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일전불사 (31/43)

  제9장 일전불사

  일전불사

  한바탕 싸움을 사양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싸움에 대한 강한 의지

  사천성 아미산. 불문의 성지 하면 대륙인들은 서슴없이 숭산 소림사를 떠올리지만 사천성에 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천성의 백성들은 아미산의 여승들이 지날 때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한창 바쁜 농번기의 농부도 모내기를 잠시 멈추고 아미산의 여승들에게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축복한다. 그들에게는 아미산의 여승들이 부처요 보살이었다.

  늘 자애로운 미소와 인자한 표정으로 아미산 일대의 주민들이 평안하도록 하기에 사천성에서 불도를 논할 때 아미파를 빼놓고서는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더구나 사천성의 패자로 군림하던 당문의 몰락으로 아미파의 입지는 그야말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런 아미산 위에 웬일인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아미산 아미파의 본당인 혜원궁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공기로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당금 아미파의 장문사태인 정인사태가 뿜어내는 노여움 때문이었다. 멸빈이라고 불리는 괄괄한 성정의 혜인사태도 쩔쩔맬 정도였다.

  그 앞에 아미사화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사공혜미는 담담하게 서 있었다. 정인사태는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그 한숨 소리가 무거운지 듣는 사람의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장문인이었다.

  “그래, 결국은 일이 그렇게 되었구나!”

  정인사태가 말문을 열자 사공혜미는 머릿속에 준비해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논리 정연한 설명을 정인사태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공지대사가 떠나기 전날 장문대사와 독대를 했다. 그것도 모두가 잠이 든 은밀한 밤에 말이지?”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는 정인사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하옵니다. 제가 심어 둔 동자승이 직접 목도하였는데 공지대사의 표정이 사뭇 슬퍼 보였다고 했습니다.”

  “슬퍼 보였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정인사태가 불전 밑으로 내려와 사공혜미 주위를 돌았다. 사공혜미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곽무헌 그 작자는?”

  사공혜미는 움찔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차가운 그녀의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사공혜미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맹을 나선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물론 목적지를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꼬리를 붙이지 않았는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자 사공혜미는 더욱 몸을 낮췄다.

  “아미사화가 뒤를 쫓았지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거론되자 아미사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미사화를 일변한 정인사태는 혀를 찼다.

  “쓸모없는 것들!”

  아미사화는 정인사태의 힐난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만사가 귀찮은지 손을 내저었다.

  “모두 나가라!”

  서릿발 같은 노호성에 집무실 안에 있던 제자들이 소리를 내지 않고 서둘러 빠져나갔다. 정인사태와 단둘이 있게 된 사공혜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래, 그건 찾아보았느냐?”

  무엇을 묻는지 잘 아는 사공혜미는 급히 입을 열었다.

  “맹주의 처소는 물론 무림맹의 모든 건물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찾으시는 물건은 없었습니다.”

  원하지 않는 대답이 흘러나오자 정인사태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찾아는 보았지만 없더라?”

  서늘한 목소리에는 은은한 살기마저 담겨 있었다.

  “내가 너에게 이르기를 그의 속곳 안도 살펴보라 이르지 않았느냐?”

  승려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정인사태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오히려 사공혜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남자의 속옷 안을 찾아보라니 여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비록 사공혜미가 승려는 아니더라도 여자였다. 그러나 정인사태에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불진으로 사공혜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정인사태의 차가운 눈과 마주치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정한 눈이었다.

  “네가 무림맹의 총군사가 되도록 치룬 대가가 얼마인지 너도 잘 알겠지? 아니 그보다 네 부모와 가문을 살리기 위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면 너는 내게 목숨을 걸고 보답을 해도 부족하다는 걸 알 것이다.”

  마치 사공혜미의 뇌리에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하는 음의 고저에 따라서 애처롭게 몸을 떨었다.

  “내가 조금만 장난을 치면 네 식솔들은 어찌 될까?”

  가족이 처참하게 난도질당하는 장면을 떠올린 그녀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런 사공혜미를 정인사태는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마치 짐승을 길들이듯 사람을 다루는 정인사태는 결코 부처의 말씀을 따르는 승려가 아니었다.

  불진의 털이개를 흔들며 불전으로 돌아가는 정인사태의 등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 소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맹주와 구걸신개 철밥통이 쫓던 자가 누군지는 알아냈습니다.”

  정인사태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빙긋이 웃고 있는 얼굴에서 자비심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사공가의 목숨을 쥐고 있는 정인사태는 사공혜미에게 염라대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숨기고 있던 정보를 꺼내 놓아야 했다.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 하지 못하면 그녀는 언제든지 자신을 버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쫓는 자는 바로 당천악입니다.”

  대역죄를 짓고 쫓기는 죄인 당천악이 거론되자 비로소 정인사태가 관심을 보였다.

  “왜지? 두 사람이 무림 정의를 위해서 그를 잡아다가 황실에 진상이라도 할 셈이더냐?”

  “아닙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그것이 거론되었고 당천악이 그것을 익히고 있다고 했...... 허억!”

  감당하지 못할 살기에 사공혜미는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거렸다. 정인사태가 살기가 자신에 집중되고 있었다.

  “뭐라? 그것을 익혀! 누가 당천악이?”

  가사 자락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의 분노로 승복이 제멋대로 춤을 추었지만 그녀는 아랑곳없이 사공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커흑!

  정인사태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내맡긴 사공혜미는 점점 의식이 멀어지고 있었다.

  우당탕!

  내팽개쳐진 사공혜미가 바닥을 인정사정없이 굴렀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백설처럼 고운 그녀의 목덜미에 정인사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우욱!”

  무공을 모르는 그녀가 정인사태의 살기를 감당해 내기란 무리였다. 죽은피를 한 움큼 게워 내고 쓰러졌다. 그러나 정인사태는 그런 그녀를 동정하기는커녕 잔인하게도 또다시 손을 뻗었다.

  “요 앙큼한 것이. 그 예쁜 혀로 나를 놀림 셈이었구나. 어째서 그리도 중요한 것을 이제야 말하는 거지?”

  두드드득!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뼈가 어긋나는 거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사공혜미의 눈에 흰자위가 많아지고 숨결이 잦아들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생은 이 자리에서 끝이 날 판국이었다.

  “하아아아!”

  정인사태가 손을 풀어 주자 사공혜미를 가쁜 숨을 쉬며 다시 살아났다. 파리한 안색으로 보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지금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기다시피 해서 정인사태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결코 숨기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만, 다만 뭐냐? 네 대답에 네 일족의 목숨이 달렸다!”

  그녀 생의 가장 큰 위기였다. 사공혜미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정인사태를 보았다.

  “다만 맹주가 너무 쉽게 말을 흘렸기에 진위 여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위 여부가 이제야 드러났다는 뜻이냐?”

  이미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 결심이 선 듯 정인사태는 사뭇 냉정했다. 입안이 마르는 걸 느낀 사공혜미는 정인사태가 한 걸음 다가오자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구걸신개가 개방도를 동원해서 당천악과 호접곡에서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 이후로 구걸신개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래서 개방은 현재 공석인 방주 자리 때문에 예전만 못합니다.”

  구걸신개가 근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건 정인사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뜬구름 잡듯이 떠돌아다니는 걸 알기에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그러려니 하고 있을 뿐이었다.

  “흠, 그의 실종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정인사태의 화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느낀 사공혜미는 힘을 냈다.

  “당시에 당천악이 선보인 무공이 사이했다고 합니다. 전에 황궁에서 무림 대회를 열었을 때 그가 기묘한 무공을 펼쳤다고 했던 증언과 일치했습니다.”

  정인사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마도 황궁에서의 사건 이후로 맹주 곽무헌과 구걸신개는 그자의 뒤를 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이후에 벌어진 강호의 기이한 사건 뒤에는 늘 당천악의 흔 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때마다 구걸신개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왜 하필 그자지?”

  정인사태는 구걸신개의 등장이 반갑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개방의 힘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었다. 개방과 관계가 틀어지면 운신의 폭이 현저하게 줄어드니 다들 개방과의 인연을 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아마도 맹주 곽무헌은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공혜미의 추측을 정인사태는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구걸신개가 나섰단 뜻이냐?”

  “그러하옵니다.”

  제자리를 맴돌며 뭔가를 생각하는 정인사태를 사공혜미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변덕스러운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수많은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걸신개가 사라지고 한동안 조용하던 맹주의 행보가 잦아지더니 결국 미행을 따돌리고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사공혜미의 결론이었고 그걸 바탕으로 정인사태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탁!

  불진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정인사태가 사공혜미의 턱을 당겼다.

  “그런데 태산에서의 사태가 벌어지고 공지대사와 오악 검존이 당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연인지 비슷한 시기에 맹주가 사라졌다. 이거로구나!”

  그녀가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하자 사공혜미는 크게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영민하신 장문인의 혜안에 그거 탄복할 따름입니다.”

  지나친 면이 없지 않지만 사공혜미는 정인사태를 향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말들이 듣기 좋았는지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감히 나와 내기를 하려 들었으니 그 용기만은 높이 사마.”

  그녀가 불전으로 돌아가 향을 피우자 사공혜미는 긴장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불전 앞에 놓인 작은 종을 치며 불호를 외운 정인사태의 눈에 한광이 스쳐 지나갔다.

  “좋아, 아미파의 제자들이 오랜만에 출도를 해야겠구나, 혜인사태에게 일러라. 오랜만에 당가를 방문해야겠다.”

  사공혜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말을 듣고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너도 같이 가자꾸나!”

  하얗게 질린 사공혜미를 보며 씨익 웃어 보이는 정인사태가 악귀처럼 느껴졌다. 낙담하여 고개를 숙인 사공혜미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호호호호!”

  정인사태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아미산을 뒤덮을 듯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함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이대로 오랫동안 잠들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였다.

  꿈틀!

  움직임이 느껴지자 송현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조금씩 펼쳐지는 동굴을 보며 자신이 꿈꾸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소혜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는데?”

  기억을 떠올린 송현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 다음이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에 송현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응?”

  뭔가가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당소혜였다. 그녀가 송현의 품에 안겨 있던 것이다. 깊은 잠에 빠졌는지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일어날 줄을 몰랐다.

  잠든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니 아주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진 송현은 당소혜의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우웅!”

  송현의 손길에 몸을 뒤척거리는 당소혜가 깨지 않고 조심스럽게 두 팔로 감싸 안고 일어섰다. 작은 체구는 품안에 쏙 하니 들어왔다.

  먹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독정을 품고 살아가는 독인체라 그런지 당소혜의 몸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가벼웠다. 당문은 이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짓을 저질렀다. 그 죗값을 지금 받고 있는 걸까?’

  송현은 당문에 불어 닥친 불행이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생명을 가지고 위험한 실험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문에 대한 선입견은 나쁜 쪽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송현의 마음이 들끓자 그것을 느꼈는지 당소혜가 몸을 뒤척였다. 내력을 끌어올려 등을 어루만지니 표정이 풀어지며 다시 잠이 들었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이곳에 와서 본 다음부터 송현은 무극무해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마공이다. 사람을 해하고 얻는 무공은 그저 마공일 뿐이야. 결국 그 마공을 익힌 사람은 마공이 가질 수밖에 없는 마기 때문에 미치고 만다.’

  자신의 생각을 강호인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맹주 곽무헌도 비밀리에 신공 무극무해를 세상에서 지우려 하는 것이다. 자신조차도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익히고만 이 절대신공이 강호에 알려지는 순간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질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후, 그나저나 이 양반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헤어진 지 꽤 시간이 흘렀기에 송현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도 어딘지 모르는 동굴에 갇혀 있는 신세여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피식!

  웃음을 터드린 송현은 모든 것은 운명대로 흘러간다는 옛 성현의 말을 떠올리고는 당소혜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깨워서 다시 길을 떠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왠지 깨우기 싫었다. 조금이라도 이 아이에게 평화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카카캉!

  “응?”

  멀리서 아주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알아차리기 힘든 작은 미성이었지만 정신을 잃고 난 후에 오감이 엄청나게 발달한 송현은 그것을 찾아냈다.

  “이건 싸우는 소리다.”

  무공을 익힌 자들의 공방이 느껴지자 송현은 당소혜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몸을 움직였다. 기감을 최대한 열어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사아아!

  송현의 발이 지면 위를 날아올랐다. 당소혜가 깨지 않도록 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송현은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람처럼 거닐던 풍보가 바람이 되었다. 진정한 바람으로 변한 송현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팡! 팡! 팡!

  장력이 터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묵직한 기합성이 한데 어우러졌다. 경력이 터지는 파장의 영향으로 주위가 뜨겁게 달됐다. 그러나 맹공을 퍼부은 십팔나한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십팔나한은 물러나라!”

  그때 웅후한 음성이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십팔나한 뒤에서 정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금강용마장!”

  느닷없이 뒤에서 튀어나온 공지대사가 소림의 항마력을 쏟아 냈다. 마치 두 마리의 용이 공지대사의 어깨와 두 팔을 휘감고 내려오는 듯했다.

  콰드득!

  장풍이 격중된 자의 몸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의당 터져 나올 비명이라든가 파육음 대신에 썩은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에 공지대사마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틀! 꿈틀!

  금강용마장을 맞고도 버둥거리며 일어서려는 적을 보며 공지대사는 질린 듯한 표정을 해 보였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연신 불호를 외치며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른 공지 대사 옆으로 오악검존이 검을 꺼내 들었다.

  “지금 기회다!”

  청룡검을 꺼내 든 오악검존은 일존 청수자의 외침에 반응하며 몸을 날렸다. 공지대사의 장력에 격중되어 쓰러진 상대에게 내력이 깃든 오악검존의 검들이 내리 꽂혔다.

  끔찍한 파육음과 함께 청룡검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끼아아아!”

  사람인지 짐승의 것인지 모를 괴성이 튀어나오며 몸부림쳤다.

  “크흑!”

  그 소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내력으로 귀를 보호해야만 했다.

  “이...... 지독한!”

  오악검존 청수자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노호성을 토해 냈다.

  콰직!

  천근추의 수법으로 내력을 다리에 집중하여 강하게 발로 밟아 버리자 머리가 부서지고 말았다. 요동치던 몸부림이 사라졌다.

  푸스스스!

  바위보다 더 단단하던 몸뚱이가 가루로 변해 버렸다.

  “크흑! 모두 숨을 멈춰라!”

  일존 청수자의 경고에 모두들 소맷자락으로 코를 막고 뒤로 물러섰다. 가루로 변한 대지는 불에 탄 것처럼 검게 그을렸다.

  “아미타불, 부디 내세에는 극락왕생하길!”

  공지대사 명복을 빌자 일존 청수자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아직 염불은 이른 것 같소이다.”

  안도하고 있던 공지대사는 일존 청수자의 탐탁지 않은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물이 되었다고는 하나 모두가 부처님의 공덕을 받으면 선한 생명으로 윤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제자가 해야 할 도리인데 어찌 책망하시는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염을 하던 공지대사는 일존 청수자의 힐난에 마음이 상했는지 아니면 염을 방해받아서 화가 난 것인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일존 청수자는 공지대사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재로 변해 버린 곳을 발로 흩어 버렸다.

  “그런 뜻이 아니오, 공지대사. 내 말은 이놈이 아니라는 거요.”

  내심 마뜩치 않은 표정을 하고 있던 공지대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어찌나 놀랬던지 가리키는 손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태산에서 조우한 괴물이 저것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공지대사가 다시 확인을 하려 들자 다른 검존들이 확인을 해 주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십팔나한과 공지대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 이런 괴물이 더 있단 말씀입니까?”

  일존 청수자는 고개를 도리질했다. 공지대사는 그 뜻을 몰라 답답해했다. 공지대사의 눈과 마주친 청수자는 한숨을 깊이 내뱉었다,

  “아니오, 태산의 그 괴물은 이 녀석과 비교도 되지 않게 강했소. 만약에 그 놈이었다면 우리는 이렇게 쉽게 이기지 못했을 것이오.”

  공지대사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석실에 들어서자 이전까지와는 다른 지독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로소 진짜 위험이 시작되었음을 느낀 일행들은 바짝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섰고 드디어 보통 장정보다 두세 배는 더 큰 흉측한 괴물과 조우를 하게 되었다.

  반시진 정도 악전고투 끝에 겨우 쓰러뜨리고 안도하던 차에 오악검존이 들려준 이야기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팔성의 공력으로도 죽이지 못한 녀석보다 더 강한 괴물이 남아 있단 뜻인가?’

  갑자기 눈앞이 암담해지는 것을 느낀 공지대사는 저절로 불호를 읊조렸다.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십팔나한의 표정에도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십팔나한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 공지야, 공지야! 이 어리석은 놈아, 너의 오만이 결국 화를 부르는구나!’

  장문대사가 무승을 더 데리고 가라고 했을 때 거절한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공지대사가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오악검존 중 일존 청수자는 어렵게 운을 떼어 놓았다.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공지대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투둑, 뚜르르륵!

  염주를 굴리던 엄지손가락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는지 염주를 세고 있던 끈이 끊어지며 바닥에 염주들이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일존 청수자 역시 쉽게 꺼낸 말이 아니었다. 오악검존과 소림의 공지대사가 함께 하고도 물러났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결국 이 일은 외부로 알려지게 되어 있다. 그동안 쌓아 온 자신의 명예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공지대사로는 감당하기 힘든 수모가 될 것이다.

  한편, 공지대사는 공지대사대로 무척 심란했다. 불같은 성정을 가진 오악검존의 청수자가 이런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지 그 고충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고 있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추락해 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아온 공지대사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일은 맹세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공지대사가 주저한다는 것을 느낀 청수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설득했다.

  “문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오. 문제의 괴수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오. 그렇다는 것은 둘, 셋, 아니 그 이상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고. 결국 이 문제는 이제 중원 무림 전체의 일이 되었소.”

  공지대사의 입에서 절망이 깊이 배어 있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무방편중진방편 무수증중진수증

  방편이 없는 가운데 참다운 방편이며,

  닦아 증득함이 없는 가운데 닦아 증득하는 것이다.

  불문에서 수행을 한다는 마음에 집착하면 그것을 치우침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아무런 것도 하지 않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편벽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공지대사는 삼십 년 넘게 불제자로 수행을 해 오면서 자신이 잘못 된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지대사가 어려운 결정을 하자 일존 청수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의 손을 잡고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린 청수자가 사형제들에게 눈짓을 하자 모두들 공지대사를 위로했다.

  “일체유심조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시게나.”

  검존들의 위로에 공지대사는 눈을 뜨고 오악검존들을 보았다. 세월의 풍파를 헤쳐 온 노도관들의 웃음 속에 숨어 있는 연륜이 느껴졌다.

  ‘공지야 너는 아직도 멀었구나!’

  깊이 깨달은 공지대사가 십팔나한들에게 그만 돌아갈 것을 명했다.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당문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련을 버린 공지대사는 어렵지 않게 몸을 돌릴 수가 있었다.

  “그나저나 당문의 식솔들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그 또한 이상합니다. 사형!”

  공지대사가 발걸음을 돌리자 적이 안심한 오악검존 중 하나가 여유를 찾고 궁금한 점을 들추자 청수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아까 그 괴수는 당문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지?”

  “그러합니다. 사형의 말대로 저희가 쓰러뜨린 괴수가 펼친 수법은 곤륜파의 금나수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사제들의 의견을 들은 청수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태산에서 소림으로 그리고 다시 당문으로 쉼 없이 달려 왔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태산에서 대적했던 괴수가 몇이나 더 있을지 모르는 소굴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당문은 이번 일의 피해자 같...... 빌어먹을!”

  청수자 입에서 격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얼마나 놀랐으면 수양이 깊은 노도사의 입에서 그런 막말이 나왔을까?

  공지대사와 십팔나한이 얼어붙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고 의아해하던 청수자는 꿈에서도 잊지 못할 소리를 들었다.

  “크르륵!”

  모골이 송연해지는 끔찍한 괴성에 오악검존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태산에서 사투를 벌였던 그 괴수였다. 하지만 오악검존이 경악하는 것은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산에서의 괴수 말고도 무려 셋이나 더 일행을 앞길을 막고 있었다.

  “맙소사!”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자 수양이 깊은 청수자의 눈매가 경련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이번 강호행은 길보다 흉이 많을 것 같더라니!”

  장탄식을 하는 청수자 옆으로 오악검존들이 청룡검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사생결단을 내야 할 순간이었다.

  공지대사도 불심을 일으키며 크게 소리쳤다.

  “십팔나한진을 펼쳐라!”

  불문 무공의 정수인 소림 십팔나한진이 펼쳐지자 웅대하고 정심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열여덟 명의 무승들이 만들어낸 만에서 항마력이 흘러나왔다.

  “크아아!”

  정순한 불문 무공에서 흘러나오는 선종의 기운이 싫은지 괴수들은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질러 댔다.

  쐐애액!

  한 번의 발 구름으로 괴수 셋이 십팔나한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좀 전에 해치운 괴수와 달리 이들은 모두 등에 거북이처럼 두터운 등껍질을 메고 있었고 양쪽으로 네 개의 촉수가 나 있었다.

  입을 크게 벌리자 톱날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그 입에 한 번 걸리면 무쇠라도 잘려 나갈 것처럼 보였다.

  그 기세가 살벌하기 그지없어서 상대적으로 십팔나한진이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공지대사의 입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법문에 따라 십팔나한에서 강맹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제행지무상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 지구적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포화천리출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한와마전상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공력을 실어 보내는 공지대사의 독경이 십팔나한진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었다. 그로서 나한진의 힘이 배가되었다. 그 위력은 기실 대단한 것이었다.

  투두둥!

  무승들의 봉이 겹쳐지며 진법 안으로 뛰어든 괴수들을 내려치자 괴성을 지르며 튕겨져 나갔다. 공지대사는 더욱 크게 독경을 하며 나한진의 힘을 증폭시켰다. 마치 소림의 힘이 이 정도라고 아니 자신의 수행이 어느 정도인지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불문의 제자이기도 했지만 무공을 익히는 무승으로써 호승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소림이 나머지 괴수를 상대하는 사이 오악검존은 악연이라고 해야 할 괴수와 마주섰다.

  “네 놈이 태산에서 벌인 악업을 오늘 우리가 벌하겠다.”

  일존 청수자의 눈빛이 서늘했다.

  “무량수불! 오악검존의 검은 마를 멸한다!”

  청수자의 외침에 그의 사제들이 검을 높이 들고 외쳤다.

  “오악검하 멸절마파!”

  끝장을 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한 오악검존의 청룡검에 은은한 서기가 비쳤다.

  “얼...... 마...... 든...... 지!”

  비릿한 괴수의 비웃음이 오악검존의 살심을 자극했다. 노도처럼 휘날리는 도포 자락을 날리며 오악검존이 괴수를 향해 청룡검을 들었다. 강호 역사상 가장 처참한 혈투로 기록된 싸움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