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교각살우
교각살우 :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인다는 말로 고치려다 수단이 지나쳐서 도리어 일을 크게 그르침을 의미 한다
두 남녀가 지붕 위에 앉아 노을이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러나 여인의 입에서 흘러 나온 한숨 소리에는 세상 온갖 근심이 다 담겨 있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여인의 턱을 당기니 언제 그랬나 싶게 화사한 미소로 반긴다.
"무슨 근심이 그리 많은 게요?“
정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음인지 여인은 고개를 저을 뿐 달리 대답이 없었다.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알고 싶었지만 더 이상 묻는다면 그것 역시 상처가 될까 사내는 궁금함을 가슴에 묻고 입을 다물었다.
발치 아래 동네 아이들이 막대기를 들고 무공 고수를 흉내 내며 깔깔거리는 모양새를 보고 사내가 미소를 짓더니 벌떡 일어섰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사내가 검을 들어 처마 끝에 섰다.
갑작스런 사내의 행동에 여인은 의아한 눈길을 보냈고 그런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인 사내는 화려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격렬하면서도 여리고 얼핏 부드러워 보이지만 이내 매서운 돌풍처럼 몰아치는 춤사위를 보는 여인의 눈에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것은 송현이 사천성 입구에서 곽무헌의 슬픈 춤사위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일어 함께 춤을 추다가 만들어 낸 정인검법이었다.
검무가 표현하는 슬픔과 고독함을 온몸으로 느낀 서희도 복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다.
진한 외로움이 묻어나오던 송현의 춤사위에 서희의 춤이 더해지자 그 슬픔은 더 배가 되었다. 분명히 두 남녀가 한데 어우러져 정을 나누는 아름다운춤사위인데 어째서 이토록 보는 이의 목이 메도록 슬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송현의 입에서 슬픈 송가가 흘러나오자 정인검은 더욱 처연해졌다.
무가, 그 묘함을 관하고자 한다거나 늘 같은 유가 그 요함을 관하고자 한다.
빙글빙글 돌며 서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 들어가 검무는 그 자체로 완벽해 보였다.
곽무헌과 함께 했던 정인검과 지금의 정인검은 또 달랐다. 지금 두 사람이 펼치는 정인검이야말로 곽무헌이 의도했던 검무의 완성작이었다.
격렬한 춤사위가 끝이 나자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진 듯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뜨거운 눈길에 서희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정인검이라고 이름을 붙였소." 송현의 부드러운 음성에 고개를 든 서희는 고개를 끄덕 였다. "정인검? 두 개의 검이 애타게 서로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마치... 마치... 서희는 격앙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음성이 커졌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서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송현은 짓궂은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마치?...“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송현의 눈은 더없이 깊고 그윽했다.
"아니에요."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린 서희는 검을 들어 정인검의 못다 한 춤을 추었다. 송현도 말보다는 그녀와의 교감을 나누는 지금의 시간에 충실했다.
송현과 서희의 정인검 수련은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눈빛이 더 나은 법이었다. 그러나 송현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느껴지는 그녀 때문에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불안한 감정이 정인검을 수련하는 동안 고스란히 송현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그녀를 두렵게 만드는 걸까? 왜 내게 말하지 못하는 거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송현은 그저 입술을 깨물고 그 녀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송현이 서희를 데리고 무작정 떠나온 지 벌써 십여 일이 흘렀다. 그동안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다니 며 못다 한 정을 나누었다.
떨어져 있던 기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두 사람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며 항상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야기했다. 정인검을 수련하는 시간을 빼면 두 사람의 손은 언제나 붙어 있었다.
그렇게 열 번째 달이 뜨던 밤 서희는 조심스럽게 떨어 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가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정감 어린 서희의 물음에 송현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더 살리고 있었다.
"괜찮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대가 제일 중요하오." 그녀의 가녀린 몸이 떨고 있음을 느낀 송현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것이 두려움이나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걸 미처 몰랐던 송현은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걱정이 되었다.
"너무 심려하지 마오. 내 자리를 잠시 비웠다고 해서 큰일이 벌어지진 않을 테니." 안심하라며 등을 쓸어 주는 송현의 손길에 몸을 내맡긴 서희는 영원히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 하게 한숨을 흘린 뒤 송현을 향해 흔들리는 눈망울을 던졌다.
"가가, 약속 하나만 해 주세요." 입술을 꼬옥 물고 있는 서희의 모습이 왜나 결연해 보 여 송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마음을 다스리는 듯 보였다. 이내 감았던 눈을 뜬 서희는 송현에게 다짐을 받으려 했다.
"후일, 제가 가가의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 것이 제 본심이 아님을 기억해 주세요." 어떻게 보면 필사적으로 보이는 애원이었다. 너무나 절실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으로 인해 송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현이 승낙하자 비로소 얼굴에 미소를 띤 서희는 송현의 품에 뛰어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송현은 그 기회를 잃고 말았다.
사실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송현은 답답했지만 그저 그녀의 등을 다독이기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설마, 또 떠나려는 건가?' 떨리는 송현의 음성에 보조라도 맞추려는 듯 서희의 가녀린 몸이 파르르 떨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또다시 이별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송현의 억센 팔이 떠나지 못하도록 하려는 듯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인 줄 알지만 송현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라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힘으로 어쩌지 못한다는 것은 송현도 잘 알고 있기에 이내 손에서 힘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가야만 하는 거겠지...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것이 아니었기에 송현의 혼잣말이 되어 버렸다. 잠시 비를 피해 날아들었던 제비처럼 서희는 또다시 송현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밤이 영영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사람의 입맞춤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또한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의 밤은 뜨겁게 불 타올랐다.
뿌연 흙먼지를 뒤집어쓴 영호인이 태평문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말고삐를 내던지다시피 황급히 안으로 뛰어든 영호인은 인사도 받지 않고 내당을 향했다.
콰당!
문이 부서져라 밀치고 들어온 영호인이 찾은 것은 송현이 아니라 게슴츠레 놀란 눈을 뜬 왕백이었다. 졸고 있던 왕백은 느닷없이 뛰어든 영호인 때문에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아이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왕백을 무시하고 영호인은 내당에 송현이 없음을 확인하고 허탈해 했다.
"장문인은 어디에 있느냐?“ 다짜고짜 다그치자 영호인의 기세에 질려 버린 왕백이 떠듬거리며 아는 것을 말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곽무헌 맹주님의 부름을 받고 무림 맹으로 떠났습니다."
"무림맹?“
영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왕백은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무림맹에서 아주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서둘러 떠났다는 말이냐? 재차 확인하는 영호인에게 왕백은 자신이 엿들은 사공 혜미와 송현의 대화를 재차 들려주었다. "무림의 운명을 뒤바꿀 중차대한 일이라고? 설마 벌써 일을 저지른 건가?' 얼굴이 창백해진 영호인은 얼이 빠진 왕백을 홀로 두고 밖으로 향했다.
엄습하는 불길한 예상이 맞지 않기를 바라며 항주의 번화가를 향해 다시 말을 내달렸다. 심하게 투레질하며 더 이상 달리기를 거부하는 말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는 영호인의 표정에는 냉랭한 한기가 가득했다. 이윽고 항주의 대저택들이 들어선 오주가에 다다르자 익숙하게 길을 찾아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그대들은 예서 기다리시게!" 황궁에서부터 따라온 동창의 고수들에게 밖에서 기다 릴 것을 명하자 별로 말이 없는 그들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영호인은 그들을 잠시 살핀 뒤 대저택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건물로 숨어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영호인은 지체하지 않고 위층으로 향했다. 인기척이 들리자 날카로운 살기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러나 이내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이들은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막여위!"
단숨에 이 층 누각으로 뛰어오른 영호인을 막여위가 반갑게 맞이했다.
영호인이 말도 없이 사라졌기에 그동안 이만저만 걱정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호인은 안부를 묻는 막여위의 입을 막았다.
"놈들이 움직였는가?"
대뜸 가타부타 질문을 쏟아 내는 영호인에게 막여위는 인상을 쓰면서도 대답을 해 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요 근래 사람과 짐들이 많이 오고 갔네. 또 어제는 짐마차 열 대분이 저택을 빠져나갔지 아마?" 막여위가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거리자 영호인은 장탄식을 했다.
"그걸 지켜만 보고 있었나?" 영호인이 따지듯 쏘아붙이자 막여위는 답답해 했다.
"자네가 절대로 나서지 말고 지켜만 보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끙!"
막여위의 성질에 영호인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자신이 그렇게 명령을 내렸으니 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빨리 움직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놈들이 오광효의 변심을 눈치 챘나?
마음이 급해진 영호인은 책상 위에 적힌 일지를 재빨리 살폈다. 그동안 감시해 오던 저택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한 달간의 일지를 훑어 내리던 영호인의 표정이 마지막 책장에서 무섭게 변했다.
"그녀가 그녀가... 돌아왔어?"
무섭게 변한 영호인의 표정을 보며 막여위 역시 쓰게 웃었다.
"이틀 전에 돌아왔네. 그리곤· "그리곤?“
왠지 불길한 막여위의 말투에 영호인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어제 떠난 마차 편에 함께 떠났네."
와락!
막여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호인의 손 안에 있던 일지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던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찢겨져 나갔다.
"아뿔싸!"
그 자리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영호인에게 달려온 막여위는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며 다그쳤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기에 냉정한 자네가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겐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해 있는 영호인을 잡아 흔드는 막여위는 조바심이 났다. 냉철한 영호인이 이럴 때는 큰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자신들이 저 저택을 감시해 온 것이 벌써 이 년여가 다 되어 간다. 그리고 그 이유는......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막여위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맙소사! 그럼 설마하니?' 영호인 곁에 주저앉은 막여위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자 영호인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 막아야 해!" 막여위가 악을 썼지만 영호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제 떠났다면 이미 그곳은 지옥이 되어 있을 거야!" 곧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영호인의 눈을 외면한 막여위가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빌어먹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니, 지금까지 노력이 헛수고가 되었어 !" 막여위가 울분을 토하자 영호인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의 눈에서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오자 막여위도 입술을 깨물었다.
"가자!" 영호인의 음성에 서린 분노를 느낀 막여위도 이를 갈았다.
"이미 늦었다면 친구의 복수라도 해 주어야지!" 두 사람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수많은 그림자들이 그들을 따라 나섰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창의 고수 두 명은 분위기가 급변한 영호인의 기색에 긴장했다.
"동창의 창위대를 부르시오." 영호인의 나직한 음성에 그들은 화들짝 놀랐다.
"창위대를 부르라면?“
창위대라 하면 동창의 무력 중 오할을 차지하는 강력 한 힘이다.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된 일은 단 하나 이므로 그들은 영호인을 향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찾으셨소?“ 영호인은 대답 대신 소름 돋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오 대인께서는 편히 주무실 수 있게 될 거요." 둘 중 하나가 품에서 대나무 통을 꺼내더니 끝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펑! 대나무 통에서 튀어나온 불꽃은 꼬리를 만들며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밤하늘을 수놓았다.
"양명에게도 사람을 보냈네. 태평문에서도 사람들을 보내올 거야." 막여위가 진득한 살기를 드러내며 콧바람을 내쉬자 영호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송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놈들은 지옥을 보게 될 거야." 거칠게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잠시 숨을 돌렸던 말들은 쉴 사이 없이 무림맹을 향해 질주해야만 했다.
소홍주의 향기기 진하게 묻어나는 무림맹이 오늘은 달콤한 소홍주 대신에 비릿한 금속내가 가득했다. 정문을 지키는 무림맹의 수신호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눈빛으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자에 들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무림맹을 찾은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대 무림의 내로라하는 명숙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무림맹의 분위기가 다른 때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팽배한 무림맹의 공기와 다르게 맹주의 집무실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맹주 곽무헌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탁자까지 두드려 가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앞에는 못마땅한 얼굴로 앉아 있는 송현이 한숨만 내쉬고 있었고 사공혜미는 딴청을 피우느라 애쓰고 있었다.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송현이 딴죽을 거느라 일부러 퉁명스럽게 굴었지만 곽무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곽무헌은 박장대소할 뿐이었다.
"끄응!"
결국 포기한 송현이 앓는 소리를 내니 곽무헌은 그제야 웃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도대체 뭐가 그리 못마땅한 게냐?' 곽무헌이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물어보자 송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림맹을 장악할 묘수가 있다고 해서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겨우 이런 방법이었습니까? 한심하다는 투로 나무라는 송현에게 곽무헌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린 곽무헌은 송현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콧김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송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낮에 윌 드신 겁니까?" 코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는 송현의 볼을 툭툭 건드린 곽무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놈아, 이것이 얼마나 고매하고 영악한 계략인지 아느냐? 팔대문파 놈들이 알게 되면 아마도 입에 게거품을 물고 기절할 것이다."
곽무헌은 자신의 계획이 자랑스러운지 아랫입술에 힘을 주며 턱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송현은 또다시 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정말 이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송현이 탁자 위에 놓은 두루마리를 가리키며 내심 못미 더워하자 곽무헌은 허리에 양손을 올려놓고 가슴을 폈다.
"아무렴, 이 천재 전략가 사공혜미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니 믿어도 된다."
딴청을 피우며 차를 홀짝거리던 사공혜미는 몸을 아예 벽을 향하게 만들었다.
"사공 군사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무모합니다."
송현이 두루마리를 들고 흔들며 이건 아니라고 역설하자 곽무헌은 또다시 손가락을 흔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틀림없이 성공한다. 사공 군사도 이것이 성공해야 자빠뜨리기 신공을 내게서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푸흡!
곽무헌의 입에서 자빠뜨리기 신공이라는 말이 나오자 사공혜미는 입 안에 있던 찻물을 모두 토해 냈다. 그리곤 사래가 들렸는지 한참을 '켁켁'거리더니 표독스러운 눈으로 곽무헌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곽무헌은 딴청을 부리며 헛기침만 연신 토했다.
지난번 헤어지기 전에는 그녀도 몰랐었는데 그사이 곽무헌에게 자빠뜨리기 신공에 대해서 뭔가 들은 것이 있나 보다. "그놈의 자빠뜨리기 신공이 뭐기에, 지난번부터 그것 가지고 난리십니까?' 송현이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푸념을 하자 곽무헌은 싱글벙글 거리며 입을 열려고 했다가 금세 표정이 변하며 입을 다물었다. 사공혜미의 싸늘한 눈빛이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흠! 흠! 뭐 구체적으로 알 것은 없고 다만 너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만 알아 두면 된다."
곽무헌이 저렇게 나을 때는 하늘이 두 쪽 나도 가르쳐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송현은 궁금함을 묻어 두어야만 했다.
그보다는 팔대문파의 장문인들이 모두 모인 지금, 곽무헌의 계획을 성공시키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야만 괴수를 만든 미지의 적들과 싸울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사공혜미의 짜 놓은 대로만 판이 움직여 준다면 팔대문파는 더 이상 곽무헌을 핍박하지 못할 테고 무림맹은 곽무헌의 발아래 놓이게 되니 송현으로서도 도와 야만 했다.
그래야만 태평문도 강호에서 입지를 세우게 되니 마다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서희가 떠나고 난 후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면 뭔가 집중할 만한 일이 필요했다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송현이 흔쾌히 받아들이자 곽무헌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었다. 합의를 보고 나자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계획에 틀어짐이 없는지 재차 확인을 했다.
내일 있을 무림맹 총회에서 단 하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밤이 새도록 의견을 나누었다. 그사이 팔대문파의 장문인들도 각기 나름의 이유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쾅!
녹색의 장포를 걸친 노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협탁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협탁 위에 놓인 꽃병이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다행히 바닥에 깔린 양탄자 덕분에 깨지지 않고 빙글빙글 회전했다. "도대체가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혜인사태는 수수방관하고 있었단 말이오?“ 녹색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삿대질을 해 대는 노인을 향해 정인사태는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지만 그뿐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그녀는 발끈하지도 않았고 그녀 특유의 거친 독설을 퍼붓지도 않고 그저 주먹을 보이지 않게 움켜 쥔 채 화를 삭이고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으므로 주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녀가 참고 있는 이유를 잘 알고 있는 혜인사태는 장문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팽 선배님, 아무리 화가 나신다지만 아미의 장문진인입니다. 예를 갖춰 주셨으면 합니다."
혜인사태가 정인사태의 위치를 각인시켜 주자 노인의 염소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초리가 격하게 위로 올라가자 혜인사태는 자신이 상대를 잘못 골랐음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 버러지 같은 계집년이 어딜 감히 함부로 나서는 게냐? 네년 말대로 이 자리는 각 문파의 장문인들이 담화를 나누는 자리거늘 어딜 늙은 암퇘지가 구린내 나는 입을 조잘대느냐?“
정말이지 입에 담기조차 민망스러운 욕설을 거침없이 토해 내는 녹색 장포의 노인에게 좌중의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연신 헛기침 소리가 실내를 울리자 노인의 염소수염이 다시 한 번 부르르 떨었다 "허, 이놈들 봐라! 그동안 내가 강호에 발걸음이 뜸했더니 안하무인이 되었구나!" 녹색 장포의 노인이 길길이 날뛰자 보다 못한 장년인이 손사래를 치며 달랬다.
"감히 누가 있어 하북팽가의 팽연호 선배님을 능멸하겠습니까, 다만......“
“다만, 다만 무엇이냐?”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팽연호를 향해 장년인이 읍소하듯 허리를 숙이고 포권지례를 올렸다.
"대선배께서 무림 후배들에게 좀 인정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들 원로에 지친 상태입니다. 게다가 현안이 보통 중차대한 일이 아니니 만큼 다들 신경들도 곤두선 상태이고 말입니다."
장년인은 달변가였다. 목소리가 낮고 그 깊이가 깊어 넓게 울리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심후한 내공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발걸음이 무거운 대신 몸은 가벼우니 내력이 상당한 자였다.
"흥! 당금 모용세가의 치세가 극에 달했다고 하더니 바 로 네 녀석 때문이렸다!"
팽연호의 사갈 같은 눈빛이 전신을 훑어 내리자 장년인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원, 팽 선배님도 너무 추켜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인 장년인이 현 모용세가를 대표하는 가주 묘용곽이었다. 현란한 권각술로 유명한 모용세가에서 백 년 만에 나온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대단한 기재였다. 하북팽가와 더불어 그 지역의 패권을 다투는 효웅이었다.
가벼운 손뼉 치는 소리가 주위를 환기시키며 향신들이 나 쓰는 관모를 쓴 노인이 어수선한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지금 우리가 그런 농지거리나 하자고 모인 것이 아니지 않소? 아미파의 혜인사태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요. 그것이 다시 강호에 나타났으니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오."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는 통에 좌중의 어수선했던 분위 기는 일신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좌중을 살핀 후 더욱 냉막한 음성으로 일갈했다.
"혜인사태의 말대로라면 소림과 화산은 이미 우리와 척을 졌다고 봐도 된다는 뜻이오. 그럼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다른 문파들 역시 우리와 뜻을 같이 하지 않거나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라는 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소?“
검은색의 관모와 뼈만 남은 냉막한 얼굴이 잘 어울리는 사내는 곤륜파의 장문인 허운장이었다. 그는 일절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오로지 실용적인 것만 강조하는 실속파였다. 오늘날 곤륜파가 급성장한 배경에는 그의 철두철미하고도 냉정한 경영이 있었다. 그의 곤륜검법 역시 군더더기 없는 실전 검법으로 강호에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허운장이 조목조목 일례를 들어 따지니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때 실내의 맨 구석에 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워낙에 존재감이 없어서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내가 내력을 끌어올리자 모두의 이목을 단숨에 받게 되었다.
그리곤 그를 알아본 이들의 입에서 다양한 반응이 흘러 나왔다. 특히나 아미의 정인사태는 그를 향해 이를 갈 정 도였다.
"여러 무림 동도를 이렇게 뵙게 되니 감개무량하오이다."
중저음 묵직한 음성이 실내를 흔들자 갑자기 좌중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자신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임에도 사내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고 모두를 향해 일일이 포권지례를 해 보였다.
"남 궁 연! 그대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거지?"
정인사태는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마치 어서 뽑아 달라고 울부짖는 것 같았다.
바로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남궁연을 향해서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는 아미파의 정인사태만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를 눈치 채는 순간 이미 곳곳에서 살기를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내력을 뿜어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궁연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실내의 공기는 곧이라도 터질듯 긴박감이 최고조에 달 했다.
"남궁연, 그대가 나설 자리가 아님을 알면서 나섰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겠지." 남궁세가와 적의가 없는 하북팽가의 팽연호가 비교적 이성적으로 행동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팽연호가 나서니 다른 이들이 함부로 하지 못했다. 좌중을 일별하며 무언의 시위를 한 팽연호가 남궁연을 향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뭔가 수작을 부려서 그대가 필요한 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면 그대가 직접 나설 정도로 급하다는 뜻인데...“
팽연호가 남궁연의 기색을 살피며 말꼬리를 흐리자 남궁연은 손사래를 치며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하하하! 과연 팽 선배님은 눈치가 빠르십니다. 이래서 연륜이라는 것을 무시하지 못하나 봅니다."
얼핏 들으면 하북팽가의 팽연호를 치켜세우는 듯했지만 자세히 살피면 늙은이가 주제를 모르고 나선다는 뜻도 되기에 그의 수염이 파르르 떨었다 "흥! 과연 근자에 들어 남궁세가의 위명이 천하를 떨친 다고 하더니 네놈의 그 주둥이도 안하무인이로구나!" 그의 녹색 장포가 바람도 없는 실내에서 마구 펄럭거리자 가까이 있던 무림인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팽연호의 장기이자 무림일절로 불리는 구룡장이 펼쳐 질 때 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남궁연도 감 히 무시하지 못하고 내력을 끌어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팽 선배께서는 노기를 거두고 제발 제 말을 들어 보시지요. 저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부탁이오!" 교만하고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남궁연으로서는 파격 적인 모습이었기에 짐짓 내력을 끌어올리던 팽연호도 잠시 기세를 멈추고 남궁연을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좋다, 무슨 수작인지 한번 들어 보기나 하자!" 팽연호가 살기를 풀자 남궁연은 비로소 얼굴에 화색이 돌며 예의 미소를 되찾았다. 그리곤 좌중을 향해 거침없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의 열변에 어느덧 좌중은 점점 빠져들었다. 그러나 몇몇 이들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워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연의 말에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말라?' 남궁연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팽연호가 턱수염을 쓰다 듬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남궁연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과연 곽무헌 맹주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거니와 그의 세 치 혀에 모두가 흥분한다면 오히려 더 큰 것을 놓치고 그에게 이용당하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남궁연의 논리정연한 주장에 좌중은 어느덧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미파의 정인사태만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닥쳐라! 곽무헌의 말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아미파의 정인사태가 반론을 제기하고 나서자 좌중의 관심은 이제 정인사태와 남궁연에게 쏠렸다.
"무슨 근거라도 있으신가요?' 자신의 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인사태를 향해 남궁 연은 느물거리는 미소로 딴죽을 걸었다. 그러나 그런 것 에 흥분하여 일을 그르칠 정인사태가 아니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소. 당문의 지하 공동구에서 벌어진 끔찍한 현장을 말이오." 당시 당문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태에 대해서 정인사태가 이야기하자 이내 좌중은 크게 술렁거렸다. 어느새 남궁세가의 남궁연이라는 존재는 흐릿해질 정도였다. 남궁세가와 악연을 맺고 있는 문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고수들은 당문에서 벌어진 비사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남궁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사태께서 보신 것이 과거 소림에서 일어난 그것과 같은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남궁연이 계속 정인사태를 몰아붙였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난 알 수 있다. 그 당시 그것에게 물린 적이 있기 때문에 난 괴수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어!" 아무도 몰랐던 비밀을 틸어놓자 좌중은 또다시 크게 술렁거렸다. 남궁연도 미처 몰랐던 일인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곤 눈동자를 굴리며 뭔가를 생각하려 하자 정인사태는 그를 밀치고 가운데로 나섰다. "여러 무림 동도 여러분, 다른 생각할 것 없습니다. 그것이 확실한 이상 내일 무림 총회에서 곽무헌 맹주를 끌어내리고 다시는 그 끔찍한 것이 강호에 나오지 못하도록 없애 버려야 합니다."
정인사태의 강경함에 남궁연은 어쩌지 못하고 입을 물어야 했다. 이미 좌중은 정인사태를 향해 환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연은 쓰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