식 간에 요동쳤다. 몇몇 원로 인사들은 어찌나 놀랐는지 체면도 잊어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까지 했다. 공공연한 금기로 정해졌던 과거의 비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기 주저했던 강호의 부끄러운 치부였다.

  "이.... 이것이 무슨 해괴한 소리오, 맹주?"

  십수 년 만에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녹옹 방선태가 눈초리를 떨며 곽무헌을 바라보았다.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 이얼지만 녹안의 눈동자는 소름 돋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과거 강호를 피에 젖게 만들었던 효웅답게 여전히 존재감이 대단했다.

  곽무헌이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녹옹 방선태의 눈초리가 치켜올라갔다. 그의 주변이 살기가 폭증되는 것이 느껴지자 근처에 있던 군웅들이 견디지 못하고 분분히 자리를 피했다.

  "설마하니 그 마서가 또 강호에 나왔다는 뜻이냐고 물었소이다, 맹주!" 파지직! 녹옹 방선태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탁자가 부서졌다. 녹옹 방선태의 입에서 마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일시에 장내 분위기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그저 사태를 관망하던 무리들조차도 격하게 반응했다.  삼십 년 전 소림사에서 벌어진 참극은 무림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수많은 영웅들과 기재들이 그 책의 마수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숨을 거둔 것이 모두 그들의 스승이거나 혈육들이었던 것이다. 친인을 제 손으로 죽여야 했던 기억은 오랜 시간이 흘렸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녹옹 방선태의 분노가 전염병처럼 비선당안으로 퍼져 나갔다. 분노와 탐욕이 어우러져 진득하게 끈적거렸다.

  이제 곽무헌은 철저히 홀로 되었다고 판단한 정인사태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남은 일은 곽무헌을 맹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무공을 폐하여 자신의 수중에 넣는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을 비선당에 자리한 군웅들이 대신 해 줄 거라고 생각하니 그동안 곽무헌에게 쌓였던 앙금들 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했다.

  정인사태의 사갈처럼 빛나는 눈이 곽무헌을 찾았다. 그러자 비선당의 단 아래 서 있는 곽무헌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훗! 언제나 그리 자신만만하더니 꼴좋구나!' 늘 가슴 한 언저리에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응어리진 한이 긴 세월을 돌아 오늘에서야 사라지게 되었다고 여겼는지 그녀의 얼굴에 차디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호호호, 어때요 스승님. 당신이 천재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그래서 당신 제자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곽가가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지 지켜보세요. 그녀의 눈에서 불타오르는 증오의 불길이 이번에는 비선당의 반대편을 노려보았다. 그 자리에는 남궁세가의 가 주 남궁연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네놈도 이제 머지않았어. 곧 네 놈도 내 발아래 엎드려 빌게 만들어 주겠다. 

 정인사태의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남궁연은 이번 일과 무관한 사람처럼 비선당의 군웅들과 동떨어진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낀 남궁연이 고개를 들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정인사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큭!" 

  남궁연은 얼굴을 따갑게 만든 기운의 정체가 정인사태 라는 것을 알게 되자 쓰게 웃고 말았다.

  '저 계집이 아직도 나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나? 하긴, 제 사부 앞에서 쾌나 골려 주긴 했었군.‘

  남궁연은 잠시 과거의 한 장소에서 벌어졌던 즐거운 유희를 떠올리고는 남궁세가와 아미파의 악연이 세대를 거치면서 몇 번씩 있었음을 상기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남궁세가와 미파의 전전대 가주와 장문인들의 사소한 약속에서 시작 한 비무 때문이었다.

  우연한 술자리에서 나온 농담에 수대에 걸쳐 남궁세가 와 아미파의 후지기수들이 매년이 강남에 모여서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호중지화라는 행사가 벌어졌다.

  두 문파의 우의를 다지고 화합을 도모하던 이 행사가 피로 얼룩지게 된 것은 남궁연과 정인사태가 십팔 세의 나이로 참가한 그날이었다.

  겨우 열여덟의 나이에 호중지화에 처음 참가한 남궁연은 당연 군계일학이었고 그의 호승심은 하늘에 닿아 있었다.

  어느덧 무림의 큰 잔치가 된 호중지화에는 많은 무림의 명숙들이 흐뭇한 눈길로 어린 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남궁연의 투지를 더욱 불태웠고 많은 형제들 가운데 살아남아야 하는 남궁세가의 생리를 잘 알고 있는 남궁연이기에 그는 호중지화를 통해서 세가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고 하였다.

  그러니 자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어깨에 들어간 힘은 고스란히 남궁연의 검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예년과 다름없이 시작된 호중지화는 남궁연 이라는 희대의 효웅에 의해서 피로 얼룩지게 되었다. 더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남궁연은 상대가 아미파의 여제자들이라는 것을 잊었는지 마치 사파의 무리를 상대하듯 검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 어린 정인사태는 속살을 보이는 치욕을 겪었고 그녀의 사매는 두 번 다시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악연!

 그 후로 남궁세가와 아미파가 양립할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남궁연의 욕망이 수그러들지 않았기에 남궁세가는 무림에 많은 적을 만들게 되었다. 세가의 원로들은 걱정했지만 남궁연의 능력으로 세가가 번창하기에 그 고민은 크지 않았다.

  잠시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본 남궁연은 픽식 웃음을 터트렸다.

  "큭! 그래도 그때는 봐 줄만 했는데 지금은 악만 남은 노파가 되어 버렸어!" 남궁연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정인사태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리 는 정인사태의 냉랭한 태도에 남궁연은 입맛을 다셨다.

  "저년은 꼭 내 손으로 처리를 해야겠구나. 그때 못했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성현아 저년도 목록에 넣거라!" 장난스러운 남궁연의 말에 남궁성현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아미파의 여제자들이라면 좋은 실험이 될 것입니다." 아들 남궁성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궁연도 껄껄껄 소리를 내어 웃었다. 양 무릎 위에 손을 올린 남궁연은 심각한 비선당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 바람에 곽무헌의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 나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군웅들이 잡아막을 듯이 다그치는 가운데에서도 오연 하게 서 있던 곽무헌의 손을 들었다. 웅성거리던 비선당 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여러 무림 동도 여러분, 저 곽무헌입니다. 일자무식 사고뭉치이지만 지금까지 남을 속이는 비열한 짓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소이다!" 내공이 실린 음성이 비선당을 울리자 이성을 잃고 흥분 했던 군웅들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의 주장대로 곽무헌은 지난날의 강호행에서 그런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가 입으로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인사태가 분동시키는 바람에 잠시 이성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정인사태가 거짓을 논할 리가 없지 않소이까?“ 

  점창파의 장문인 염오랑이 걸쭉한 음성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그녀를 지지하는 문파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분위기가 반전되는 것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비선당의 기류가 둘로 나뉘어 팽팽하게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이때 정인사태가 쐐기를 박겠다는 심산으로 나섰다.

  "모든 일에는 증거가 있는 법!"

 정인사태가의 손짓에 혜인사태가 제자들과 함께 들것을 들고 나타났다. 들것은 천으로 덮여 있어서 군웅들에 게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정인사태는 곽무헌 앞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군웅들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정인군자인 척 강호를 속여 온 곽무헌 맹주의 실체를 밝히겠소." 들것을 덮고 있던 천의 한 자락을 힘껏 잡아당기자 실로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내 는 일시에 소란스럽게 변했다. 장탄식하는 소리와 경악성으로 가득 찬 비선당의 모든 이목이 곽무헌을 향했다.

  "이것은 멸문지화를 당한 사천당문의 비역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왜, 곽무헌 맹주는 비밀리에 봉문한 당문에서 이것을 없애려 했을까요?“

 정인사태는 맹주가 무림맹에 알리지 않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한 것이 내막이 있다는 쪽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당문에서 찾아낸 여러 가지 증거들을 내놓으며 강호를 손아귀에 쥐려는 곽무헌의 그럴듯한 음모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지지하는 문파 들이 곽무헌을 규탄했다 비선당은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에 사로잡혔다. 정인사 태를 지지하는 무리들은 당장에라도 검을 꺼내 들고 곽무헌의 무공을 폐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무림인들처럼 위험한 존재들이 없기에 비선당은 일촉즉 발의 위기 속에 놓여 있었다.

  "아미타불!" 정순한 내공이 실린 웅후한 독경 소리에 비선당의 뜨거운 열기가 찬바람에 식듯 가라앉았다. 장내로 들어온 노승을 발견한 군웅들은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팔자걸음으로 장삼을 휘적거리며 들어선 노승이 비선당의 군웅들을 훑어보더니 혀를 찼다.

  "쯧쯧쯧, 벌써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노물들이 뭐 먹을 게 있다고 이리도 많이 자리했노?“ 승복과 어울리지 않는 거침없는 언사에도 누구 하나 감히 반박하고 나서지 못했다. 심지어 녹옹 방선태마저도 주먹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기는 했지 노승을 향해 불편 한 심정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인사태는 오히려 노승을 보고 반가워했다.

  "효선대사님을 뵙습니다." 정인사태가 공손하게 포권지례를 올리자 효선대사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당문에서와 너무나 다른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효선대사는 손을 내저었다.

  "허허, 이거야 원 전에는 잡아먹을 듯이 굴더니 오늘은 마치 기방의 기녀처럼 나긋나긋하니 내가 술이 덜 깼나?“ 머리카락 하나 없는 민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린 효선대사는 영 마뜩잖아 했다. 그러나 효선대사가 그러거나 말 거나 정인사태는 군웅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시는 효선대사님 역시 당시 당문의 비역에 계셨습니다." 정인사태의 충격적인 발언에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그녀의 발언은 자칫 위험한 수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것은 소림사가 이 일에 관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낳기 때문이었다. 일시에 군웅들이 시선을 받은 공지대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난색을 표하기에 바빴다.

  공지대사는 이런 자리에는 익숙하지 않기에 군웅들을 상대하는데 노련하지 못했다.

  정인사태는 공지대사가 소림의 대표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그를 몰아부칠 계획이었다. 더구나 효선대사의 출현은 그녀에게 더욱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공지대사와 효선대가 무공이 고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무공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서로 물고 뜯어 허물을 캐내는 자리에서는 그녀가 그들보다 한 수 위 였다.

  자신감으로 가득해진 정인사태는 거침없이 효선대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효선대사님, 당문의 비역에서 공지대사와 소림의 십팔나한이 괴수들에게 죽거나 다친 일이 있습니까?“

 자신의 입을 통해서 증명을 받으려는 속셈임을 눈치 챈 효선대사는 곽무헌을 도와주려고 난입한 것이 오히려 해 가 되었음을 깨닫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것이... 그러니까... 제대로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효선대사를 보고 정인사태는 미소를 지었다.

  "소림의 원로이자 무림의 선배로서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정인사태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지 않자 효선대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끄응! 그래 그랬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정인사태는 더 이상 효선대사를 상대하지 않고 공지대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공지대사와 숨결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공지대사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자, 공지대사님, 당시에 당문의 비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지요. 설마하니 불제자께 서 거짓을 말하지는 않으시겠죠?"

 정인사태는 공지대사가 무공의 고수이기 전에 불심이 깊은 승려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승복을 입은 승려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큰 불경이었다.

  공지대사가 좌불안석이 되어 곽무헌의 눈치를 살폈지만 곽무헌은 어찌 된 영문인지 그저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찌 보면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공지대사를 정인사태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몰아붙였다.

  계속해서 부정하는 공지대사의 눈앞에 당시 당문에서 끔찍하게 변해 버린 십팔나한의 시신을 들이밀었다. 미처 수습하지 못하거나 소멸되었다고 여겼던 제자들이 흉측 하게 변한 모습에 공지대사는 연신 불호를 외우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계속되는 추궁에 공지대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당시의 정황을 틸어놓았다. 그에 따라 비선당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구마강시의 출현과 괴수의 놀라운 능력에 소림사에서의 비극을 눈으로 직접 본 나이 많은 강호인들과 각파의 장문인들은 마서를 외쳐 댔다.

  이제 더 이상 곽무헌에게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정인사태에게는 아직도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공지대사의 손을 다정하게 잡은 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물었다.

  "공지대사, 그 괴수의 정체를 군웅들에게 알려 줄 수 있겠소?“

 뜻밖의 물음에 공지대사의 표정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그것은.... 공지대사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모든 것을 체념한 공지대사는 눈을 질끈 감고 염주 알을 굴렸다.

  "괴수는... 자군사 위공이었소이다."

  맥없이 흘러나온 공지대사의 말에 효선대사도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고 군웅들은 너무나 경악하여 아무 소리 도 내지 못했다.

  이에 가장 분노한 것은 녹옹 방선태였다. 그는 당시 소림 참극에서 아내를 잃었다. 그의 녹장이 당장에라도 출수할 듯이 보였다.  

  그때 내내 감고 있던 곽무헌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눈빛이 어찌나 사납던지 녹옹 방선태가 주춤거릴 정도였다.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군웅들을 훑어본 다음 믿지 못 할 행동을 했다.

  "으하하하하하!"

 언뜻 보기에 미쳐서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지만 곽무헌이 웃음을 뚝 그치자 장내는 일순 침묵했다. 손을 들어 손뼉을 치자 조용한 비선당에는 곽무헌의 박수 소리만 들렸다.

  "멋진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소이다. 정인사태, 그대에게 한 가지 묻겠소이다. 무고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이까?“

   곽무헌이 말하는 무고죄라는 것은 보통의 경우 별일이 아니지만 무림맹에서 말하는 무고죄라는 것은 아주 큰일 이었다.

  자칫 문파가 봉문에 처할 수도 있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다. 문파와 문파 간에 분란의 소지이기도 하기에 강력한 제재가 뒤따랐다.

  곽무헌이 무림맹주의 위치에 있으므로 따지고 보면 정인사태는 무림맹의 맹주를 탄핵하는 입장이기에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 어떤 식으로든 아미파와 정인사태는 책임을 져야만 했다.  

  '도대체 뭐지 저 자신감은?‘

  그녀는 가슴 한편에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떨쳐 내며 오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절대로, 절대로 이 승부에서는 자신이 이긴다는 자신감으로 다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곽무헌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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