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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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퇴양난(進退兩難)

-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럴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인역유언, 퇴곡(人亦有言, 退谷)라는 말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평생을 그리워하면서도 못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결코 원치 않는 이와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좌군사 위공과는 평생에 걸쳐 세 번을 만났다. 그리고 그 세 번째 만남은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 아무리 찾아 봐도 좌군사 위공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자 송현은 측은지심이 일었다. 진물이 흘러내리는 흉측한 모습에서 총명한 학사의 풍 채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어쩌면 한림원 학사로서 세상 에 이름을 떨칠 수도 있는 기재였다. 그의 말마따나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이 비운일지도 몰랐다.  

  "크르륵, 다 잘난 내 녀석 때문이지 왜 하늘은 나를 이 땅에 내려 보내고 너 또한 존재케 했는지 원망스러웠다. "좌군사 위공의 뒤틀린 언사에 송현은 그의 슬픈 운명이 자신의 탓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가 짊어진 짐일 뿐이다. 그걸 어떻게 이겨 내는가는 각자의 의지와 노력에 달린 일이다. ' 약해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다독인 송현은 고개를 들어 좌군사 위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헛소리!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바로 자신의 어리석음이 빛은 일이라는 걸 모른다면 그대는 바보일 뿐이야." 저도 모르게 악을 쓴 송현의 흥분이 내재된 무극무해의 힘을 자극했다.  인간의 분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무극무해는 신체의 주인이 격하게 화를 내자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 쿠웅! 송현을 중심으로 주위 반경 일 장 정도가 원을 그리며 움푹 꺼져 들어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여파가 물결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좌군사 위공은 집게발로 몸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났다. 기이하게도 강맹한 기운은 당소혜와 곽무헌, 그리고 소 림의 생존자들에게는 영향이 없었다. 파츠츠츠! 그러나 좌군사 위공의 가재 같은 견갑과 충돌하자 듣기 거북한 마찰음과 함께 하얀 연기가 솟아났다. 그와 동시에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선 좌군사 위공은 자신의 집게 발 주변이 녹아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기성을 토해 냈다. "크르륵!" 좌군사 위공의 몸이 크게 떨렸다. 송현의 기운이 자신 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게다가 무극무해와 충돌한 충격으로 좌군사 위공의 정신 은 약해지고 또다시 마성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크르륵, 순수...... 근원의 힘...... 내게 필요해!" 강한 충격을 받은 좌군사의 위공의 말투가 어눌해지자 송현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좀 전의 좌군사 위공이 아니었다. 아니 좌군사 위공이면서 변질된 새로운 인격체였다. 송현에게서 느껴지는 무극무해의 순수한 진원 진기를 느낀 나머지 갈증에 목마른 짐승처럼 갈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좌군사 위공의 변질된 무극무해의 기운이 송현을 살폈고 송현 역시 그를 통해서 좌군사 위공의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맙소사, 도대체 저 몸 안에 몇 개의 영혼이 들어 있는 거지? 원치 않는 교감이었지만 그로 인해 송현은 괴수의 정체 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어떤 인간인지 몰라도 이런 짓을 저지른 놈들은 제정신이 아닐 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가 있지? 치를 떨던 송현은 결심이 섰는지 늘어뜨리고 있던 양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그걸 지켜보던 맹주 곽무헌이 다급히 외쳤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게다. 마치 절벽에다가 맨주먹을 두드리는 느낌이 들 테니." 한 번 매운 맛을 본 곽무헌의 충고를 가슴에 새긴 송현 은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극무해의 힘이 송현의 힘을 배가시켰다. 투두둑! 송현의 전신에서 바람이 일며 서늘한 기운이 사방으로 흘러나오자 거칠게 울어 대던 좌군사 위공의 크르륵 거리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전신의 기운을 끌어올린 송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산북두라는 소림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돌볼 처지도 못 되었고 곽무헌은 당소혜가 독기를 빨아들여서 점차 신색이 회복되고 있었지만 아직 힘을 쓸 여력은 없어 보였다. 그나마 있던 인성을 상실하고 다시 괴수로 변해 버린 자군 사 위공이 역겨운 침을 흘리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별수 없음인가? 나직이 탄식한 송현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오악검존의 청룡검을 향해 손을 뻗자 심하게 요동을 치던 청룡검이 송현의 손 안으로 날아들었다.  웅웅!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간 것이 불쾌한 탓인지 청룡검이 울어 대자 송현이 검신을 문지르며 아이 달래듯 속삭였다. "쉬! 저 괴수 때문에 네 주인도 다치지 않았느냐? 잠시 너를 빌려 그 원한을 갚고자 하니 참거라." 놀랍게도 효과가 있었다. 청룡검의 울음이 잦아들자 송 현은 청룡검을 들어 괴수 좌군사 위공을 향해 검을 들었다. 다음 순간, 몸속의 피가 피부를 뚫고 밖으로 뛰쳐나가 는 환상을 겪은 송현은 들끓는 기혈을 가라앉히기 위해 머릿속에서 무극무해의 심상 편을 여러 차네 되뇌어야 했다.  크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처럼 보이지도 않는 요상한 것을 희번덕거리는 괴수를 보며 송현은 이를 악물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자신의 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무극 무해의 기운과 끔직한 괴수로 변해 버린 좌군사 위공의 기운이 같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 그 안에 비록 슬픈 영혼들이 잠자고 있다고 하나, 그것 역시 운명일 뿐. 부디 편히 잠들기를...... 송현의 두 다리가 풍보의 백팔 보를 힘차게 내뻗자 바람이 되어 날아올랐다. 이미 그것을 눈치 챈 좌군사 위공의 거대한 몸체도 마주 달려 나왔다.  카캉! 투캉! 투캉! 송현과 괴수로 변해 버린 좌군사 위공은 거리를 좁히자마자 무섭게 충돌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송현의 칠성검은 무당의 그 어느 제자보다 정교하고 위력적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곽무헌과 소림의 제자들은 탄성을 토해 냈다. 오악검존도 상처조차 내지 못했던 괴수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그야말로 대단한 신위였다. "저런 고수가 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문파의 고수입니까? 겨가 정신을 차린 공지대사가 입을 열자 어느 정도 상 세를 회복한 곽무헌이 쓰게 웃었다. 중독 증세가 확연히 사라진 걸 느낀 곽무헌이 당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절간의 펑중이 시전의 장사치를 알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곽무헌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공지대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알고 있는 사이임에 틀림없는데 어째서 저 정도의 고수를 장사치라고 폄하하는지 그로서는 알 수 가 없는 노릇이었다. 밝힐 수 없는 신분인가 보구나. 그나저나 맹주의 주위에 저런 초고수가 있었다니 놀랄 일이로군,' 곽무헌을 구대문파가 늘 감시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공지대사는 일면식이 전혀 없는 고수에 대한호기심으로 조바심이 났다. 그 상대가 고강한 무공의 고수였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호승심이 강한 공지대사의 무공에 대한 열정은 강호에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공지대사의 두 눈은 송현과 괴수의 동작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곽무헌은 혀를 내둘렀다.  '콕! 몸이 그 지경이면서도 저놈의 열정은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군. 그나저나 송가 저 녀석은 어느새 또 성장을 한 거지?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괴물이야.' 격공섭물로 바닥에 떨어진 청룡검을 낚아채는 광경을 지켜본 곽무헌은 괴수와 동등하게 싸우는 송현을 보며 미미하게 손을 멸었다.  '어째서 저 녀석은 중독이 되지 않는 걸까' 괴수는 검은 독물과 독무를 쉴 새 없이 뿜어 댔다. 하지만 송현은 전혀 구애받지 않고 청룡검을 휘둘러 댔다. 그것은 차라리 경이롭기까지 했다. 문득 곽무헌은 자신의 팔에 매달려 있는 작은 소녀에게 눈길이 향했다. '이 아이 때문인가?' 당소혜가 당문의 백 년 정화인 독정이라는 사실을 알 길이 없는 곽무헌은 그저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지만 거의 맞춘 셈이었다. 송현은 당소혜와 함께 지내면서 내성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연찮게 찾아온 독정과의 교감 때문이었다. 당소혜의 체내에 있던 독정은 순수한 독의 결정체다. 순수함은 또 다른 순수함과 통하기 때문에 송현의 무극무해를 동질로 받아들였고 그를 통해서 송현은 가장 강력한 독에 대해서 내성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당소혜의 독정에서 뽑아 쓴 독물은 이미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퇴색되어 버린 독기가 송현에게 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곽무헌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자신만 모를 뿐 그 역시 엄청난 기연을 맞이한 것이다.  당소혜가 곽무헌의 체내에 내재된 독기를 뽑아내는 동안 곽무헌 역시 독에 대한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후으으읍!" 길고 깊게 토해 낸 숨결이 편안했고 창백했던 곽무헌의 낯빛은 혈색이 완연했다. 그런 곽무헌을 보며 당소혜가 싱긋 웃어 보였다. "허허허, 이거야 원 무림맹주라는 체면이 서질 않게 되었지만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구나." 곽무헌의 손길이 싫지 않은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마냥 즐거워했다. "괜찮아요. 송현 오라버니가 꼭 구해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아주 좋은 분이라고 했거든요." "저 녀석이 말이냐?" 고개를 끄덕이는 당소혜를 보며 곽무헌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괴수의 집게발을 모두 잘라낸 송현을 보며 곽무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괴물 같은 놈!" 자신도 형편없이 당한 괴수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송현은 괴물임에 틀림없었다. 얼이 빠진 채 입을 벌리고 넋을 잃은 십팔나한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키아아악! 

  고막을 찢는 괴성과 함께 괴수는 비칠거리며 쓰러질 듯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송현의 청룡검에 만신창이가 되어 곧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다. 잠시 사이를 둔 송현은 그런 괴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현세의 악업은 내세에 모두 갚으시게나. 그리고 다음 생에는 부디 뜻하는 바를 이루게, 좌군사 위공!" 청룡검에 은빛 광채가 은은하게 흐르자 송현은 청아한 기합성과 함께 대지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무당의 검이 악을 멸하노라!" 은빛의 광채가 지하 동공을 가득 채웠다. 송현의 청룡 검이 그 순간 울음을 토해 냈다. 우우우웅! "현허칠성검!" 고고한 학이 날아오르듯 우아한 자태로 괴수의 키만큼 날아오른 송현은 물 흐르듯 부드러운 손길로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슈각! 무당 칠성검을 진일보시켰다는 현허칠성검에 담긴 구궁의 오묘한 묘리에 무극무해의 기운이 더해져 가공한 위력의 검기가 괴수를 양단해 버렸다.  은빛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괴수의 몸부림도 멈추게 되었다. "끄르륵! 끄르......후드득! 비오는 듯 한 소리가 나면서 괴수의 독물과 신체 부위 들이 조각조각 떨어졌다. 지독한 악취와 독무가 뿜어져 나와 일행들에게도 큰 피 해가 갈 뻔했지만 당소혜가 독무를 모두 빨아들여 위기를 모면했다. 물론 그 기이한 광경에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송현은 청룡검에 묻은 독물을 한 차네 팔을 떨쳐 냄으로써 털어 내고 소멸해 가는 괴수의 잔재 근처로 다가갔 다 조각난 괴수의 흔적은 그걸 창조한 존재가 얼마나 악독한지 말해 주고 있었다. 잘려 나간 조각들이 죽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독하구나!" 절로 표정을 찌푸린 총현을 한쪽만 남은 괴수의 눈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잘려 나간 입이 움직였다.  "송...... 현...... 송......!" 원한이 가득 담긴 음성에 저도 모르게 진저리치고 만 송현은 발로 그 입을 으깨버리고 말았다.  

"죽어! 사라지란 말이다." 송현은 두려웠다. 이 절대적이면서 질기고 질긴 마성이 자신의 몸속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송현을 자극한 것이다. 턱! 굵은 팔이 송현을 붙잡았다.  "그만 하게! 이제 그만하면 됐어!" 곽무헌이었다. 안정을 되찾은 곽무헌이 어느새 다가와 발작적으로 행동하는 송현을 진정시킨 것이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곽무헌을 보자 송현의 머리도 겨가 차가워졌다. 신발을 검게 물들인 독물에 송현의 신발은 어느새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탓에 무극무해의 기운이 몸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치이이! 하는 연기와 함께 독물이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쯧, 아까운 신발만 버렸군." 곽무헌의 신발 타령에 송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말마따나 한쪽만 맨발인 자신의 몰골이 형편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제 꼴이 우습게 줬네요." 곽무헌에게 부축을 받아서 일행에게 돌아온 송현의 품에 당소혜가 달려와 뛰어 들었다. 그런 당소혜를 송현은 아무런 말없이 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마치 친 부녀지간 처럼 애절해 보였다. "보통 아이가 아니더구나!" 송현은 곽무헌의 질문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곽무헌은 큰 문 제라도 되는 듯 한숨을 토해 냈다. "이 아이를 어쩔 셈이냐?' 획!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송현의 몸이 돌아섰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쩌다니요?" 송현의 눈이 대답을 요구하듯이 노려보자 곽무헌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인상을 썼다. 그리고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표정으로 콧등을 긁었다. "강호에서 그 아이의 존재를 알면 아마도 난리가 날 텐 데. 그걸 감당할 수 있겠냐?" 곽무헌의 말뜻을 모를 송현이 아니었다. 당소혜를 안은 송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송현의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본 곽무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 이었다. "제가 책임집니다. 이 아이는 이제 태평문의 식솔이고 제 딸입니다.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는 송현의 의지가 엿 보였다. 그걸 느낀 곽무헌은 고소를 금치 못하고 송현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거봐, 자네는 강호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말이 맞지?" 한쪽 눈을 찡긋 하며 지나가는 곽무헌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송현은 부정할 수 없었다. 대신 당소혜의 여린 몸을 힘껏 안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 사이 곽무헌은 정신을 차린 공 지대사와 십팔나한들을 살피고 있었다. 흠칫! 송현은 품속의 당소혜가 부들부들 떨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갑자기 왜?" 작은 떨림이 쉬지 않고 이어지다 이내 오한에 떠는 것 보다 더 심하게 떨었다.  송현이 품에서 떼어 내 살피니 당소혜의 얼굴이 공포심에 가득 물들어 있었다. "소혜야 왜 그러니?" 당황한 송현이 소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극무해의 기운을 몸속에 불어넣어 줘도 어린 소혜 의 두려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덥썩! 작고 여린 손애 송현의 팔을 강하게 잡았다. 마치 지금 떨어지면 안 될 것처럼 간절해 보였다.  "그녀...... 그녀가 와요!" 소혜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두렵게 하는지 송현은 답답하기만 했다. 부들부들 떠는 소혜의 가녀린 신형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녀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니? 알아듣게 말해야지 도와줄 것 아니니?" 보다 못한 송현이 윽박지르듯 소리치자 소혜의 작은 입이 달싹였다. "피해요! 그녀가 화가 나면 아무도 못 막아요. 오라버니 어서 피......" 극한의 공포심을 견디지 못한 소혜가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소혜야! 소혜야!" 애가 탄 송현이 불러 보지만 당소혜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달려온 곽무헌이 서둘러 당소혜의 맥문을 움켜쥐었다. 미약하지만 일정하게 뛰는 맥을 확인 한 곽무헌은 안도했다.  "무슨 일인가?"

  당소혜의 손을 내려놓은 곽무헌이 묻자 송현도 모르겠노라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오고 있다며...... 피해야 한다고 말하더니 이렇게 쓰러졌습니다." "누가 온다고? 도대체 누...... 딸랑! 곽무헌의 말을 끊은 것은 다름 아닌 방울 소리였다. 딸랑! 딸랑! 그 소리는 마치 지옥의 무저갱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음산했다. 그때 공지대사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오악검존이 태산에서 괴수를 상대할 때 방울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랭주님,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위기를 감지한 공지대사가 댜급히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대답뿐이었다. "이미 늦은 것 같네!" 차갑게 내뱉으며 일어서는 곽무헌의 시선을 따라간 공지대사는 헛바람을 삼켜야만 했다. "어찌 저럴 수가!" 산산조각 났던 괴수의 잔재들이 꿈틀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후 발광하듯이 요동치던 조각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한 덩어리로 뭉치기 시작하면서 역겨운 형태를 만들어 냈다.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나 끔찍한 광경이었다.  "우욱!" 보다 못한 나한들 중 몇몇이 토악질을 해 댔다. 불심이 깊은 공지대사도 고개를 돌려 외면할 정도였으니 말할 필요가 없는 광경이었다. 기괴한 풍경이 연출되는 동안에도 방울 소리는 일정한 리듬에 맞춰서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방울 소리에 집중하던 곽무헌은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지하 동공이어서 소리가 메아리치니 도무지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근원지를 찾을 수가 없잖아!" 곽무헌은 이 현상이 방울 소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방울 소리를 내는 곳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형태를 설명할 수 없는 편육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저게 도대체 뭐야?"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송현은 기가 막혔다. 지금의 상황은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이었고 그것은 매우 위험한 존재가 부활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쐐애애액! 고깃덩어리 같은 괴수의 몸체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피해!" 곽무헌의 외침에 모두들 분분히 뒤로 물러났지만 촉수가 노리는 것은 일행이 아니었다. "아니?" 모두가 기겁할 일이 벌어졌다. 촉수가 노린 것은 바로 시체들이었다 바로 오악검존과 십팔나한의 시체였다. 어찌해 볼 사이도 없이 시체들이 촉수에 감겨서 괴수의 몸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모두들 아연실색하는 사이 시체들을 집어삼킨 괴수의 몸체는 꿈틀거리기를 계속하더니 서서히 변형을 하기 시 작했다. "놈이 변하고 있다!" 말 그대로 고깃덩어리 같던 괴수의 몸체가 서서히 어떤 형체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보다 더 강력하고 지독한 사기가 주변을 침식해 갔다. "크흑! 이 지독한!" 송현마저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강력한 마기였다. 모두들 내공을 끌어올려 대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피해야 합니다!" 다급히 도주할 것을 말한 송현에게 곽무헌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피한단 말이냐? 출구는 저 괴물의 뒤쪽뿐이다. 이곳은 사방이 막힌 곳이란 말이다." 낙담한 곽무헌의 반응에 송현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절벽에 동굴이 있습니다. 그 길을 통하면 당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 희소식에 곽무헌의 표정이 밝아졌다. 서둘러 십팔나한 들에게 공지대사를 부축해서 옮길 것을 명했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마기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렬해지는 마기는 파도가 밀 어 닥치듯 주변을 쓸어 가고 있었다. "어서 서둘러...... 빌어먹을!" 고개를 돌린 곽무헌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느 새 어두워진 사위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것은 처음보다 몇 배는 더 커진 괴수가 그 원인이었다. "제가 막아 보겠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피하세요!" 당소혜를 건네며 부탁하는 송현에게 곽무헌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아무리 너라고 해도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모두가 당하고 맙니다." 소림의 제자들 대부분 부상을 당해서 움직임이 기민하지 못했다.  절벽의 동굴까지는 백여 장이 넘는다. 그에 비해서 새로운 몸을 만들어 가는 괴수의 성장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선택의 기로에 선 두 사람! 곽무헌은 당소혜를 소림의 제자들에게 맡겼다. 공지대사가 무어라 하면 손을 내저었지만 곽무헌은 우격다짐으로 당소혜를 맡기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송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여간 그 고집 때문에 언젠가는 손해 볼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곽무헌의 기척을 느낀 송현은 괴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콕콕 거리는 웃음소리에 송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 바닥 생리가 이렇다. 죽을 줄 알면서도 의협심 뭐 이런 것 때문에 앞으로 나서게 된다. 이 말이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송현의 농지거리에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다가 씨익 미 소 짓고 말았다. 이런 순간에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진짜 친구다. 목숨을 걸고 싸워 줄 동료끼리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두 사람은 말없이 전면의 괴수를 노려보았다.  

  새로운 형태로 변한 괴수는 그 크기가 성인·남자 넷이 어깨를 올라타고 서 있는 키에 무려 여덟 개의 집게발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더구나 이전에는 없던 촉수들이 등 뒤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죽고 살아날 때마다 저리 강해진다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인데?" 곽무헌이 도무지 승산 없어 보이는 상대를 살피며 엄살 을 피우자 송현은 쓰게 웃고 말았다.  "그뿐 아닙니다. 저 입 좀 보십시오." 송현이 가리킨 괴수의 입은 마치 상어의 이빨이 이중 삼중으로 박혀 있는 듯 한 형태였다. "바위라도 갈아 먹겠어!"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괴물로 재탄생한 것이다. 푸스스스! 형체를 완성한 괴수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딛자 대지가 검게 변하며 죽어 버렸다. 독기도 몇 배 강해진 것이다. "괴물!" 곽무헌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뱉은 말에 송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녀석이 괴물이 아니라 저걸 만든 놈들이 괴물입니다." "흥!" 그런 말은 일단 살고 나서 해야지. 여기서 죽는다면 그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곽무헌의 말처럼 우선은 살고 볼 일이었다. 송현은 괴수의 몸을 살피며 나름 약점을 찾아보려 애를 쓰는 중이 었다. 단전에서 내력을 끌어올린 송현이 풍보를 시전하여 괴수의 뒤로 미끄러졌다.  쓰윽! 송현이 재빨리 뒤로 돌아 배후를 노리자 갑자기 몸체에 서 수십 개의 눈이 튀어나오더니 송현의 모습을 쫓아서 대비했다. "저럴 수가!" 괴수의 등판에 수십 개의 눈이 나타나 껌벅이며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한 송현은 탐색이 무의미해졌음을 깨닫고 뒤로 물러서려 했다.  쐐애액! 독사가 먹이를 낚아채듯 촉수들이 송현의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어딜 감히!" 

  어느새 손에 들린 청룡검을 휘둘렀다. 칠성단파의 수법이 펼쳐지자 촉수들은 목표를 잃고 허무하게 잘려 나갔다. 그러나 잘려 나간 촉수보다 더 많은 수가 달려들었다.  "큭!" 욕지거리를 토해 낼 시간도 없이 밀어닥치는 괴수의 공격에 풍보를 극성으로 펼쳐 권역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도움을 받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사정은 곽무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난무하는 촉수 공격에 곽무헌도 어쩌지 못하고 피하기에 급급했다. 크기가 커진 만큼 괴수는 더 강해졌다. 다행히 독기에 는 내성이 생겨서 중독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해진 공격 수법에 두 사람은 승부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펑! 가죽 부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곽무헌의 거구가 종잇장 날리듯 중심을 잃고 뒤로 하염없이 밀려났다.  "카악, 퉤!" 검붉은 핏덩이를 뱉어 낸 곽무헌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자 핏물이 입가를 물들였다. 아직 이전의 싸움에서 입 은 상세가 다 낫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이 정도에 약한 모습을 보일 권왕 곽무헌이 아니었다.  

  "크하하하! 오냐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한바탕 드잡이 질 할 맛이 나지." 마치 이전의 싸움에서 보여 준 것은 자신의 본 실력이 아니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괄괄한 목청으로 크게 소리친 그는 좀처럼 보여 주지 않던 신위를 펼칠 요량으로 내력을 끌어올렸다. 이미 공 지대사와 십팔나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눈이 없으니 숨겨 둔 한 수를 펼쳐 내려는 것이다. 양팔을 들어 올린 곽무헌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자 그의 주위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너덜너덜해진 장포 자락이 춤을 추자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이 났다. "왜 구대문파의 늙은이들이 곽가권을 두려워하는지 몸으로 체득하게 해 주마!" 섬뜩한 미소를 보여 준 곽무헌의 신형이 고무줄이 늘어나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갔다.  팡! 파팡! 징검다리를 뛰어 넘듯 곽무헌의 신형이 거대한 괴수의 몸통을 여기저기를 발판삼아 뛰어 오르며 가격했다. 곽 무헌의 내력이 담긴 철권이 적중할 때마다 거대한 괴수의 몸통이 충격에 흔들렸다. "과연 권왕이라는 칭호가 허명은 아니었어!" 송현은 혀를 내두르며 곽무헌의 신력을 감탄해 마지않았다. 눈 깜짝할사이에 일백여 차네의 권을 날린 절정의 신공 앞에 괴수는 괴성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쿠우웅!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에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이 흔들렸다. 흙먼지를 피워 올리는 통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곽무헌의 모든 내력이 실린 권경에 당했으니 쉬이 회복되지는 못할 것이라 여겨졌다.  "후으으읍!" 자세를 갈무리하며 진기를 다스리는 곽무헌의 곁으로 송현이 내려섰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후우우, 겨정할 것 없다. 구 할의 내공을 담은 암경을 모두 쏟아 부었으니 제아무리 괴수라고 해도 버틸 재주는 없을 터." 자신만만해 하는 곽무헌과 달리 송현인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보아 온 괴수의 능력은 상상 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미지의 존재가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방울 소리가 어디서 날지 송현은 청각에 집중했다. "크르륵!" 그러나 송현의 기대를 저버리고 방울 소리 대신에 괴수 의 울음이 들려왔다.  

  약하게 들썩거리던 괴수의 몸이 먼지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움직였다. 이에 곽무헌은 혀를 차며 어이없어 했다. "허, 나도 이젠 퇴물인가?" 필생의 공력을 쏟아 부은 권격이 효과가 없음을 확인한 곽무헌은 허탈한 심정을 드러냈다. 송현은 곽무헌과는 다른 의미로 한숨을 쉬었다.  곽무헌의 저 대단한 권격도 이겨 낸 괴수다. 둘이서 무엇 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검기도 권경도 소용이 없으니 이젠 어떻게 공략을 해야 할지 암담했다. "크르륵, 크르륵!" 두 사람이 주저하는 사이 괴수는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다. 물론 그 흉폭함은 더 거칠어졌다. "쿠에엑!" 곽무헌에게 당한 것이 분한지 괴수는 발광에 가까운 몸부림을 쳤다. 그것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광경인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송...... 현...... 곽...... 맹주...... 죽...... 여." 드문드문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좌군사 위공의 인성 때문에 괴수는 혼란스러운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수십 명 아니 그 이상의 인성이 혼재되어 있는 괴수는 하나의 인격체로 융합되지 못한 부작용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죽여...... 줘...... 제발! 아미타...... 크웨에엑!"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괴로워하다가 몸부림치자 두 사람은 그 틈을 이용해서 도망치려 했다. 서로 눈이 마주 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쉬운 법이 아니었다. 딸랑! 딸랑! 음산한 사기가 깃든 방울 소리가 이제까지와는 달리 아주 강하게 울려 퍼졌다. 방울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의 표정은 벌레 씹은 듯이 변했다. "제기랄!" 아니나 다를까 혼재된 영혼의 불협화음 때문에 괴로워하던 괴수가 평온을 되찾은 것이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 에게는 불행이었다.  촤아아악! 수십 개의 촉수가 날카로운 창이 되어 두 사람을 꼬치처럼 꿸 듯이 날아왔다.  콰지직! 대지에 꽃힐 때마다 흙더미가 뒤집어지며 나는 굉음이 두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가진 경공을 최대한 시전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놈 송가야! 어떻게 좀 해 보란 말이다!" 곽무헌이 고래고래 고함을 치자 황당해진 송현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맹주님도 못하는 걸 저보고 어쩌란 겁니까?" 악에 바친 송현의 악다구니에 곽무헌은 더 크게 소리쳤다. "이놈아 네놈의 몸속에 들은 무극무해의 진기는 나중 에 엿이라도 바꿔 먹을 심산이냐?" 곽무헌이 악쓰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 송현은 여전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일단은 피하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청룡검으로 수없이 잘라 내고 쳐내도 소용이 없었다.  사라지는 촉수보다 새롭게 달려드는 촉수들이 더 많았다.  게다가 거리가 좁혀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거대한 집게발 을 휘둘렀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을 몇 번이나 경험하자 두 다리에 힘을 풀릴 지경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송현도 악에 바쳤다.  "하아, 하아. 오냐 이 괴물아!" 풍보를 극성으로 시전하여 거리를 벌린 송현은 청룡검 을 위로 내던졌다. 그리곤 무극무해의 진기를 청룡검에 실어 보냈다. 무극무해의 신력을 받은 청룡검이 기성을 토하며 송현의 주위를 맴돌았다.  "저 녀석이 죽을 둥 살 둥 하니 겨가 내 말을 이해했나 보구나!" 

  곽무헌은 송현이 자신의 충고대로 무극무해의 진기를 괴 수의 몸속에 쏟아 부으려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송현의 순수한 무극무해의 진기가 괴수의 몸속에 흐르는 변질된 무극무해의 기운을 파괴한다면 괴수 스스로 붕괴되어 소멸할지도 몰랐다. 다만 생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진원진기이므로 송현도 다칠 수 있는 모험이었다.  "송가 이 녀석아, 너만 믿는다!" 곽무헌은 주먹을 불끈 쥐고 송현을 응원했다. 괴수도 무극무해의 기운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 기성을 지르며 송 현을 향해 짓쳐들었다.  "구궁의 묘리 속에 진리가 담겨 있노라! 칠성파황참." 내력을 집중한 양손 사이에 머물던 청룡검이 울음을 토 해 내며 괴수에게 날아갔다. 빛처럼 쏜살같이 짓쳐드는 청룡검은 세상의 악을 멸하려는 천상의 뇌전 같아 보였다.  "그렇지!" 곽무헌은 필승을 예상이라도 하듯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희열에 찬 곽무헌과 달리 전력을 다한 송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날아가는 청룡검의 호선이 왠지 위태로워 보였다.

병상첨병

 - 병을 앓는 중에 또 다른 병이 겹치다. 엎친 데 덮친 격을 비유함. 계속해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 많이 쓰는 표현이다.

  송현의 염원이 담긴 청룡검은 무극무해의 순수한 진기를 가득 머금고서 괴수를 끝장내기 위해 날았다. 콰드득!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괴수는 수십 개의 촉수로 청룡 검의 진로를 막아섰다.  슈가가각! 청룡검은 무서운 기세로 촉수들을 베어 버리며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 기세 그대로 날아가 괴수를 끝장내 버 리 기를 모두가 소원했다.  청룡검에 실린 송현의 순수한 무극무해의 진원진기가 괴수의 혼탁한 진기에 려이면 괴수는 견디지 못하고 소멸 할 것이다. "가라!" 곽무헌은 주먹을 불끈 쥐고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질렀 다. 그러나 호기롭게 외친 곽무헌의 외침은 곧 경악성으로 바뀌었다.  "저럴 수가!" 섬광처럼 날아가던 청룡검이 큰 충격을 받고 방향을 잃 튀어나온 시커먼 덩어리들이 청룡검에 들러붙어서 길을 막은 것이다. 그것은 괴수가 흡수한 시체들이었다.

마기에 물든 시체들은 되살아나 청룡검을 향해 육탄 돌격을 감행한 것이다. 너무나 강한 원혼들이 부딪쳐 오니 청룡검도 감당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어버렸다. 콰직! 결국 청룡검은 괴수를 맞추지 못하고 엉뚱한 바위만 부 수고 말았다. "이런 젠장맞을!" 곽무헌은 너무나 억울해 하며 무릎을 내리쳤지만 무리 하게 진기를 쏟아 부은 송현만큼은 아니었다.  "우욱!" 피를 한 움큼 쏟아 낸 송현은 내부가 진탕되는 느낌과 함께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칠거렸다. 겨가 중심을 잡고 쓰러지는 낭패를 막았다.  이를 악다문 송현은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상이 심했다.  방법을 달리한 도박이었지만 영악하게도 괴수는 피하 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방어했다.  "정말 지독한 놈이에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녀석은 영 약해지고 있습니다. " 송현의 말에 곽무헌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녀석이 배우고 있단 뜻인가?"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당황한 곽무헌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도대체 저런 괴물을 만들어 낸 놈들은 무슨 생각인 거 지?" "저도 그게 두렵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말입니다." 기진맥진한 두 사람이 허탈해 하고 있을 때 화가 난 괴수가 괴성을 질러 댔다. 그러나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왠지 아까보다 못한 것 같은데?" 눈치가 빠른 곽무헌이 괴수를 살피더니 송현에게 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갑자기 눈에 띄게 움직임이 둔해졌다. 다만 그 흉폭함은 더 커진 듯했다. 이를 본 송현은 뭔가 짐작이 가는지 턱밑을 매만졌다.  

  "아마도 흡수했던 시신들을 소모해 버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 송현의 어림짐작이 그럴듯하다고 여긴 곽무헌이 다시 한 번 할 수 있겠냐며 의중을 물었다. 그의 권유에 다시 해 보겠다며 오악검존이 버린 다른 청룡검에 손을 뻗어 보았지만 검은 잠시 흔들리다가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기력이 쇠한 것이다. "끙, 그래 가지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겠어!" 낙담한 곽무헌이 고개를 가로젓자 송현은 곽무헌에게 해 보라고 청했다. 그러나 곽무헌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내가 가진 무극무해의 기운은 자네에 비해서 너무나 미약해! 그 미력한 힘으로 어찌 성공하겠나?" 실망한 송현은 괴수가 다시 움직이려 하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이내 기운을 차리고 곽무헌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이만큼 했으면 된 겁니다. 이 정도 시간을 벌어 줬으니 공지대사와 제자들은 충분히 몸을 피했을 겁니다. 저희도 어서 벗어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송현의 마음을 읽은 곽무 헌은 피식 웃어 보였다. 

  "줄행랑이라, 모양새가 좀 그렇지만 일단 목숨은 부지 하고 봐야지." 다행히도 곽무헌의 무인의 자존심을 들먹이며 송현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곽무헌이 쉽게 마음을 돌려 준 덕택에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절벽의 동굴을 향해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딸랑! 딸랑! 바람결에 또다시 방울 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의 표정 은 흙빛이 되었다. 잠시 괴수를 조정하는 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은 것이었다.  "쿠에엑!" 아까와는 전혀 다른 리듬의 방울 소리에 괴수는 부르르 떨며 몸서리치더니 믿기지 않게도 촉수로 자신의 몸을 잘 라 내는 엽기적인 행동을 시작했다. 마치 두부를 썰듯 몸의 일부를 잘라 내는 기이한 행동 에 곽무헌은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송현 은 놀라지 않았다. 곧바로 조금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한 가지 가정을 이야기하니 곽무헌은 크게 감탄하며 맞장구를 쳤다. "과연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네. 청룡검을 막기 위해서 과도하게 사용한 진기 때문에 내력이 달리자 스스로 신체 를 줄이고 있다는 건가?"

  곽무헌이 쉽게 이해를 하자 송현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 을 가졌다. "틀림없습니다. 저희들의 공세가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뜻입니다. " 희망을 발견한 송현이 기뻐하자 곽무헌도 미소를 지었다.  "결국 불사신은 아니 라는 뜻이로군." 주먹을 마주치며 호기를 부리는 곽무헌을 보며 송현은 자신 있게 말했다. "큰 약점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괴수를 조정하는 방울 을 든 자와 차단시키고 주변에 따로 흡수할 생명체가 없는 밀폐된 공간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 "좋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야겠어. 오늘의 수고가 덧없게 될까 봐 겨정했는데 다행이로군. 이제 자리를 뜨지! 저놈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것 같아!" 곽무헌이 엄살을 부리자 송현은 그의 여유로움에 기가 찼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기에 서둘러 절벽 을 향해 내달렸다.  딸랑! 딸랑! 딸랑! 문제가 일단락되었다고 여겼던 두 사람은 방울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떨쳐 내려고 하면 할수록 마치 그물망에 갇힌 생쥐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당황한 곽무헌이 주변을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겁니까?" 대답 없이 인상을 쓰고 있는 곽무헌을 보며 송현은 자 신의 질문이 정확했음을 알았다. 경공을 최대한 시전하여 내달렸지만 몸집을 줄인 괴수와의 거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망할! 이 따위 기문진법에 당하다니!" 낭패한 표정의 곽무헌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안력을 돋 우었지만 그저 평범해 보이는 지하 동공의 평범한 풍경일 뿐이었다.  톡! 톡! "응?" 등을 두드리는 기척에 고개를 돌린 곽무헌의 표정이 귀 신을 본 얼굴로 바꿔었다.  "맙...... 소...... 사!" 전신에서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사람처럼 맥없는 목소리였다.  거대했던 괴수가 보통 성인 남자의 키로 변해서 두 사람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그 형상이 지금까지 중에서 최악이었다.

  문드러지고 일그러진 얼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고통 에 찬 표정들이었다. 지금까지 흡수했던 사람들의 얼굴들 탑처럼 쌓여 있었다. 그 옆으로 팔과 다리가 튀어나와 있으니 지옥의 괴물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 위에 머리처럼 제일 크게 달려 있는 것은 두 사람도 잘 아는 이는 얼굴이었다. "좌군사 위공...... 신음성을 흘린 송현의 넋두리에 괴수가 몸을 떨었다.  "위...... 위공? 위공...... 그게 누구지?" 기억의 혼재와 부재가 연속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 도 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는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왔지만 공격을 하지 않고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서서히 마성이 사라지고 있나 봅니다. " 조심스럽게 속삭인 송현의 말에 곽무헌은 긴장한 채 고 개만 주억거렸다. 저 괴수는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존재다. 그러나 저런 괴수를 만들 생각을 하는 인간의 존재는 가히 공포스러울 정도다. 저런 괴물이 줄줄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면 절망 이라는 단어만 떠올랐다.  "강호를 말살시킬 셈인가?" 곽무헌은 갑자기 떠올린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 그의 가슴을 짓 눌렸다. "자네 이름은 위공, 한때 무림맹의 군사로서 일했고 아 주 뛰어난 기재였다네." 곽무헌의 돌출 행동에 송현이 기겁하며 막으려 했지만 그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곤 괴수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자네 고향은 강남의 햇살이 따뜻한 소호라는 마을이었네." 곽무헌이 좌군사 위공이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자 괴수는 부들부들 떨면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괴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머리들 역시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 거리며 소란을 피웠다.  "크으으!" 머리를 움켜쥐고 고통에 몸부림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울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곽무헌은 물러서지 않고 더 욱 목청을 높였다.  "약관의 나이에 진사에 급제를 하고 한림원에서도 인정받는 기재였지." 곽무헌의 음성은 또렷하고 맑았으며 멀리 넓게 퍼져 나갔다.  '내력을 사용해서 말하고 있군.' 송현은 곽무헌이 남은 내력을 쥐어짜서 음공의 일종을 시전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괴수는 곽무헌이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에 따라서 방울 소리도 다급하게 울렸지만 이전처럼 통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좀처럼 들어 보지 못하던 방울 소리에서 괴수를 조정하는 쪽도 당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괴수는 방울 소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괴수는 그저 괴로워하며 곽무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친구야, 이게 무슨 꼴인가?" 마지막 말에는 안타까운 심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정으로 슬퍼하고 있는 곽무헌의 마음이 전해질 정도였다. 맹, 맹주님!" 괴수의 입에서 처음으로 사람다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너무나 슬픈 음색이었다. 고개를 움직여 끔찍하게 변해 버린 자신을 살펴보는 괴수를 보며 곽무헌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였다.  "이제 정신이 드나?" 곽무헌의 목소리도 젖어 들었다. 어려운 시절 함께 할 수 있는 동지라 여겼던 이였다. 내치기는 했지만 아련한 감정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네......

  맹주님과 함께 꿈을 꾸고 싶었을 뿐입니다. " "천하를...... 꿈꾸었지...... 조금 전까지 목숨을 빼앗기 위해 싸웠던 사이라고는 짐작조차 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변해 버린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쥔 위공은 뼈저린 후회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만심...... 제 교만이 저를 타락시켰고 결국 모든 일 을 망쳐 버렸습니다." 진실로 후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겠지만 죄송하다는 말씀은 드리고 싶었 습니다. 제게 베풀어 주신 그 은...... 크으으으!" 갑자기 비틀거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 내자 곽무헌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딸랑! 딸랑! 이제까지 들어 보지 못한 무겁고 혼탁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시에 위공은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화가 난 곽무헌이 방울 소리를 진원지를 찾고자 했지만 전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곽무헌과 송현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좌군사의 위공은 크게 휘청거렸다. 몸에 달려 있는 모든 머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힘겨워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추었고 요란하게 울리던 방울 소리마저 그쳤다.  적막함! 시간이 정지한 듯 사위는 침묵했다. 그 숨막히는 정적 을 깨뜨린 것은 송현이었다. "위험합니다!" 송현이 악을 쓰며 곽무헌에게 몸을 날렸다. 무언가 위험을 감지한 송현의 행동 뒤에 괴수의 몸이 한차네 몸을 떨었다.  투두둑! 깨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푸하학! 괴수의 몸을 이루고 있던 머리들이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속에 원한이 가득한 비명들이 뒤덮여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후두둑! 비 오는 소리가 나며 역한 냄새가 사방을 뒤덮었다.  치 이 익! 독물이 대지에 떨어지면서 타들어 갔다. 송현의 장포도 넝마로 변했다. 서둘러 옷에 묻은 독물을 털어 내고 겉옷 을 던져 버린 송현은 곽무헌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약간 멍한 상태인 곽무헌을 이리저리 살피는 송현의 귓가로 허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지?" 화가 난 건지 어떤지 알 길이 없는 무색의 음성에 송현은 머뭇거리다 답을 했다.  "아무래도 폐기 처분한 것 같습니다." "폐기 처분?" 곽무헌이 초점 없는 눈을 들어 무슨 뜻이냐는 듯 물어 왔다. 그에게 씁쓸한 미소를 보여 준 송현은 조금 전까지 괴수가 서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잔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들로서는 실패한 실험이라는 뜻이겠죠." 그제야 곽무헌도 이해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좌군사 위공이 이성을 찾고 통제를 벗어났으니 저들로서는 그 런 존재가 필요할 리가 없었다.  "아직 작별 인사도 못했는데 그리 허무하게 가 버리다니....... 곽무헌은 아직도 좌군사 위공을 마음속에서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내쳤지만 그에게는 모두가 적뿐인 무림맹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벗이었던 것이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잔뜩 긴장한 채 사위를 살피는 송현의 기색에 곽무헌도 상념에서 벗어났다. "무슨 뜻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곽무헌에게 송현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설명했다.  "저들이 괴수를 포기했다는 건. 이제 더 이상 실험이 무의미해졌다는 뜻입니다. "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곽무헌의 느긋함 때문에 송현은 안달이 났다.  "모르시겠습니까? 이제 우리 존재도 필요 없게 됐단 말입니다." 

발작하듯 소리치는 통에 곽무헌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그럼 우리가 괴수의 실험 대상이었다는 뜻이냐?" 송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곽무헌은 이를 갈았다. "이 내가 저 따위 괴수의 연습 상대였다니, 내 이놈들 !" 불같이 성을 내며 일어선 곽무헌이 허공에 대고 고함쳤다. "나 곽무헌이야! 권왕 곽무헌이란 말이다! 이놈들아!" 송현은 분을 참지 못하고 악다구니를 쓰며 허공에 삿대질을 하는 곽무헌을 잡아 당겼다.  "지금 우리 내력 가지고 저들을 상대하기란 어림도 없는 일인데 왜 자극을 하십니까?' "흥! 이놈들은 일부러 소림 놈들은 풀어 주고 우리만 진법에 가두었다. 네 말대로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미처 송현이 눈치 채지 못한 사실을 일깨워 준 곽무헌은 오늘 이 자리를 살아서 빠져나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슈슈슈!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주변에서 검은 야행복 차림의 살수들이 나타났다.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난 살수들은 물 샐 틈 없이 두 사람을 포위했다.  "끝장 낼 심산이로군!" 곽무헌이 냉소를 내뱉자 송현은 고개를 저었다.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습니다. " 손에 쥔 청룡검에 힘을 준 송현이 검을 치켜세우자 곽무헌이 껄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렴, 그래야 강호를 살아가는 사내라고 할 수 있지!" 가슴을 세게 치며 호기롭게 나선 곽무헌이 손가락을 들어 까딱거렸다.  "와라! 매운 맛을 보여 주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수들은 대지 위를 나는 듯이 달려왔다. 사방위를 점하고 시야가 가려지는 사각지대를 노리고 들어오는 살수들은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타핫!"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곽가권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처음부터 손에 사정을 두지 않은 곽무헌의 권과 각이 검수 들을 때리고 차고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한차네 공격을 퍼부었던 곽무헌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 것은 무화과수의 수법으로 살수들을 몰아 붙였던 송현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은 또 뭐야?" 청룡검을 들어 검신을 눈으로 확인한 송현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히 자신을 노리고 덤벼든 다섯 명의 살수를 베었다. 그러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을 벤 느낌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볏짚으로 이루어진 허수아비를 베는 것 같아. " 이마에 깊은 골을 만들어 낸 송현이 검을 한 차네 허공 에 털어 낸 다음 자세를 취했다. 현허칠성검의 모리 중 구 궁파천의 초식으로 눈앞에서 위협하고 있는 살 수 셋을 향해 몸을 던졌다.  가가각! 

  고막을 자극하는 검과 검의 마찰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유려함을 자랑하는 무당의 현허칠성검이 살수들의 무수 한 검격 속을 춤을 추듯 유영하며 빠져나갔다.  서겨! 유속의 흐름처럼 빠르게 베고 찌르기를 성공한 송현은 초식을 끝내고 마무리 동작을 취했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 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허무 그 자체였다.  "없다...... 난 아무것도 베지 못했어!" 허탈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몸을 일으킨 송현은 잘려 나간 살수들의 신체 부위에서 피가 전혀 흐르지 않는 것 을 확인했다.  "또 다른 괴물이로군." 한바탕 몸을 푼 곽무헌이 송현과 등을 맞대며 성을 냈다.  "그래도 이놈들은 변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하는 송현을 보며 곽무헌을 피식 웃고 말았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요 녀석들이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곽무헌은 살수들의 정체를 아는 모양이었다. 송현이 곁눈질을 하자 손바닥에 침을 뱉어 문지른 곽무헌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구마강시라고 들어 봤느냐?"

  고개가 꺾일 정도로 격하게 돌린 송현의 눈이 함지박하게 커진 것을 보고 곽무헌은 코웃음을 쳤다. "들은 풍월은 있나 보구나. 예전 환원교의 교주 구마가 만들어 낸 희대의 병기다. 무림의 십대마병에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독한 강시다. " 구마 강시의 내력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송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구마강시가 무공을 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나 역시...... 이크!" 두 사람의 대화를 기다려 줄 검수들이 아니었다. 복면 속의 검은 눈동자들이 빛을 내며 요혈을 공격해 왔다. 다 시 한 번 두 사람과 구마강시들이 혈전을 벌였다.  "하아, 하아!" 점점 거칠어지는 두 사람의 호흡에 비해 구마강시들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특히나 곽무헌은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또한 파리해진 얼굴의 송현도 그 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괴수를 상대하느라 두 사람 모두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후우, 후우!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무공은 별것 아닌데 숫자가 많고 죽여도 죽여도 다시 일어나니 죽을 맛이군:" 

  입에서 단내를 풍기는 곽무헌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너덜해진 소매로 훔치며 주변을 살폈다.  온통 검은 물결이었다. 좀 전보다 그 숫자가 더 많아진 듯했다.  "이런 육시랄 놈들!" 으르렁 거리며 구마강시들이 모여 있는 무리 한가운데 뛰어든 곽무헌은 필생의 공부인 곽가권의 무룡장을 화려 하게 펼쳤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그 손속은 예전만 못 해 보였다.  "낭패로군!" 곽무헌의 손길이 더뎌진 것을 본 송현은 자신 역시 청룡검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사 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더구나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방울의 주인이 더 신경이 쓰여 손이 자꾸만 엇나갔다.  "이크!" 그 바람에 몇 번이나 위기를 맞이했던 송현은 자신의 경 신법인 풍보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사지에서 벗어났다.  "책에 보면 구마강시는 인육을 먹는 본능만 남아서 머리만 남아도 인간을 문 입을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 나 지금 상대하고 있는 구마강시들은 냉정하고 절제된 모 습이다. 더구나 악취도 나지 않아. 다만 저 검은 눈만이 구마강시와 비슷하다. "

  구마강시와 상대하던 송현은 적들이 구마강시와는 확 연히 다른 점을 느끼고 모험을 해 보기로 결정했다.  "큭!"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끌어올리자 단전이 바늘로 찌르는 듯 한 통증이 밀려왔다. 내상을 입은 몸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애써 무시하고 이를 악 다문 송현은 전정단참에서 유운참선까지 십여 초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푸스스! 이전까지와는 달리 송현의 검에 스친 구마강시들이 베인 부위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며 바람 빠진 가죽 부 대처럼 조글조글하게 변해서 쓰러졌다.  "효과가 있다?" 뛸 듯이 기뻐한 송현은 쉴 틈 없이 몸을 날렸다. 구마강시에 둘러싸인 곽무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스스! 베이는 소리와 바람 빠지는 소리가 수십 차네 난 후에 엉망이 된 두 사람이 공터로 빠져나왔다. 곽무헌과 송현의 몰골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독물로 엉망이 된 옷가지는 그렇다고 쳐도 전신의 상처 들이 핏물과 땀으로 젖어서 산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 다. 게다가 곧이라도 숨이 멈출 듯이 헐떡거리는 두 사람은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하아, 하아! 모양 빠지게 한심하구나. 이 곽무헌이 말이다." "체면 따위야 아무렴 어떻습니까? 살아서 나가는 것이 중요하죠!" "누가 장사꾼 아니랄까 봐! 이놈아 무인은 명성을 먹고 사는 게야." 그 와중에도 곽무헌이 체면을 중시하자 송현은 어이가 없었다.  떠들 힘이 남아 있거든 그 힘을 사용하십시오. 저놈들 아마도 무극무해의 진기를 이용해 만들어진 강시 같습니다. " 송현의 설명에 곽무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악다문 입 에서 윽! 윽! 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열이 받은 듯했다.  부축하고 있던 송현의 손을 뿌리치더니 주먹을 움켜지고 마보 자세를 취했다. 곽무헌의 몸 주위로 익숙한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확인한 송현은 자신도 얼마 남지 않은 무극무해의 기운을 청룡검으로 보냈다.  "후우, 좋아!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입을 다문 송현은 말하는 기운도 아끼려는 듯 침묵한 채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과 구마강시의 혈투는 그야말로 생사를 건 사투였다.

  신음성도 없고 비명도 없는 싸움이었지만 그 어느 싸움보다 더 지독한 혈투였다. 일다경쯤 흐르자 구마강시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곽무헌도 내력이 다했는지 무릎이 땅에 닿아 있었고 송현도 검을 지팡이 삼아 겨가 버티고 있었다.  "빌어먹을! 왜 진기가 다시 모이지 않는 거지?" 송현은 써도 써도 마르지 않던 무극무해의 기운이 점점 사라지는 원인을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랬다면 구마강시들 쯤이야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숨을 헐떡이는 곽무헌이 욕설을 퍼붓는 것이 들렸다. "하아, 하아, 이제야 이 지랄 맞은 진법이 뭔지 알겠구 나. 환상미려진!" '환상미려진이라구요? 빌어먹을!" 무림맹에서 좌군사 위공의 진법에 고생을 했던 송현은 지난 일년간 기문진식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했다.  그때 읽었던 기문도해라는 책에서 전설에서나 내려 온다고 전해지는 하나의 진식을 떠올렸다.  환상미려진! 그것은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무서운 진법이었다. 진법 에 갇힌 상대가 강하면 진법의 위력도 배가 되는 독특한 진법이었다. 더구나 일단 한 번 발동이 되면 파훼가 불가 능하다고 알려진 무서운 진법이었다. 오로지 진법에 갇힌 이가 죽어야지만 환상미려진은 소멸된다고 전해졌다. 너 무나 가혹하기 때문에 오래전 중원에서 이를 금지 시켰고 환상미려진에 대한 모든 자료를 지워 버렸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것이 남아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숨을 몰아쉬던 송현이 아니라며 고개를 젓자 곽무헌이 킬킬킬 거리며 웃어 댔다.  "삼십 년 전인가 혈교가 준동했을 때 중원에 다시 나타났었다고 했다. 그때 모두 불태웠다고 했지만 진법에 대 해서 아는 놈이 살아남았을 수도 있겠지. 살아 있는 생명 의 기운을 빼앗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 가둬 버리는 진법 은 세상에 오로지 환상미려진밖에 없어. 써도 써도 마르 지 않던 무극무해의 기운마저 제압하고 죽은 시체인 강시 놈들은 영향을 받지 않아. 그렇다면 그것밖에 없다. " 곽무헌이 단정하듯 선언하자 송현은 낙담했다. "파훼법은 없습니까?" 혹시나 하는 미련에 물어보자 곽무헌은 말하기도 힘이 드는지 손을 내저었다.  "후우, 그럴 줄 알았습니다. " 체념하는 송현의 귀로 곽무헌의 외침이 들려왔다.  "정신 차려라! 놈들이 다시 온다. " 일백의 구마강시가 수십으로 줄어들었지만 지금 상태 에서 수집이나 수백이나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겨가 일으킨 송현은 이번이 마지막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자 눈앞으로 수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태평문의 식솔들과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 던 여인 서희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모두 미안해...... 약속을 못 지켜서!" 짓쳐드는 구마강시를 보던 송현의 눈이 스르륵 감겼고 너무나 무겁게 느껴지는 청룡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우우웅! 투우웅! 공기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 공명하며 크게 울렸다. 그 것은 마치 물속에서 커다란 파도에 휩쓸리는 것과 같았다.  투두두둥! 세 번째 충격이 가해지자 구마강시를 비롯해 모두가 버티지 못하고 땅 위를 굴렀다. 파도 대신에 공기가 크게 요 동치면서 스쳐 지나갔다. 태풍의 사나운 바람처럼 몰아쳤다. 날아가지 않기 위해 서 송현은 있는 힘을 다해 버텨야 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던 송현은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벌려야 했다. 지하 동공의 맑은 하늘이 마치 누 군가 종이를 찢듯이 위에서 아래로 균열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드드드득!  

  느닷없이 공간이 일그러지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끔직한 소음에 송현과 곽무헌은 귀를 막 고 괴로워해야 했다.  콰지지직 ! 경천동지!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천지개벽이 일어 난다고 착각할 정도로 하늘과 땅이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거짓말 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아름다웠던 수풀도 지하 동공의 멋들어진 하늘도 모두 사라졌다. 대신에 거친 잡초들로 이루어진 죽은 땅과 이 끼와 곰팡이로 뒤덮인 동굴이 나타났다.  진법이 깨진 것이다.  "후으읍!"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대지처럼 텅 빈 단전으로 다시금 무극무해의 기운들이 스멀스멀 찾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적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했 고 내상을 입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은 곽무헌과 송현의 편이 아니라 구마강시들의 편이었다.  중심을 잃고 쓰러졌던 구마강시들은 벌떡 일어서더니 묵빛의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다가 왔다.  "억울하군. 이렇게 죽다니!" 송현도 곽무헌과 같은 심정이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검을 쥘 힘이 한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구마강시들의 검들이 코앞에 다가오는 순간, 강맹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후두드득! 구마강시의 팔다리가 비 오듯 떨어져 내렸다.  "멸!" 날카로운 여인의 고성과 함께 좀 전의 강력한 기운이 구마강시들을 흩어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니 너무나 허무하게도 소멸되었다. 그렇게 자신들을 괴롭히던 구마 강시들이 손쉽게 사라지는 광경은 목숨을 구함받으면서도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콕! 내 살아생전에 저 할망구가 이렇게 반가운 날이 있을 거 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구명지은의 상대를 알아본 곽무헌의 농지거리에 송현 은 안력을 돋우었다. 진홍색 넓고 풍성한 가사에 목에 걸린 염주가 검을 휘 두를 때마다 출렁거렸다. 구마강시들은 그 검에 스치기만 해도 검은 연기로 변해서 소멸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마강시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신지 몰라도 목숨을 빚졌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잘 나오지 않는 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는 비구니였다. 만자가 새겨진 승모 아래 연륜이 있어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흥!"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냉담하게 콧방귀를 끼고 돌아서는 그녀의 태도에 머쓱해진 송현을 보고 곽무헌이 바닥에 널브러져 채 파안대소를 했다. "하하하하, 왜 저 마녀를 보고 냉혈사태라고 하겠느 냐?" "냉혈사태?" 고개를 갸웃거리는 송현의 눈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총군사!"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무림맹 총군사 사공혜미였다.  "그대가 어떻게 여기에?" 반가움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곧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사공혜미를 보자 그 동안 그녀에게 모질게 대했던 일들이 너무나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대를 볼 낯이 없구려." 송현의 따듯하게 대해 주니 사공혜미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한마디에 그동안 서운하던 감정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놈아! 나는 죽어가는 데 네놈은 연애질이냐!" 곽무헌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곽무헌에게 다가갔다. 연방 심통을 부리는 모습을 보며 송현과 사공혜미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상세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마지막에 송현에게 달려드는 구마강시를 곽무헌이 몸으로 막아 냈기 때문이었다. 괜히 미안해진 송현은 고개를 숙였다.  "어라, 이놈 봐라! 이런 면도 있었네?" 곽무헌이 짓궂게 굴자 송현은 얼굴이 벌게졌다.  "놀리지 마십시오!" 정색을 하는 송현을 보며 곽무헌은 키득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내를 가득 메우며 들어오는 무 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거냐?" 자신을 바라보며 물어보는 곽무헌에게 사공혜미는 한 

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눈치 챘는지 곽무헌은 고개를 끄덕 였다.  "망할 할망구가 냄새를 맡은 모양이군. 늑대를 피하려 다 범굴에 들어간 셈이 되어 버렸어." 곽무헌이 편치 않은 심정이 되자 송현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도대체 아까 그 사태가 누굽니까?" 송현의 물음에 곽무헌은 기분 나쁜 소리를 냈고 사공혜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미파의 장문인...... 정인사태예요." 소스라치게 놀란 송현이 도도하게 서 있는 정인사태를 쳐다보았다. 절대로 산문을 나서지 않는다는 신비인 정인 사태의 명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친 정인사태가 미소를 짓자 송현은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좋은 감정으로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겨가 위기를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곽무헌의 말대로 더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했다. 

여호모피(與虎謨皮) 

- 이 고사는 태평어람의 직관부 사도 하 편에서 실려 있는 이야기로 여호모피라 함은 호랑이에게 제 가죽을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구하는 일이 상대방의 이해와 상충하여 이루어질 수 없음 또는 이해가 상충하는 상대방이 도와줄 리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정인사태를 필두로 무려 일백오십 명이나 되는 아미파 문도들이 당문의 지하 깊숙이 숨어 있던 지하 공동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의문을 품고 있단 송현의 의구심은 곧 풀렸다.  "내 그대에게 구명지은을 입고도 인사조차 못했으니 결네가 컸소이다. " 안정을 찾은 공지대사가 송현에게 포권지네를 하며 감사해 했다. 곽무헌은 그런 공지대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송현은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공al대사와 소림의 제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해들은 송현은 서둘러 인사를 마쳤다. 어느새 달려와 품에 안기는 당소혜 때문이었다.  십 년을 혜어졌다. 상봉하는 가족처럼 매달리는 당소혜 때문에 송현은 조금 전까지 생사를 넘나들었던 악전고투를 잊을 수 있었다.  "괜찮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좋은지 눈까지 강고 송현의 손길을 느끼는 당소혜의 표정이 너무나 귀여웠다.  "응!" 송현의 품에 안긴 당소혜가 사공혜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공혜미도 자신을 유심히 보는 소녀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꼬마 아가씨?" 송현의 품속으로 숨어 버리는 당소혜를 보며 사공혜미 는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에요?" "이야기 하자면 길어요. 나중에 해 줄게요.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죠?" 아미파의 수뇌부가 모여 있는 곳을 슬쩍 곁눈질하자 사 공혜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차마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작게 속삭이는 정도였다. 그것도 행여 누가 들을까봐 무척이나 조심했다.  

  "그녀를 조심하세요."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게 보일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곽무헌에게 사공혜미와 아미파의 관계를 대충 들어서 알고 있지만 지금 보여 준 그녀의 모습을 보면 들어서 알 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두려운가요?" 대답 대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며 송현은 화가 났다. 누군가에게 종속된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을 실제로 보게 되니 알지 못할 분노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너무나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죄라면 그녀 의 지였다. 곽무헌에게 듣기로는 그녀 나이 아홉 살에 아 미파로 팔리듯 왔다고 한다. 정인사태는 사공혜미에게 천하의 유명한 학자들을 붙여서 공부시켰다. 하지만 절대로 금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무공이었다.  곽무헌이 우스갯소리로 해 준 이야기 중에 아미락의 어느 제자가 사공혜미에게 건강을 위해서 간단한 초식을 가르쳤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연이 있었다.  인자해 보이는 정인사태의 얼굴 뒤에 숨겨진 잔혹한 성 정이 보이는 듯했다.  춥지도 않은데 오들오들 떠는 사공혜미가 안쓰러웠다.  송현은 사공혜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내가 지켜 주겠소." "......" 깜짝 놀란 그녀의 봉목이 송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 담긴 진심을 보며 사공혜미는 겨우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공혜미는 송현이 자신을 보면서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도 어디선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 몰라 내가 사공혜미를 외면한다면 그녀도 누군가에게 외면당할지 모른다.' 사공혜미가 이런 속내를 알았다면 실망했겠지만 지금 은 그저 그의 따뜻한 배려에 감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꼴이 시어서 참을 수가 없구나. 애 앞에서 무슨 짓 이냐?" 언제 곁에 왔는지 곽무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사공혜미가 노려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그나저나 저 할망구가 왜 온 것이냐?" 어느 틈엔가 당소혜를 빼앗아 품에 안은 곽무헌이 정인 사태와 장로들이 모여 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공혜미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본 곽무헌은 콧방귀를 끼었다.  "네가 나의 감시자였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송현은 눈을 깜빡이며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곽무헌은 당소혜와 장난을 치며 외면했다. 사공혜미는 정체를 들킨 도둑처럼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미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사공혜미의 목소리가 변했다. 이 순간은 무림맹의 총군 사로 돌아와 있었다. 잠시 송현을 만나서 흐트러졌던 여 인의 감정을 접어 버린 사공혜미는 빈틈없던 총군사로 돌아온 것이다.  "콕콕! 이제야 너다워 보이는구나." 곽무헌의 빈정거림에도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저다운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맹주님께 위해를 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히던 그녀라 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송현이 어색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보기 싫었던지 그녀는 애써 눈길을 피했다.  "너를 믿어도 되겠느냐?' 뜬금없는 말에 송현은 당황했고 사공혜미는 눈빛을 반짝였다.  "저를 믿지 마시고 제 살고자 하는 마음을 믿으세요." 지지 않고 마주보는 사공혜미의 눈을 보고 곽무헌은 기 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이 많은 계집들 중에 적어도 등에 칼을 꽂지 않을 한 사람은 확보한 셈이군. 응?" 뭔가가 잡아당기는 느낌에 곽무헌은 의아해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는 당소혜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크하하하! 그래그래 너도 있었구나!" 뭐가 그리 좋은지 곽무헌은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영문을 모르는 송현만 어리둥절해 있을 뿐이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곽무헌이 뚝 하니 웃음을 그쳤다.  정인사태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온 것이다. 사공혜미는 무림맹주보다 더 어렵게 대하며 뒤로 물러났다.  "무림맹의 맹주라는 작자가 그 꼴이 뭔가요? 쯧쯧쯧!" 찬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온 정인사태의 핀잔 섞인 잔소리에 곽무헌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 할망구가 어디서 시비야? 평생 아미산에서 안 나을 것처럼 굴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예까지 행차하셨나?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랬다면 몰라도." 곽무헌의 짓궂은 농에 정인사태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곽무헌은 짐짓 무섭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에구 무시라! 저 눈 좀 보소.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기세로세,"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너스레는 떠는 곽무헌에게 정인사태의 매서운 눈빛이 쏘아졌다.  "이크!" 역시나 엄살을 부리며 허둥거리는 곽무헌의 너스레 때문에 정인사태의 화가 더 커졌다.  "채신머 리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서 달려들 태세였다.  정인사태의 손에 들린 검을 본 송현의 낯빛이 달라졌다.  '저 검, 뭔가 다르다? 구마강시를 단숨에 요절 낸 정인사태가 휘둘렀던 검이었다.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여유를 가지게 된 지 금 눈여겨볼 수 있었다. 검에서 느껴지는 기운아 낯설지 않았다.  송현의 눈길을 느꼈는지 차가운 정인사태의 눈동자가 송현을 쏘아보았다.  "네 녀석은 뭐지?" 아미깍 특유의 오만하고 도도한 자태에 송현은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송현이 라고 합니다. "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기를 느낀 송현은 저도 모르 게 기운을 끌어올렸다.  "요놈 봐라!"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정인사태가 송현의 멱살을 잡아 당겼다. 여인의 손에 건장한 사내가 매달린 광경이 볼만 했는지 곽무헌은 키득거리며 재미있어 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응?' 섬뜩해지는 기운을 느낀 곽무헌은 품속의 당소혜를 재 빨리 진정시켜야 했다. 송현에게 위해가 가해지자 당소혜 가 무서운 기운을 뿜어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곽무헌이 필사적으로 괜찮다며 다독거리지 않았다면 모르기는 해도 커다란 불상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진땀을 뻔 곽무헌이 짐짓 정인사태를 나무랐다.  "무림 선배라는 할망구가 애송이에게 힘자랑이나 하고 그거야 말로 채신머리없는 짓으로 보이는데?" 고개를 홱 돌리며 노려보는 정인사태를 향해 곽무헌은 혀를 내밀었다.  "이......" 폭발 직전의 정인사태와 곽무헌 사이에 끼어든 것은 다름 아닌 사공혜미였다.  "두 분 다 그만하시지요.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 냉정한 그녀의 말에 두 사람 모두 머리를 식혔다.  "흥!" 거칠게 손을 뿌리치는 바람에 송현은 하마터면 바닥을 굴러서 낭패를 당할 뻔했지만 경신법으로 겨가 망신을 당 하는 것을 모면했다. "제법이로구나, 애송이!" 칭찬이 아닌 비아냥거림이었지만 송현은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가 못마땅한지 정인사태는 매섭게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치 엄중히 경고하는 듯했다.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것처럼 말이다.  "괴수는 어디 있습니까?' 사공혜미가 곽무헌에게 묻자 정인사태의 눈이 가늘어 졌다.  "도대체 누가 그런......?' 모른다고 잡아?"려던 곽무헌은 멋쩍게 서 있는 공지대 사와 눈이 마주치자 입맛을 다셨다.  "끙! 그게 말이지 이거야 원 말을 해도 믿을지 모르겠네." 난처해하는 곽무헌 대신 송현이 나섰다. 정인사태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또 나서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자 신의 관심사였기에 무시했다 "소멸되었습니다. " 정인사태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어찌 그런 일이? 그건 말도 안 돼!" 그녀의 태도를 보며 송현은 정인사태가 괴수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음을 눈치 챘다.  -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예전 소림의 참사를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 소림의 참극이라면? - 그래, 처음 무극무해가 전해진 바로 그 당시를 말하는 것이다.  -아! 곽무헌의 전음을 통해 사정을 들은 송현은 무당의 장진 인과 소림의 혜승선사가 천축에서 가져온 무극무해를 익힌 소림 나한승들의 비극을 떠올렸다.  '구대문파 장문인들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무극무해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이제야 정인사태의 출현을 이해하게 된 송현은 곽무헌과 사공혜미의 대화에 담긴 뜻도 알 수 있었다. 괴수와 구마강시에게서 겨가 살아났지만 진짜 위험은 지금부터라 는 것을 깨달았다.  '무극무해가 다시 중원에 나타났음을 알게 되면 정인 사태는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얻으려 할 것이다. ' 그토록 우려하던 일이 결국 벌어지고 만 것이다. 곽무헌이 사공혜미에게 믿어도 되겠냐고 말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일이 난감하게 되었어!'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답답함을 안으로 삭인 송현은 곽무헌이 서둘러 이 자리를 피하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그것은 송현도 마찬가지 였다.  '절대로 세상에 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시타르의 마지막 유언을 며올린 송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너 이 녀석! 사실대로 말해라. 어찌 된 영문이냐?" 위협적인 태도에 송현은 잠시 주저하더니 괴수와의 사투를 정인사태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필요한 부분만 간추 린 송현의 관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였다. 적당히 감출 것 은 감추고 덜어 내고 정인사태가 궁금해 하는 내용만 들려주었다.  "흠......‥ 손에 턱을 괴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정인사태 를 똑바로 바라보는 송현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있다는 듯 당당했다.  "그러니까 괴수로 변했던 무림 고수가 정신을 차린 뒤 스스로 소멸했다는 게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정인사태의 물음에 송현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네, 그렇습니다. 무시무시한 괴력을 보여 준 괴수는 마지막 순간에 잠시 인성을 되찾고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 하며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 "사실이더냐?" "이 송현의 목을 걸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 맑고 투명한 눈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연하게 서 서 자신을 바라보는 송현을 보며 정인사태는 불쾌해 했다. 송현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진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듯 정인사태는 곽무헌을 노려보았다. 곽무헌은 괜히 움찔해 보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것이 아니었단 말이오?" 왠지 절박해 보이는 정인사태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곽무헌은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나도 혹시나 했지만 아니었소." 곽무헌 역시 진중한 자세로 대하자 정인사태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그 모습이 표독스럽고 차가운지 보는 이의 가슴마저 서늘해질 지경 이었다.  그녀의 눈길을 마주한 곽무헌은 녹록치 않은 연륜으로 대했다. 알맹이는 쏙 빼 버린 이야기를 그녀가 믿든 안 믿든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송현과 곽무헌 두 사람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정 인사태와 아미파의 문도를 상대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혹마저 있으니 성급하게 행동하다가는 크게 위험을 자초할 염려가 있었다.  장인사태의 침묵에 송현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행여나 그녀의 의심이 깊어져 일이 틀어진다면 당문에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몰랐다.  곽무헌도 여유를 부리고 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마찬 가지였다. 그녀가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나 잔인한지 잘 알고 있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인사태는 우두커니 서서 골똘히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송현은 그런 정인사태 너머로 공지대사를 쳐다보았다.  그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놀 랍게도 공지대사가 송현을 보며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 이는 것이 아닌가? 마치 겨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보였다. 곽무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인사태 때문에 내색을 못하고 두 사람은 그저 조바심을 낼 뿐이었다.  

  "그렇다면 당문의 소행으로 봐야 한다는 뜻인가? 뭐 좀 알아낸 것이 있소?'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채근하는 정인사태에게 곽무헌의 한심하다는 듯이 성을 냈다.  "그대가 알다시피 진법에 갇혀 허우적대던 우리들인데 무엇을 알겠어?" 곽무헌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정인사태는 곤혹스러워 했다.  자신의 직감을 믿고 떠난 무리한 출정이라. 그러니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간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 다. 손바닥 사이로 아무도 모르게 손톱이 파고 들어갔다.  "혜인 사저!" 성난 외침에 혜인사태가 나는 듯이 달려왔다.  "아무래도 당문이 이 지하에서 무언가 일을 꾸민 것 같 다. 샅샅이 살피도록!" "존명 !" 혜인사태의 명에 따라서 일백오십의 아미파 문도들이 지하 동공으로 퍼져 나갔다.  문파에서 공을 세우기란 참으로 요원한 일이다. 줄줄이 위아래로 늘어선 선후배들 틈에서 눈에 띄는 공을 세워 장문의 눈에 드는 일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지만 일단 성공한다면 출셋길이 보장되는 셈이니 누구나 그런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기회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을 세우기 위해 아미의 제자들은 눈에 불을 켰다.  그것을 지켜보던 송현은 불현듯 생각난 것이 있어서 머리를 쳤다.  '아차!' 당소혜와 함께 보았던 밀실! 그 안에 잡혀 온 수많은 이 들과 실험실이 생각난 것이다.  정인사태가 그것을 본다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그 렇게 된다면 자신의 거짓말도 탄로가 날 테고 결국 무극 무해의 흔적을 찾은 정인사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당황한 송현을 보고 곽무헌은 눈을 부라렸다. 행여 정 인사태가 이상한 낌새라도 챌까 봐 서둘러 송현을 자신의 몸으로 가렸다.  그리곤 괜한 헛기침을 하며 정인사태의 관심을 돌렸다.  다행히 정인사태는 단념이 빨랐다. 이미 곽무헌과 송현 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이 비밀 장소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문도들을 닦달하는 중이 었다 "이 미련한 놈아. 일을 죄다 망칠 셈이냐?" 곽무헌이 으름장을 놓자 송현은 정인사태가 문도들에게 명을 내리는 것을 보며 조심스럽게 자신이 본 밀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뭐?' 왜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곽무헌은 어쩔 줄 몰 라 했지만 이미 정인사태는 아미파의 문도들과 지하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 사공혜미가 공지대사와 무언가 심각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잠시 송현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웃는 모습과 함께 손을 들어 보였다. 송현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불안감이 스쳤지만 애써 웃어 준 송현은 사공혜미가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숨을 내 쉬었다.  

아미파가 예상 밖으로 지하 동공을 수색하려 하자 송현은 다급해졌다. 이에 조바심이 난 송현은 곽무헌을 채근 했다.  "어찌합니까? 이리 놔두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송현의 닦달에 곽무헌이 이마에 주름을 잔뜩 만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어쩌긴 뭘 어째, 쫓아가 봐야지! 만약에 그 할망구가 뭔가 냄새를 맡고 소란을 떨게 되면 조용하던 구대문파들이 모두 나설 게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될지 말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겠지?" 잠시 머릿속에 떠올려 본 송현은 몸서리쳤다. 피바람이 불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그리는 못하게 해야죠." 결심이 선 송현은 당소혜를 잡고 어려운 부탁을 해야만 했다. 밀실로 안내해 줄 것을 부탁하니 당소혜는 꾸밈없는 맑은 얼굴로 기꺼이 승낙했다.  송현은 왠지 당소혜를 이용하는 것 같아 꺼림칙했지만 지금은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밀실로돌아가면 또 어 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해 본 송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 인가 '음' 용을 써 보았지만 단전에 느껴지는 내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부상을 당한 신체는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할 일이 눈앞에 있으니 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송현은 당소혜를 앞세워 다시 금 당문의 지하 깊숙이 들어갔다.  

인적이 사라진 지하의 광장으로 방갓을 쓴 무인들이 날 아들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이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닥에 난 흔적들을 손으로 매만지며 확인했다.  "아직 따뜻합니다. 여기서 많은 무리로 나뉘어졌습니다. 찾는 일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 수하의 보고에 방갓의 매듭이 가장 많은 사내가 인원을 나누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라. 다른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마 라!" 감정 없는 냉막한 음성에 방갓쓴 무리들이 허리를 숙였다.  "명심해라! 우리의 목표는 단 한 놈이다!" "복명 !" 짧게 대답한 방갓 쓴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매 듭을 많이 단 사내가 수많은 발자국으로 흐트러진 광장의 바닥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수하 하나가 겨정을 드러내자 사내는 한숨을 쉬었다.  "주인께서 아신다면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무송 그 친구에게 신세진 것이 많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어. 당포 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더라도 친구의 부탁은 들어줘야지, 그리고 어차피 우리 손에 죽는다면 상회의 후계자라고 하 기에 부족하지 않은가?" 

  방갓 쓴 사내의 넋두리에 수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단. 한차네 바람이 불자 지하 광장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았던 것처럼...... 

  곽무헌과 송현은 당소혜가 이끄는 대로 전혀 길처럼 보이지 않는 험지를 헤쳐 나가야 했다. 뒤에서 곽무헌이 연 방 투덜거리자 송현이 참지 못하고 고함쳤다.  

"어린 아이도 아무런 불평이 없는데 다 큰 어른이 엄살이 그리 심하십니까?" 송현의 힐책에 곽무헌이 발끈했다. "어딜 봐서 그 녀석이 어린애라는 거냐? 무려 백 살도 넘은...... 맹주님!" 송현이 노려보자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제야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문 것이다.  당소혜는 자신이 독정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당연히 백 년이 넘도록 살아온 세월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 아이의 지적수준만을 지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그녀가 자각을 하게 된다면 큰 위험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송현은 조심에 또 조심을 하고 있었다.  당소혜의 귀를 두 손으로 막고 있던 송현은 곽무헌에게 눈빛으로 다짐을 받고 나서야 다시 소혜의 귀에서 손을 뗐다. 다행히 아미의 제자들은 이쪽으로 관심을 가진 이들o 없었다. 몇 번이나 뒤를 확인하는 통에 걸음이 더뎠지만 만사 불여튼튼이었다.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송현은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그러나...... 한밤의 먹이를 뒤쫓는 승냥이처럼 몰래 뒤를 따르는 이가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스멀거리는 그림자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존재는 기척을 죽이고 몰래 뒤를 따랐다.  

  또르륵! 동굴 천정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가 크게 울렸 다. 그만큼 밀네된 공간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뺨에 느껴지는 바람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쾌나 깊이 들어온 것이다.  당소혜가 검은 돌이 막아선 길의 끝을 가리켰다.  "여 기로구나!" 송현과 곽무헌이 눈빛을 교환했다. 양쪽에서 바위를 맞 잡은 두 사람은 내력을 사용하며 홈이 난 자국을 따라서 밀었다.  그그긍! 밀리는 소리와 함께 돌문이 한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사람 하나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지체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럴 수가!" 당황한 송현보다 곽무헌의 놀람은 더욱 컸다. 백 명도 넘는 이들이 모두 숨이 끊겨 있었다. 몰래 훔쳐보았을 적 에 있었던 검은 복면의 무리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재산에서 사라진 도사들이 모두 여기 있었구나!" 곽무헌은 돌 침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생존자가 있는지 살폈다.  "틀렸다. 모두 죽었어!" 곽무헌이 낭패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송현 은 사람들의 몸에서 체액을 빼내던 광경이 떠올라 중앙에 있던 거대한 수조를 찾았다.  "이게 뭐하던 거지?' 곽무헌은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올라오는 텅 빈 수조 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송현은 빈 수조를 내려치며 아쉬워했다. - "지독한 놈들!" 자신들이 침입한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증거를 없애고 사라진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밀실이 또 있으니 서둘러 야 합니다. 소혜야 그곳도 안내해 줄래?" 송현은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대응했다. 그 많은 일을 처리하다 보면 분명 누군가는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걸 바탕으로 흥수의 정체를 밝혀 낼 실마리를 찾아내야 만 했다.  송현이 당소혜와 함께 밀실을 빠져나가자 뒤를 따르던 곽무헌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밀실을 돌아보았다.  "이놈들 왜 이런 장치를 해 놓고도 그냥 두었을까?" 곽무헌의 시신들을 살필 때 눈여겨보았던 가운데 기둥 앞으로 다가갔다.  곽무헌의 눈길을 끈 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조 옆에 정교하게 맞물려 놓은 대리석 조각들이었다. 그것은 천정 지붕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곽무헌은 대충 그 용도를 짐작 하고도 남았다.  입맛을 다신 곽무헌은 잠시 고민하더니 발끝으로 가운 데 조각을 빼밖다.  드드드드! 

맞물려 있던 조각이 사라지자 가운데 기둥이 무너지면 서 밀실 전체에 균열이 시작되었다.  투두둑! 지붕에서 돌조각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자 곽무헌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빠져나갔다.  "이 밀실이 발견되기를 바란 모양인데 그렇게는 못하지." 콧방귀를 홀린 곽무헌은 송현의 기척을 쫓아서 속력을 높였다. 등 뒤로 들리는 굉음에 회심의 미소까지 지어 보 였다. 밀실은 순식간에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 버렸다. 

  쾅! "빌어먹을!" 또다시 텅 빈 수조를 보게 된 송현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참지 못하고 발길질을 하고 말았다. 사기로 만들어진 빈 수조는 충격을 못 견디고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조각난 수조 파편을 집어 든 곽무헌은 냄새를 맡아 보고 손가락으로 남아 있는 액체를 손가락을 찍어 맛을 보았다.  "사람의 체액입니다. " 뗑그랑! 곽무헌은 한동안 얼음 조각상이 되어 버린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더니 하망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볼 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우욱!" 손가락을 집어넣어 억지로 토해 내는 곽무헌을 보고 당 소혜는 깔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쳤다.  "물! 물!" 속을 게워 내며 토악질을 하던 곽무헌에게 당소혜가 물 을 건넸다.  "고, 고맙구나!" 허겁지겁 당소혜가 건덴 물을 벌컥 벌컥 들이마시던 곽무헌은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느낌이 이상함을 눈 치 챘다.  "물맛이 어째 이상...... 으헉!" 당소혜가 건넨 것은 물이 아니었다. 이런 밀실에 물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설마?" 사색이 된 곽무헌이 고개를 돌리자 당소혜가 천진난만 한 표정으로 반쯤 부서진 수조의 바닥을 가리켰다.  "아직 많이 있어 할아버지. 천천히 마셔!" 얼마든지 더 주겠다는 당소혜의 친절에 곽무헌은 피를 토하고 쓰러질 뻔했다.  "우웨웨엑!" 경기를 일으킨 곽무헌은 사력을 다해서 목에 넘긴 정체 불명의 액체를 뱉어 내기 위해 내공까지 동원했다. 종내에는 더 이상 나을 것이 없는데도 목젖을 자극하니 위산이 독하게 흘러나왔다. 거의 시체와 다를 바 없는 행색의 곽무헌 앞에 조그려 앉은 당소혜가 턱을 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맛이 없어? 그럼 이걸 마셔!" 더 진한 체액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곽무헌의 코앞에 내 밀었다.  "우우우우웨엑 !" 불쌍하게도 더 이상 나을 것이 없는 곽무헌의 위는 자연 반사적으로 토악질을 해 댔다.  "소혜야, 그거 어디서 났니?" 소혜의 손에 들린 붉은 빛의 체액을 보고 깜짝 놀란 송 현이 다그치자 겁에 질린 소혜가 밀실의 구석을 가리켰다.  "저 안에 또 방이 있어." 미처 치우지 못한 곳이 있음을 안 송현은 표정이 환해 졌다 "송가야, 물...... 물 좀 다오!" 숨넘어가는 곽무헌을 남겨두고 송현은 어둠 속에 가려 진 밀실의 통로를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소혜야, 할아버지 좀 돌봐 드려!" 한마디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고 사라진 송현의 부탁에 당소혜가 손을 걷어붙이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겨정 마 오빠! 여기 물 많아!" "커헉!" 곽무헌의 몸이 경기를 일으키다 못해 발작하고 있는 것 을 보며 당소혜는 고개를 저었다 

역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좁은 복도로 안력을 돋우며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시간이 흐르고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 변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딸그락! 발치에 치이는 것들을 집어 드니 질그릇들이었다. 평범한 질그릇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약초 향이 많이 나는 것으로 보아 약을 찧고 가는 데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온갖 약초와 독초들이 뒤려인 냄새였군." 너덜해진 장포 자락을 찢어 코와 입을 막은 송현은 급 하게 떠나 흔적이 역력한 밀실 몇 군데를 더 통과한 후에 걸음을 멈췄다.  '인기척이다!' 손에 든 청룡검을 확인한 송현은 내력을 두 다리에 집중하며 기척을 죽인 채 다가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무언가 당황한 음성이 뒤섞여 들려왔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 일에 대해서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므로 반드시 사로잡아서 어찌 된 일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불빛! 어둠 속에서는 작은 불빛이 커 보인다. 태양빛처럼 환 한 빛을 따라서 송현은 몰래 숨어들었다.  '세상에 맙소사!' 밀실의 정경을 확인한 송현의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 천인공노할 놈들 같으니라고!" 대노하여 소리치니 밀실 안에 있던 이들이 기겁을 하며 뒤돌아섰다.  그곳에는 형편없는 몰골이었지만 형형한 눈빛을 빛내 고 있는 송현이 청룡검을 든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횐수염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노인이 표독스럽게 물어 오자 송현은 이를 갈았다.  "나? 지옥의 판관이다. 지금부터 네놈들을 단죄하겠다!" 송현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훈일유(一薰一硫) - 향기 나는 풀이 누린내 나는 풀을 죽인다는 뜻으로 좋은 일 즉, 선함은 쉽게 잊히고 악함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노인의 옆을 지키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특이하게도 검이 아닌 편을 날렸다. 그 사나운 기세만큼이나 독랄하게 송현의 요혈을 노렸다.  따다당! 편의 끝에 달린 금추가 청룡검에 부딪히면서 요란한 소 리를 냈다. 불똥이 튀떤서 송현의 무서운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우우웅! 이젠 송현을 주인으로 생각하는지 오악검존의 청룡검 은 송현의 기운을 잘 받아들였다. 번뜩이는 청룡검의 검 날이 도륙을 시작했다.

  노인의 횐 수염이 세차게 떨리는 몸보다 더 격하게 떨었다. 자신의 지키던 호위 무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바닥을 ?"구는 광경이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이었다.  송현의 검은 평소와 달리 처음부터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들을 악행을 보아 온 터라 용서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복면인들은 모두가 팔이나 다리를 잘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을 흘렸다.  "잔혹하구나!" 한 수에 죽일 수 있음에도 일부러 고통을 주는 수법을 악랄하다고 비난하자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힐난했다.  "닥쳐라! 무고한 이들을 데려다 실험 도구로 사용한 자 가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다니 웃기지도 않구나!" 일부러 팔다리를 자르는 격한 수법을 쓴 덕택에 송현은 온몸에 피칠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으음!" 가슴에 보자기를 꼭 품은 노인은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 질 쳤다. 그러나 도망치기에는 밀실이 너무나 작았다.  탁!  

  얼마 가지 못하고 등이 벽에 닿자 노인은 바들바들 떨 며 목숨을 구걸했다.  "사, 살려 주시게! 제발 이 늙은 목숨을 한 번만 살려 주게!" 애처로울 정도로 매달리는 노인의 작태에서 구역질이 난 송현의 눈에는 애초에 자비심 따위는 없었다. 차디찬 검 끝이 목젖에 닿자 노인의 동작이 멈췄다.  "제...... 제발......‥ 기어 들어가는 노인의 음성에 자극받았는지 송현의 손 에 힘이 들어갔다.  "허 억 !" 목덜미에 붉은 혈흔이 만들어지고 실펏줄 같은 피가 흘 러 내리자 노인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나 죽네, 살려 주시오. 뭐든 다 할 테니 살려만 주시오." 왜 갑자기 살심이 솟구쳤는지 모른다. 다만 이 노인을 죽여 무고하게 죽어 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만 하게!" 언제 쫓아왔는지 곽무헌이 당소혜를 안고 나타났다.  "알아낼 것이 있지 않은가? 분한 마음은 그 다음일세." 곽무헌의 말이 옳았다. 송현은 잠시 들끓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검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노인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죽다 살아나게 되면 사람은 크게 달라지는 법이다. 노인은 곽무헌에게 매달려 울먹였다.  "살려만 주면 모든 걸 다 말하리다. 나라고 좋아서 이 짓을 한 건 아니오." 노인은 필사적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노인의 말이 사실처럼 들렸지만 당소혜가 노인을 보며 몸서리치자 곽무헌은 그 말이 거짓말임을 쉽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연륜이 란 이런 데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곽무헌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노인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자, 자 일어나시오! 저녁석이 성질이 불같아서 그렇지 내가 말하면 잘 들으니 어떻게 영문인지 들어나 봅시다. " 곽무헌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으므로 송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말없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노인에게는 충분히 위협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노인은 곽무헌이 묻는 것보다 더 많이 털어놓았다.  지루하다 느낄 정도로 두서없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만!" 

  참다못한 곽무헌이 제지하고 나섰다. 어지간한 그로서도 노인의 앞뒤가 맞지 않는 신세타령을 듣고 신지는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잡혀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이 일을 시킨 흥 수가 누구인지 그게 알고 싶을 뿐이다. " 험상궂은 곽무헌이 으름장을 놓자 노인은 숨이 막히는 지 새파랗게 질려서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잡혀 온 사람들 저는 모릅니다. 그들이 어디 서 왔는지...... 아무튼 사람들에게 뭔가를 먹였습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약물을 먹은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제가 한 일은 주요 혈에서 체액을 빼는 일이었습니다. " "왜 체액을 빼냈지?" 노인은 모른다며 고개를 강차게 저었다. 도리질하는 노인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곽무헌은 눈을 가늘게 뜨며 노인의 얼굴에 코를 들이밀었다.  "그럼 그 체액들은 어디로 갔지? 아, 그것도 모르겠 군!" 이번에는 반대로 고개를 위아래로 심하게 움직였다.  "큭!" 실소를 터뜨린 곽무헌의 이마에 골이 깊게 패였다.  

  "그렇다면 이 아이도 처음 보는 아이겠군." 잠시 주저하던 노인의 고개가 마찬가지로 모른다며 위 아래를 끄덕 였다.  "그래?' 씨익 웃어 보인 곽무헌이 당소혜에게 손짓을 하자 무서 워하면서도 곽무헌 뒤로 다가와 몸을 숨겼다.  "소혜야, 이 할아버지 처음 보니?" 곽무헌의 부드러운 음성에 당소혜를 고개를 빠끔히 내 밀어 노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당소혜는 기겁하고 곽무헌의 뒤로 숨어 버렸다.  "저 할아버지 나빠! 소혜의 피를 매일매일 뺏어 갔어. 내가 아프다고 했는데도 늘 몸에 상처를 냈어!" 당소혜와 외침에 지금까지 벌벌 떨던 노인이 기세가 일변했다.  "타핫!" 장포 속으로 숨겼던 양손이 앞으로 뿌려지자 손끝에서 무수히 많은 우모침이 튀어나왔다. 한결같이 색이 죽은 걸로 보아 독침이 틀림없었다.  "헛!" 단발마의 기합성과 함께 곽무헌의 신형이 이동했다. 기민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피어났다.  

  "크크크! 아무리 빨라도 지척에서 뿌린 만지독화의 독액이 발라진 우모침을 모두 피할 수는 없을 터, 열을 세기 전에 네놈들은 끝장이다. " 노인의 말마따나 그가 출사한 우모침은 보기 힘들 정도 로 작을 뿐만 아니 라 그 수도 많았다.  곽무헌은 목 언저리에 꽃혀 있는 몇 개를 기분 나쁜 손짓으로 털어 냈다.  송현도 손을 들어 얼굴을 막은 덕분에 손등에 십여 개 가 박혀 있었다.  노인은 그것을 확인하자 지금까지 태도와 달리 가슴을 펴고 웃음을 터뜨리며 교활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훌훌훌, 어리석은 놈들 내 연기에 속아 넘어갔구나." 멍하니 쳐다보는 송현과 곽무헌을 보며 노인은 자신의 암습이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감히 노부를 핍박했으나 내 너희들에게 은혜를 베풀 어 주마. 만지독화는 너희들이 잠든 것처럼 편안하게 죽음을......" 아함,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펴는 곽무헌은 전혀 이상이 없어 보였다. 중독 증세는커녕 오히려 혈색이 더 좋아진 듯 싶었다.  "으헉 !" 

  노인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크게 당황했다.  "여덟, 아홉, 열!" 당소혜가 손가락을 꼽아 보며 노인에게 장난스럽게 손 을 펼쳐 보여 주었다.  "어, 어떻게? 설마 저 꼬맹이가?' 노인은 당소혜를 가리키며 이를 악물었다. 핏발선 노인 의 눈길에 당소혜를 얼른 곽무헌의 뒤로 숨으며 혀를 내 밀었다.  "저것이 그렇게 거부하더니 어떻게 처음 보는 놈들에게......:" 노인은 자신의 암습이 실패한 것보다 당소혜가 두 사람 을 따르는 것에 더 분해 보였다.  "백 년이다. 무려 백 년이나 공을 들였건만 죽 쑤어 개 준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이제 노인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슴에 꼭 품고 있던 보자기마저 바닥에 집어던지고 틸썩 주저앉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송현과 곽무헌을 노려보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금전을 들여 지켜 왔는데 저따위 이름도 모르는 것들에게 독정을 나누어 주다니, 이제 백 년의 정화도 탁해졌으니 내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음 이야." 분함을 이기지 못하는지 연신 씩씩거리던 노인은 고개를 들더니 크게 소리쳤다.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다고 했느냐? 좋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노인은 벌떡 일어나더니 밀실의 돌출된 돌조각을 힘차게 밀었다. 두 사람은 행여나 노인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나 싶어 서 경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돌출되었던 조각이 벽까지 들어가자 밀실 안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기관 장치?" 곽무헌의 예상대로 그그긍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밀실 의 한쪽 면이 미닫이문처럼 한쪽으로 밀려나며 비밀 공간 이 나타났다.  조심스럽게 그 안을 들여다본 곽무헌은 헛바람을 집어 삼킬 정도로 크게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송현 역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저 '어, 어' 하는소리를 낼 뿐이었다. 당소혜는 이미 본 적이 있는지 시큰둥했다.  "이 미친 영감탱이! 이게 무슨 짓이냐?" 노인의 멱살을 틀어쥔 곽무헌의 팔뚝에 힘줄이 도드라 졌다 숨이 막힐 텐데도 노인은 아까와는 달리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비웃음만 흘렸다.  "쳇!"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달은 곽무헌은 노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역시나 노인은 돌바닥에 부딪치며 벽 에 충돌할 정도로 심하게 내팽개쳐졌지만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도대체 이들이 누구기에?' 송현은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벽에 매달려 있는 수정관들 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 안에는 푸른 액체가 가득 채워 져 있었다. 그러나 송현을 놀라게 만든 것은 푸른색 액체 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일남일 녀, 일노일소였다.  그때 곽무헌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청성파 엽청군, 화산의 권무령. 하지만 동남동녀로 보이는 저 아이들은 누군지 모르겠구나. 왜 오래전 자취를 감춰서 세인들은 모두 은거했다고만 알고 있었거늘, 설마 하니 이런 곳에서 이런 꼴이 되어 있을 줄이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던지 곽무헌은 수정관 앞에서 눈을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에 송현은 분을 참지 못하고 노인을 찾았다.  "도대체 당신은 사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 떻게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이런 잔혹 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거야? 설마 저 아이도 당신의 짓인가?" 송현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잡아챘다. 당소혜를 가리키며 으르렁거리는 송현을 보며 노인은 입가의 홀러 내리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키득거렸다.  "내가? 그 말은 영광이지만 아쉽게도 내 실력으로는 어 림도 없는 일이지. 감히 독왕 당사륭의 발치도 따라갈 수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지." 노인은 이제 모든 것을 체념했는지 맥없는 소리로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곽무헌의 반응은 남달랐다.  "당사륭? 설마 독마 당사륭을 말하는 것이냐" 경악한 곽무헌은 송현에게서 노인을 빼앗아 마구 흔들 었다.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노인 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위대한 독왕 당사륭을 기억하는 자가 있다니 제법이 로구나." 노인은 사교에 빠진 맹신도처럼 당사륭을 이야기하면서 감격해 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당사륭은 광인이었다. 그 때문에 백 년 전 에 당문에서 축출을 당했고 무림공적으로 몰려 탄현애에 서 죽임을 당했다. 그의 모든 무공은 불태워 없어졌고 당 문에서도 그의 기록을 모두 없애 버린 것을 모르더냐? 그 광마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수백 수천이 희생되었다.  그걸 알고나 지껄이냔 말이다. " 곽무헌이 분을 참지 못하고 노인을 패대기쳤다. 이번에는 힘이 과하게 들어가 노인의 사지 중 몇 군데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송현은 이번에도 말리지 않았다.  "콕콕콕, 그건 무지한 네놈들이 지쩔이는 헛소리일 뿐 그분은 위대한 선지자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걸으신 선각자이시다. " 송현과 곽무헌은 노인의 광오한 말에 기가 질려 버혔 다.  "과거 당문의 화려한 명성은 모두 그분의 업적을 가로 챈 염치없는 짓거리였다. 중원의 명문정파라는 것들 역시 그분의 재주와 천재성을 시기해 누명을 씌워 불명예를 안 겨 준 것이다. "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곽무헌은 쓰러져 있는 노인의 가슴을 발로 밟았다.  드드득! 가슴뼈 내려앉은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닥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왜 여기서 갑자기 당사륭 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냐?그리고 이곳에서 행한 실험은 무엇을 위한 포석이더냐?" 사뭇 무서운 기색임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콕콕콕, 중원의 정파 놈들은 이제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이다. 그분의 업적이 이제 강호로 나갈 것이다. 중원무 

114 · 학사장문인 5 

림?" 이제 그분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것이다. " 갑자기 미쳐 버린 듯한 노인의 태도에 곽무헌의 노기는 첨차 도를 더해 갔다.  "미친놈! 어서 알해! 도대체 네 뒤에 누가 있는 거야!" 알에 힘을 주자 노인은 기침을 하며 더 웃지를 못했다.  그러더니 곽무헌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독정을 얻는 것은 실패했지만 독왕님의 후예들은 이곳에서 충분한 성과를 얻었다. 이제 곧 너희들을 찾아갈 테니 목을 내놓고 기다려라. 커헉!" 갑자기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떠는 노인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안 꽉무헌이 재빨리 곁에서 떨어졌다. 곧이 어 짙은 독무를 내뿜으며 노인의 몸이 녹아내렸다.  "이 지독한!"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곽무헌 앞으로 당소혜가 난서다 니 독무를 모두 흩어 버렸다.  "소혜가 나쁜 연기 다 없앴어, 이제 괜찮아 할아버지!" 몇 번 보았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설마하니 이 아이하 그 독정이란 말인가?" 무릎을 꿇은 곽무헌은 당소혜를 머리를 쓰다듬었다. 칭찬을 해 주는 것으로 안 당소혜가 특유의 눈을 감고 즐거워하는 표정을 해 보였다.  "후,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소혜의 몸 안에는 대단한 진원진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도 생각을 하는 영물이었습니다. " 송현의 설명에 곽무헌은 질린 듯한 표정을 해 보였다.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했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렵구나." 너무나 순수해 보이는 소녀가 피 한방울로 수백만을 죽 일 수 있는 독병기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아 곽무헌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당사륭의 추종자들인가요? 도대체 당사륭이라는 사람은 누구죠?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 곽무헌은 당소혜를 무릎에 앉히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알 리가 없지. 당사륭이라는 이름을 기록에서 지워 버렸으니까. 야사를 쓰는 이야기꾼들도 절대로 그 이름을 올리지 않지, 너무나 극악무도한 말종이기 때문이야. 혹 여 이후로 또다시 그런 악마가 나타나지 않게 하려는 이 유 때문이었는데...... 이젠 완전히 잊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중원무림이 완전히 착각을 하고 있었어." 곽무헌의 입을 통해서 백 년 전 무림의 비사가 흘러나 왔다.  전대미문의 천재이면서 독의 제왕이라고 불리던 사천 당문의 절대 초인 당사륭에 대한 이야기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은 당사륭은 십 세가 되기 전에 당문의 독을 통달했고 십오 세가 되기 전에는 극독에 대한 해독제를 만들어 내 당문을 발칵 뒤집었다고 했다. 이후 당사륭은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특별한 대우 속에서 후계자의 길을 걸었고 이를 당문에서는 특급 기밀로 처리해 누구도 당사륭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강수로채를 비롯한 사파들이 연합을 이루어 장강 이남을 장악하고 조정에까지 대적하는 큰 사 단이 발생했다.  대해의 해적들까지 힘을 합치는 바람에 그 세력이 관부 에서도 어쩌지 못해서 군을 동원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어이없게도 관군이 패퇴를 하고 만 것이다. 이에 사파연 합체는 기고만장하여 인근 지역을 무참하게 수탈을 하였 고 보다 못한 무림의 인사들이 토벌대를 만들어 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무림맹의 초석이 된 정파 연합이었으며 쟁쟁한 무림의 명숙들이 무기를 들고 장강 이남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출중한 무공을 가지고도 물 위에서 대항하는 사파 연합은 만만치 않았다.  정파 연합은 큰소리치던 것과 달리 체면을 구기게 되었고 전황은 예상치 못한 장기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때 홀연히 나타난 것이 당문의 당사륭이었다고 한다.  약관의 나이에 절세 미모를 가진 당사륭은 홀로 배를 타고 사파 연합의 본거지로 들어갔고 일각을 넘기지 않아 돌아왔는데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어보는 무림인들에 게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고 했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이들이 배를 타고 사파 연합의 본거지때 들어가 목도한 것은·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몇몇은 그 참혹한 광경을 이겨 내지·못하고 미쳐 버렸 으며 또 몇몇은 그날 이후 스스로 무공을 폐하고 불문에 귀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무렴 삼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파 연합 중 단 한 명도 살아남은 이들이 없었다. 더욱이 끔찍한 것은 모두들 스스로 제 몸을 해쳤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 목을 베고 스스로 사지를 잘라 내고 웃고 있는 광경은 그 어떤 말도로 형언할 수 없었고 이를 본 소림의 대승 좌승선사는 백팔지옥이 현세에 재래했다고 말했다 고 한다.  그 후 사천당문에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으며 중원무 림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사천당문의 이름이 곧 정의가 될 정도였다.  한 명의 기재로 인해 사천당문은 역사 이래 최고의 전 성기를 누렸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 나 좋은 꿈은 짧기 마련이라고 했듯이, 서서히 먹구름이 사천당문의 하늘 위로 몰려들었다.

  당사륭이라는 천재를 담기에 사천당문이라는 그릇이 너무나 작았던 것이다.  당사륭은 중원무림에 만족하지 못하고 천하를 꿈꾸었다. 이에 당문의 원로들은 크게 노했고 당사륭에게 경고를 했지만 이미 당사륭에게 그런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곪은 상처가 터지듯 당사륭과 당문의 갈등은 폭발 하고 말았고 당사륭이 비밀리에 자행했던 끔찍한 인체 실 험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당문에서의 축출, 동시에 무림 공적의 선포로 당사륭은 중원 전체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러야 했다. 피아 간 그로 인해 발생한 희생은 시산혈해 바로 그것이 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뿌리가 깊은 중원무림의 저력은 남다른 것이었고 당사륭을 따르던 무리 중 하나가 정파 무림 과 손을 잡는 바람에 그는 탄현애라는 만 리 절벽 아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를 따르던 추종 세력도 정파 무림의 무자비한 학살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무림의 어두운 비사를 전해들은 송현은 답답한 듯 숨 을 내쉬었다.  "결국 후손들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로군요." 곽무헌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소혜가 당사륭의 후손일 수도 있을까요?" 

  송현의 추측에 곽무헌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척살대의 손에 목이 잘렸다. " 확언하는 곽무헌을 보며 송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노인 의 녹아내린 시신을 가리키며 냉담하게 말했다.  "저자를 보십시오. 백 년이 지났는데도 마치 당사륭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도 당사륭의 차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사륭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미치광이들이 더 남아 있다는 겁니다. 이 제 어쩌시렵니까?" 더 이상은 숨길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곽무헌 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도 대답이 없었다.  맹주님!" 이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만한 사항이 아님이 밝혀졌으니 공론화하여 무림의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이 되 었음에도 곽무헌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송현 이 답답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 생각에는 이제 우리 손을 떠난 일 같습니다. 저 분들만 하더라도 문파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현이 재차 설득하려 하자 곽무헌의 냉담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차갑다. 너무나 차가운 말투에 송현은 움찔거렸다.  "저분들 어떤 분들인지 아느냐? 나 같은 건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어떻게 사로잡히셨을 까?" 냉랭하다 못해 살기마저 감도는 눈빛을 받은 송현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미 중원무림에 당사륭의 숨결이 사방에 묻어 있음 이야. 잘못하면 공론화가 아니라 우리 둘이 당할지도 모 른다. " 곽무헌의 억측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송현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무림의 생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송현은 의식하지 못하고 서성거리다 어지러움을 느끼고 수정관에 몸을 기대었다. 내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노인의 수하들을 상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꿈틀! 두근! 

아주 작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강해지자 상념에 빠져 있던 곽무헌도 알아차리고 경악했다.  "거기서 떨어지거라. 어서!" 다급한 외침에 송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러났다.  텅!텅! 죽은 줄 알았던 수정관 속의 노인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점잖은 도사의 모습에서 가시덤불 같은 흥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수정관을 깨물려고 하고 있었다.  "맙소사!" 뱀처럼 길어진 혀로 수정관에 묻은 혈흔을 핥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관 반대편에 묻은 피를 먹을 수 없음 을 모르는지 노인은 광기에 사로잡혀서 몸부림쳤다.  "이 죽일 놈들!" 분노가 치민 곽무헌이 수정관을 주먹으로 때리자 금이 가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그그극! 카캉! "맙소사!" 결국 수정관이 터지고 푸른 액체와 노인이 바닥으로 쏟 아졌다.  "우욱!" 생선 비린내 같은 역한 냄새가 밀실 안에 가득 찼다. 송현이 견디지 못하고 코를 막았지만 곽무헌은 살이 문드러진 노인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크르륵!" 귀에 익숙한 짐승의 소리에 곽무헌의 눈가가 파르르 떨 렸다.  "검을 다오!" 송현은 말없이 청룡검을 건넸다. 검을 든 곽무헌의 손 이 떨렸다.  "이분은 청성파의 무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고 검술의 세계를 미학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신 검선이셨다. 사리사욕과는 거리가 멀었고 흘로 독야청청하시던 분이시다. " 검선 엽청군! 이십 년 전에 갑자기 사라져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을 거라고 알려진 문림의 명숙이 송현의 피 냄새에 발광하며 바닥을 기는 괴물로 변했으니 참으로 기구한 일이었다.  "내게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쳐 주신 분이기도 하지." 넋두리처럼 흐르는 곽무헌의 음성에는 슬픔도 분노도 없었다. 그것은 허무 그 자체였다.  "적어도...... 적어도 이분은 이렇게 되실 분이 아니다. " 갑자기 목소리가 진해지며 그의 분노가 흘러나왔다.  "최소한의 명예와 덕을 존중하시던 분이 이렇게 돌아가셔서는 안 된다. " 검을 거꾸로 쥔 곽무헌의 음성에 짙은 살기가 배어 나 왔다 콰직! "쿠에에엑!" 송현을 향해 기어가려는 엽청군의 등에 청룡검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심장이 관통되었지만 엽청군은 징그러 운 혀를 날름거리며 버둥거렸다. 피부가 햇살 아래 얼음처럼 녹고 있는 모습은 끔찍했다.  청룡검의 손잡이를 잡은 곽무헌이 눈을 감고 무극무해 의 기운을 흘려보냈다.  파츠츠츠! 번갯불이 튀는 소리와 함께 엽청군의 몸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무극무해의 기운이 엽청군의 내부를 뒤흔들었 다.  "콜록! 콜록! 누...... 누군가? 나의 악몽을 깨워 준 이가?" 이미 반쯤 녹아내려 간 엽청군에게서 아주 가느다란 음 성이 흘러나왔다.  "무헌입니다, 어른신!" 눈이 붉게 충혈된 곽무헌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었지만 손이라고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헌? 허허, 그 망아지처럼 날뛰던 곽가냐?" 곽무헌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엽청군은 기 억이 점점 흐려지는지 말투가 어눌해졌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느냐?" 곽무헌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하니 엽청군은 허허 웃기만 했다.  "고마우이 ......‥ 그걸로 끝이었다. 한때 사람들에게 검선이라고 추앙받 던 이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초라하고 비극적인 결말이었 다.  무릎을 구부린 채 한동안 일어나지 않던 곽무헌이 가라 앉은 목소리로 송현을 찾았다.  "약속 하나만 해라!" 뜬금없이 약속을 하라는 말에 송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무슨?" 알 길이 없는 곽무헌의 속내를 어림짐작해 본 송현은 이내 포기하고 귀를 기울였다.  "내가 저렇게 되면 네가 죽여 다오!" 송현은 뜻밖의 부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 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쥘 뿐이었다.  "아니 저렇게 되기 싫구나! 그 전에 네가 내 목숨을 거 두어 다오." 송현은 속에서 뭔가가 끓어올라 참을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이놈 송가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구나!" 버럭 소리를 질러 보지딴 송현은 고개를 돌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소혜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상하자 중 간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약속하라니까!" 악을 쓰는 곽무헌에게 송현은 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다 늙어서 무슨 청승이랍시고 죽는다 어쩐다 소리를 하고 그러십니까?다시는 그런 소리 마십시오. 맹주님은 천년만년 아주 질기게 오래 사실 테니 말입니다. "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뜨거운 감정을 꾹꾹 눌러버린 송현은 청룡검을 뽑아서 수정관 앞에 섰다.  아마도 실패작들이 틀림없었다. 수정관 위로 좌군사 위 공의 슬픈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를 악물은 송현리 무극무해의 기운을 청룡검으로 흘 려보내자 청룡검이 구슬프게 울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냄새를 맡은 들짐승처럼 수정관에 잠들어 있던 이들 이 사납게 변해서 몸부림쳤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처음 소리 낸 것은 인간의 말이 아닌 괴물의 울음이었다.  "내세에는 반드시 좋은 시절, 좋은 삶으로 태어나시오!" 슈각! 무극무해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청룡검이 수정관을 베 고 찌르자 몸부림치던 미완성의 괴수들이 하나같이 생전 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소멸되었다.  "일어나십시오. 당사륭인지 뭔지 그놈의 미치광이 집단을 찾아서 박살내야 할 것 아닙니까?" 다부지게 말하는 송현을 보며 곽무헌도 큰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송가야, 이놈아 내가 누구더냐 나 권왕 곽무헌이다.  곽무헌! 내 이름 석 자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던 그 곽무헌이 라고!" 아까의 엄살은 어디 갔는지 다시 기운을 차린 곽무헌이 가슴을 치며 큰소리를 쳤다.  "응?"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곽무헌이 고개를 숙이자 당 소혜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소혜야, 무슨 일이냐?" 의아해 한 곽무헌이 고개를 숙이자 당소혜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제 딴에는 조용히 말한다는 것이 밀실이라서 크게 울린다는 생각을 못한 모양이었다.  깔'아버지,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털 난데." . "......?" "풋!" 송현은 당소혜의 진지한 표정에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애써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들썩이는 어깨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그러나 돌처럼 굳어 버린 곽무헌보다야 사정이 나았다.  잠시 다른 세계로 영혼이 여행을 다녀온 곽무헌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네 이 녀석!" 곽무헌이 도깨비 얼굴을 하고 소리를 지르자 당소혜가 "꺄아" 하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두사람이 쫓고 쫓기는 소란을 피우며 밀실을 빠져나가자 송현은 소리 내 어 웃었다.  "나 원 참, 어린애 같으시기는, 하지만 덕분에 쉽게 아픔을 털어 내실 수 있었으니 소혜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나 역시 마찬가지고. 웃음이란 이렇게 좋은 거로군." 송현은 당소혜 덕에 두 사람의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 졌음을 깨달았다. 다른 밀실을 모두 돌아보고 정인사태가 눈치 채지 않게 모두 페쇄한 다음 몰래 떠나야 했다. 서둘러 밀실을 떠난 송현은 미처 한 가지를 생각하지 못했다.  스르륵!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숨어있던 존재가 귀신처럼 튀 어나왔다.  "호호호, 그러면 그렇지 뭔가 냄새가 난다 했더니 곽가 그놈도 여우가 다 되었군." 발밑에 차이는 것을 검 끝으로 쳐올려 잡았다. 그것은 노인이 죽기 전까지 가슴에 품고 있던 보따리였다.  "호호호, 사내들이란 늘 흘리고 다니는 법이라니까!" 여인은 만족스러운지 보따리를 들고 송현이 나간 길을 따라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곽무헌이 조각을 찾아내 빼 버린 밀실은 차례 차례 붕괴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든 비밀도 함께 묻히길 원했지만 누군가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배수거신(杯水車薪) 

- 능력이 모자라 도저히 일을 감당할 수 없음을 비유

송현과 곽무헌은 두 개의 밀실을 더 파괴한 후에야 잠 시 숨을 돌렸다. 그 와중에 아미파의 제자들 중 한 무리와 조우할 뻔했지만 조심을 한 덕분에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린 일행은 마지막 밀실을 향해서 재빠르게 움직였다. 위치가 아미파 제자들이 수색에 나선 근방이라 서 위험의 소지가 있었지만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었다.  곽무헌이 난색을 표하며 빠져나갈 것을 종용했지만 당 소혜와의 약속 때문에 송현은 혼자라도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고 곽무헌은 별수 없다며 송현의 고집에 두 손을 들어야만 했다.  몇 번이나 아슬아슬한 줄타기 하듯이 아미파의 눈을 피 해서 대리석 문으로 막혀 있는 밀실 앞에 도착했다.  "역시나 막혀 있군." 밀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문을 만져 본 곽무헌이 인상 을 썼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곽무헌이 나서서 석문에 어깨를 대고 힘을 썼다.  웃챠! 힘쓰는 소리 한 번에 무거운 석문이 맥없이 밀려났다.  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기운 차린 것을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쓸데없는 무인들의 호승심이라고 생각한 송현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자신 역시 이제 강호에 깊숙이 발을 들였 으니 무림인이었다.  '훗, 나중에 나도 저렇게 변할까?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 렬 송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당소혜의 몸이 굳어 버린 걸 눈치 챈 송현은 상념 을 깨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소혜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 밀실이 바로 당문의 식솔들이 잡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들어가길 주저하는 당소혜를 번쩍 안아 들고 송현은 밀 실로 들어갔다. 어찌 보면 잔인한 짓일 수도 있지만 이곳 을 그대로 남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으로 들어서 자 곽무헌이 곧바로 석문을 닫아 버렸다.  쿵! 하는 소리에 당소혜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른 밀실에서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의아해 하던 곽무헌은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맙소사! 당일후 그대마저......‥ 피골이 상접하여 앙상하게 살가죽만 남은 노인을 보며 곽무헌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사천당문의 원로인 당일후는 당가 사람답지 않은 온화 한 성품으로 강호에서도 명망이 높은 인물이다. 그런 그 가 차디찬 돌 침상 위에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으니 청 성파 엽청군의 죽음에 이어 또 한 번의 감당키 어려운 아픔이었다.  "혹, 아시는 분입니까?" 곽무헌은 대답 대신에 고개만 끄덕였다. 엽청군과는 달 리 당일후를 대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친밀해 보였다.  "이 각박하고 살벌한 강호에서 몇 안 되는 벗이었지." 곽무헌의 음성에서 충분히 두 사람의 사이를 짐작하고 도 남음이 있었다. 그가 당문을 찾은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사천성 입구에서 유숙을 할때 친우한 명이 연락이 안 돼서 겨정이 된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갑자기 늙어 보이는 곽무헌이 안되어 보여서 그를 위로하려고 손을 들던 송현은 또 하나의 슬픔이 뒤에서 느껴지자 몸을 돌려야 했다. 그것은 서로 영적인 교감을 나눈 당소혜의 몸속의 독정이 송현의 무극무해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 무척이나 슬퍼하고 있어!' 무표정한 표정과 흔들림 없는 태도에 비해 내부에서의 울림은 마치 슬픔의 바다라도 되는 듯 끊임없이 밀려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침상 위에는 중년의 미부가 잠이 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사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젊었을 적에 상당한 입소문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당소혜의 보호자였음을 눈치 챈 송현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이분이 소혜를 돌봐 주신 분이로구나." 소혜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작은 입을 떨어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소혜를 돌봐 준 엄마들 중에서 제일 좋았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소혜를 보면서 송현은 가슴이 아려 왔다.  백 년을 넘게 살아온 소혜는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 가 는 것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정을 주고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들이 늙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서 의문이 들었을 테고 결국 자신이 남과 다름을 알았을 것이다.  그 순간이 마음의 문을 닫은 때가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해 본 송현은 그런 소혜의 얼어붙은 마음을 열어 준 것이 이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니 소혜의 슬픔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도 다른 엄마처럼 깊은 잠에 든 거야?" 송현은 죽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너무나 추상적이라는 사실은 차치해 두고 굳이 인간 의 삶 중에서 가장 큰 슬픔을 알게 해 주고 싶지는 않았 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랬다.  "그래 소혜야 아주 깊은 잠에 드신 거야, 하지만 소혜 가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아시면 무척이나 속상해 하실지도 몰라." 검은 두 눈동자가 놀라서 반짝거렸다.  "정말?" 

  송현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자 당소혜는 입술을 내밀 며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 살이 넘었지만 당소혜 는 어린 소녀였다. 그런 아이의 얼굴이 심각해 하고 있으니 송현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그나저나, 이상하다? 다른 밀실들은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이 모두 사라졌는데 어째서 당문의 식솔들만 그대로 둔 거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송현은 갑자기 뒷골이 서늘해졌다.  '뭐지 이 기분 나쁜 예감은? 대체로 좋지 않은 예감은 들어맞기 마련이었다. 그걸 잘 아는 송현은 당소혜를 품에 안고 곽무헌을 불렀다.  쟁주님! 이곳을 나가야 합니다. 아무래도 함정인 것 같습니다. " 송현이 재촉을 했지만 곽무헌은 벗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 반응이 더디기만 했다.  "제기랄!" 속이 타는 송현이 몸을 날려 곽무헌을 낚아챘다.  맹주님 가야 합니다. " 그제야 고개를 돌린 곽무헌은 잠시 동안 눈의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뭐라고 했지?"

  현실에서 멀어진 곽무헌에게 자리를 피해야 한다고 재 차 설명했다. 함정에 빠진 것 같다는 말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그때 밀실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제야 곽무헌의 표정이 렬래의 신색으로 돌아왔다.  "들킨 건가?" 금세 기운을 차리고 일어선 곽무헌에게 석문의 밀린 자 리에서 표시가 났을 거라고 설명했다.  "이런 그걸 생각하지 못했어?" 주먹을 내려친 곽무헌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해 보였다.  이미 이곳에서 빠져나갔어야 하는 자신들이 밀실에 있는 장면을 들킨다면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이곳에는 다른 밀실과 달리 의문의 죽음을 당한 당문의 식솔들이 누워 있다.  흥수라는 오해를 받는 것은 물론 괴수의 출현에 대한 의혹마저 받을 수 있었다.  "완벽한 덫에 걸린 셈이야," 두 사람이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밖에서 입구를 찾았다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어떻게 합니까?" 다급해진 송현이 재촉하자 곽무헌의 낯빛도 창백해졌다. 그때 곽무헌이 발견한 것은 수백 개의 돌 침상이었다.  

  그그그긍! 거대한 석문이 인위적으로 열리는 소리가 나며 제법 많은 이들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날렵한 몸놀림의 아 미파 제자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이 대단한 것이라도 되 는 양 호들갑을 떨었고 곧 동료들을 부르는 호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백 개의 돌 침상 위에 놓인 당문의 시신들은 충분히 호각을 울릴 만한 사항들이었다. 잠시 후 배분이 늪은 이 들이 도착하자 제자들은 한쪽으로 물러났다.  "어찌 된 것이냐?" 카랑카랑한 음성의 혜인사태가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 이며 물어 오자 제자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석문이 열렸던 흔적을 발견하고 들어·와보니 이런 상 태였습니다. " 불진을 들어 돌 침상의 시신을 건드려 본 혜인사태는 넓은 밀실을 훑어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이하에 주름을 만든 그녀는 냉랭하게 명령했다.  "아이들 몇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계속 수색해라! 시체 말고 뭔가 도움이 되는 것을 찾으란 말이다. 한심한 것 들플!" 그녀가 말하는 도움이 되는 것이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문의 비전, 비기, 영약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멸문이 사실로 확인된 마당에 먼 걸음에 대한 수고가 있어 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철저히 수색해! 우리가 가져가지 않으면 뒤에 오는 놈 들 차지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냐?"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리가 없었다. 약육강식의 무림에서 그녀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다시금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 이 순간 이들은 당문의 불행을 위해 찾은 무림 동도가 아니 라 그저 탐욕스러운 도적 떼에 불과했다.  밀실을 지키기 위해 남은 아미의 제자 셋은 수백 구의 시신과 함께 있으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그중 하나 가 자꾸 뒤쪽에서 뭔가가 끌어당기는 듯한 모한 느낌에 돌아보기를 반복하더니 몸서리를 쳤다.  "흥! 이게 뭐야, 시체나 지키고." 예쁜 용모와 달리 거친 입을 가진 그녀는 발길에 걸리 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화를 냈다. 다른 두 제자들 역시 기 분이 좋을 리가 없으니 그녀에게 동조하며 자신들을 이곳 에 남긴 사저의 욕을 하느라 수백 구의 시체 중에서 두 구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쉬이익 "헉!" 아미의 세 제자들은 갑자기 가슴 어림이 뜨끔! 하는 느낌을 받는 것과 동시에 사지가 빳빳하게 굳어 버리는 경험을 했다.  누군가에게 점령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 제자는 그저 커다란 눈망울만 데룩데룩 굴려야 했다. 이제 자신들의 운명은 흥수에게 달린 것이다.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사내의 손이 가슴 섶으로 들어오자 입이 거칠었던 아미의 여제자는 죽고만 싶었다.  고이 간직해 온 순결을 잃게 생겼으니 그야말로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흥수의 손은 그 녀의 몸을 더듬지 않고 대신에 뿔피리만 가져갔다. 그것 은 아미파 제자들의 호각 신호용 뿔피리였다.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느꼈지만 그녀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흥수가 못된 짓을 하지 않았음에 감사 할 뿐이었다. 그렇게 안도하려는 순간 또 다른 기척이 들 리자 그녀들은 긴장해야만 했다.  타다닥! 일부러 거칠게 점혈을 푸는 타법에 그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멍청한 것들!" 어찌나 말투가 살벌한지 그녀들은 살아났다는 기쁨은 느껴 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장문 진인을 뵈옵니다. " 사시나무 떨듯이 겁이 질린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녀들의 구명지은이 하필이면 릭도 눈물도 없는 장문인 정인사태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이의 손에 구함을 당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문파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며 그녀가 어떤 체벌을 내릴지 몰라 그녀들은 전전긍긍했다.  "내가 뭐라고 가르쳤더냐?" 사뭇 살벌하기 그지없는 정인사태의 질책에 그녀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바로 대답을 했다.  "아미파 밖을 나서면 그곳이 바로 강호이니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 고개를 숙인 그녀들의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걸 아는 것들이 내 얼굴에 먹칠을 하다니!" 이제 문파로 돌아가면 무거운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거 라 생각하니 그녀들은 울고만 싶어졌다. 그러나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이었다 "부디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슈각! 

  뜻밖에도 정인사태의 처벌은 바로 죽음이었다 자신들 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그녀들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쓰러 졌다.  그녀들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밀실의 바닥을 적셔 갔 다. 자신의 제자를 베어 버린 무정한 스승의 표정은 너무 나 담담했다.  핏물이 흘러내리는 검 끝으로 제자들의 죽음을 확인한 그녀는 검을 바닥에 버렸다.  틀늰 가슴에 품고 있던 보자기를 그녀들의 주검 사이에 떨어졌다.  낯이 익은 보자기는 송현과 곽무헌에게 암습을 가했던 밀실의 노인이 가슴에 품고 있던 보자기였다. 그 보자기 에는 핏물이 묻은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후후후, 곽가야 네놈이 이 일을 묻으려 애를 쓴다만 그렇게 둘 수가 없구나. 다시 한 번 그것이 세상에 나오려 하니 나는 그걸 나오게 해 줘야겠다. " 바닥에 떨어진 보자기가 펼쳐지면서 손때 묻은 책자들 이 흩어졌다. 죽은 노인이 직접 기록한 것들로 보였다.  "자, 이걸로 강호가 또 한 번 즐거워지겠구나!" 섬뜩해 보일 정도로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 보인 정인 사태는 잠시 후 자취를 감췄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아미의 세 제자들만이 차디찬 시신이 되어 당문의 식솔들과 운명을 함께했다. 서둘러 밀실에서 빠져나온 곽무헌은 아미의 제자에게 빼앗은 호각을 입에 물고 내공을 주입했다.  삐이이! 가늘고 긴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타고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송현은 깜짝 놀랐지만 그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 서 하는 일이라 믿고 묵묵히 뒤를 쫓기만 했다.  곧이어 지하 공동구 전체가 호각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곽무헌이 한 번 불면 근처에 있던 아미 제자들이 화답 을 보냈다.  '이런 방법이었군!' 곽무헌은 호각 소리를 통해서 아미 제자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들이 없는 곳으로 피해서 이동했다. 송현은 내 심 그의 기지에 혀를 내둘렀다.  곽무헌의 재치 덕분에 일행은 아무런 충돌 없이 지하 공동구를 빠져나가는가 싶었다 삐이이 ...... 삐...... 갑자기 곽무헌의 걸음이 멈추더니 호각을 불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갑자기 무슨......"

  송현도 급히 걸음을 멈추었다가 전면을 보고는 헛바람 을 집어삼켰다.  "이럴 수가!" 송현의 놀람은 대단했다. 당문으로 빠져나가는 출입구 앞에 정인사태를 필두로 혜인사태가 형형한 눈빛을 빛내 며 제자들과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콕! 저 할망구가 속아 넘어가지 않았군." 곽무헌은 씁쓸하게 웃었지만 속내는 그리 편하지 않았 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내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상처들로 인해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걸렸다.  '제길! 내가 저 할망구를 상대하기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구나. 다른 계집들을 송가 놈이 막아 준다고 해도 이건 뻔 한 승부다. ' 정면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서자 곽무헌은 다른 길을 모색했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 위기를 빠져나가야 했다.  "어인 일로 이 몸을 맞이해 주는 거지?" 곽무헌의 비아냥거림에 정인사태는 코웃음을 쳤다. 그 녀는 뒷짐을 진 채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짙은 살의를 엿본 곽무헌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건 곽가 네놈이 더 잘 알 텐데?" 그녀의 비릿한 미소 속에 감춰진 음모의 냄새를 맡은 곽무헌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입 안이 타들어 갔다.  '저 여우같은 할망구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오늘 곱게 보내 줄 심보가 아닌 것 같은 데, 무슨 덫을 파 놓은 걸까? 곽무헌의 고민을 해결해 주려는 듯 두 사람을 훑어본 정인사태가 불진으로 곽무헌을 가리키며 고함을 쳤다.  "이 간악한 음적! 아직도 발뺌을 할 셈이냐?" 느닷없이 두 사람을 파렴치한 음마로 몰아가는 정인사태의 행동에 곽무헌은 기가 막혀서 허탈해 했다. 그리곤 이마에 주름을 가득 만들어 소리 질렀다.  "닥쳐, 이 노망난 할멈! 아미산에서 너무 오래 숨어 지내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었구나! 이 곽무헌이 어쨌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 대는 곽무헌을 보며 정인사태 는 파렴치한이라며 비난했다. 몸이 성했으면 가만히 있을 곽무헌이 아니었다. 정인사태도 그걸 눈치 챘는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지? 설마하니 내게 무극무해 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나』 곽무헌은 저도 모르게 가슴 섶으로 손이 올라갔다. 두터운 양피지가 느껴지자 안도한 곽무헌은 불안한 눈길로 정인사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흥! 흥수들이 발뺌을 하니 하는 수 없지. 가져와라!" 정인사태의 명에 제자들이 들것을 가지고 왔다. 피에 젖은 천으로 덮인 세 구의 시신을 보며 곽무헌은 몸을 떨었다.  '설마? 송현 역시 세 구의 시신을 보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곤 들것을 덮은 천들이 벗겨지자 두 사람 다 비명 같은 신음성을 토해 냈다.  "흥! 아주 너희들 짓이라고 시인을 하는구나." 정인사태는 득달같이 곽무헌과 송현을 몰아세웠다. 그 녀의 분노하는 연기에 아미파의 제자들은 두 사람을 동료를 죽인 흥수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러나 곽무헌과 송 현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두 사람이 밀실을 빠져나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살아 있었지 않은가. 게다가 점혈을 한 곽무헌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점혈의 정도는 가장 약한 수법을 사용했다. 누군가 의 도움이 없어도 한 시간 정도면 풀려나는 수법이었다. "개도 물어 가지 않을 소리를 하고 있구나. 우리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곽무헌의 반론 제기에 정인사태는 기다렸다는 듯이 피 묻은 보퉁이와 검을 시신 옆에 내던졌다 "이 검이 시신들 옆에 떨어져 있었다. 네 검이 아니더냐?" "그런......" 밀실에서 엽청군에게 안식을 준 청룡검이었다. 엽청군 을 벤 검이기에 들고 다니기가 꺼려져서 버린 것인데 어떻게 여기에 나타난 것인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저 보퉁이에 난 손자국도 너희들 중의 한 명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래도 발뺌을 할 작정이더냐?" 물끄러미 검과 보퉁이를 본 곽무헌인 입술을 깨물었다 보퉁이에 난 손자국은 틀림없이 자신의 손자국이었다.  "곽무헌, 무림맹주라는 가면을 쓰고 네가 그동안 행해 온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강호 정의를 위해서라도 그대를 단죄하겠다. " 정인사태는 불진을 휘둘러 제자들을 자극했다. 아미의 제자들은 분노에 휩싸여 곧이라도 무기를 휘두를 태세였 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곽무헌은 비로소 느끼는 바 가 있었다.  '이제 보니 모든 것이 네년의 음모로구나! 기어이 내 목을 치겠다는 뜻이더냐?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는 곽무헌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친 정인사태의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닌 독사의 눈빛이었다.  "잠깐만! 억측이 너무 심합니다. 더구나 이분은 무림맹 의 맹주시란 말입니다. 오해가 있다면 맹으로 돌아가 시시비비를 가릴 일입니다. " 보다 못한 송현이 나섰지만 오히려 불나는 데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흥!" 건방진 녀석 어디라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게냐. 오냐,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마!" 정인사태는 참지 못하고 손을 썼다 아미파의 독문 무공인 적하신장 중 단정외연의 수법으로 내력이 집중된 오른손을 거침없이 뿌렸다.  느리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강맹한 기운에 송현은 감 히 무시하지 못하고 무당의 장법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유운장 중에서 연유인정의 수로 맞섰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지처럼 움직이는 송현의 춤사위와 정인사태의 장이 격돌하자 북 터지는 듯한 굉음 이 울렸다.  

  "큭" 답답한 신음과 함께 송현은 두세 차례나 넘어질 듯 뒤 로 물러났다.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억지로 삼킨 송현은 들끓는 내부의 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다. 깜짝놀란 곽무헌이 재빨리 송현을 부축하며 암습을 한 정인사태를 노려보았다.  정인사태는 정인사태대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 송현을 보았을 때보다 강렬한 느낌 이었다.  '뭐지 저 녀석은? 처음 대면하였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마치 녀석이 내 단전을 흠쳐보는 듯한 느낌이야...... 이, 이건 설마 그때의 그것?' 순간이지만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결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인사태는 무림을 피바람으로 몰아넣을 뻔한 과거의 참사를 떠올렸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너, 너 ....."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송현을 가리키는 정인사태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곽무헌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기어이 사단이 벌어지고 마는구나!' 곽무헌의 우려대로 손속을 나누면서 정인사태의 막대한 내력에 당황한 나머지 송현의 단전에 숨어 있던 무극무해의 기운이 자연히 발동한 것이다.  그 짧은 순간 정인사태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무극무해 의 느낌을 몸으로 기억해 내고 경악한 것이다. 더구나 줄 곧 의심을 하고 있던 곽무헌이 아니고 새파랗게 어린 무명소졸이 무극무해의 기운을 품고 있었으니 그녀가 놀라 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차창! 정인사태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었다.  '어쩔 수 없다. 송가 놈이 나중에 나를 원망하더라도 일단 목숨을 건지고 볼 일이야!' 곽무헌은 당소혜를 앞으로 세웠다. 그리곤 당소혜의 귀 에 대고 그녀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렇지 않아도 정인사 태에게 부상을 당하는 송현을 보고 화가 잔뜩 나 있던 당 소혜의 눈에 불이 붙었다.  독왕 당사륭이 남긴 독의 정화였다. 독왕의 독화가 꽃 피려 하니 제아무리 정인사태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 이다. 물론 죄 없는 아미의 제자들까지 희생당하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아니었다.  송현이 절대로 당소혜를 각성시키면 안 된다고 했고 곽 무헌 자신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쁜 할머니, 용서 못해!"

  팟츠츠츠츠츠! 당소혜의 전면 일 장여 앞에서 불꽃이 튀며 검은 독무 가 발생했다. 신기한 현상에 정인사태마저 흠칫거리며 뒤 로 물러섰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그때 그 사이로 뛰어든 인영이 있었다.  "잠시만요! 모두 진정하세요." 다름 아닌 사공혜미였다.  "사공 소저 ......" 송현은 그녀가 나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정인사태가 그녀를 결코 가만 두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애가 탔다.  "지금 이들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무림맹주를 독단으로 단죄하는 것은 강호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 사공혜미가 당소혜 앞을 가로 막고 정인사태에게 맞서 자 아미파 제자들은 당황했다.  사공혜미는 아미파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미파의 절대자인 정인사태에게 항거하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질서가 무너지고 소란스러워지자 혜인사태가 버럭 고함 을 지르며 꾸짖었다.  흐트러진 제자들을 다잡으려는 것이었지만 사공혜미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여러 문도들은 들으세요. 아직 확실치 않은 일로 무림맹의 맹주를 해한다면 그것은 결코 아미파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모두들 제 충심을 알아주세요!" 일이 이렇게 되자 제자들은 정인사태와 사공혜미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이 발칙한 년이! 감히 길러 준 은혜도 모르고 주인을 물려고 들어! 오냐 네년도 죽여주마!"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정인사태가 참지 못하고 명을 내렸다.  아미의 제자들은 주저하면서도 감히 장문인의 명을 거역하지 못해서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제발 제 말을 들으세요!" 이상하리만치 그녀는 목숨을 내던지며 모험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공혜미를 보면서 곽무헌은 의아해 했다. 그 리고 환상미려진에서 빠져나와 조우했을 때 자신에게 한 말을 기억해 냈다.  '저를 믿으시나요? 아미 제자들의 검 앞에 몸을 내던진 채 사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곽무헌의 뭔가를 눈치 챘다.  '설마 시간을 끌고 있음인가'』 곽무헌의 예상대로 그녀는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자꾸 만 저 너머 당문으로 나가는 동굴의 입구에 시선을 주었다.  

  상황이 너무 더디게 진행되자 보다 못한 혜인사태가 나섰다. 멸빈 혜인사태라는 명성답게 그녀의 손속에는 자비심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백옥검을 꺼내 든 혜인사태는 아미의 절초 중 하나를 검 끝에 집중하여 펼쳤다 번쩍! 은빛의 검기가 대지를 가르며 사공혜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것을 본 곽무헌이 신음성을 토하며 앞으로 내 달렸다. 사공혜미를 구하려 함이었지만 부상당한 몸으로 는 무리였다.  아미의 제자들은 이미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린 시 절 함께 자란 그녀의 죽음을 차마 보지 못해서였다.

"안 돼!"

  곽무헌의 절규가 허무하게 허공에 메아리칠 때 살가죽을 베는 소리 대신에 강력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퍼펑! 그것은 장내로 난입한 한 사내가 혜인사태의 검기를 막아 내면서 생긴 충격파였다.  "감히 어느 놈이?" 자신의 출수가 무위로 돌아가자 혜인사태의 얼굴이 게 달아올랐다. 누군가 끼어들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검기를 한 번에 무력화시킨 것에 대한 질시와 상처받은 자존심의 발로였다.  "이 익 !" 입술을 깨문 혜인사태가 표독스러운 표정과 함께 다시 한 번 진기를 검에 모았다. 그러나 돌아선 사내의 모습을 본 그녀는 진기를 흩어 버리고 말았다.  "세상에! 어떻게 당신이 이곳에 ...... 좀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뭇 누그러진 혜인사태는 눈앞의 사내가 출현한 것에 당황함을 금치 못 하고 정인사태를 돌아보았다.  정인사태 역시 그의 출현이 못내 당혹스러워 보였다.  "후후후, 사태의 손속은 여전히 맵구려, 허나 오늘은 잠시 참아 주셔야겠습니다. " 여유롭게 웃으며 검을 든 손으로 포권을 취하는 사내의 머리에는 도사의 도관이 멋들어지게 자리하고 있었다.  "화산일검 악소군! 네가 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정인사태가 악을 쓰듯 소리쳤지만 악소군은 표정에 전 혀 변화 없이 담담히 말했다.  "후배 악소군, 장문인의 명에 따라서 당문의 이상한 조 짐이 보인다 하여 이렇게 불원천리 달려왔습니다. " 악소군의 포권지네가 끝나는 동시에 화산파 복장을 한 도사들 삼십여 명이 장내로 날아들었다.  "화산파의 제자들이 정인사태를 뵙습니다. " 정명하고 맑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한결 같이 눈들이 깊고 명문혈이 불거진 것으로 보아 정예 중의 정예들로 구성된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이...... 이놈 악가야, 도대체 무슨 심산으로 제자들을 보냈느냐? 정인사태는 화산파의 장문인을 떠올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이를 어쩐다? 곤란해진 정인사태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악소 군이라면 배분으로 밀어붙일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고집 을 잘 아는 그녀로서는 난처할 뿐이었다.  손만 뻗으며 목을 분지를 수 있는 송현의 모습이 크게 들어오자 그녀는 내심 초조해졌다.  그 사이 무인들이 내뿜는 강한 기세를 온몸으로 막아 내던 사공혜미가 쓰러졌다.  곽무헌과 송현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네가 말한 것이 이것이더냐?" 이제야 사공혜미에 대한 오해를 푼 곽무헌이 내심 미안 한 얼굴로 물어보자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진짜는 아직 도착을 안 했네요. 그들이 와 야 정인사태가 날뛰지 못할 겁니다. " 아직 안배한 것이 더 있다니 곽무헌과 송현은 역시나 그녀의 뛰어난 기지와 지혜에 감탄했다. 이 급박한 상황 에서 정인사태를 압박함으로서 위기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재주는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도대체 또 누가 있어서 저 할망구를 핍박할 수 있을 까? 설마하니 그 노친네는 아닐 테고......" 곽무헌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가 말이 안 되는지 읏어 넘겼다. 그때 동굴에서 청명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아미타불!" 너무나 정심한 불호에 곽무헌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정말 그 땡중을 불러냈느냐?" 곽무헌의 놀란 표정이 재미났는지 사공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효선대사님이 정말 와 주시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다행이네요. 이로서 우리가 살아날 가능성은 조 금 더 늘어난 건가요?" 파리해진 안색으로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면 곽무헌은 질린 표정이 되어 버렸다.  '허허, 세상에 이 어린 것이 도대체 어떻게 방법을 썼 기에 저 살아 있는 부처를 나오게 만들었을까? 곽무헌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장내를 향해 걸어 들어오는 노승을 보았다.  효선대사가 휘적휘적 팔자걸음을 걸으며 곽무헌에게 다가왔다. 그를 보는 곽무헌의 표정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누구기에 그리 긴장하시는 겁니까?" 송현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어보자 곽무헌은 쓰게 웃었다.  "무공에 미친 정중이지 무공을 너무 좋아해서 결국 무공에 먹혀 버린 미치광이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저놈 때문에 우리가 살아 나갈 수도 있지만 도리어 저놈에게 먹힐지도 몰라!" 곽무헌의 경고에 그를 보는 송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기도가 전혀 없다. 존재감이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기에 저런 신위를 선보이는 걸까?' 승복을 입고 있지만 덥수룩한 수염과 술 냄새를 풍기는 효선대사를 보며 송현은 오늘 하루가 무척 길어질 것이라 는 걸 직감했다.

계란유골(鷄卵有骨)

- 송남잡지에 나오는 고사로 운수가 나쁜 사람의 일은 모처럼 좋은 기회가 있더라도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거리의 한량처럼 휘적휘적 볼썽사납게 걸으며 장내에 들어선 효선대사는 강아지풀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태산북두 소림의 고승과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거지에 송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저런 자가 불제자라 할 수 있을까? 송현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곽무헌이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대단한 인물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은 그가 경지를 벗어난 인물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뭣들 하는 짓들이냐?" 

  투박한 목소리까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효선대사의 으름장에 아미의 제자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성정이 불같은 혜인사태도 감히 효선대사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와 같은 광경을 본 송현은 하늘 위에 하늘이라는 말 을 실감했다.  '과연 강호의 기인이사가 많다고 하더니 놀랍기 그지없구나. 저들만 해도 평범한 이들은 꿈도 꾸지 못할 초인들인데 효선대사의 경지는 상상도 못할 정도니 중원무림 은 참으로 오모하다. ' 송현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그 사나운 정인사태가 효선 대사를 보더니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정 도였다.  그녀가 비록 아미파의 장문인이라고 하나 강호의 배분 만 놓고 보더라도 감히 마주 얼굴을 볼 상대가 아니었다.  소림의 방장이라고 해도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겉보기에는 곽무헌보다 젊어 보이는 탁발승을 보며 송현은 그의 무위를 가늠해 보려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정말이지 대단한고수다. 그는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변에 동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마치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 

  측정할 수 없는 강함을 보고 송현은 크게 감탄했다. 아 마도 무인들이 꿈꾸는 경지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라 고 짐작해 본 송현은 그가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상처를 살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곁으로 화산일검 악소군이 다가가 뭔가를 속삭였다.

  "흠흠! 어디서 그렇게 지분거리는 냄새가 나는가 했더니 아미파 계집들이었구나." 외모만큼이나 거친 입담에 송현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 는 걸 겨가 참았다. 육덕지게 풀어놓는 그의 음담패설은 웬만한 남자라도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그러니 아미파의 제자들로서는 심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대사님, 체통을 지키십시오." 보다 못한 혜인사태가 운는 소리로 사정을 했지만 효선 대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끄럽다. 요년아, 네가 고따위 성질머리를 고치지 못 하니까? 시집을 못 가지." "헉 !" 혜인사태가 뒷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자 근처에 있던 제자들이 부축을 했다. 천하에 있어서 그 누가 혜인사태를 저렇게 다룰 수 있겠는가? "킥 !" 당소혜가 그 모양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송현이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이런 자 리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이 신기했는지 효선대사는 시체 에서 관심을 끊고 송현에게 다가왔다.  "응?" 그는 곧바로 당소혜에게 눈길을 주더니 좀처럼 거두질 않았다. 처음과 달리 점점 눈빛이 사나와지는 걸 눈치 챈 송현의 소혜를 뒤로 감추었다.  "그저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자비를 베푸십시오." 한눈에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효선대사가 살심을 품자 송현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의 살기를 온 몸으로 받아 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일 뿐이라...... 장담하느냐?" 투박하지만 아미파 제자들에게 하던 것처럼 막대하지 는 않았다. 적이 안심한 송현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 로 보면서 진심으로 대했다.  "네, 보잘 것 없는 제 목을 걸겠습니다. " 당당한 송현의 태도에 대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한겨울 삭풍보다 더 차가운 미소로 변했다.  "만에 하나 그 아이의 몸속의 그것이 독마로 변한다면 어찌하겠느냐? 네 목 하나로 감당할 일이 아닐 텐데?" 그는 정확히 소혜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도 송현처럼 그는 상대의 진기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혹 말로만 듣던 현경의 고수가 아닐까 생각하던 송현은 상념을 접고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을 입 밖으로 냈다.  "그건 제가 직접 거두겠습니다. 이 아이의 목숨을!" 결연한 의지가 깃든 송현의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효선대사는 킬킬거리며 웃어 댔다. 일견 송현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걸 송현은 알 수 있었 다.  "아직 강호에 사내새끼 하나쯤은 남아 있단 말이라 이 거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효선대사는 곽무헌을 발견하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랜만이로구나, 곽가야!" 감히 무림맹주이자 권왕 곽무헌을 동네 아이 부르듯 하 는 효선대사를 송현은 질린 표정으로 보았지만 곽무헌은 감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삼십 년 만입니다. " 곽무헌이 햇수를 상기시키자 뒷짐을 쥔 채 하늘을 보며 기억을 더듬던 효선대사가 고개를 연방 끄덕였다.  "삼십 해라, 벌써 강산이 세 번은 바뀌었구나. 설니홍조라더니 참으로 인생무상이로다. " 눈이 녹은 진땅에 큰 기러기가 걸어간 발자취가 사라진 다는 뜻으로 인생이 덧없음을 풍자한 효선대사의 넋두리에 곽무헌의 눈도 뿌옇게 변했다.  "부처제서도 사람의 인생사 사바전광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송현의 낭랑한 음성에 하늘을 보며 회한에 잠겨 있던 효선대사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호오, 이것 봐라! 사내다운 의기가 넘치는데다가 학식 도 겸비했다 이거냐?" 효선대사는 불경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심정을 잘 나타내 준 송현이 기특한지 아주 흡족해 했다.  덧없고 무상한 이 세상을 번개에 비유하여 인생이 눈 깜박할 사이임을 이른다는 법화경의 한 구절은 지금 그의 유쾌하지 않은 외출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허허허, 삼십 년 면벽수련한 이 땡중보다 요 서생 녀석이 더 많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니 아미타불, 아미타불이로다!" 껄껄껄 소리 내어 웃은 모습이 처음 장내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누그러져 보였다. 이에 송현은 비로소 안도 했다. 그러나 화산일검 악소군이 시신 옆에 있던 책을 들 고 와 건네자 다시 긴장이 되었다.    손에 침을 묻혀 가며 손때가 묻은 서책을 살펴보는 그 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처럼 여러 차례 변했고 때때로 눈매가 무섭게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모두 덮었을 때는 오히려 더 평온해 보였다.  "여전히 세상은 혼탁하고 미혹한 중생들은 헛된 탐욕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탄식을 토해 낸 효선대사가 서책들을 들고 손에 힘을 주자 그의 주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손에 불이 붙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푸스스스! 두꺼운 서책들이 검게 타들어가더니 이내 재로 변해 버렸다. 이에 정인사태는 비명을 지르며 뛰어왔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효선대사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서책들은 맹주 곽무헌이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질렀다는 증거입니다. 어째서 이런 참담 한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분기탱천하여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정인사태를 보는 효선대사의 표정은 한마디로 귀찮아 보였다.  "시끄럽다!" 순간 정인사태는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나 싶었다. 그러나 귀를 손가락을 후벼 파며 못내 짜증 섞인 투로 말하는 효선대사의 표정은 그의 말처럼 정말이지 귀찮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 이......‥ 몸에 걸친 가사를 움켜쥔 그녀의 손이 옷을 찢을 듯했다. 얼마나 분하고 화가 났으면 악다문 입술 사이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귀에서 시커먼 이물질을 꺼내어 동그랗게 말아 획 하니 던져 버린 효선대사는 연방 혀를 찼다.  ·야, 이년아 네 년도 부처님을 모신다면서 그 돼먹지 못 한 심보는 어디서 배운 게냐?" 짐짓 나무라는 듯한 효선대사의 꾸짖음을 귀담아 들을 정 인사태가 아니었다. "말이라고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아미파의 장문으로서 체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허, 이년 봐라! 네 사부의 사부도 내게 함부로 못하거늘 감히 네가 나를 핍박하려는 것이냐?" 효선대사가 은밀하게 기를 흘려 보내자 정인사태의 표정이 창백해지며 답답한 신음을 냈다.  네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이 몸은 강호를 유람했다.  너야말로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나불대는 게냐?" 전신을 옭죄는 기운 속에서도 정인사태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으......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강호의 법도를 지키 지 않으면 안 될 터...... 곽가 놈은 무림의...... 죄인...... 털썩! 무리하게 진기를 끌어올려 효선대사에게 대항하던 정인사태는 그가 힘을 거두자 맥없이 주저앉았다. 짧은 순 간이었지만 그녀는 온몸에 땀을 뒤집어쓰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쯧쯧쯧, 곽가야 어쩌자고 계집하고 원수지간이 된 것 이냐? 계집이 한을 품으면 어찌 되는지 알면서!" 효선대사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화산일검 악소군이 또다시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좋다 이거야, 그렇다면 이 죄인은 내가 압송을 하지," 뜻밖의 제안에 정인사태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곽가는 제 제자를 욕보이고 죽였으며 무림동도를 납치해 잔혹한 실험을 했으니 당장 이 자리에서 주살해야 합니다. 특히나 저 서생 놈은 본녀가 데리고 가야겠습니다. " 다급해진 그녀는 배수의 진을 친 장수처럼 버텼다. 그 녀의 절박함을 읽은 효선대사는 흥미가 동하는 표정으로 그녀와 송현을 살폈다.  '요것 봐라! 곽가 놈이 아니라 저 서생 놈에게 볼일이 있다 이건가?' 의외의 상황에 효선대사는 빙긋이 웃어 보였다.  "싫다!" ......?" 장난스러운 대답에 정인사태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이것은 명백히 월권이며 강호의 예에 벗어나는 행동 입니다. 만약에 고집을 피우신다면 저는 무림맹 회의를 소집해서 소림에 그 죄를 묻겠습니다. " 또박또박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인사태에게 겁을 먹은 위인도 아니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그러시던가?" 이렇게 나오니 정인사태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자, 그럼 이 녀석들은 내가 데리고 갈 테니 무림맹 회 의인지 뭔지 소집하라고, 간만에 구대문파 놈들 면상이나 구경하게 생겼구나!" 왔던 것처럼 휘적휘적 팔자걸음으로 빠져나가려 하자 그들을 포위하고 있던 아미 제자들이 검을 곧추세우고 경계했다.  장문인의 추상과 같은 명이 있었으니 그녀들이 포위망 을 풀 리가 없었다. 효선대사의 손에 죽더라도 그녀들은 장문 진인의 말에 따라야 했다.

  차창! 그때 화산일검 악소군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은은한 서기를 머금은 그의 검이 빛을 내며 아미파 제자들 의 얼굴을 비추었다. "감히 나설 배짱이 있는 여협들은 나서시게. 화산의 검 얼마나 매서운지 가르쳐 줄 테니!" 효선대사를 아는 이들은 몇 안 되지만 화산일검 악소군이라면 달랐다.  당금 무림에서 활동하는 고수들 중 검중지왕이라고 불리는 악소군이었다. 당연히 효선대사의 이름보다 그녀들 에게 더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악소군! 화산과 아미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어찌 우 리를 핍박할 수 있단 말이오?" 혜인사태가 참지 못하고 나서자 악소군의 반응은 냉랭했다.  "흥! 화산은 지난날 무림맹에서 받은 수모를 기억하고 있소이다. " 악소군의 쌀쌀맞은 태도에 혜인사태는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날 무림맹의 심사관에서 금 영사태가 저지른 죄를 떠올린 것이다.  어리석제도 그 사건 이후로 아미파는 화산파에게 일절 사과의 서신을 보낸다던가 해명을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이는 혜인사태가 자신에게 책임이 전가 되는 것이 두려워 장문인에게 보고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것은 서로 간에 오해로 빚어진 일이니 화산은 나서 지 마시오." 혜인사태는 어떻게든 악소군과 효선대사를 이 일에서 손을 떼게 해야 했다. 장문인의 태도로 보아 곽무헌과 송 현을 반드시 문파로 끌고 가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죽여야 함을 눈치 챘기 때문에 그녀도 절박했다.  "닥치시오! 어딜 감히 세 치 혀로 현혹하려 하시오. 앞으로 화산은 아미파에게 예의를 다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언에 아미파는 크게 동요됐다. 화 산파와 아미파의 관계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였다. 그랬기에 일대에서 더 큰 위세를 떨칠 수 있던 것인데 일이 크게 틀어졌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그대의 뜻인가? 아니면 장문인의 뜻인가?" 당황한 정인사태가 끼어들자 악소군은 냉소를 머금고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화산의 뜻이라고 했소이다. " 찬바람이 쌩쌩 부는 악소군의 냉담한 반응에 정인사태 눈에 불이 났다.  뭔가 사정이 있음을 눈치 챈 그녀가 혜인사태를 노려보았지만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럴 수는 없음입니다. 그들은 아미파의 죄인이니 우 리에게 생사여탈권이 있으니 넘겨주십시오, 아니면......" 정인사태가 말끝을 흐리며 결연한 표정으로 막아서자 효선대사가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면?" 팔짱을 낀 채 여유를 부리는 그를 향해서 정인사태는 검을 겨누었다.  "아미의 제자들을 모두 죽이고 가십시오." 그녀의 선언에 제자들은 이제 모두 죽었구나 하는 표정이 되었고 효선대사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지 '허허' 하는 너털웃음만 흘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화산일검 악소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면서 화산일검 악소군의 일 초가 펼쳐졌다. 느닷없이 펼쳐진 칼바람에 아미파의 제자들은 금정검식으로 대항했지만 이미 거센 바람을 탄 화산의 매화검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악소군의 검이 더욱 세차게 칼바람을 일으키니 사방의 매화꽃으로 뒤덮이는 환상이 펼쳐졌다. 악소군의 매화검 에 쫓겨 가던 아미의 제자들은 아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며 장검을 놓치고 말았다.  뒤에서 이를 구경하던 효선대사는 연방 '좋구나!' 라며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그의 검풍 아래 놓인 아미파의 제자 들은 결코 좋지 않았다.  더욱 놀란 이는 정인사태였다.  '화산일검 악소군, 천하검객 악소군이란 위명이 결코 허명은 아니었어!' 제자들이 엉망으로 나?"구는 걸 보며 그녀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검집에서 검을 뽑아 내던지니 마치 줄이 달리기라도 한 듯이 직선으로 날아가는 검은 눈이 달린 것처럼 악소군을 쫓아갔다.  그녀의 검초 절학이 펼쳐지자 악소군은 기다렸다는 듯 이 자세를 바꾸며 내력을 배가시켰다.  태산이라도 가를 듯이 날아가던 그녀의 검은 매화 꽃잎 이 짙어지자 길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고집스럽게 내력 을 쏟아 부었지만 이미 매화꽃 향에 취한 그녀의 검은 나아갈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맙소사! 당금 화산에 매화이십사세수를 완성한 이가 있다니." 무릎을 꿇은 정인사태는 자신의 패배보다 매화검을 완 성시킨 악소군이라는 존재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다.  "더 이상 아미파의 제자들은 나서지 마라!" 정인사태마저 굴복시킨 악소군의 말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이 일이 강호로 퍼져 나간다면 아미파의 명성은 한순간에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유유히 빠져나가는 곽무헌과 송현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곤 악에 바친 음성으로 효선대사의 등 뒤에 대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효선대사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멀리서 여인의 분노한 비명이 들여오자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천 성도를 벗어나자 일행의 걸음이 느려졌다. 아미파의 권역에서 빠져나오자 일단 한숨을 돌린 효선대사는 쉬어 갈 것을 말했고 악소군은 허름한 객잔을 잡았다.  어느덧 깊어진 겨울의 한풍이 낡은 객잔의 창을 흔들면 서귀곡성을 냈다. 으스스한 기운에 점소이들이 어깨를 털면서 종종걸음으로 손님들을 접대했다.  "여기, 탁주 한 병과 고기 좀 내오너라!" 승복 차림의 중이 술과 고기를 내오라고 소리를 지르니 객잔의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병장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반응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무림인! 그것으로 더 이상 시빗거리를 제공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점소이들도 주인의 명으로 특별히 고참 점소이들로 바꾸었다.  행여 객잔에서 말썽이 나는 것을 걱정해서였다. 주인의 눈치 빠른 행동으로 경력이 많은 점소이들은 무림인들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크하하하! 역시나 속세에 나오니 아주 좋구나! 크흑, 이 얼마 만에 맛보는 즐거움이더냐? 도대체 사양이라는 것을 모르는지 효선대사는 부어라 마셔라 그칠 줄을 몰랐다. 이에 민망해진 공지대사가 연 방 일행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닭다리를 들고 뜯고 있던 효선대사가 닭다리를 흔들며 잔소릴 해 댔다.  "이런 얼어 죽을! 술 한 잔 얻어먹는 것이 무에 그리 대 수라고 죽을죄라도 진 듯이 고개를 숙이고 꼴값을 떠는 게야!" 어느새 혀가 꼬부라진 효선대사 때문에 난처해진 것은 공지대사였다. 그는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삼십 년 만의 외출에 들뜬 효선대사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공지대사님!" 송현이 웃으며 말을 하자 공지대사는 고마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송 시주께서는 참으로 유덕하시구려. 그대처럼 성품 이 곧은 이는 참으로 드물지요." 칭찬이 이어지자 송현은 낯부끄러워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씀 감히 받기가 어렵습니다. 거두어 주사지요." 서로 예의를 차리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혀가 꼬인 효선 대사가 빈정거렸다.  "하여간 배운 것들이 문제야 그냥 편하게 먹고 마시면 그만이지 무슨 겉치레가 그리 많아. 꺼억!" 결국 많이 취한 그를 십팔나한들이 부축하여 방으로 향 했다. 그가 사라지니 객잔은 다시금 평온을 찾았다.  계속 말이 없는 곽무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지대사 는 불호를 낮게 외우더니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고 계시는군요." 뭔가 사연이 있음직한 말에 곽무헌은 처음으로 술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메마른 목 줄기를 독한 탁주 가 타고 흘러 들어가자 절로 뱃속이 화끈거렸다.  "후아, 이곳 술맛은 강산이 변해도 그대로군." 술을 연거푸 들이켠 곽무헌은 공지대사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대라면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같이 속세의 때가 묻은 이들에게는 힘든 일이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송현과 악소군은 그저 묵묵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어느새 잠든 당소혜 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던 송현은 공지대사의 한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게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로군요." 공지대사의 푸념에 곽무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리도 많이 술을 드신 게지요. 절대로 취할 수가 없는 분이 슬픔에 저 리 취하신 걸 보면 말입니다. " 공지대사가 잊고 있던 것을 일깨웠는지 곽무헌은 잠시 손가락을 들어 세워 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벌써 그리되었나? 오늘이 그날인 줄 몰랐네." 곽무헌는 잔속의 술을 입 안에 털어 넣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곤 뭔가 결심을 했는지 악소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부상이 심하니 자네가 좀 도와주게나. 이 친구도 정상이 아니니 이 중에 내력이 성한 이는 자네뿐이지 않은가?" 화산일검 악소군은 곽무헌의 부탁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밖에 있는 쥐떼들을 처리하란 말씀이지요?: 당문을 나설 때부터 뒤를 쫓고 있던 살수들을 없애라는 말로 이해한 악소군이 검을 들자 그의 제자들도 검을 들었다. 이에 곽무헌은 고개를 저었다.  "방갓 쓴 놈들은 우리가 항주를 떠날 때부터 쫓아온 놈들일세. 아마도 나 아니면 저 녀석을 노리는 것일 텐데 이 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 노리지는 않겠지. 내일 아침에 자 네들은 떠나는 척하면서 돌아와 잠복하게나. 내일 밤에 우리만 남은 걸 알면 그때를 노릴 테지." 이미 뒤를 쫓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곽무헌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악소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모두 죽이지는 말고 한 놈 정도는 살려 두게. 그래야 배후를 캘 수 있을 테니까." 독주를 물 마시듯 하는 곽무헌은 살수가 노리고 있음에 도 너무나 무신경해 보였다.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방갓 쓴 살수들의 실력이 뛰어남을 빗대어 이야기하자 곽무헌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네의 매화검을 받아 낼 이가 당금 중원무림에 과연 몇이나 될까? 엄살은 나중에 부리고 지금은 다른 부탁이나 함세." 악소군은 검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의 새로운 부탁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서였다.  "우리들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이는 자네뿐이로군." 곽무헌의 부탁에 악소군은 내력을 펼쳐 얇은 막을 만들었다.  "공부가 부족하여 이 정도입니다만 작은 말소리 정도 는 들리지 않을 겁니다. " "고마우이!" 마음이 심란한지 곽무헌은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워 버렸 다. 마지막 술자리라도 되는 양 비장한 표정의 곽무헌이 빈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모든 것을 밝힐 때로군."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지 못할 묘한 표정의 곽무헌이 송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삼십 년 전 강호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그날의 일을...... 

  여러 날이 흐르고 흘러 겨울이 계절의 끝자락에 매달려 발버둥 치는 때에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항주의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과연 항주로다! 두터운 솜옷 사이로 땀이 배어나는 것 이 과연 항주의 겨울은 남다르구나!" 효선대사는 쾌나 감격한 표정으로 항주를 굽어보았다.  계곡에서 내려 보는 항주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효선대사 는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수려한 풍치도 아름답거니와 미인들이 유달리 많다고 하더니 그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구나!" 길을 지나가는 아녀자들을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통에 공지대사는 연방 불호를 외우며 천당 과 지옥을 오가는 심정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그의 기행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제발 체통을 지키십시오." 보다 못한 곽무헌이 잔소리를 하자 효선대사가 역성을 냈다.  "어라, 이놈 보게! 이놈아, 네 녀석이 이런 좋은 곳에서 호의호식하면서 ?"굴고 있을 동안 나는 소림사 그 햇볕도 안 드는 곳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단 말이다. 불쌍하지도 않느냐?" 곽무헌의 멱살을 잡고 울분을 토해 내는 효선대사의 모 습을 보며 사공혜미와 당소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킥킥킥 !" 여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한 효선대사는 멋쩍은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원래 이런 것은 아니고 오랜만에 세상 구경을 했더니 기분 좋아서 이렇구나. 나는 절대로 이런 사람이 아니란다. 알겠느냐?" 마치 주입식 교육이라도 하려는 듯 효선대사는 당소혜 가 그렇다고 대답할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다.  그때만큼은 효선대사도 아주 진중하고 무게감 있어 보였 다. 그러나 몸을 돌려 세우니 다시금 입가에 참지 못할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소주와 항주에 사는 것이 꿈이 라 하더니 이 말을 한 사람에게 상이라도 줘야 해! 음하하하하!" 효선대사는 지분거리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항주 거리를 마치 계집이라도 되는 듯이 헤집고 다녔다.  공지대사와 십팔나한들은 기겁을 하여 그 뒤를 졸졸졸 쫓아다녔다.  "저분이 삼십 년 전의 참극을 막은 분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 두 달 전 허름한 객잔에서 삼십 년 전의 참극에 대해서 전해들은 송현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항상 존중했다. 처음에 이해를 하지 못했던 그의 기행들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장진인과 혜승선사가 과거 무극무해를 강호로 멋모르고 들여왔다가 빛은 참극의 한가운데 효선대사가 있었던 것이다.  "제 손으로 형제를 죽였으니 온전한 정신으로는 버티질 못할 것이다. 저 요란한 행동 뒤에는 누구도 알지 못할 슬픔이 숨겨져 있다. " 곽무헌의 말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었다.  '맹주님, 저는 너무나 무섭습니다. " 송현이 걸음을 멈추고 곽무헌을 바라보자 그는 무슨 일 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당사륭의 추종자들을 말하는 것이냐? 그거라면 화산의 악소군과 소림에서 벌써 조사에 착수를 했으니 곧 뭔가 꼬리가 잡히지 않겠느니?" 지난겨울 객잔에 머물며 몸을 추스르는 동안 그들은 놀 고만 있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흉수가 독마 당사륭의 추종 세력임을 밝혀 낸 곽무헌과 송현은 화산과 소림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그나마 구대문파 중 믿을 수 있는 곳이라 판단했기 때 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미 두 문파에서 암중에 천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송현의 걱정이 혹시나 그것인지 몰라 넘겨짚은 곽무헌은 고개를 도리질하는 송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u쩝, 그럼 뭐가 그리 걱정인 게냐? 어라, 혹시 사공혜미 를 건드린 것이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곽무헌의 의심에도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머문 것이 사공혜미와 송현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다 보니 달 리 갈 데도 없는 두 사람이 길고 긴 겨울밤 이런저런 대화 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둘 다 학식이 풍부하고 지적인 사람들이다 보니 토론하다 보면 날이 밝기가 일쑤였다.  

맹주님!" 송현이 헛소리라며 빽!하니 고함을 지르자 곽무헌이 기겁을 했다.  

귀를 파던 "허, 이놈아 애 떨어질 뻔하지 않았느냐?" 짐짓 엄살을 부리는 곽무헌을 보며 송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가 불행해졌습니다. " 넋두리 하듯 작게 말하는 통에 곽무헌은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 짜증 섞인 곽무헌을 잡아 세운 송현은 진지했다.  "무극무해를 알게 된 이들은 모두 불행해졌습니다. " 송현의 걱정을 알게 된 곽무헌도 일행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지만 걸음을 멈추고 송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리 사서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 자신을 위로하려는 곽무헌에게 송현은 고개를 가로저 었다.  "아닙니다. 효선대사님을 보세요. 형과 동생이 무극무해를 익히다 괴수로 변하자 스스로 형제를 죽이고 탁발하 여 중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업보를 견디지 못하고 삶 을 허비했습니다. " 송현의 감정이 어찌나 격한지 곽무헌은 말릴 재간이 없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맹주님을 보세요. 무극무해 때문에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살고 계십니다. 또 당천악만 하더 라도 무극무해 때문에 가문이 멸문하고 자신은 대역죄인 이 되어 쫓기고 있습니다. " 송현의 불안한 마음을 충분이 알고 있는 곽무헌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건 각자의 운명인 게다. 너를 봐라! 너는 무극무해의 진경을 익혔다. 그건 누구보다도 무극무해와 가장 인 연이 질기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너를 보려무나! 좋은 친 구들에 다른 이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을 해내고 있다. 더구나 태평문이라는 터전과 식솔들까지 있다. 이래도 불행하다고 할 것이냐?" 곽무헌의 설득력 있는 설명에 송현도 비로소 마음이 놓이기 시작하는지 굳었던 표정이 살아났다 "운명이란 스스로 헤쳐 나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 준다고 했다.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그건 내 팔자가 사나워서 라고 스스로를 탓한다면 그처럼 미련한 짓도 없을 것이 다. " 나약한 마음이 자신을 망치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자신을 채찍질하고 강하게 만드는 것만이 자신과 주 변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 어찌 보면 궤변일 수도 있었지만 송현에게는 가장 필요 한 충고였다. 그런 것은 책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인생 의 연륜에서 나오는 가르침이었다.  많은 일을 겪었다지만 송현의 나이 이제 겨가 이십 대 초반이었다. 의지가 흔들리고 결심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 한 이치였다. 다행히도 그때마다 주변에는 충언을 아끼지 않는 친구와 친인이 있었다.  과거에는 영호인이 지금은 곽무헌이 송현의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맹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너무 비약을 한 것 같습니다. " 송현이 불안한 마음을 틸어 버린 듯하자 곽무헌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어깨를 두드리며 송현의 기운을 북돋아 준 곽무헌은 저 멀리서 당소혜와 사공혜미가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 가자! 자고로 여자들을 기다리게 하는 사내치고 제대로 된 녀석을 못 봤다. " 그의 농지거리에 송현은 무거운 마음을 모두 털어버리고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게다가 익숙한 거리로 돌아오니 오랜 여행으로 지친 송현의 마음도 점차 안정이 되 는 듯싶었다.  

  태평상하의 사층 전각이 보이기 시작하자 송현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몰랐군.' 곧 반가운 이들이 반겨 줄 생각을 하자 송현은 그동안 겪은 고초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몇 달이 몇 년처럼 느껴졌지만 잠시 후면 한달음에 달려 나와 반겨 줄 왕백 등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지?" 너무나 놀란 송현은 두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간판은 곧이라도 떨어질 듯하고 고색창연하던 태평상하의 입구 가 폐가처럼 부서진 것이 꿈이라고 여기고 싶었던 것이 다.  콰당!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태평상하의 간판이 결국 송현의 발치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제기랄! 불행이 시작되는 건가?" 말을 한 곽무헌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송현이 노려보자 곽무헌은 휘파람을 불며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만 생기는 거야, 왜!" 울고 싶어진 송현이었다.  두 달여 만의 귀환에 반겨준 것은 따뜻한 환송이 아니라 엉망진창이 된 태평상하였다. 

이전투구(泥田鬪狗)

- 진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명분이 서지 않는 일로 볼썽사납게 싸우는 형국을 묘사한 말이다. 

  태평상하 안으로 들어서니 더욱 엉망이었다.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던 물품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게다가 물건들이 너무 훼손되어서 도무지 팔수가 없을 정도였다.  발에 짓밟혀 엉망이 된 당포를 집어 든 송현은 분노하고 있었다. 이 당포 한 마를 만들려면 태평문 식구들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는지 잘 알기에 그의 노여움은 더욱 컸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잘도 내 점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지?" 찢겨진 비단을 보며 이를 악무는 송현의 등 뒤에서 곽무헌이 또 철없는 소리를 했다.  "휴, 아무래도 무극무해의 저주가 시작되고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악담을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좀 전의 위로는 뭐였는지 곽무헌은 계속해서 송현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시끄러워요!" 어찌나 고함 소리가 컸던지 사공혜미와 당소혜가 화들 짝 놀라서 들고 있던 물건을 놓칠 지경이었다. 그때 안에 서 무기를 든 이들이 튀어나왔다.  "웬 놈이냐......? 어?" 잠시간 침묵이 흐른 후 너무 반가운 나머지 목이 메어 부르는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송 학사님!" "송현!" 끈끈한 정으로 이어진 사람들만이 보여 주는 훈훈함으로 가득했다.  "모두들 무사했구나!" 떨어져 있어도 항상 그리워하던 이들이 무사함을 알게 된 송현은 안도하며 정겨운 해후를 했다. 손을 맞잡고 흔 들어 대는 왕백을 보며 송현은 비로소 웃음을 되찾는 여유를 가졌다.

  영호인과 양명, 막여위는 어깨를 둘러싸며 환호했다.  한 줌의 가식도 없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은 이 미 송현의 가족이었다.  "응?' 옷을 잡아당기는 소혜를 보며 송현은 피식 웃고 말았 다 유난히 눈망울이 커다란 소혜를 번쩍 안아 들어 올린 송현은 모두에게 귀엽고 깜찍한 소녀를 소개했다.  "인사하거라. 소혜야. 삼촌들이다. "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저마다 인사를 하던 영호인 등은 웬 아이나며 호들갑을 떨었다.  "후후후, 내 딸이야!" 

너무나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현과 달리 큰 충격을 받은 친구들은 한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뒤에서 웃고 있는 사공혜미를 향해서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 사공혜미를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을 뜻하는바 모두 들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자 사공혜미가 고함을 질렀다.  "모두들 어떻게 된 것 아니에요. 어떻게 몇 달 만에 애를 만들어요. 바보들 같으니라고!" 새침해진 그녀가 뽀로통해져서 고개를 돌리자 송현의 품에서 빠져나온 소혜가 조르르 그녀에게 달려갔다 "엄마!" 

"아하하하하! 얘가 오늘 왜 이러지?" 당황한 사공혜미가 소혜에게 언니라고 부르라며 다그치는 모습을 보던 영호인 등의 날카로운 시선이 송현의 얼굴에 꽂혔다.  "하, 참내. 얼굴에 구멍이라도 나겠군. 당문의 마지막 후예 정도라고 알아 둬." 그제야 모두들 의심의 눈길을 거두었다. 기가 막혔지만 그만큼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송현은 친우들의 몰골이 형편없다는 사 실을 깨달았다. 마치 격전을 치룬 이들처럼 옷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고 모두들 크고 작은 검상과 자상으로 말이 아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뒤늦게 물어본 송현의 질문에 영호인이 한숨을 내쉬며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한참을 그렇게 사정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모두들 부서진 집기를 의자 삼아 동그랗게 모였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고와 사건에 대해 서 전부 전해들은 송현은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그러니까 어떤 놈들이 우리 상권을 노린 짓이라는 거야?" 겨가 화를 참고 있는 송현이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왕백이 그동안 많이 힘들었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말도 마십시오. 그 막돼먹은 놈들이 강짜를 부리는 통 에 장사는 전혀 하지도 못했습니다. 단골손님들은 진즉 에 떨어져 나갔고 물건들이 저 모양이 되어서 이젠 헐값 에도 팔지 못합니다. "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는지 왕백은 십 수년은 늙어 보였다 "관아에 기별을 하지 않은 게냐?" 이건 관의 힘을 통해서 해결할 일이었다. 상권의 분쟁 은 관아에서도 많이 신경을 쓰는 부분이었다. 세수의 확 보와 연관된 일이다 보니 관리들도 다른 백성들과 달리 왜나 챙기는 편이었다.  "소용없었다고요. 이놈들 뇌물만 처먹을 줄 늪지 도무 지 일을 해결할 의지가 안 보이더라니까요." 열불을 내는 왕백은 그동안 쌓였던 억울한 마음을 모두 쏟아 냈다. 

   "항주부윤 주치를 만나 봐야겠어." "소용없네." "왜지?" 단호하게 말하는 영호인에게 따지듯 묻자 그는 곤란해 하며 항주부윤이 입궁하기 위해 항주부를 비웠다는 설명 을 해 주었다.  "부윤이 없다면 지사도 있고 행정 치안을 맡은 관리라 도 있을 것 아닌가?" 답답한 나머지 목소리를 높인 송현에게 막여위가 성질을 부렸다.  "아,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데 당최 그 관리라는 놈들 이 부윤이 돌아올 때까지는 병력을 못 움직이겠다는 거 야.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우리더러 알아서 하라고 했네." 막여위의 설명에 송현은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고 생각 했다.  "뭔가 이상한데, 그렇지 않은가?' 송현이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냐고 물어보자 영호인이 그동안 알아 낸 것을 말해 주었다.  

"영파방?' 송현은 제아무리 기억을 짜내어도 그에 대한 정보가 없자 영호인을 보았다. 영호인도 별로 아는 것이 없는지 간략하게만 이야기했다.  "영파는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작 은 땅이네 그곳 상인들은 모두 영파방 소속이지. 나도 이 핸가 가지 않지만 한 달 전부터 시비를 걸더니 어제는 이렇게 실력 행사로 나왔다네." 부서진 점포를 보자 한숨만 흘러나왔다. 영호인의 설명 이 부족했기에 송현은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놈들을 만나 보면 될 것 아닌가?" 걸걸한 목소리가 끼어들자 영호인 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경계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스님들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선두에 서서 제집처럼 들어오는 이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산적 두목감이었다.  "누구신지?' 영호인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공지대사가 서둘러 인사를 했다.  "공지라는 법명을 가졌소이다. " 영호인은 온화하게 생긴 노승을 보며 잠시 생각을 하더 니 크게 놀라서 포권지례를 올렸다.  "감히 무림말학이 몰라뵙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영호 인이라고 하옵니다. " 황망해 하는 영호인을 보며 공지대사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무당칠검 영호인이 바로 그대였구려. 내 익히 그대의 활약상을 자주 접하고 있었습니다. " "보잘 것 없는 허명일 뿐입니다. 대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영호인은 장차 소림의 기둥이 될 공지대사을 만났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몇 번이나 소림을 방문했지만 배분에서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소림이 배출한 천재 무승 공지대사를 보는 영호인의 눈에는 경외심으로 가득했다.  "어흠!" 자꾸만 헛기침을 하는 산적 두목 때문에 영호인은 신경 이 거슬렸고 공지대사는 연방 불호를 외무며 눈을 감았다.  공지대사가 입을 다물자 산적 두목은 노골적으로 그를 향해 헛기침을 해 댔다.  "이분은......?" 보다 못한 영호인이 물어 오자 공지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이 소개했다.  "제 사숙뻘 되시는 어른입니다. " 대충 얼버무리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대충 공지대사의 곤란함을 눈치 챈 영호인도 그쯤에서 그만두려 했지만 상대방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어쭈, 뭐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해치우려고 하네?" 상당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내비치자 공지대사가 낮게 속삭였다.  "속세에 나가는 대신에 이름을 숨기라는 주지스님의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일부러 주지스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자 산적 두목이 어이없어 하며 길길이 날뛰었다.  '도대체 누구기에 저리도 안하무인일까? 공지대사의 사숙뻘 되는 고승이 누가 있지?' 영호인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그를 보며 의아해했고 송현과 곽무헌 등은 웃음을 참지 못해 괴로워했다.  "효자 선자를 쓰시는 분이시네, 영호인!" 보다 못한 송현이 대신 나서서 산적 두목을 소개했다.  "효선...... 효선?" 소림의 항렬을 생각하며 배분을 따져 보던 영호인의 입 이 턱이 빠질 듯이 크게 벌어졌다.  "과, 광승 효선대사?" 얼마나 놀랐는지 영호인은 검 손잡이를 쥐고 뒤로 멀찍 이 떨어질 정도였다. 

  "어흠! 어흠!" 자기 딴에는 위엄스럽게 보이고 싶은지 뒷 짐을 지고 연 방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해 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대사님!" 송현이 충고를 하자 효선대사는 입맛을 다시더니 손을 내저었다.  "크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역시 자연스러운 멋이 장점인 거 같아. 그렇지?" 송현은 대답 대신에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어떤 대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어차피 효선대사도 송현의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바로 화제를 돌렸다.  "제법 반반한 점포였던 것 같은데 된통 당했구먼. 원래 사내는 말이야. 되로 받으면 말로 갚아 주는 거라고. 주인 체면에 직접 나서기 뭐하면 내가 가볍게 움직여 주지. 어 때?" 저자거리에서 고리나 뜯어 먹고 사는 무뢰배나 다름없는 언사에 공지대사는 인내심을 시험받고 있었다.  송현은 객잔에서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린 효선대사 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 점점 후회가 되고 있었다.  그 바람에 공지대사와 십팔나한들도 돌아가지 못하고 객 지에서 고생 중인 것이다.  삼십 년 만의 속세 구경인데 너무하다면 다 큰 어른이 울먹이는 데 거절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발등을 찍는 일 이 될지 미처 몰랐다면 그것이 잘못이었다.  "제발 체통을 지키십시오. 대사님이 이러시면 소림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좀 더 알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태평상하를 노리고 있다면 그 배후 가 있을 겁니다 어떤 놈들인지 알아보고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겁니다. " 논리 정연한 송현의 설명에 대부분이 수긍을 했다. 물 론 효선대사 혼자만 만족하지 못했다. 마치 좀이 쑤셔서 어쩔 줄 모르는 철부지 같이 투덜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마에 주름을 잔뜩 만든 공지대사는 삼십 년 면벽수련 의 잘못된 결과를 보는 것 같아서 이후 면벽수련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자, 자! 어쨌든 태평문의 문주가 몸성히 돌아왔으니 오늘은 잔치라도 벌여야겠습니다. 어차피 장사하기는 틀렸으니 일찍 문을 닫고 문으로 돌아가시죠. 모두들 이 소 식을 들으면 기뻐할 겁니다. " 왕백의 말이 옳기에 모두들 그 의견에 따라서 태평문으 로 향했다. 잔치라는 말에 효선대사가 기뻐하며 투덜거리는 것을 멉추자 모두들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놀이 지며 붉게 물드는 주장진의 언덕 위에 위치한 태평문은 언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아무리 멀리 그리고 오래 떠나 있어도 변치 않고 기다려 줄 것 같은 소중한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송현이 돌아왔음을 알고 환영을 해 주었다. 글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인사를 하는 풍경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다만 이런 모습 을 처음 보는 소림의 제자들만이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평문은 문호를 열어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습 니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생업이 어려운 이들에게 는 일자리를 주어 생계를 유지하도록 돕고 있지요." 사공혜미의 설명에 공지대사는 부끄러웠다. 태평문에 비해 소림은 어떠한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에 대 해서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불문의 성지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과연 소림을 찾는 힘없고 가여운 백성들은 얼마나 있는지 떠올려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고관대작의 자제들이나 명문정파의 식객들이 대부분이었다.  '허허, 저 어린 시주께서야말로 진정 부처로구나! 공지 야, 공지야 이 어리석은 중생아.' 그는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중생을 구제하는 제세 구민은 바로 작은 것에서부터 실천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앞으로 소림의 나아갈 길을 보게 된 공지는 한층 불심 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효선 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 했다.  "느끼는 바가 있는 게로구나!" 공지는 효선이 지켜보고 있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소승 공지, 그동안 얼마나 무지했는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을 뿐입니다. " 한결 편안해진 공지대사의 얼굴을 보며 효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거면 된 거야! 부디 너만은 소림의 고리타분한 방장 이 되지 말고 두루 백성을 살피는 자애로움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가끔씩 보여 주는 선승의 모습에 공지는 고개를 숙였다.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 공지대사의 등을 두드려 준 효선대사는 손바닥을 비비 며 코를 벌름 거렸다.  "너는 깨달음을 얻고 나는 술과 고기를 얻는다. 그 얼마나 공평한 일이더냐! 으하하하!" 잘 나가다가 또다시 엉뚱한 이야기로 빠져 버리는 효선 대사 때문에 공지대사는 이마에 주름살이 점점 늘어 갔 다. 아무리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효선대사의 입담에는 부처도 등을 돌리고 돌아설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 자! 손님이 왔으니 맛난 음식이...... 흠! 흠!"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던 효선대사가 걸음을 멈췄다.  "잠깐!" 얼굴에 가득했던 장난기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무서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마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인격체가 돌아가면서 나타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다른 모습이었다.  "네 집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 정색을 한 효선대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의아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아무도 마중 나온 이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정문을 굳게 걸어 잠근 것이 이상했다. 평소라면 많은 이 들이 오고 가야 할 시간이었다.  "설마? 놈들이 여기까지?" 영파방을 떠올리자 송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울러 다른 이들도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소혜를 사공혜미에 게 맡긴 송현은 곽무헌을 보며 뒤를 부탁했다.  

  획! 저마다 경신법을 구사하며 태평문의 담을 넘었다. 무공 이 따라 주지 않는 사공혜미와 당소혜, 왕백 등은 곽무헌 과 함께 뒤로 쳐졌다.  "쯧쯧쯧, 문을 부수면 되는 것을. 자고로 사내란 대로 로 다녀야 하거늘!" 곽무헌이 내력을 끌어 올려 태평문의 정문을 부수려 하 자 왕백이 사색이 되어 앞을 가로막았다.  "절대 안 됩니다. " 엉뚱하게 끼어든 왕백 때문에 곽무헌은 화가 났다.  "이놈아 비키지 못해?" 으름장을 놓아 보지만 왕백은 결코 비키지 않았다.  "은자 닷 냥을 내십시오," "뭐?" 어이가 없어서 다시 되물어 본 곽무헌은 혹시라도 자신 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확인을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왕 백이 또박또박 되풀이해서 말하자 그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 "정히 문을 부수고 싶다면 은자 닷 냥을 내십시오. 그 돈이면 충분히 수리비가 되고도 남을 겁니다. " 곽무헌이 그제야 자신이 문명사회로 돌아왔음을 깨달았고 이곳이 동정상방에서도 두 손을 든 태평상하의 본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 지독한 장사치들 같으니라고!" 볼품없어 보이는 왕백이 바로 태평상하의 총관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곽무헌은 왕백이 미수금을 받아 낼 때 얼마나 지독하게 구는지 들은 풍월이 있는지라 진기를 끌어 모았던 손을 내렸다.  '저 녀석에게 빚지고는 두 팔을 편히 뻗고 잘 수가 없다 하니 참는 수밖에, 끙!' 화는 나지만 성질을 부리지 못해 심통이 난 곽무헌은 단숨에 담을 띨어넘었다.  끼이익! 곽무헌이 담장을 뛰어넘은 다음 정문을 열어 준 것이 다. 곽무헌 해맑고 웃고 있는 왕백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 며 웃었다.  "네 녀석, 감히 무림맹주를 부려먹었으니 단단히 각오 하거라!" "무, 무슨?" 왕백은 곽무헌의 말뜻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일당은 아주 비싸다는 뜻이니라!"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자 왕백은 기겁을 하였다.  "제가 언제 문을 열어 달라고 했습니까? 저는 그저 문을 부수면 안 된다고 했을 뿐입니다. " "그거나 이거나 아무튼 내 노임은 은자 열 냥이니라!" 뒷짐을 진 채 유유자적 거닐며 안채로 향하는 곽무헌을 보며 왕백은 양 손가락으로 셈을 하고 있었다.  "은자 닷 냥 아끼려다 열 냥이 나가게 생겼구나. 아이고 망했다. " 생돈을 뜯기게 생긴 왕백은 배가 아파서 줄을 지경이었다. 그런 왕백의 바지춤을 당기는 이기 있었으니 소혜였다.  "왜 그러니?" 맥 빠진 왕백에게 소혜가 해맑게 웃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요. 제가 잘 말해 줄게요." "뭘 말이냐?" "아빠에게 말이에요!" 그......" 그런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 주려 했지만 소혜는 벌써 사공혜미와 곽무헌의 뒤를 쫓아 사라지고 있었 다.  순식간에 은자 열 냥을 손해 보고 게다가 그 사실을 송 현에게 들키게 생겼으니 오늘 왕백은 그야말로 재수가 옴 붙은 날이었다.

  담장을 넘은 송현과 효선대사 등은 요란한 병장기 소리 가 들리는 후원 쪽으로 몸을 날렸다. 건물의 벽마다 핏자국이 난 걸 본 송현은 머리칼이 주뼛 섰다. 단 한 번도 태 평문이 공격을 받는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  길을 가는 내내 태평문 식솔들의 시신을 마주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으아악!" 단발마의 비병과 병장기 소리가 가까워지자 송현의 신 형은 빗살처럼 튀어 나갔다.  

  카캉! 장창 위로 서너 개의 검이 떨어졌다. 만약에 힘이 달린 다면 그대로 고꾸라질 상황이었지만 장창을 쓰는 이가 신력 하라는 타고난 인물이었다.  웃차!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오히려 공격한 이들을 밀어붙였다. 장창을 거칠게 휘두르자 검을 찔러 오던 손들 이 어지러워졌다.  결국 장창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이놈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겁도 없이 숨어들었느냐?"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내가 아니고 여자였다. 긴 머리를 흩날리며 장창을 휘두르는 이는 다름 아닌 양가장창의 후예이자 태평문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 양 설란이었다.  그녀의 매섭고 무서운 창격에 당한 침입자들은 손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멍청한 놈들, 그깟 계집 하나 상대하지 못하고 이게 무슨 추태냐!" 수하들이 양설란에게 꼼짝 못하는 광경이 그리 유쾌하지 못했는지 성난 음성이 튀어나왔다.  "오 대인, 계집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 무식한 녀석의 권법은 일류를 상회하는 정도입니다. " 보고를 듣는 동안에도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건장한 체 격의 사내가 권과 장을 휘두르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여럿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저, 저!" 오 대인이란 자가 혀를 차며 뒷목을 움켜쥐자 기다렸다 는 듯이 염방의 식솔들이 봉을 휘둘러 침입자들을 물리쳤다. 영호인에게 단련된 태평문 식솔들의 곤법은 무당파의 고절한 곤법 이었다.  개개인의 실력은 크게 뛰어나지 않으나 매일같이 연습 한 합격진은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으아악!" 

  지금도 합격진에 당한 수하들이 꼴사납게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오 대인은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등을 돌려 버 렸다.  "으...... 미련한 것들! 이 무슨 망신이냐?" 괄괄한 성정의 오 대인이 성질을 부렸지만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무공을 익혀 온 태평문의 저력을 몰랐던 탓이니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면 접수할 거라고 했던 호언장담 이 아미 한 시진을 넘겨 두 시진 가까이 흘러가고 있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침입한쪽이 더 쓰러진 수가 많아지니 입이 열 개라도 변 명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나서야겠군." 뚱뚱한 몸집을 흔들며 걸어 나오는 중년인을 보고 오 대인이 손사래를 쳤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오."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알지만 자존심이 상한 채로 물러 날 순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굴이 상기된 오 대인을 보며 중년인은 쩔쩔껄 웃어 댔다. 웃을 때마다 흔들리는 비겟 살을 보며 오 대인은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 을 참아야만 했다.  "나도 오 대인을 믿고 싶지만 하늘을 보시오. 이러다가 밤을 새게 생기지 않았소. 방파의 어르신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귀소두가 처리하겠소." 그렇게까지 말하고 나서는 데야 오 대인도 더 막을 수 가 없었다.  앓는 소리를 하며 비켜 주기는 했지만 쓰린 속을 감추지 못하고 뜨거운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놈의 성질 좀 죽이시오. 그러다 제 명도 못 채우고 쓰러지시겠소이다. " 농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격전이 펼쳐지는 곳으로 걸어가는 귀소두에게 달려드는 오 대인을 수하가 끌어안다시피 해서 막았다.  "아이고! 제발 참으십시오. 저 마두에게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수하의 말이 일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신발을 벗어서 그걸로 애꿎은 수하를 두들겨 팼다.  "그러니까 네놈들이 잘했으면 내가 이 망신을 당할 이 유도 없잖아. 이것들아!" 다소 모자라 보이는 오 대인의 소동을 뒤로하고 귀소두 가 웃음을 터트리며 전장에 나섰다. 오 대인의 수하들은 귀소두를 일견하자 곧바로 물러섰다.  "응? 세상에 저게 돼지야 사람이of분 귀소두를 본 이들의 첫 마디는 한결같았다. 사람들의 말처럼 걸어 다니는 것이 신기했다. 한겨울 눈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훌훌훌, 아이야. 네 녀석의 권법이 제법 쓸 만하더구나. 어디 이 노부에게도 견식 좀 시켜 주겠느냐?" 귀소두에게 지목을 당한 사내는 다름 아닌 이자웅이었다. 늘 싸울 때면 웃통을 벗어젖히는 버릇은 여전했기에 굵은 땀방울이 울퉁불퉁한 근육 사이를 흘렀다.  "허, 이거야 원. 도대체 뭐야 이건?" 황당해 하는 이자웅의 심정도 무리가 아니었다. 느닷없는 기습에 많은 이들이 상하고 몇몇이 죽고 말았지만 그 건 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전열을 정비하고 나자 침입자들의 실력이 크게 위협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된 이자웅은 상대를 경시하고 말았다.  싸움에 임할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자신을 낮추 고 상대를 높이 보는데서 출발함을 이자웅은 잊고 만 것 이다.  "돼지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매타작 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테지!" 마지막 육가권의 후예인 이자웅의 손에서 펼쳐지는 이 가 육가권의 삼십육 권이 화려한 초식과 함께 권풍을 일으키며 귀소두를 향해 쏟아졌다.    일순간에 삼십육 권이 비대한 귀소두의 전신을 두드렸다.  내심 마음먹고 휘두른 권격이었기에 이자웅은 필승을 자신했다. 그러나 주먹이 귀소두의 몸에 닿는 순간 그는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자신의 권에 실린 내력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실제로 육가권의 권경에 당하면 큰 소리가 나야 하지만 서른여섯 번의 권격에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훌훌훌, 이거 실망이구나. 겨가 이 정도라니!" 듣기 거북한 중성적인 음성에 이자웅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분노를 담아 휘두르는 진가 육가권의 절초들은 비대한 살집에 막혀서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냥 가만 히 서서 이자웅의 공격을 몸을 받아 낸 귀소두의 눈빛이 빛났다.  "귀소파랑!" 귀소두의 기합성이 터져 나온 순간 이자웅은 환영을 보았다.  비대한 귀소두의 살들이 살아 움직여 자신을 공격하는 환영을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퍼버벅 ! 연타음이 들리더니 거구의 이자웅이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쿨럭 !" 검은 피를 한 움큼이나 흘린 이자웅의 무릎이 꺾이자 양설란이 다가왔다.  "괜찮아요?" 내상을 입은 이자웅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파리 한 안색으로 보아 당장에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중상 이었다 입술을 깨문 양설란이 창을 겨누었다.  "정체가 뭐냐?" 번뜩이는 창날의 위로 양설란의 매서운 눈매가 비쳐졌다. "훌훌훌, 이런, 이런 미처 우리들을 소개하지 않았던가?" 뻔뻔하게도 담을 몰래 넘어 암습을 한 주제에 귀소두가 마치 깜박했다는 투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양설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귀소 두는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이번에 항주에 뿌리를 내리게 된 영파방 사람들일세."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이 더러운 돼지 놈아!" 양설란의 거친 입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순간 양설란은 돼지 입에 입 맞추는 상상을 하 며 몸을 떨었다. "어쩌긴 이제 태평상하는 항주에서 사라져 줘야겠다는 거지. 이 지역 상권은 우리가 접수를 해야 하단 이 말이 다. 귀여운 것." 귀소두가 혀로 입술을 함자 양설란은 반드시 귀소두를 단매에 죽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양가창이 돼지를 잡는 백정의 창은 아니지만 오늘 하 루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다. " 그녀는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날렸다.  탄력을 받은 장창은 이리저리 휘며 상대가 어느 방향에 서 치고 들어오는지 가늠하기 어렵게 흔들렸다.  쐐애액! 푸슉! 푸슉! 상쾌한 소리를 내며 상대의 요혈만 골라 찌른 양설란의 창격은 요란한 초식과는 달리 별 효험을 거두지 못했다.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지?" 무쇠로 만든 창날이 맨살을 찔렀는데 오히려 그녀의 손바닥에 얼얼했다. 마치 돌벽에 대고 창을 찌른 듯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양가창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지만 계집이 무공을 한답시고 날뛰는 꼴은 보기 좋지 않아." 귀소두가 앞으로 나서자 양설란은 전신내력을 창으로 모아 양가창술의 절초인 양격뇌전의 수법으로 귀소두의 목젖을 정확하게 찔렀다.  바위도 부숴 버린다는 양격뇌전은 속도와 강함에 있어 서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양가창의 최고 초식이었다.  그녀의 절초는 군더더기 없이 훌륭하게 시전되었고 허 리를 비튼 그녀의 자세는 양격뇌전이 완벽하게 구사되었 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창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박혀 들어갔으니 귀소두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켜보던 태평문의 식솔들도 양 설란의 승리를 확신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양설란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이 익 !" 창을 잡아 래려 했지만 귀소두의 살집에 물린 창은 좀 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잡아 빼는 것이 힘들자 그녀는 좌 우로 창을 흔들었다. 그러나 창대가 부러질 듯이 휘기만 하고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훌훌훌, 받은 것이 있으니 나도 돌려 줘야 예의겠지. 옛다!" 귀소두의 비대한 몸집이 크게 부풀었다가 갑자기 줄었다. 그 바람에 창이 자유로워져 기뻐했던 양설란 곧이어 창을 통해 전해지는 사이한 기운에 큰 충격을 받아서 비 명을 질렸다.  "으...... 악독한!" 바닥에 쓰러진 양설란의 손목은 금세 시커멓게 물들었다.  독! 의심할 여지도 없이 중독된 것이다. 양설란은 몸을 일 으키려다 현기증을 느끼며 넘어졌다. 염방의 사내들이 분 을 이기지 못하고 덤벼들었다가 마찬가지로 일초지적도 되지 못하고 쓰러졌다.  "훌훌훌, 뭣들 하는 게냐. 이제 이곳을 정리해라. 저녁 은 본가로 돌아가서 먹고 싶구나!" 귀소두의 비릿한 음성에 오 대인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의 말마따나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화풀이는 해야겠기 에 그는 태평문의 식솔들을 가리키며 불같이 화를 냈다.  "모두 죽여 버려라! 애고 어른이고 계집이고 하나도 살 려 두지 마라!" "복명 !" 오 대인 수하들 역시 분풀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살기가 물들은 눈으로 태평문의 식솔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자웅이 그 몸으로 일어나 막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가슴에 커다란 자상만 입고 쓰러졌다. 이제 흥수들의 손에 태평문의 식솔들이 몰살을 당할 위급한 상황이었다.

  따다다당! 거친 금속음과 함께 오 대인의 수하들이 손목을 움켜 쥔 채 비칠거리며 물러섰다. 느닷없는 돌출 상황에 오 대 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때 장내로 날아든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고는 길길이 날뛰었다.  "또 어떤 놈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려는 거냐?" 막돼먹은 오 대인을 향해서 차갑고 냉담한 음성이 날아갔다.  "태평문의 주인 송현이라고 한다. 네놈들이 영파방이냐?" 영호인과 막여위 등이 다친 식솔을 돌보는 모습을 보며 송현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뒤쪽 에 쓰러진 채 움직임이 전혀 없는 식솔들을 보자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영파방이든 뭐든지 간에 내 식솔을 상하게 했으니 네 놈들은 오늘 여기서 살아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송현의 남다른 기세를 느낀 오 대인은 뒷걸음질로 물러서더니 귀소두에게 모든 것을 떠넘겼다.  "저것들도 그대가 상대해줘야 겠소이다. " 늘 자신만만해 하던 귀소두에게 반응이 없자 오대인은 의아한 마음에 그를 쳐다보았다.  '응? 뭐야 이 노마두가 떨고 있어? 그랬다 귀소두는 송현 일행을 보는 순간 겁에 질린 사 람처럼 떨고 있었다. "상도라는 것도 모르는 놈들에게 자비심을 베풀 이유 는 없겠지. 각오해라!" 송현이 검을 꺼내 들자 효선대사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왜 그러십니까? 이건 제 집안일입니다. " 좀처럼 분을 참지 못하는 송현이 나서지 말라고 경고를 했지만 효선대사는 능글맞게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니다, 이건 내 일이구나.오늘마침 좋은 날이니 돼 지 좀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승복의 소매를 걷고 나선 효선대사는 특유의 팔자걸음 을 휘적휘적 걸으며 귀소두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로구나, 그동안 살이 좀 더 오른 걸 보니 손맛이 아주 좋을 것 같다. " 주먹을 쥐는 효선대사의 손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귀소두는 꼼짝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단지 꿀꺽 하는 침 삼키는 것이 마지막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 다음부터 벌어진 장면은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만 믿을 수 있는 엽기적이고 끔찍한 광경이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그럴진대 정작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는 바로 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밤이 깊도록 태평문에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자 걱정되어 찾아온 주장진 어부들에게 태평문 문지기들은 잔치 준비로 돼지를 잡는 소리라고 둘러대야만 했다.  주장진의 어민들은 도대체 무슨 잔치를 얼마나 성대하게 하기에 저 많은 돼지를 잡는지 모르겠다면 은근히 잔칫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설마하니 어민들이 태평문에서 잡고 있는 것이 사람돼지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회계지치(會稽之恥) 

- 중국 춘추시대 월왕 구천 회계산에서 오왕 부차에게 패하여 사로잡힌 몸으로 갖은 수모를 당하고, 겨가 본국으로 돌아가 이십 년간 상담의 고생 끝에 오나라를 멸망시켜 회계산의 수치를 씻었다는 고사에서 전한다.

  한날한시에 이루어진 태평상하와 태평문에 대한 영파방의 기습으로 입은 손해가 막심했다. 금전적 손해도 손 해였지만 송현을 못내 괴롭힌 것은 사상자가 나왔다는 사 실이었다.  송현은 그들의 주검 앞에서 망연자실하여 넋을 놓고 눈물을 흘렸다. 송현에게 있어 그들은 한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이 곡을 하고 같이 눈물을 흘렸고 함께 밤을 지새웠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문주가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 가식적인 행동이라든가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송현의 행동은 진심 그 자체였다. 죽은 염직공의 아내보다 더 구슬피 울었고 애비를 잃은 아이들보다 더 서럽게 흐느꼈다. 그렇게 모두가 같이 슬픔을 나누니 그 슬픔은 반이 되었고 또 다른 식솔들이 함께 하니 또 반이 되었다. 그렇게 서로의 슬픔을 나누는 데 인색한 이가 없으니 태평문은 금세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을 치루는 동안 웃음이 사라졌던 태평문에 다시 웃음 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상사의 삼일사로 삼사일 동안 밤을 지새운 송 현이 까칠해진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까르르!" 연등이 늘어선 마당에는 아이들이 상복을 입은 채 웃고 떠들고 있었다. 어느새 이곳 아이들과 친해진 당소혜도 한 데 어울려 불꽃을 쫓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송현은 세상은 잔인하면서도 신비롭다는 것을 체득했다.  애비가 죽음을 맞이하고 새 생명이 태어난다. 그렇게 삶은 끊임없이 반복을 하는 것이었다.  "삶은 계속되는구나!" 저도 모르게 이태백의 시 한 수가 떠오르니 누군가 가져다 놓은 탁주 한 사발에 서글퍼진 마음을 달래 본다.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이다. 그런데, 덧없는 인생이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림이 얼마인가? 옛 사람이 촛불을 잡고 밤놀이를 한 것은 진실로 까닭 이 있도다. 하물며 따듯한 봄날은 안개 낀 경치로써 나를 부르고, 대지는 나에게 문장을 빌려 주었음에랴. 복숭아 꽃 오얏 꽃 핀 향기로운 뜰에 모여 형제의 즐거 운 일을 나누니 여러 아우는 빼어나서 모두 혜련이 되었는데 나의 영가는 홀로 강락에게 부끄럽구나. 그윽한 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아 고상한 이야기는 더욱 맑아지고 옥같은 잔치를 벌여 꽃에 앉고 술잔을 날리며 달에 취 하니 좋은 시가 아니면 어찌 고상한 회포를 펴리요. 만약 시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벌은 금곡의 술잔 수에 따르리라. 

  잠시나마 이태백이 되어 온갖 근심을 털어 내어 보지만 그런다고 무거운 마음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빈 사발을 보며 혼자 웃음을 터뜨리자 등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쯧, 문주라는 놈이 청승맞게 뭐하는 짓이냐?" 잔뜩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는 곽무헌을 보며 송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한 잔 하시렵니까?" 빈 술병을 흔들며 입맛을 다시자 곽무헌이 술 한 동이 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입구를 막은 황지를 걷어 내싸 은은하면서 달콤한 향이 후각을 자극한다.  "탁주도 좋다만 항주 하면 이 소홍주를 마셔야지." 월나라 군사들이 이 소홍주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다는 옛 고사를 떠올린 송현은 또다시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전쟁에서 패배한 병사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객지를 떠돈다는 내용이었다.  "허허, 어차피 죽고 나면 묻힐 땅 조금이 전부인데. 왜 들 그리 악착같이 사는 겐지." 곽무헌이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인 말을 하자 송현이 놀렸다.  "하하하, 천하의 권왕 곽무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습니다. " 술에 취해서 평소에는 하지 못할 말을 대뜸 꺼내자 곽무헌은 화를 내기는커녕 무릎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웃으라지, 어차피 개만도 못한 것이 강호에서의 삶이 아니더냐? 명성을 쫓고 부귀영화를 쫓아 검 하나 달랑 메 고 강호를 홀로 헤매지만 우리들이 갈 곳은 오직 하나 차디찬 땅속뿐이 라네!" 탁자를 두드리며 박자까지 맞추는 노랫가락은 경쾌하기 그지없었지만 가사는 듣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강호라는 비정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무림인들의 최후가 그리 평탄치만은 않은 것을 풍자한 노래는 저자거리의 아이들도 알고 있는 널리 퍼진 노래였다.  송현도 곽무헌의 노랫가락에 맞춰서 구성지게 노래를 불렀다. 휘영청 하늘 높이 뜬 달빛 아래 어느덧 모여든 아 이들마저 두 사람과 함께 고인들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위로했다.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죽은 이를 위로하는 삼일사가 끝이 나자 송현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지난날의 슬픔은 빨리 잊는 것이 최선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 진중한 눈으로 좌중을 훑어본 송현은 가라앉은 목소리 로 강조했다. 그것은 바로 복수였다.  "스무 명의 가족을 잃었습니다. 스무 명의 아내가 남편 을 잃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아비를 잃었습니다. 저는 제 식솔을 해한 영파방을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 송현의 분노가 좌중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에 걸걸 한 성정의 이자웅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이 죽일 놈들!" 태평문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그는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것은 양설란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을 믿고 태평문을 맡긴 송현에게 그리고 삼백여 명의 염공들과 수백의 가족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태평문은 그들에게 고향이며 집이며 가족들이었다. 누구도 받아 주지 않는 자신들을 태평문은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 주었고 가족으로 대해 줬다. 이젠 아침이면 마당을 쓸며 잔소리를 하던 허씨 영감도 늘 빨간 코를 긁적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박가네도 다시 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자웅과 양설란은 당장에 영파방으로 쳐들어가자며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나 송현은 그런 그들을 진정시켰다.  "두 사람 모두 진정하도록 하세요. 지금 영파방을 친다면 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도록 만드는 것과 같은 우 를 범하게 됩니다. " 가라앉은 음성의 송현을 보며 그 역시 애써 분을 참고 있음을 알게 된 이자웅과 양설란은 자신들 성급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분한 마음이야 다 똑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쫌 더 침착해야합니다. 우리가 분노에 눈이 멀어 과오를 범 한다면 죽어 간 형제들에게도 면목이 없게 됩니다. "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송현도 속에서 울분이 치솟차 을 라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영파방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지금 비밀리에 그들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으니 조만간 그놈들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다른 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 송현은 모두에게 자신들이 약하기 때문에 그날의 참사 가 벌어진 것이라고 역설했다.  "억울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미지의 적에 대항해 싸 울 힘이 없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만 합니다. " 누군가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 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힘이 언어 당장 동료의 복수를 하지 못한 이 수치스러운 마음을 잊지 말고 인내합시다. 이제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힘을 키우십시다. 그 누구도 함부로 여기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어조로 말하는 송현의 주장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문이 항주의 상권을 장악하고 동정상방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통상 마찰을 빛을 정도 비대해지자 태평 문을 노리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언제고 일어날 일일지도 몰랐다. 그에 송 현이 변화를 주장하자 좌중의 모든 이들 역시 똑같은 심정이 되었다. 그것은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동료들을 지 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후회였다.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한 송현은 새로운 제 안을, 아니 앞으로 태평문이 나아갈 바를 밝혔다.  "장네를 치루면서 스스로 맹세한 것이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 태평문이 약하다는 이유로 핍박받지 않고 남에게 우습게 보이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송현은 중대한 결심을 모두에 게 털어놓았다.  "저는 강호를 피해서 살려고 했습니다. 그저 보통의 삶 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 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희생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잠시 격해진 감정을 다스린 송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어느 곳이나 모두 강호이며 그곳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강호인이라는 것을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 새로운 해석이었지만 모두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논리 정연한 설명이었다. 좌중을 둘러보면서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송현의 모습은 문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렇다면 강호의 법대로 살겠습니다.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 태평문은 강해질 것입니다. 구대문파에도 흔들리 지 않는 힘을 키우겠습니다. " 이 자리에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있었다면 코웃음을 치거나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파안대소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중에 자리한 그 누구도 송현의 말에 웃지 않았다. ' 행복은 아무도 지켜 주지 않습니다. 우리 손으로 지킬 밖에요. 아주 힘들고 고된 여정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 주시고 원치 않는 이들은 떠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송현의 이야기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염방의 방주인 황염이 소리쳤다.  ·염방의 멍청이들은 아무도 떠나지 않을 게다. 아니...... 그럴 겁니다, 문주님!" 황염이 갑자기 말투를 바꾸자 사람들의 졌다. 늘 송현의 이름을 부르며 타박하던 대하는 예의를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뭘 쳐다 봐, 이것들아! 이젠 저 녀석도 제법 의젓해 졌으니 대접을 해 줘야지. 쳇 이렇게 부르는 막이로군." 멋쩍은지 황염은 일하러 간다며 수건을 목에 두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영호인도 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을 좌중을 향해 꺼내 놓았다. "염직장 어른신이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태평문은 가족처럼 따뜻한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 백여 명으로 시 작했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은 무려 오백 명이 넘는 대식구가 되었으니 큰 무리나 탈 없이 지내려면 위계질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 영호인의 설명에 모두들 크게 공감했다. 자신의 생각이 크게 무리가 없음을 느끼고 영호인의 미리 그려 놓았던 청사진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태평문을 정식 문파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획 이었다. 다만 이번 영파방의 사건처럼 무력에 있어서 손색이 있으므로 영호인은 이를 문제 삼았다.  "다행히 우리는 다른 곳과 달리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가르칠 만한 아이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 왜 오랫동안 해 온 생각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영 호인은장기적으로 태평문이 외세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방안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 계획에 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실용적이었으며 구체적이었 다. 듣는 이로 하여금 조금도 이의를 제기할 부분이 없어 보였다.  "아이들의 학문과 무공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태평문의 인재로 키워 나갑니다. 학문에 능한 아이들은 중앙으로 진출시키고 무공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은 태평문의 수신호위로 자랄 겁입니다. 물론 그 외에 태평문의 주력인 염방의 기술자 창성 및 계속해서 늘어나는 태평상하를 책 임질 행수들 역시 모두 태평문의 식솔들 중에서 충원해 나갑니다. " 일체감과 소속감은 강한 유대감을 이끌어 내고 모두가 태평문의 한 가족이라는 결속력으로 뭉치게 되므로 한 곳 으로 힘이 모이게 되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자, 잠깐만요!" 사색이 된 왕백이 주판을 튕기다가 다급히 손을 들었다. "다 좋은데 말입니다. 제가 지금 얼추 계산을 해 보았는데 그 개혁에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갑니다. 그걸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합니까?" 왕백은 장부를 펼쳐 보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에 없이 장사가 잘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 근래 들어 영파방 무리와의 충돌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또 계속해서 이주민들과 염방의 친척들에서 친구들까지 받아 주고 있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는 인원도 문제지만 그에 따른 경비가 쾌 부담이 되고 있는 실정에서 그 개혁안을 운용하다가는 파산하고 말 겁니 다. " 영호인의 이상적인 제안을 했다면 왕백은 냉혹한 현실 문제를 지적했다.  영호인으로서는 태평문의 재정 상태를 잘 살필 수 없었다. 그것은 셈에 능한 왕백의 문제였다.  송현은 난감해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 지었다. 영호 인은 자금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사항에 미숙하지만 전체를 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반면 왕백은 유지 관리에 대한 능력이 탁월하지만 전체를 이끌어 나가 는 총체적 집단 관리는 무리다.  그러나 이 둘이 잘 조화가 된다면 그야말로 가장 멋진 조합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송현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자금 문제는 내가 해결하지." 송현이 나서자 왕백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설마하니 또 그 영감을 찾아가실 요량은 아니겠죠?" 저잣거리의 전당포 탁성운의 주인 자공 영감을 말하자 송현은 진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아니겠느냐?' 송현의 대답을 들은 왕백은 겨울 초입에 그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결코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위인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터라 고개를 저었다.  "제 짧은 생각이지만 그쪽하고는 거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요." 왕백이 시무룩해 하자 송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거래는 거래인데 돈을 빌리거나 하는 채무 거래는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알쏭달쏭한 말에 왕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미심장해 보이기는 하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기 때문 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기는 했지만 영호인이 회의를 계 속 진행시켜서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진행된 태평문 개혁안에 태평문의 수뇌부들 은 크게 고무되어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다.  새로운 개혁안은 곧 태평문 전체에 알려지게 될 것이 다. 곧 그에 대한 반응들이 나을 것인데 찬성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도전하는 이들의 몫이니 용기 있는 자들은 남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보상금을 받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떠날 것이다.  송현은 수뇌부들에게 절대로 강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정도 의지와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잡아서 함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격변의 시대는 모험심이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송현의 예상대로 태평문은 오후 내내 일손을 잡지 못한 태평문 식솔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토론으로 소란스러웠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것과 달리 안 채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안채 깊숙한 곳에 위치한 송현의 서재에 세 사람이 마 주 앉았다.  무림맹주 곽무헌, 총군사 사공혜미, 그리고 송현이었다. 한동안 홀짝거리는 소리와 찻잔 부딪히는 소리만 들 렸다 이 어색한 침묵이 앉아 있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참지 못하고 깬 것은 송현 이었다.  "돌아가실 참입니까?" 어렵께 운끌 텐 송현에게 곽무헌은 팔짱을 낀 채 고개 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벌써 육대문파가 비밀리에 모여서 의견을 조율했을 겁니다. " 송현의 말에 곽무헌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겨정한다 기보다 왠지 귀찮은 일에 휘말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조금은 진지하게 고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겨정되는 마음에 송현이 강하게 운을 떼자 곽무헌은 팔 짱을 풀고 머리를 긁적였다.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다. 송가야!" 차를 물처럼 들이켠 곽무헌은 양치를 하듯 소리를 내다 가 꿀꺽 삼켜버렸다.  "정인사태 그 마녀가 그냥 있을 리가 없겠지. 모르기는 해도 소림과 화산파를 빼고 회합을 가졌을 것이다. " 송현도 짐작한 내용이라 토를 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정인사태는 자신과 대립하는 문파는 배제하고 회합을 가졌을 것이다.  "청성, 곤륜, 개방, 무당, 점창, 공동, 종남파가 아미산 에서 회합을 가졌습니다. " 침묵하고 있던 사공혜미가 입을 열자 곽무헌과 송현은 그럴 줄 알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개방은 내가 설득할 수 있다. " 곽무헌은 실종된 구걸신새 철밥통을 떠올렸는지 표정 이 좋지 않았다. 송현도 그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도무지 종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무당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 유장문은 송현의 손을 잡아 줄 것이 틀림없었다. 하나 라도 적이 줄어든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무당파와 같이 유서 깊은 문파라면 더욱 그랬다.  "후, 그럼 우리의 적은 육대문파인가?' 곽무헌이 인상을 쓰며 가늠하고 있을 때 사공혜미가 다 시금 참견을 했다. "정확하게는 육대문파와 남궁세가입니다. " 남궁세가라는 말에 곽무헌과 송현이 발작적으로 반응 했다.  "남궁세가가?" 두 사람이 얼마나 남궁세가를 싫어하는지 보여 주는 단 적인 예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궁세가라는 집단이 얼마나음험하고 이기적 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송현은 남궁연 가주의 무자비하고 냉혹한 성정 을 두 눈으로 목도하였기 때문에 그런 자가 적이 된다면 얼마나 힘들어질지 알고 있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곽무헌도 남궁연을 떠올렸는지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두 사람 모두 남궁세가와는 한 배를 탈 수 없는 숙명 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세가들의 반응은?" 사공혜미는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묻는 즉시 답 을 내놓았다.  "삼대세가는 조용합니다. 물론 사천당문이 이미 멸문 을 했으니 삼대세가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요." 사공혜미가 당문의 멸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곽무헌 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난 태평문이 당문의 자리를 대신 했으면 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에 송현은 크게 놀랐지만 사공혜미는 이미 곽무헌과 교감이 있었는지 덤덤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 송현이 고개를 저으니 곽무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송현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며 그의 걱정을 덜어 주 었다.  "지금 당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궁극적으로 나중에 삼대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면 내게 큰 힘이 됨은 물론 저들이 좌지우지하는 강호의 판도를 조율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 곽무헌이 생각보다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음을 알게 되 자 송현은 크게 감탄했다. 때로는 엉뚱하고 짓궂은 면도 있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호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정도를 걷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지도 몰랐다.  송현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그의 걱장을 공감했기 때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현 역시 현재의 강호 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 울 좋은 명문정파는 그 배경과 권력을 바탕으로 자신들만 의 정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송현은 그런 세상이 싫었 고 적어도 강호라는 곳이 사람 냄새 나는 터전으로 만들고 싶었다.  "기다려 주신다면 태평문은 사천당문 못지않은 세가로 다시 태어날 겁니다. " 의외로 송현이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자 곽무헌이 감탄 했다. 늘 강호와는 인연이 없다며 발을 빼기 일쑤였던 송 현이 강호 무림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도발적인 면을 보 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 영파방인지 뭔지 녀석들의 기습으로 변했군. 이제야 안 건가? 결국 모든 이가 강호지인이라는 것을!' 조금씩 변해 가는 송현의 모습이 즐거운지 곽무헌은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당문에서 려은 일들은 확실히 송현 을 변하게 만들었다.  학문만 익힌 고지식했던 송현의 사고를 보다 적극적이 고 호전적으로 만들었다. 피동적이고 수비적이었던 성격 이 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송가 놈도 이제야 강호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지!' 곽무헌은 동질감을 느끼게 된 송현이 더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송현을 바라보는 사공혜미의 눈길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곽무헌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사공혜미는 서둘러 표정을 바꾸었다.  '저 아이, 확실히 송가 놈에게 마음을 빼앗겼군. 하지 만 저놈에게는 정인이 있는데 어찌하나? 곽무헌은 턱밑을 쓰다듬으며 송현과 앞으로의 일을 논 의하는 사공혜미를 바라보았다.  '총군사는 이제 끈 떨어진 신세다. 정인사태가 그녀를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를 우리 사람으로 확실히 만들어야 한다. 그중 제일 좋은 방법은 자빠뜨리는 건데...... 곽무헌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사공혜미와 송현을 번갈아 보았다. 이상한 느낌이 든 송현이 고개를 돌리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곽무헌이 눈에 들어왔다.  맹주님 ......‥ 그러나 곽무헌의 정신은 어디론가 여행이라고 떠났는지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송현이 그의 몸을 흔들었다.  "도대체 이 중요한 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 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정신이 든 곽무헌은 당황하 여 얼버무렸다.  "응? 아니다 아무것도 그냥 자빠뜨려야 하는데 말이야 잘 자빠뜨려야 하는데 ......‥ 

  여전히 곽무헌은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런 곽무헌을 보며 송현은 걱정스럽게 운을 톄었다 "아직 무림맹으로 돌아가기에는 준비가 덜 된 거 아닙니까?" 사공혜미도 곽무헌이 미덥지 못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나 말이에요. 도대체 무얼 믿고 무림맹을 장악 할 수 있다고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두통이 밀려오는지 이마를 매만지는 사공혜미에게 송 현은 농담을 건넸다.  "아마도 자빠뜨리기 신공이라도 연마하셨나 봅니다. " "네?" 엉뚱한 농에 사공혜미는 봉목을 치켜떴다가 이내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송현도 자신의 썰렁한 농담에 웃어 주는 사공혜미가 고마워서 같이 웃었다.  지난겨울 객잔에서 두 사람은 확실히 마음의 벽을 허물 고 친해졌다. 다정한 두 사람을 보며 곽무헌도 속으로 따라 웃었다.  '흐흐흐, 그래 웃어라 웃어. 자빠드리기 신공이 곧 너 희들을 덮칠 것이다. ' 곽무헌의 속내를 알 길이 없는 두 사람은 무거운 회의 중간에 모처럼 웃으며 잠시 현실을 잊었다.  

  여러 날이 흐르고 곽무헌과 사공혜미가 송현의 만류에 도 불구하고 무림맹으로 돌아갔다.  아미파의 정인사태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간곡하게 만류했지만 곽무헌은 이젠 더 이상 숨 지 않고 나설 때라고 말하며 무림맹을 장악할 모수가 있다며 사공혜미와 떠났다. 그리고 잊지 않고 곧 자빠뜨리기 신공을 전수해 줄 터이니 기대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 다.  전혀 긴장해 보이지 않는 곽무헌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그나마 공지대사가 함께 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곽무헌이 무림맹으로 귀환하는 순간부터 강호는 다시 한 번 격렬하게 용틀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는 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사람은 긴 대화를 통해서 괴수를 만들어 낸 흥수인 당사륭의 추종 세력은 결국 강호 안에 숨어 있음을 깨달 았다. 그것도 명문정파 속에 가면을 쓰고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쉽게 그들을 찾아내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곽무헌의 무림맹 장악이었다. 지금 까지는 꼭두각시에 허수아비 맹주였지만 곽무헌도 그동안 미리 대비해 두었던 한 수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의 말대로 맹을 곽무헌이 장악하고 괴수 사건을 덮으려 한다면 당사륭의 무리들이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보일 것이라는 게 결론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당문의 멸문을 통해서 강호에 괴수의 출현과 독마 당사륭의 존재를 노출 시키려 했다. 언뜻 우연처럼 보였지만 사공혜미는 그것이 철저히 계획된 일이라고 믿었다.  그녀의 주장대로라면 그 비밀 집단은 더 큰 계획을 위해서 당문의 사건을 터뜨렸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곽무헌 은 그들의 원하지 않는 대로 당문의 일을 끌고 간다는 것 이 계획이었다.  즉, 아예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 그들은 다시 한 번 강호의 이목을 끌 만한사건을 준비할 테니 그때 꼬리를 잡아 일망타진한다는 것이 사공혜미의 계획이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묘안이었고 곽무헌과 송현은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소주를 향해 가는 곽무헌의 행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한 송현은 노을이 지는 주장진의 언덕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것은 혹시 올지도 모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서희...... 송현의 작은 속삭임이 마침 불어온 바람결을 타고 멀리 흘러갔다.  

  곽무헌이 원대한 포석을 위해서 무림맹으로 떠난 다음 날부터 태평문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송현의 뜻에 따라서 떠날 사람들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하며 짐을 챙기기 바빴고 함께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 이들은 새로운 문규를 익히고 따르기 위해 법석을 떨었다.  겨우 삼 년 만에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태평문은 더 크게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그걸 위해서 송현은 무슨 일 이든 다 하려고 마음먹었다.  영호인의 청사진 아래 태평문은 이전에 없던 직위들이 만들어졌고 그에 따른 권리와 책임이 주어졌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던 태평문의 식솔들은 처음에는 그러한 틀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니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어서 불편해 보이는 사람처럼 행동을 했 다. 하지만 영호인과 양명, 막여위, 그리고 왕백은 모두 황궁이라는 조직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이들이었다. 그 경험이 태평문을 확실하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솔직히 그냥저냥 밥이나 먹고 살만한 터전만 만들면 된다라고 생각했던 때와 강호에 뛰어들어 투쟁하게 된 것과 마음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가장 먼저 변 한 것은 황국직조태감을 지낸 황염이 수장으로 있는 염방 이었다.  어느새 염방은 황국의 직조염랑처럼 규율과 체계가 잡 혀 있었고 말투며 행동거지에 예가 있었다.  이렇듯 황궁 출신의 관리들이 많은 태평문 식솔들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시행하지 않는 학문 익히기에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것은 송현이 절대적으로 주장한 것으로 검을 한 번 들 때 책장도 반드시 한 장은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태평문은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갔다 

  송현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왕백이 쫓아와 앓는 소리를 했다. 장부를 펼쳐 보이며 자 금이 바닥이 났음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확실히 상상 이상으로 돈이 들어가는구나!" 송현도 놀라워하자 왕백은 기세를 올리며 입을 놀렸다.  "이뿐이 아닙니다. 송 학사님, 아차! 문주님의 명으로 연일 신입 문도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먹고 입히는 것도 문제지만 그들에게 지급하는 병장기의 구매 가격 이 턱없이 많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그대로 두었다가는 하루 종일이라도 푸념을 늘어놓을 것 같기에 송현은 왕백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읍...... 읍!" 바동거리는 왕백의 귀에다 대고 송현이 웃음을 참으며 속삭였다. 뭐라고 했는지 몰라도 왕백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이십니까?" 송현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왕백은 손바닥을 비비며 헤죽거렸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왕백은 신바람이 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러나 왕백이 사라지자 송현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잠시 신형이 흔들리나 싶더니 잔상만 남기고 송현이 사라졌다. 당문에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긴 송현의 공부가 더 깊어졌음을 보여 주었다.  풍보를 극성으로 펼쳐 태평문의 안채에 위치한 비밀 옥사에 도착하자 새로이 만들어진 태평문의  수신호위들이 경례했다.  "문주님을 뵈옵니다. " 영호인이 직접 단련시키고 있어서인지 하나같이 눈매 가 날카롭고 잘 벼려진 검처럼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수고가 많군, 그래, 어찌하고 있나?" 송현은 옥사에 갇혀 있는 죄수의 상태를 묻자 수신호위 하나가 이마에 주름을 만들었다.  "몰조차 입에 안 대고 있습니다. " 그럴 줄 알았다며 송현이 안으로 들어섰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 누군가 한 사람이 결박당한 채 무릎 꿇려져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죄수의 몰골은 형편없어 보였다.  이미 입술은 마르고 터지기를 반복해서 곪고 있었다.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있다면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송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사납던지 어둠 속애서도 맹수의 그 것처럼 번뜩였다.  "여전하군,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기가 꺾였을 텐데. 날이 갈수록 독기가 더해지니 대단해. 하기야 그날 객잔 에서 기습을 했던 네 동료 놈들도 정말이지 대단했어. 제 동료의 몸에 칼을 꽂으면서도 나를 죽이려 하다니. 그날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오금이 저린다고."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에 죄수는 이를 갈았다.  "물론 너희들에게 운이 나빴다는 건 인정하지, 그날 우 리 일행 중에 화산제일검이 없었다면 당한 것은 우리였을 거다. 나는 그때 내상이 심했으니까."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 죄수는 바들바들 몸을 떨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뭐 어쩠든 너희들의 암습은 실패했고 너 혼자 살아남았다. 조금이라도 편해지려면 배후를 대는 것이 좋아." 살길을 열어 주겠다는 송현의 제안에 죄수는 피 섞인 가래침으로 대신했다.   퉤! 역한 냄새가 나는 가래침이 송현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 모양을 보고 벽에서 등을 뗀 송현이 가까이 다가갔다.  "처음에는 말이지 영파방 놈들이 보낸 자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파방 놈들을 족쳐 봤는데 아니더군.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는데 말이야......" 붉게 충혈 된 눈을 노려보는 송현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죄수는 불길한 느낌을 받고 눈동자가 흔 들렸다. "네놈이랑 비슷한 어떤 사내를 기억해 냈단 말이지. 검 은 무복에 늘 검을 끌어안고 어떤 노인을 지키는 얼음덩이를 말이지." 부들부들: 송현의 말에 죄수는 크게 신형을 떨었다. 자신와 짐작 이 맞았음을 안 송현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곧 외출 준비를 할 테니 그리 알도록. 네 주인을 만나러 가야겠어. 내가 예전하고 달리 빚지고는 못 살거든."  송현이 밖으로 나가자 죄수는 한 가닥 의지하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는지 기운을 잃고 쓰러졌다. 그토록 지키고 자 했던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송현이라는 존재가 두렵게만 느껴졌다.

남원북철(南轅北轍)

- 수레의 끌채는 남을 향하고 바퀴는 북으로 간다는 뜻으로 마음과 행위가 모순되고 있음을 비유 

  영파방과 태평문의 충돌 이후로 항주 거리는 한동안 살벌한 풍경을 연출했다. 모르쇠로 일관하던 항주부에서도 사람이 상하고 상점들이 문을 닫자 결국 관병을 파병해서 시전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흥흥했던 소문도 가라앉았고 끽의 복수를 할 거 라펀 태평문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점포을 열고 장사에 만 매진하자 항주는 다시금 평안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외지인과 항주 사람들이 물건을 구경하고 사기 위해서 흥정을 하는 통에 아주 소란스러웠다.  "이래서 시전에 나오면 기분이 좋단 말이야. 뭔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이곳의 기운이 의욕을 넘치게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송현이 맥없이 끌려오는 방갓 쓴 사내를 향해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송현은 유쾌하게 웃으며 혼자 떠들었다.  사내는 번화한 거리가 가까워지자 앞으로 걷지 않으려 했지만 막여위의 굵은 팔뚝이 밀어붙이는 데는 버틸 재간 이 없었다. 이미 모든 혈을 점혈당한 사내는 어린 아이보다 약해져 있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포박되어 있던 터라 몸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사내를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양명 역시 그런 사내를 개 끌듯이 잡아끌었다.  탁성운! 항주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자공의 전당포였다. 겉으로는 인색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저리로 고리를 놓는 의상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송현은 그의 진정한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붉은 주렴을 젖히고 들어가자 여전히 작은 책상에 앉아 서 주판을 튕기고 있는 자공이 눈에 들어왔다 "여, 영감 잘 있었소?" 뜬금없이 들이닥친 송현을 흘깃 한 번 쳐다본 자공은 장부의 셈을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다.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총관인가 뭔가 하는 녀석에게 틀림없이 들르라고 전했는데 이제야 나타나는 게냐?' 입은 떠들면서도 주판알을 튕기는 것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셈을 하는 머리 따로 말하는 머리 따로 있는 듯했다. 고소를 금치 못한 송현은 아무렇게 의자에 걸쳐 앉은 다음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작은 소리였지만 여간 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이마에 내천자를 그린 자공이 장부를 덮고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이놈아, 장부 계산할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 몰 라?" 역성을 부리는 자공을 보며 송현은 차갑게 비웃었다.  "그런가요? 그걸 아는 분이 자객을 보냈습니까?' 송현의 태도가 여느 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자공 은 신색을 바꾸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정색을 한 자공의 태도를 보며 송현은 고개를 가로저었 다 "실망이군요. 자객을 보낼 수는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렇게 발뺌하는 모습은 모리배나 하는 짓이라는 걸 아십니까?" 송현의 언사에 자공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팔십 평생을 살면서 이보다 더한 모욕은 없었다. 그의 분노를 대 신하기도 하듯이 그림자 속에서 검이 튀어나왔다.  챙캉! 빠르게 튀어나왔던 검은 그보다 빠르게 돌아갔다.  "크흑!" 피를 흘리는 손목을 움켜쥔 채 물러서는 무송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사고가 정지 하는 법이다. 무송은 송현의 신위에 압도되어 몸이 굳어 버렸다.  송현이 당포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이미 살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녀석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일이 틀어졌음을 알고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평생 익힌 암수 중에 가장 자신 있는 절기였다. 수많은 암습에서 단 한 차례도 실패하지 않은 절대신공이었다.  그런 절초가 송현이 던진 찻잔에 막혀 실패한 것이다.  '어느새 저렇게 커져 버렸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는 엇비슷하다 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태산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지금의 송현은 아무리 완벽한 조건이라도 해도 암습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 있었다.  손아귀가 터져서 피를 흘리고 있는 데도 무송은 지혈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무송, 이놈아. 이게 무슨 짓이냐?" 자공은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 이 화가 났다고 해도 사람을 상하게 할 목적으로 검을 뽑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무송은 모든 것이 실패하였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죄 죽음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부러진 검을 집어 들고 목을 향해 찔러 가던 무송의 행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송현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챙캉! 또 한 번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무송은 성한 손도 피로 물들며 바닥에 쓰러졌다.  "네 이놈, 그만 하거라! 그만 해!" 송현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던 자공은 이내 조용해졌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당황해 하는 자공에게 송현은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방갓 쓴 살수들을 찾는 거라면 소용없는 짓이라고 말 해 주고 싶군요." "너 이놈!" 분이 극해 달한 자공은 손가락질을 하다못해 별의별 욕설을 해 댔다. "그런 걸로 분풀이가 된다면 실컷 하시죠. 하지만 그 다음에는 제 차례라는 걸 명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 냉혈한으로 변한 송현이 자공에게는 지옥의 악귀로 보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자공은 분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직시했다. 이미 모든 주도권은 송현에게 넘어갔음을 인정하자 그는 차분해졌다.  딱! 송현이 손가락을 튕기자 막여위가 방갓 쓴 사내를 데리고 들어와 바닥에 내던졌다. 맥없이 바닥을 뒹구는 바람 에 방갓이 벗겨지며 삼십 대 장한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너는?" 장한의 얼굴을 확인한 자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한 은 자공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무송은 무송대로 놀라 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필시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가 살아 돌아왔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 목숨을 노린 살수 중 하나입니다. " 자공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보지 않는다고 송현 의 냉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제게 손을 내밀고 한편으로는 제 등 뒤로 칼을 들이미셨더군요. 그게 그토록 주장하시던 자공의 술이라면 실망입니다. " 자공은 일순 억장이 무너지는 참담함을 느끼며 주저앉았다. 평생을 지켜 온 신조가 한순간에 퇴색되어 버린 것 이다 자공의 술은 인술이며 바른 상도이고 선비상인의 근본 이라고 누누이 송현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이 모두 소 용없게 된 것이다.  "이 자공이...... 평생을 부끄럼 없이 살아온 내가 후안무치한 놈이 되고 말았구나." 진실로 탄식하는 자공을 보면서도 송현은 의심의 눈길 을 거두지 않았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공을 문책했다.  한마디, 한마디 감정이 실리지 않는 송현의 음성은 사람 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기가 없었다.  "영파방도 당신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입니까?" 자공은 굳게 입을 다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송 현의 분노를 더 키웠다.  "제 식솔들이 상했습니다. 애비를 잃은 아이들이 수십 이고 지아비를 잃은 여인들의 곡소리가 매일 밤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의 짓입니까?" 격한 감정과 함께 터져 나오는 살기는 무형의 흉기였다. 

  당문에서 돌아온 이후로 송현의 신위는 곽무헌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선 상태였다. 작은 깨달음만 뒤따라 준다면 화경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삼국연의에서 여포가 관우, 장비와 일 대 이로 싸워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걸 보고 세인들이 화경의 경지라 칭 했다지만 지금 송현의 상태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살기를 표출하자 당포 안에 있던 자기들이 견디지 못하게 깨져 버렸다. 기겁을 한 무송이 그 몸을 해 가지고 자 공의 앞을 막아섰다.  "네 목을 노린 것은 나다. 화풀이를 하려면 내게 해라. 주군께서는 아무것도 모르...... 컥!" 송현이 손을 뻗자 무송은 목을 쥐고 바닥을 ?"굴었다.  손에 힘을 주며 아귀를 오므리자 무송의 목이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뼈가 뒤틀리는 소리는 모하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입을 다물던 자공의 크게 놀라 소리쳤다.  "그만 해라! 모든 것을 말해 줄 테니 그 아이를 놓아 주거라!" 절박해 보이는 눈을 확인한 송현이 기운을 거두자 무송 은 거칠게 숨을 토해 내며 쓰러졌다.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자공은 적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기절한 무송과 고개를 숙인 사내를 본 자공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칠십 년이다. 그동안 별 의별 풍파를 다 겪었고 수많은 인간들을 다 겪었지만 네 놈 같은 녀석은 보다 보다 처음이다. "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자공은 송현의 눈을 노려보았다.  

"설마하니 애들을 모두 죽인 것이냐?" 자공은 탁성운을 지키던 수하들을 염려하고 있었다.  송현은 그것이 왠지 모르게 가식처럼 느껴졌다.  "전 괴물이 아닙니다. 당신하고 다르죠." "다르다?" 자조적인 웃음과 회한이 뒤섞여 나왔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송현은 알고 싶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오로지 단 하나였다.  그가 영파방의 배후인지 아닌지 였다. 송현의 손에 진기 가 모아지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공은 곰방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부싯돌을 당겨 불을 붙인 자공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더니 연기를 내뿜었다. 그것으로 긴장이 풀리는지 훨씬 담담해졌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전에 내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나는 너를 해칠 생각 따위는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내 후계자로 생각했기 때문 이다. " 송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자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담배 연기 속에 숨어 있는 자공의 진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눈빛을 빛냈다.  "어디서부터 너와 나의 인연이 이렇게 엉킨 실타래처럼 어긋나는지 모르겠구나. 너의 표정을 보니 이미 너와 나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듯하니 그것이 한스럽다. " 마치 유언을 하듯 자공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송현이 원하는 것을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그의 말은 길어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우리는 위나라 때 상술의 대가이신 여불위의 후손들이다. " 일상의 대화중에 들은 이야기라면 놀라서 벌떡 일어날 사실이었지만 지금의 송현에게 자공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놀랍지 않았다.  "당시 진시황제는 여불위의 금력과 머리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죽음 을 미리 예견하고 모아 둔 자긍은 비밀리에 감췄고 살아남은 후손들은 그 재물을 후대로 물려주었다. " 고대극 비밀을 털어놓는 자공은 오랜 세월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듯이 편안해 보였다.  "그런데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운다는 아무리 좋은 뜻 도 세월이 흐르면 퇴색하듯이 욕심을 부리려는 자들이 생 겼다. 이에 당시 금방을 맡고 있던 방주 소광은 위기를 직 감하고 이를 숨겼다. " 송현이 서화의 비밀을 풀어내고 찾아낸 막대한 재물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그 많은 금은보화가 그곳에 있었는지 의문이 해소되었다.  단시일에 어마어마한 재물이 모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오랜 세월 축적된 보물이었던 것이다 "천하라도 도모할 심산이 었습니까?" 송현은 비웃어 줄 셈으로 한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자공 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송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를 도모한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모험이었다. 자칫 멸문으로 가는 낭떠러지일 수도 있기에 송현은 손에 모았던 진기를 흩어 버렸다.  "역모의 불충을 저지를 셈이었소?" 한층 냉랭해진 송현의 말에 자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한 배짱은 없었다. 자고로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 이 아니라 그저 뒤에서 그림자처럼 존재할 뿐이었지."

  송현은 자공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되새기다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하니 ......?" 창백해진 송현을 보며 자공은 씁쓸하게 웃음을 흘렸다 담배 연기가 무척이나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내가 점찍은 녀석답구나. 그래 연왕부에 자금을 대고 있다. " 연왕 주체는 오래전부터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도는 호전적인 번왕 중 한 명이었다 북 경 근처에 군대를 동원했다는 등 별의별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그 많은 사병을 유지하는가 했더니 바로 당신의 뒤에 있었군. 그 대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송현은 직접 듣고 싶었다, 그것이 태평문을 공격한 이유 중의 하나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천하상권의 통일이다. 전 대륙에 금방의 깃발을 올리 고 오로지 금방을 통해서만 물건을 사고팔도록 만드는 것 이 나의 꿈이었다. " 저 작은 노인의 마음속에 그토록 무서운 생각이 들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참다못한 송현은 그의 계획이 엉터리였음을 주장했다. "선비상인의 정신이라고? 흥! 개도 안 물어 갈 헛소리! 천하상권의 통일이라니 그건 매점매석하는 악덕 상인보다 더 나쁜 짓이오. 자유로운 시장경제야말로 진정한 상도의 길임을 모르는 것이오?" 송현의 질책에 자공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로 태어나 큰 뜻을 품어 보는 건 결코 부끄러운 짓이 아니다. 천하를 도모함에 있어서 모두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자공의 뜻은 완고했다. 그런 자공의 위험한 생각이 송 현은 안타까웠다.  "어리석은 그대의 욕심으로 인해 전쟁이 벌어져 군대 의 말발굽 아래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할 백성의 슬픔은 생각해 보았소?" 인의를 생각하는 송현과 천하를 논하는 자공과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영웅과 효웅의 차이는 백짓장 하나 정도지 그것은 성공을 하느냐 못하느냐다. 백만, 천만을 죽여도 대업이 성공하면 영웅이오, 실패하면 효웅이 되는 것이다. " 당당하게 말하는 자공에게 사람에 대한 연민은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것은 오로지 불꽃이었다. 그것 을 들여다본 송현은 새삼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다. "미쳤군!" 짧은 한마디로 평가된 자신의 삶을 자공은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송현은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역사는 자 공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크게 요동쳐 왔음을 알고 있었다. 역사에 드러나는 영웅들 뒤에서는 그들을 부추기고 조력한 숨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자공 역시 연왕의 불안 과 탐욕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로 인해 이 명 황조는 또 다시 뒤틀린 역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후후후, 이제 곤 천하는 연왕의 군대가 짓밟게 될 것 이고 연왕이 천하의 주인으로 황좌에 오를 것이다. 그리 하면 이 금방이 천하상권을 틀어쥐고 대명제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다. 하하하하!" 순간 머리가 아파 옴을 느낀 송현은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복잡한 머릿속을 진정시키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든 자공을 현실 세계로 데려왔다. "그래서 내가 필요했다는 뜻인가? 천하상권을 움켜쥘 상단주로 말이지." 자공은 송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자공은 이내 풀이 죽은 모습 이었다. "진시황제의 저주 때문인지 애석하게도 우리 금방에서는 인재가 나오지 않았다. 정말 거짓말처럼 관직에 나가 기 위해서 수없이 노력했지만 번번이 미끄러지고 말았지. 결국 나는 외부에서 사람을 데려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 했고 네가 내 눈에 띈 것이다. 너야말로 답보하고 있는 우 리 금방을 발전시킬 인재였다. " 다소 흥분했는지 아니면 아직 송현의 마음을 돌릴 수가 있다고 착각을 했는지 그는 애절한 눈빛으로 송현에게 부탁했다.  "너라면 천하를 손에 쥘 수 있다. 황제마저 네 꼭두각시로 만들어 이 대명제국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 어떠냐? 아직 늦지 않았음이야!" 자공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송현에게 손을 내밀었지 만 돌아온 것은 차디찬 질문뿐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죽이려 했소? 왜 태평문을 건드린 것 이오?" 미소를 띠었던 자공은 송현의 표정이 차가워지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웠다. 귓가에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 공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운명이 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 주군은 아무 잘못이 없다. 우리는 너를 인정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너같이 유약한 녀석이 우리 금방의 수장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다. " 

  무송이 자공을 막아서며 송현을 향해 악다구니를 썼다.  피를 토하듯 송현에 대해서 분노를 드러낸 것이다.  "네가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항주에서 네 녀석의 태평문이 그렇게 성공할지는 예상 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주군께서는 네 녀석을 더 신뢰하고 서둘러 금방을 넘기려고 했었다. 우리는 그것을 막고 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강호의 생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너무나 당당한 무송의 태도에 송현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 갔다.  "강호의 생리라? 별 개떡 같은 소리를 다 들어 보는군. 우리 좀 더 솔직해지는 것이 어떨까? 내가 서화의 비밀을 풀지 못하고 금방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지 못했어도 내 가 위협이었을까?" 정곡을 찌르는 송현의 말에 무송은 흠칫거리기만 할 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백 년간 잠들어 있던 막대한 금은보화가 돌아왔으니 금방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었겠지?" 마치 보기라도 한 것처럼 금방 내부 사정을 꿰뚫어 보 는 송현의 직관력에 무송은 감탄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고 해도 그것은 졸렬한 짓이었다. 강호의 생리라고 했나? 그렇다면 나 역시 강호의 도리를 따르려고 할 뿐이니 억울하지는 않겠군?" 사형 선고를 내리는 송현의 발치에 무송이 엎드렸다.  그는 개처럼 기어서 빌고 또 빌었다.  "나는 어찌 되어도 좋다. 주군은 살려 다오! 모든 것은 내가 계획한 일이다. " 무송의 몸부림에 방갓 사내도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송현은 그런 두 사람의 충정이 역겹게 느껴졌다.  "영파방은 뭐지?" 무송은 자공을 살리기 위해 모든 일들을 틸어 놓았다.  금방의 뿌리는 영파 지역의 유지들이었다. 또한 대륙의 여러 상방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영파출신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자공의 말대로 오랜 세월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묵묵히 때를 기다려 온 것이다. 그 인 내심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좋아, 그렇다고 쳐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나를 제거하려는 건 십분 알겠지만 태평문과 태평상하는 왜 공격했나?" 무송은 송현의 다그침에 잠시 주저했지만 자공을 일견 하고는 곧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본보기였다!" 순간 송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그것 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저도 모르게 살심이 솟구쳤다.  "본...... 보기?" 무송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니까 다시금 자공 이외의 누구도 금방의 후계자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태평문을 멸문시켜 본보기를 삼고자 했다는 뜻인가?" 맹목적인 충정이 어떤 위험한 짓도 가능케 한다는 사실 을 확인시켜 주는 순간이었다.  무송은 자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위인이었다 "그 천하상권이라는 걸 손에 넣기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이려 했다는 뜻이로구나!" 무송은 송현의 음성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영파방 휘하 일백 살수가 실패하고 태평문을 치러 간 정예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이런 순간이 오리라 짐작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모든 일 은 내가 저지른 것이다. 내 목숨 하나로 끝을 내라!" 너무나 당당한 무송의 태도에 끝내 참고 있던 송현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닥쳐 !"

  흩어졌던 진기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송현이 내친 장력 이 무송을 향해 날아갔다. 어찌나 무시무시한 장력인지 귀공성이 일어났다.  "안 돼!" 그러나 다음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 다. 자공이 몸을 던져 무송에게 날아가는 장풍을 막아 낸 것이다.  퍼엉! 북 터지는 굉음과 함께 자공의 작은 몸이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벽에 곤두박질쳤다.  "커헉 !" 검붉은 피를 칠공에서 흘리는 자공의 모습은 끔찍했다.  "주군! 어째서...... 어째서 이리도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셨단 말입니까?" 성치 않은 몸으로 재빠르게 기어간 무송이 죽어 가는 자공을 안았다. 피가 목울대를 메우는 통에 자공의 헐떡거리는 말을 알아듣기가 좀처럼 힘들었다.  러...... 너는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부디 나를 용서 ......" 자그만 체구의 자공이 숨을 거두자 무송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절규했다. 방갓 쓴 사내가 무릎걸음으로 기 어와 곡을 했다.  "으어, 으어 !" 부모를 잃은 짐승처럼 울부짖던 방갓 사내가 부러진 무송의 검을 들고 송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응징 의 검을 마음속에서 꺼내 든 송현에게 자비심이란 없었다. 퍼억! 방갓 사내는 송현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뇌수가 터져 나왔다. 부릅뜬 눈으로 비칠거리더니 모로 쓰러졌다. 가공할 만한 신위 였다.  송현의 분노에 자극받은 무극무해가 무형의 기운으로 표출된 것이다.  분을 풀기 위해서 송현은 다음 상대를 찾았다. 자공을 안고 있는 무송도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이 울분이 풀릴 것 같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무송의 어깨를 잡아챘다.  털썩! "이...... 비겁한 놈! 으아아아!" 이미 무송은 혀를 깨물고 자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 을 참지 못한 송현은 무송의 얼굴이며 가슴을 무자비하게 두드렸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졌지만 송현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피떡이 되어 버린 무송의 시신은 이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버렸지만 송현은 멈출 줄 몰랐다.  "이제 그만 하게!" 송현의 어깨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만 하면 되었어......" 혹시 모를 폭주를 염려한 영호인이 들어온 것이었다.  누구보다 송현을 위하는 영호인의 마음의 소리가 송현을 진정시켰다.  "콕콕콕, 이놈들은 당문에서 보았던 괴물보다 더 지독 했어 ." 어깨를 들썩이며 의미 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송현의 어 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 인간의 욕망처럼 무서운 괴물은 엾는 법이지. 이제 그만 가세나. 악취 때문에 한시라도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 이날만큼은 문주가 아닌 친구로서 영호인은 송현을 위로했다. 이들을 모두 죽였다고 송현의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호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보다는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빼앗은 더러운 기분만 남아 있을 송현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두 사람이 떠나자 비릿한 혈향으로 가득한 탁성운에 불길이 치솟았고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역사의 흐름을 한 사람의 힘으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했다. 그러나 송현은 역모의 사실을 알면서도 이 를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자네가 여전히 금위위의 수장이라는 걸 알고 있다네." 슬픔을 잊기 위해서 처음 항주에 도착했을 때 머물렀던 객잔에 들린 송현은 술 한 잔을 마시기도 전에 영호인에 게 자공의 계획을 알렸다.  "뭣이라고?" 크게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송현이 어떻게 자 신의 숨겨진 신분을 알고 있는지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역모! 그것은 천하대란의 악몽이었다.  자초지정을 전해들은 영호인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송 현이 어서 가보라고 하자. 영호인은 그를 걱정해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괜찮으니 어서 가라고,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집하나 못 찾아갈까?" 자신을 걱정해서 자리를 뜨지 못하는 영호인을 채근하니 그는 마지못해 일어섰다.  "금방 돌아오겠네, 너무 취하지는 말아!" 영호인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송현은 그걸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불현 "충심이라는 걸까?" 그런 것보다 송현은 건문제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여 겼다. 황제와 신하의 도리인 군신의 예보다 인간 대 인간 으로서의 의리라고 느낀 송현은 부디 건문제가 연왕의 도발을 막고 천하를 안정시켜 주길 바랐다. 그리고 더 이상 자공과 같은 효웅들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기를 소원했다.  달콤하고 향긋하기만 한 소홍주가 전혀 맛있지 않았다.  잔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항아리째 들어 마셔 보지만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취하지도 않았고 갈증도 해갈 되지 않았다.  그때 삼층 누각에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 묻어 있는 아련한 향기가 송현의 전율케 했다.  너무나 익숙하고 그리워했던 쟈스민 향에 송현은 격렬 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환청이라고 해도 좋은 감미로 운 음성이 들려왔다.  "바보 같은 사람......" 송현은 차마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지금 이것이 술에 취해서 들리는 환청인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만약에 돌아보아서 아무것도 없다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송현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서희......" 꿈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그녀가 미소 지으며 고달픈 삶에 지친 송현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누란지위(累卵之危)

- 층층이 쌓아 놓은 알의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몹시 아슬한 위기를 이르는 말

  송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서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 린 그녀를 끌어안았다.  "제발 꿈이라면 깨지 말고, 꿈이 아니라면 이대로 죽어 도 좋아."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해서 절대로 누군가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늘 꿈꾸다 손을 뻗으면 사라지던 신기루가 아니었다.  가녀린 그녀의 심장이 송현의 품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뭉클거리는 보드라운 입술이 메마른 송현의 입술을 적시자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서희, 그동안 도대체 어디 ......" 가냘픈 손가락 하나가 송현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나중에, 나중에......" 잦아드는 그녀의 말처럼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가 돌아왔으니 그걸로 된 것이었다 송현은 그녀를 안고 삼층 누각을 나는 듯이 내려갔다.  송현의 달라진 신위에 놀란 그녀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송현은 바람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늘이었지만 오늘의 하늘은 어제의 하늘과는 달랐다. 하늘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꽃과 나무 들, 새들의 울음소리마저 송현에게는 남다르게 느껴졌다.  온 세상이 마치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 이 들었다. 그것은 그림에서 방금 튀어나온듯한 아름다 운 서희 때문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무작정 달린 송현은 어느 이름 모를 촌락에 도착했다. 누군지 모를 이가 살다가 버리고 떠난 폐가에서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나누다 방금 잠든 서희를 언제까지나 지켜볼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가닥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주자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혹여 그녀가 깰까 봐 노심초사하던 송현은 새 벽의 찬 기운에 감기라도 들까 봐 잔가지들을 모아서 불을 지폈다.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자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폐가에도 훈혼한 온기가 퍼지니 서늘한 새벽의 찬바람을 막 아 주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다람쥐 한 쌍이 나타나 송현의 주변을 맴돌았다.  "요 녀석들 봐라, 내가 무섭지 않은 재냐?" 미소를 지은 송현은 품을 뒤져 남아 있던 육포 조각을 던져 주었다.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아 본 다람쥐는 얼른 입에 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낱 미물도 제 짝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했단 말인가? 참으로 한심하구나!" 그동안 서희를 찾지 않고 기다리기만 했던 자신을 질책 한 송현은 다시는 그녀를 잃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녀가 떠나서야 자신에게 서희란 여자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는지 깨닫게 되었던 송현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지 낸 나날이 너무나 힘들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 은 고독이었다.  한기를 피해 볏짚으로 파고드는 그녀에게 장포를 벗어 덮어 준 송현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최근 들어 무극무해의 심상 편을 모두 이해하게 된 송현의 공부는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얻은 깨달음을 통해 무극무해의 방편과 모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이전에는 그저 무극무해의 신묘막측한 기운에 이끌려 갔다면 지금에 와서는 그 기운을 운용하고 절제된 사용을 통해서 마치 수족을 부리듯 조절이 가능한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는 스승인 시타르도 이루지 못한 경지였다.  무상무념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송현은 서희 의 출현으로 불안했던 감정이 사라지자 더욱 더 깊은 곳 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침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에 도달한 송현은 충격을 받았다.  무...... 그런 곳이 존재했다.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경험 이었다.  이제야 왔는가? 느닷없이 들려온 낯선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란 송현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절대 무의 세 계에 자신 말고도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송현의 호 기심을 유발했다.  소용없네. 나는 자네를 볼 수 있지만 그대는 나를 볼 수 없어! 다시금 들려오는 음성은 특정한 방향이 아니라 이 공간 전체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 그제야 송현은 말을 걸어온 상대가 살아 숨 쉬는 존재 가 아니라 이 무한의 세계 자체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후후후, 오랜 세월 그대를 기다려 왔다. 무극무해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하네. 송현은 커다란 충격에 빠져 들었다. 뜻밖의 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심정적인 안정을 가져온 서희의 출현 이 다른 때보다 더 깊인 명상에 빠져 들게 만들어 준 결과였다.  이곳까지 도달한 걸 보니 희노애락의 굴곡을 많이 겪었을 테지, 그 모든 것은 무극무해와 연이 닿은 이들의 숙명 의 고행이라고 할 수 있네. 송현은 결코 무극무해와 연을 맺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무극무해를 알게 된 이후로 슬픔만을 경험 했다. 스승인 시타르를 잃었고 자신은 원치 않던 강호라는 비 정무림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무극무해를 알지 못했다면 두 손에 피를 적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망하고 있군그래. 송현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지 미지의 존재에게 서도 슬픔이 묻어났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송현을 위로라도 하듯이 주변이 따스해졌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제가 원하던 것은 평범한 삶이었지만 이젠 그런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 송현의 슬픔 음성이 흘러나오자 주변은 다시금 어두워 졌다. 마치 송현의 마음과 이 공간이 하나처럼 보였다. 그 것을 느끼는 순간 그동안 살아온 삶의 기억들이 공간에 펼쳐졌다.  송현의 탄생부터 성장, 삶의 기쁨과 슬픔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기도 하는 것이다.  무극무해는 그저 송현에게 자신을 보다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느닷없이 송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왜 우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 눈물은 뜨겁고 진한 인간 적 인 눈물이었다.  "무위......" 지금 송현이 깨달은 것은 인위의 반대 개념인 인간이 의도적 만들고 강요하고 그것을 지키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으로 간주하는 공자의 유가 사상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지금 송현에게 찾아온 깨달음은 인간이란, 순수한 자연 의 본질을 가지고 있으나 문명 세계에 길들여져 자연의 진실과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한 것이다.  일체의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고 무위자연하는 속에서 인간의 자유스러운 삶이 얼마나 위대한지 환상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우주의 본체는 가장 크고도 유일한 무극으로서의 모든 삼라만상은 이 무극의 세계로부터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 무위로 사는 것만이 인간을 구제하는 길이었다.  "아, 무극무해!" 바로 무극무해의 요체였다. 그 순간 모든 근심과 고민 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송현은 일체의 평화를 느꼈다.  그 절정의 순간에 맛보는 초유의 감정은 전율 그 자체였다.  비로소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구나! 미지의 존재는 떨리는 음성으로 송현의 깨달음을 축하 해 주었다.  근래 도가의 도는 그 절대성을 강조하여, 인간은 늘 감정적인 편견에 빠져 우주 만물을 상대적으로 치부하고, 

  제멋대로 판단함으로써 도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타고난 자연의 도를 망각하게 되었으며, 이 로 인해 탐욕과 분란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미지의 존재가 주장하는 인간의 이상적인 삶은 인위적 인 문명 세계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 돌아가 원초적인 삶 을 살 것과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무위자연이란꾸밈이 없이 자연에서 천지만물의 생성자인 도의 뜻을 체득하여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삶을 사는 것이군요." 송현이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하여 말하자 미지의 존재 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졔야 비로소 또 하나의 구제자를 찾았구나.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 갑자기 뒤틀리더니 더 없이 아름다운 숲이 펼쳐졌다. 당황한 송현이 이리저리 두리번거릴 때 숲 안에서 백의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신선?" 노인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수염을 매만지며 선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껍질을 벗느냐 못 벗느냐의 차이일 뿐 인간이니 신선이니 하는 것 따위조차도 인위니라. 송현은 신비로운 존재에게 절로 고개를 숙였다.

  "무극무해를 만드신 분이로군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 때문에 많은 이들이 슬픈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원망하는 말이었지만 말투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미 초탈한 경지에 이른 송현이기에 그저 알려 주는 것뿐 이었다.  알고 있다. 나 역시 무극무해의 어두운 면을 보았다. 허나 세상은 절대 선이 아니면 절대 악이 되어 버린다. 나도 그것만은 어쩔 수가 없구나. 노인은 개탄을 하는 듯 한숨을 쉬며 잠시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송현에게 손 을 내밀었다.  무극무해률 세상에 남겨 두면서 만들어 놓은 안배에 통과한 이는 오로지 너뿐이로구나. 자 내 손을 잡고 무위의 세계로 가자꾸나! 노인의 내민 하얀 손을 보며 송현은 갈등했다. 저 손만 잡으면 무위의 도가 펼쳐진 세계에서 영원히 안위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의 고통도 아픔도 없을 거란 걸 송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송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노인을 향해 송현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인세에 두 번 다시없을 기연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 고 있습니다. 허나......" 허나, 무엇이 너를 아직도 속세에 잡아 두려 하느냐? 안타까워하는 노인의 마음을 느낀 송현도 편치 못했다.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 송현의 굳은 눈빛을 읽은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것은 송현의 마음을 이해한다기보다 그의 고집을 절대 꺾을 수 없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리석구나! 혀를 차는 노인을 향해 송현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무위하며 사는 것보다 저는 신의를 지키며 살고 싶습니다. " 송현의 굳게 다문 입술을 보며 노인은 '허허' 웃음만 흘렸다. 뒷짐을 진 채 허공을 잠시 응시하던 노인은 길게 탄식했다.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구나! 씁쓸하게 말을 꺼낸 노인은 몸을 돌려 숲으로 돌아갔다. 그런 노인의 등을 향해 송현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스스스스! 뿌연 안개가 짙어지더니 송현은 갑자기 온몸이 땅으로 꺼지는 환상을 보며 미궁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 억 !" 답답한 듯 숨을 몰아쉰 송현은 눈을 크게 떴다.  번쩍! 송현의 두 눈에서 은하수의 별처럼 많은 빛 무리가 솟 아나왔다. 어두웠던 폐가에 인근 십 리 밖에서도 보일 정 도로 커다란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가 이내 사라졌다.  송현의 눈빛은 너무나 깊고 고요하며 심연의 세계 그 자체였다.  "경하 드려요, 가가!" 달콤함 여인의 음성에 송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언제 깼는지 서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부좌를 푼 송 현이 그녀에게 다가가 살포시 끌어안았다.  "미안하구려, 내가 잠을 깨웠나 보오." 등을 토박이며 미안함을 대신하는 송현의 가슴에 서희는 고개를 묻었다.  "아니에요. 신공을 대성하셨으니 기뻐해야 할 일이죠." 말로만 듣던 득도의 경지를 곁에서 지켜본 서희의 목소 리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송현도 그것을 느꼈다. 그러자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쓸데없는 기우라며 송현은 서희를 더욱 끌어안으며 나쁜 기분을 떨쳐 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품에 안 긴 서희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슬퍼 보인다는 사실을 송 현은 알지 못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한다. 그런 일이 또 한 번 일어나 천하가 뒤숭숭해졌다.  번왕 중 하나인 연왕이 기어이 군사를 일으켜 건문제를 몰아내고 천자가 된 것이다. 무지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누가 천자가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황궁의 주인이 누 가 되든지 간에 그들의 삶이 변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관직의 끄트머리에라도 발을 담그고 있는 자라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영호인은 오문을 통해 황궁에 발을 들여놓았다. 성문을 열고 들어서자 낯익은 건물과 함꼐 화려한 황궁의 풍경이 펼쳐졌다.  문턱을 넘어서니 궁궐 안에는 많은 고관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관복에는 루비와 산호 단추가 반짝거렸고, 금빛의 꿩과 하얀 학이수놓인 장식이 붙어 있었다.  연왕, 아니 이젠 영락제로 등극한 새 천자에게 잘 보이려 가는 탐관들이었다. 영호인은 이내 그들을 외면하고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영호인을 마중 나온 사람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간결한 옷차림을 하고 친절하게 맞아 준 소환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어린 내시를 보자 영호인은 태평문에서 정신없이 장부 정리에 매진하고 있을 왕백을 떠올렸다.  이젠 구렁이보다 더 약아빠진 왕백에게도 저런 어린 시 절이 있었음을 떠올리며 커다란 관복이 맞지 않아 질질 끌고 다니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내 소환이 안내한 정원의 현판을 보자 미소가 사라졌다.  '여긴? 영호인의 미간이 좁아진 이유는 이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잠시 주저하던 영호인은 결심이 섰는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기름칠이 잘된 장쇠 덕분에 문은 가볍게 열렸고 안으로 들어서니 중년의 장한이 탁자에서 차를 즐기고 있었다.

  '저자는 오광효?' 오광효는 일찍이 연왕 주체가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한 인물이었다. 스스로 연왕 주체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했다.  연왕 전하께서 신을 지목하신다면, 신은 전하께 횐 모 자를 씌어 드리겠습니다.  연왕 주체는 요광효의 의도를 눈치 챘다. 흰 모자를 쓴 다는 것은 백자와 왕자가 결합하여 황제의 황이 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연왕 주체는 요광효를 곁에 두었다.  이후 요광효는 권력의 핵심부에 자리하면서 새 왕조의 요직에 안착하였다.  영호인은 그가 자산을 왜 불러들였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처음에는 건문제를 모시는 금의위의 수장들을 처단하려는 것인 줄 알고 내심 긴장했으나 그것이 아님을 알고 스스로 황궁으로 입궁한 것이다. 사실 오광효의 말 한마디면 영호인은 대역죄인으로 참형에 처해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사문인 무당파에까지 그 피해가 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대가 영호인이로군. 앉게!" 

  읍을 한 후 자리에 앉은 영호인은 금의위의 보고서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탐욕스러운 간신배라고 되어 있었지만 마주하고 나니 대장군의 호상 에 기개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 눈속임을 하였군.' 영호인은 오광효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연 극을 했다고 여겼다. 거짓 행동에 속은 금의위는 그를 경 계 대상에서 누락시켰고 그 결과 그는 난을 일으키는 데 있어 어려움 없이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쳐다보니 부담스럽군." 찻잔을 내려놓은 오광효가 인상을 쓰자 영호인은 자신 의 잘못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 사색이 된 영호인을 보며 그는 껄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닐세, 아니야. 내 농 한 번 한 것 가지고 정색을 하 기는. 자, 자. 편히 차 한 잔 들게나!" 오광효는 이내 인상을 풀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건 그가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부리는 여유였다. 그 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영호인으로서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대의 경력을 보니 아주 다채롭더군." 

  서책 한 권을 펼쳐 든 오광효는 표시를 해 두었던 부분 을 펼치며 읽어 내려가는 시늉을 했다.  "금의위 일등 교위 이후에는 금의위 수장에...... 현재 는 태평문이라는 상단의 몸을 담고 있다고?" 제법 상세한 내용에 영호인은 등 뒤로 진땀이 흘러내렸다.  "그, 그러하옵니다. " 오광효의 속내를 알 수가 없으니 영호인으로서는 답답할 뿐이었다. 그가 늑장을 부릴수록 영호인의 입술을 바 짝 타들어 갔다.  "게다가 무당파 칠검이라는 명호를 가지고 있는 무림 의 고수이고?" 오광효의 입이 열릴 때마다 영호인은 절벽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심정이 되었다.  "보잘 것 없는 허명입니다. " 애써 자신을 낮추기 바쁜 영호인과 달리 오광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영호인을 치켜세웠다.  "아니야, 그대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기재일세." 미소를 지우고 정색을 하는 오광효를 보며 영호인은 침 을 집어삼켰다. 이제야 그가 자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참 이유를 들을 때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실은 말이야, 황상께서 이 어지러운 시국을 빠른 시간 내에 정리하고 싶어 하시네." 새로이 정권을 잡은 이들은 누구나 정권을 안정시키길 원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그 일에 무당이 앞장서 주었으면 하 네. 그 일에 자네가 무당과 황실의 가교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네." 본론이 튀어나오자 영호인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도가의 성전인 무당파가 황궁의 정치 선전 도구로 전락 하게 생겼으니 이는 크게 두려워하고 멀리해야 할 일이었다. 일찍이 장상봉 진인께서 늘 권력을 멀리하라고 했음 을 알고 있는 영호인으로서는 무당에 큰 위기가 도래했음 을 깨달았다.  더구나 자신에게도...... "물론 어려운 일임을 잘 아네, 많은 반발이 있을 테지. 허나 그대가 건문제를 도피시키고 지금의 황상을 시해하 려고 했다는 사실을 덮어 준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 이 아닌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서운 이야기를 꺼내는 오광효에 질려서 영호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산문에 걸린 시체가 가짜라는 건 나만이 알고 있네. 그리고 북경 경수사에 몰래 숨어든 자객들이 금의위의 자 네 수하들이라는 것도 나만이 알고 있지." 오광효라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깨달은 영 호인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자의 말 한마디면 자신은 물론 무당과 태평문이 끝장날 판국이었다.  "무엇을 어찌하라는 말씀입니까?' 기가 죽은 영호인의 음성이 떨리고 있음을 확인한 오광 효는 비릿한 미소를 남몰래 지어 보였다. 그는 장포 소매 속에서 잘 접힌 서찰을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눈짓으로 읽어 보라 명하니 영호인은 조심스럽게 서찰을 펴 보았다.  

흑건고륭, 남수묵당 ! 

'북에는 자금성을 짓고, 남에는 무당을 짓는다?' 영호인은 단 한 문장이 적힌 서찰 내용을 보고 경악했다. 현명한 영호인은 그 글 속에 숨은 뜻을 단번에 간파했다.  영락제가 무당산을 도가의 성전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 유는 우선 건문제의 삭번과 영락제의 정난지역을 합리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정식으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니 이후에 많은 반대자들 이 나타날 것이고 민심도 그러할 것을 알 터이니 이를 정 권 초기에 진화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연왕 주체는 건문제와의 싸 움, 즉 정난지역이 도가의 신인 진무신의 도움으로 승리 한 것이라 백성들에게 퍼트려 왔다.  이것으로 흐트러진 민심을 바로잡고 자신의 정권 찬탈 을 합리화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당산을 중건 하려는 영락제의 숨은 속내였던 것이다.  당연히 반대를 해야만 했지만 영호인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무당의 장문인을 부르지 않고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오광효에게도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민활하게 머리를 회전시킨 영호인은 동요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황상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음이니 이는 무당파에 게도 큰 홍복이옵니다. " 포권지례를 올리는 영호인을 보며 오광효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는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좋아, 혹여 자네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면 저 밖에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수고를 할 뻔하지 않았겠는가?" 이젠 식은땀으로 옷이 다 젖을 지경이었다. 예상대로 오광효는 영호인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 다른 방도를 준비 해 두고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영호인은 더욱 바짝 정신을 차렸다.  '이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나를 택한 이유는 또 있을 것이다. ' 영호인의 예상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오광효는 짐짓 늑장을 부리며 영호인의 애를 좀 더 태운 다음 속삭이듯 비밀스러운 말을 꺼냈다.  "사실 이런 일은 장문인을 통해서 해도 되지만 또 다른 일도 있기 때문에 자네를 불렀네. 모름지기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비밀이 유지되는 법이지. 내 말이 틀렸나?" 되물어 보는 오광효의 속내를 잘 아는지라 영호인 머리를 더없이 낮게 조아렸다.  "소신이 보고 들은 것은 그저 바람 소리였을 뿐이니 심 려 마십시오," 영호인이 알아서 하니 오광효는 크게 만족해 했다.  "눈치가 빠른 친구와 대화를 나누니 아주 좋구먼. 실은 말이야. 정난지역을 치르다 보니 사실 우리의 사병만으로 는 황제의 군대를 상대하는 데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네. 그래서 은밀히 강호의 손을 빌렸다네." 영호인은 뒤통수를 치는 듯한 충격에 고개를 번쩍 들었 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실이었다.  중원무림 중 어느 문파가 약정을 깨고 역모를 도모했는지 영호인은 그 문파를 잘근잘근 씹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을 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영호인은 고개를 숙였다.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짐짓 고민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오광효를 보며 영호인은 그것이 이제까지와는 달 리 실제로 상당히 갈등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에 영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 충심을 다할 것이니 하명하여 주십시오." 어떤 이들인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영락제를 도와 황권을 찬탈했으니 그들은 황실을 등에 업고 중원무림을 집어삼킬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말이지, 도움을 받기는 받았는데 영 찜찜하더 란 말이지." 오광효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직도 못 미더운 표정이었다. 그런 오광효를 설득하기 위해서 영호인은 강호의 일은 강호의 방식대로 처리하는 것이 뒤탈이 없음을 강조 했다. "강호의 일은 강호의 방식대로?" 영호인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광효는 일어서서 후 원을 향해 걸었다. 영호인도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았다.  "내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녔어도 그런 것은 처음 보았네, 강시라는 존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기는 했지만 실지로 보기는 처음이었다네. 그 괴물 같은 놈이 무려 혼자 일천을 상대하더군. 그때 처음으로 내가 반대편이 아니라 는 사실에 감사했지."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영호인은 몸을 떨었다. 최근에 강호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괴수가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송현과 곽무헌이 당문에서 돌아와 들려준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임을 직감한 영호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강호의 방식대로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충한 무리들이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뛴다면 오 대인께 허물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 영호인이 알아서 가려운 곳을 긁어 주니 오광효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좋아!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보았군." 뒤를 돌아 영호인의 어깨를 마주 잡고 두드려 주는 오광효의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자네 말대로 그놈들이 점점 요구를 하기 시작했네, 초 것도 아주 부담스러운 것들만 골라서 말이지." 오광효를 보며 영호인은 옛 고사를 떠올렸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사냥개가 사냥을 떠날 때 주인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으 며 서로 생사고락을 함께 하지만 사냥감이 사라지면 버려지는 신세라는 사기의 한 고사였다.  자신 역시 이 일이 끝나면 똑같은 신세가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이 필요했다. 거절한다면 후일을 도모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영호인의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오광효는 말로 하는 대신에 또다시 서찰 하나를 건네주었다.  "녀석들이 그 괴수를 숨겨 놓은 곳이네, 아! 물론 그 거 처를 마련해 준 것은 나일세. 그러니 그 흔적까지 철저히 지워야 하네, 황상께서 내가 그런 무리와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영호인은 깊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찰을 조심스럽게 받아 든 영호인은 소매 속에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내 영호인 그대를 믿지. 자, 이걸 받게나! 불쑥 건네받은 금패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영호인 에게 오광효는 큰 선심이라도 쓴 듯이 거드름을 피웠다.  "동창이라고 새로이 만들어진 황제 폐하의 수족이네, 동창의 좌위 신분패이니 하는 일에 보탬이 될 것이네. 돌아가는 길에 동창에 들려서 살펴보고 가게나." 새로운 정보 조직이 만들어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동창을 통해서 영락제는 주원장보다 더 무서운 공포 정 치를 펼치고 있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귀족이건 평민이건 가차 없이 처벌하고 있었고 그 앞에 동창이 있었다는 그들은 무고한 양민과 관리들을 고문실에서 대역죄라 명목 아래 무자비한 고문으로 죽이고 있었다.  얼떨결에 동창의 좌위사가 된 영호인은 내키지 않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소득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괴수를 만들어 낸 흥수를 알아내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 큰 행운이었다. 어서 돌아가 송현과 곽무헌에게 이 일 을 알리고 자신은 무당의 일만 잘 처리한다면 시간을 벌 수 있다.  그후 앞날에 대한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영호인을 향해서 오광효는 불쑥 입을 열었다.  "태양이 용의 비늘을 비추니 수많은 황금이로다." 천하의 대세에 순응하라는 말이었다. 천하가 어지러운 시국일 때 문치보다는 마상득천하의 무용이 더욱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 말뜻을 깨달은 영호인은 그가 암중에 경고하고 있음 \을 깨닫고 더욱 몸을 낮추었다. 절대로 자신의 위치를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영호인은 자신이 사냥개임을 잘 알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행동했고 이 각여 후에 후원을 빠져 나왔다.  당장 돌아가고 싶었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창의 환관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밤새 시간을 허비한 영호인은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동창의 고수 몇과 함께 성문을 나서게 되었다.  말의 흔들림을 느끼며 질주하던 영호인은 소매 속에 들 어 있는 서찰이 궁금하여 견디지 못했다. 서둘러 서찰을 꺼내서 펼쳐 본 영호인은 하마터면 말 위에서 떨어져 내 릴 뻔했다.  "맙소사! 이곳은......" 무엇을 보았는지 영호인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사 색이 되었고 그를 따르던 동창의 고수들은 말고삐를 당겨 야만 했다.  서찰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영호인은 너무나 두려 운 것을 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말 위에 앉아 있던 영호인이 서찰을 찢을 듯이 움켜쥐었다.  "송현...... 이 일을 어쩐다?" 영호인은 무거운 표정을 좀처럼 풀지 못한 채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악다문 입에서는 이후로 단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리곤 항주를 향해 말을 거칠게 몰았다. (학사장문인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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