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강호무정
강호무정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별리와 그것을 슬퍼하는 이별애상도 욕망이라는 이름 아래서는 모두가 무상함이다
북쪽에는 겨울이 한창이지만 항주는 아직까지 햇살이 따스하다. 그러나 겨울은 겨울인지라 바람이라도 불라 치면 저도 모르게 오한에 떨게 된다.
“에취! 어째 으슬으슬 한 것이 고뿔이라도 걸리려나? 오늘은 일찍 들어가 타이라 품에서 뒹굴어 볼까?”
자신이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타이라를 생각하니 왕백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태평문이 안정되니 두 사람은 요즘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환관 출신의 자신을 타이라는 진짜 사내라며 마음을 다 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이라며 왕백은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리며 지냈다.
장부가 그녀라도 되는지 소중하게 끌어안은 왕백이 종종걸음으로 점포를 나서면서도 상인들에게 눈인사 건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오래된 토박이건 근자에 들어 문을 연 상인이건 간에 왕백을 대하는 태도들이 조심스럽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타 지역 출신에게 배타적인 지역 출신의 상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송현과 태평문은 해냈다.
동정상방의 진 대인이 태평문을 인정해 준 점도 크게 작용했지만 태평문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항주에서 태평문에 대한 위상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니 태평문의 총관인 왕백을 쉽게 볼 사람은 몇 안 되었다.
딱!
경쾌하게 터진 소리와 반대로 왕백은 목숨보다 소중한 장부를 떨어뜨리고 머리를 감싸 쥐며 사경을 헤맸다. 척추를 타고 흘러 내려오는 경악할 만한 고통에 왕백은 치를 떨었다.
“크흑! 도대체 어떤 말종이...... 아,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이마에 툭하니 불거진 혹을 만질 겨를도 없이 왕백이 머리를 조아렸다. 눈을 슬쩍 들어 눈치를 살피는 대상은 등에 주판을 꽂고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꼽추 노인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한 대 맞은 것이 못내 억울한지 왕백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당포 탁성운의 주인이며 절장성 내의 은자를 틀어쥐고 있다는 전귀 자공과 그의 호위무사 무송이었다.
이미 그에게서 빌린 돈은 모두 갚은 상태였지만 잊을 만하면 나타나서 곤란하게 만드는 통에 왕백은 내심 자공이라는 영감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눈앞의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왕백은 대놓고 싫다는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네놈 주인은 어디에 틀어박혀 있기에 코빼기도 안 비치는 것이냐?”
“나 원 참, 낸들......”
자공의 곰방대가 다시 하늘을 향하자 왕백의 눈초리는 내려가며 한결 나긋나긋해졌다.
“알 리가 있겠습니까?”
고개를 도리질하는 왕백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자공은 앓는 소리를 내며 가뜩이나 주름진 얼굴을 더 구겼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더냐?”
짐짓 초조해 보이는 자공의 모습을 보며 왕백은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서화 속의 비밀을 풀어 천하를 다 사고도 남을 보화를 찾아냈지만 송현은 믿을 수 없게도 내게 필요한 것은 은자 천 냥 뿐이라며 나머지 재화를 모두 노인 자공에게 넘겨주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날 동굴 안에서 왕백은 차라리 자신을 죽이고 가라고 송현에게 매달렸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평생을 살면서 가장 원망스러운 때가 떠오르자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송현이 떠나기 직전에 자공 영감이 찾아오라면 전해 주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혹 찾아오시면 이렇게 이르라 했습니다. 뭐라고 했더라?”
끙끙대며 한참 동안 인상을 찌푸리던 왕백의 표정이 환해지며 이마를 쳤다.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대가자야라고 말입니다.”
왕백이 어렵사리 기억을 떠올려 전해준 말을 들은 자공의 얼굴은 참담하게 구겨졌다.
더 있어 봐야 좋은 꼴을 보기 힘들 것 같다는 걸 눈치 챈 왕백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종종걸음으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왕백을 지켜보던 무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기에 그리 화를 내시는 겁니까?”
무송이 보기에는 말을 한 왕백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했다.
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이 엄청났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자공이 이처럼 화를 내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오래전 공자의 제자 중 하나가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그것을 상자에 넣어 감추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쳐 줄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공자가 ‘팔 것이다. 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갑자기 옛날 고사를 꺼내는 자공의 이야기에 무송은 의아해했지만 귀를 기울였다.
“아대가자야 즉, ‘나는 좋은 값을 쳐 줄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그가 몸값을 올리겠다는 뜻입니까?”
무송은 곧이곧대로 알아들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고고한 선비인 척 하더니 결국 똑같이 탐욕스러운 존재라 여긴 것이다. 그럴 바에는 왜 처음부터 재물을 차지하지 않고 돌려주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쯧쯧쯧,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런 뜻이!”
혀를 차며 곰방대를 입에 문 자공은 담배 연기에 한숨을 섞어서 내보냈다.
누구보다 옳고 그름을 강조하는 송현이 자신의 처지를 아대가자야라고 표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송현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알아줄 사람을 진정으로 만나고 싶은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럼 어르신이 자신을 거둘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평하는 것입니까?”
분노한 무송에게서 사나운 기운이 흘러나오자 자공이 눈을 부라렸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뭐하는 짓이냐? 함부로 살기를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소, 송구하옵니다.”
실수를 깨달은 무송이 곧바로 기세를 거두어들이자 자공은 곰방대의 재를 털어 냈다. 바람에 재가 흩어지는 걸 지켜보더니 코끝을 찡그렸다.
“녀석은 천하의 주인은 따로 있으니 욕심을 내지 말라고 내게 경고하는 거다.”
“설마!”
무송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녀석은 내가 무얼 하려고 하는지 눈치 채고 있는 것 같구나.”
검을 잡은 무송의 손에 힘이 들어가니 힘줄이 흉하게 튀어나왔다. 쉽지 않겠지만 숨겨둔 힘을 사용하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조직의 비밀을 아는 자라면 그것이 누구라도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해 왔다. 그것이 바로 무송이 해 온 일이었다. 우두커니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는 자공의 뒷모습을 보며 기다렸다.
그의 입에서 한마디만 떨어지면 조직의 척살대가 움직일 것이다. 쉴지 않은 싸움이 될 터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더라도 송현은 없애야만 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것이 백년 넘게 이어온 조직의 생존 비결이었다.
“계륵...... 이라는 건가?”
이제나 저제나 자공의 입에서 죽이라는 명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무송의 몸이 흠칫했다.
‘계륵이라면 설마하니 버리지 못하시겠다는 뜻인가?’
경악한 무송에게 몸을 돌린 자공은 씁쓸하게 웃으며 검을 든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만 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손을 들어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을 비친 자공은 상인들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그를 보는 무송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스윽!
뒤편에서 기척도 없이 사람이 나타났다. 마치 일행이 아닌 듯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그 느낌은 같았다.
“주군께서 너무 그자에게 집착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내의 태도는 공손했지만 음성은 더없이 음산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송과 닮아 있었다. 방갓을 깊게 눌러써서 얼굴을 전혀 알아볼 수 없지만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그들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흘깃거리는 이 조차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번잡한 거리의 한 공간을 그 들은 지워 버린 것이다. 특급 살수들만이 할 수 있는 비술 이었다.
“나이가 드신 게야...... 자신의 대에서 과업을 이루고 싶은 조바심에 판단이 흐려지신 것 같다.”
방갓 쓴 사내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무송은 검을 들어 쳐다보았다. 때 묻은 손잡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평생을 함께해 온 동지에게 묻기라도 하는지 한참을 노려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린 무송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뭔가 결심을 한 듯했다. 엄지손가락으로 검을 미니 눈이 시도록 차가운 검신이 드러났다.
“척살대를 움직인다!”
무송의 말에 방갓 쓴 사내의 고개가 급히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 하지만 그건 주군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방갓 쓴 사내의 음성이 요동쳤다. 그 바람에 그들이 있던 공간이 일렁거렸고 뭔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든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갔다.
“흥분할 것 없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그것이 주군을 모시는 자의 숙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방갓 쓴 사내는 한동안 멍하니 무송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어 검을 들어 포권했다.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방갓 사내는 아지랑이처럼 신형이 흔들리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 길이 지옥이라고 해도. 어르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겠다. 그 학사 놈은 너무 위험해!”
눈빛이 한없이 가라앉는다고 느낀 순간 방갓 쓴 사내처럼 무송의 신형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른 나뭇가지가 타들어 가며 타닥타닥 거리는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밀어내 준다. 어둔 밤하늘에 박혀 있는 총총거리는 별빛 아래서 송현은 묵묵히 부지깽이 삼은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셔 불티를 밤하늘로 날려 보낸다.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어느 것이 별빛이고 어느 것이 모닥불의 불티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깊어가는 초겨울의 밤하늘은 차가운 기운 때문인지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다. 술 한 모금 입술에 적신 것도 아니건만 기분에 취해 절로 흥얼거리게 만든다.
세상 사람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사를 같이하게 만든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저 새야
지친 날개 위로
추위와 더위를 몇 번이나 겪었던고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고통 속에
헤매는 어리석은 여인이 있었네.
님께서 말이나 하려만,
아득한 만 리에
구름만 첩첩 보이고...
부스럭!
운기조식을 하던 곽무헌이 기척을 내자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춘 송현은 불속에서 둥근 돌을 꺼내 건넸다.
곽무헌이 힘을 주니 푸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깨어졌다. 그 안에서 꿩의 하얀 속살이 모락모락 김을 내었다. 진흙을 발라서 구운 꿩고기였다.
“방해를 한 셈인가?”
연잎에 싸인 부드러운 꿩의 살코기를 우물거리는 곽무헌이 먹기를 멈추고 물어보자 송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부지깽이로 다시 불섶을 되살리는 송현의 얼굴이 불길이 흔들릴 때마다 복잡한 그의 마음처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잘 모르는 무식한 나에게도 참 구슬픈 노래였네.”
입술에 묻은 기름기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훔친 곽무헌은 술 생각이 간절한지 입맛을 다셨다. 그런 모습을 보니 미안해졌다. 괜히 청승맞게 노래를 불러서 술 생각이 났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미안함에 술 대신 다른 걸로 대신했다.
“옛날 금나라 원호문이라는 사람이 병주로 과거를 보러 가다가 우연히 기러기를 잡은 사람을 만났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기러기 한 쌍을 잡았는데 살아남은 기러기 한 마리가 도통 달아나지 않고 슬피 울다가 결국 땅에 머리를 찧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호오, 거참 미물인 짐승도 정을 안다는 말인가?”
곽무헌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자 송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감동받은 원호문은 그자에게서 기러기를 사서 묻어 주고 기러기의 애틋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안구사라는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옛 노래에 얽힌 사연을 전해 듣고 곽무헌은 크게 마음이 움직였다. 오래된 고사가 들려주는 슬픈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인생의 슬픔 때문인지는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품 안 깊숙한 곳에 간직해 두었던 빛바랜 서책을 꺼내 든 곽무헌은 마치 정인을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한 장 한 장 펼쳐보던 그의 입에서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강호를 사는 사람들에게 정이란 독과 같다고 스승님께서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
꺼져 가는 모닥불을 살리기 위해 숨을 불어넣던 송현의 손길이 멈췄다. 어째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무서운 독과 비견될 수 있는지 송현은 따지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가는 애써 눌러 놓은 그리움이 튀어 나와 또다시 자신을 괴롭힐 것 같아서였다.
그 감정을 들춰내고 설명한다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었다.
‘서희, 그대는 너무 무심하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고 있소.’
더욱 간절해지는 정인 생각에 심란해진 송현은 애꿎은 모닥불만 들쑤셔 놓았다. 지켜보던 곽무헌은 송현에게서 철없던 시절 자신의 얼빠진 행동을 하던 젊은 곽무헌을 보았다. 그가 들을 수만 있다면 곽무헌은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후, 아직도 수련이 부족한가? 아니면 잊지 못하는 내 자신의 수양이 얕은 것인가? 이제 잊을 만도 되었거늘......’
똑같은 노래를 들었지만 곽무헌과 송현의 감정은 너무나 달랐다. 인성의 차이라기보다는 자라 온 환경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음속의 감정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송현과 소소한 감정은 억지로 누르는 곽무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있음이었다.
“자네를 번민하게 만드는 이가 강호인인가?”
어째서 곽무헌이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송현은 서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자신도 그녀에 대해서 그다지 많이 알고 있지 않음이었다.
‘그녀를 가까이 하지 말게!’
구걸신개 철밥통과 친우인 영호인이 한결같이 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 이유에 대해서 송현은 듣지 못했다. 또 다시 엄습해 오는 불길함에 몸서리쳤다.
“그런가 보군, 내가 한 가지 충고할까? 강호를 살아가는 무인들의 정이란 보잘 것 없는 거라네, 더구나 그것이 남녀 간의 사사로움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그 끝이 불행하다는 것만 말해 주고 싶군.”
세 사람 째였다.
송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아는 두 사람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곽무헌마저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마치 나쁜 점괘로 우울해하고 있는 사람이 우연찮게 일어난 사고를 점괘 탓으로 돌리는 마음과 비슷했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와 자신의 인연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나쁜 상념에 빠졌다.
‘이런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서둘러 고개를 저은 송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그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의심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때 곽무헌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강호를 조롱하고 다닌 지 십 수 년
어느새 가을이 돌아왔구나.
무적의 권왕이라 불리건만
돌아갈 곳 아무 데도 없어라
금빛 명성도 빛바래고
서러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거나.
곽무헌의 장탄식에는 후회, 연민 그리고 인생의 무상함이 담겨 있었다. 막강한 무공을 지닌 초인인 줄 알았더니 그 역시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한낱 인간이었던 것이다.
문득 자신의 미래를 곽무헌에게서 본 송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곽무헌의 삶은 끔찍한 것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고 가슴속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사명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이지 지독한 형벌이었다.
삶이란, 살아갈수록 더 알 수 없는 여정이라는 걸 깨달은 송현은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렸다.
도덕경에 이르길 우리네 인생은 한쪽으로 갔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온다고 했다. 과연 자신은 지금 어디쯤 이르렀고 지금의 번민은 과연 얼마나 계속될 지 궁금했다.
곽무헌은 욕망을 짓누르고 살아왔다. 송현 자신은 욕망에 사로잡혀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
영원히 충족되지 못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걸 송현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감정이라는 영악한 녀석은 이성보다 더 교활하고 똑똑하다.
그러나 만물 중에 욕망을 가지거나 욕망을 비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만이다.
“무위라는 건가......”
송현은 곽무헌을 보며 느낀 감정을 노자의 도덕경의 한 구절에 찾았다. 머릿속에 떠올린 구절에 깊은 뜻이 온몸으로 느껴지자 그 격한 감정에 견디지 못하고 입 밖으로 외치고 말았다.
상무, 욕관이기묘
상유, 욕관이기요
무가, 그 모함을 관하고자 한다거나,
늘 같은 유가 그 요함을 관하고자 한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곽무헌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벌떡 일어선 곽무헌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더니 공터에 섰다. 손과 발을 들어 움직이자 자연히 기운이 일어나 따라 왔다. 그것은 춤사위였다.
“어찌 저리 가슴 아리도록 슬픈 것인가?”
거구의 곽무헌이 추는 춤사위는 지독하게 고독했고 슬펐다. 지켜보던 송현은 심장이 반쯤 잘려 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곽무헌의 춤에 이끌려 몸이 움직였다. 잠시 후 달빛에 두 사내가 덩실덩실 어울려 춤사위를 펼쳤다. 두 사람이 손끝과 발끝을 따라서 낙엽들이 두둥실 떠올라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마구잡이에 형식도 없어 보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자 일정한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고 어울리지 못하던 두 사람의 춤사위가 마치 두 마리의 백학이 짝짓기를 하듯 조화를 이루었다.
촤아아!
송현이 오른발을 축으로 왼발을 크게 회전시키자 바닥이 깊게 패이며 선이 그려졌다.
투웅!
곽무헌의 발이 대지를 밟을 때마다 그 흔적이 대지에 깊게 남았다. 그렇게 어울리기는 한 시진이나 흘렀을까? 두 사람이 거리를 격하고 떨어졌다.
서로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 두 사람은 작은 깨달음을 통해 조금은 친밀해지기 시작했다.
곽무헌의 손길이 숲 속에 있는 대나무를 향해 뻗치자 그중 약한 댓가지들이 잘려 나갔다. 송현은 손을 뻗어 떨어지는 가지 중 하나를 골라잡았다.
곽무헌이 죽간을 검처럼 들고 송현을 향해 찔러 나갔는데 송현의 반응이 빨랐다. 가늘고 짧은 대나무 가지의 끝 이 거짓말처럼 서로 맞아 들어갔다.
수백 초를 주고받아도 끝이 없었다. 결국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췄다.
밤새 춤사위와 검무를 펼쳤기에 무척 피곤해 보였지만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멋진 검술이었습니다. 혼자일 때는 그 위력이 반감하나 둘이 어우러질 때 나오는 기운은 독수리처럼 빠르고 표범처럼 강맹하니 뉘가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다만......”
아쉬움이 묻어나는지 말꼬리를 흐리는 송현을 보며 곽무헌은 손에 들고 있던 죽간을 버렸다.
“끝까지 둘은 하나가 되지 못하지, 그래 안타깝고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이니까.”
동이 터서 내리쬐는 아침 햇볕 속에 서 있는 곽무헌이 이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인들이 말하는 신선이 바로 그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뭐라고 이름이라도 지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상념을 깨우는 곽무헌의 말에 송현은 순간 당황했다.
‘춤에 무슨 이름을? 아!’
이마를 툭 하니 두드린 송현은 그제야 곽무헌이 말하는 바를 눈치 챘다. 아직 손에 들고 있는 투박한 죽간을 내려 보던 송현은 서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을 보며 따뜻하게 웃어 주는 정인의 모습이었다.
“정인검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발로 흙을 차서 재를 덮어 꺼뜨리던 곽무헌은 숨을 쉬지 못해 꺼져 가는 불씨를 보며 되뇌었다.
“정인검이라, 훗! 자네답군.”
훗날 중원 무림에 이름을 떨친 검술이 태어났음을 누가 알까? 신발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낸 곽무헌은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북쪽을 바라보았다.
“곧 사천성인가?”
곽무헌을 따라서 눈을 돌리니 길게 이어진 평원과 구릉이 펼쳐지고 있었다. 봇짐을 챙긴 송현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곽무헌을 놓칠세라 급히 뒤를 쫓았다
사천성!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두 쪽이 형연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 분지다. 서쪽 지대는 고원이 기복을 이루고 동부는 상대적으로 낮아서 사천 분지라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아농강, 민강, 타강, 가릉강 등 강들은 지세를 따라 장강으로 흘러든다.
능선을 따라서 빠르게 움직이는 두 개의 그림자는 미처 눈으로 쫓기 힘든 놀라운 속도로 움직였다.
수풀이 그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았다면 숲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야말로 대단한 경신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걸었고 나중에는 달렸으며 종내에는 바람이 되어 날았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이 야트막한 구릉 위에서 멈춰 섰다.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에는 험준한 산 속에서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 곳인가요?’
호흡을 가다듬은 송현이 안력을 돋우며 산세를 살폈다. 송현이 본 그 어떤 산보다 험준했다. 어떻게 저런 험한 산세를 뚫고 건물을 세웠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두 사람이 대설산 입구에 들어서니 싸늘한 기운이 맞이했다. 빛바랜 거대한 비석에는 사천당문이 대설산에 있음을 말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훼손되어 있었다. 아마도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소인배들이 당문의 불행을 틈타 벌인 비열한 짓거리일 것이다.
하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광경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더 많이 나타났다. 예전의 성세를 짐작케 하는 거대한 촌락들은 인기척 없이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기대했던 광경이 아니라는 듯 묻는 송현을 보며 곽무헌은 쓰게 웃었다. 마을의 입구를 지키던 수호신상의 머리는 이미 잘려 나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고 촌락의 집들은 한결같이 폐가로 변해 있었다.
거미줄 쳐진 입구를 곽무헌이 손바람을 일으켜 날려 보냈다. 그러자 폐허가 된 촌락의 참담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망연자실한 송현과 달리 곽무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한 가옥의 문을 열던 송현은 맥없이 부서지는 문을 잡으려다 으스러져 조각나 버리는 것을 보며 당황했다. 곽무헌은 그런 송현을 보며 냉소했다.
“무얼 기대했나? 대역죄를 지은 이들에게 어떤 형벌이 가해졌을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냉정할 정도로 감정 없는 목소리에 송현은 어젯밤 정인검을 추던 그 곽무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송현과 달리 곽무헌은 분명히 사천당문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던 이들이 모여 살던 생기가 도는 촌락을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폐허를 둘러보는 그에게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사천당문을 용서하셨습니다. 봉문하는 것으로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았단 말씀입니다.”
마치 자신의 잘못인 듯 소리치는 송현을 보며 곽무헌은 철부지 같다며 나무랐다
“그것이 바로 사형 선고라는 걸 몰랐나? 이전에는 관부의 세력을 등에 업고 안하무인격으로 사천 땅에서 힘을 휘두르던 당문에게 비빌 언덕이 없어졌네. 사문의 최고수 들이 잇달아 실종되고 죽음을 당해 껍질만 남은 허울 좋은 문파를 어느 누가 두고 볼 것 같은가?”
“맙소사!”
곽무헌의 말뜻을 깨달은 송현은 치를 떨었다. 은원강호라 하지 않았던가?
대를 이어 복수하는 강호의 습성을 떠올린 송현이 눈을 감자 몇 해 전 벌어진 참극이 눈앞에 펼쳐졌다.
복수와 욕망에 사로잡힌 무림인들이 송현을 스쳐 지나 갔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도 잔혹하게 살수를 펼쳤다.
비명과 살육이 난무했다. 당문의 방계 제자들이 사력을 다해 저항해 보지만 수적으로도 실력으로도 모자란다.
서서히 무너져 가는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다. 그 속에 홀로 서 있는 곽무헌을 보자니 화가 났다.
“도대체 무림맹은 무얼 한 겁니까?”
송현의 악쓰는 소리에 과거의 영상이 사라졌다. 부러진 검을 매만지고 있던 곽무헌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무림맹? 그런 곳이 있었던가? 아!”
장난을 치듯 부러진 검으로 머리를 두드린 곽무헌은 무섭게 웃었다.
“큭큭큭, 암! 무림맹에서 먹고 노는 비룡단을 파병시키기는 했었네. 이 잘난 무림맹주의 이름으로 말이야. 하지만 보시다시피 때가 늦고 말았지.”
남 이야기 하듯이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거기에 그 때의 분노가 서서히 끓어오르는지 가시 돋친 말들이 튀어나왔다.
“잘나신 무림맹의 원로들과 구대문파 장문인들, 거기에 나머지 세가의 잘나신 명숙들은 기회다 싶었겠지”
더 이상은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이었다. 거대문파 하나가 사라지는 걸 그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것이다.
강호무정이라더니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세계였다.
그 당시 자신은 잘한 처결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호인은 입을 다물고 애써 내색하지 않았던 일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사천당문이 봉문하도록 처결한 것은 송현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멸문지화였을 것이다.
결과가 같다는 걸 알면서도 송현은 이 무거운 업이 모두 자신의 책임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분노가 한 사람에게 향했다.
“당천악! 이 모든 건 당신이 원흉이다.”
저도 모르게 들어간 내력이 분출되었다.
콰드득!
나무로 만든 의자가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불행의 모든 시작은 당천악으로부터였다. 사부인 시타르의 죽음과 무당파의 참극 그리고 사천당문의 멸문까지 송현은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림이 당천악과 남궁연같이 사악한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라는 것 또한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곽무헌이 냉소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응?”
폐허 속을 살피던 곽무헌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산 중턱을 바라보던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길,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군.”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곽무헌의 신형이 튀어나갔고 송현도 질세라 내력을 끌어올렸다.
마을 안에 유일한 온기였던 두 사람이 사라지자 다시금 냉막한 기운이 뒤덮었다.
중턱에 자리 잡은 거대한 정문 앞에 도착하니 굳게 잠겨 있어야 할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고리 위로 봉문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봉인이 찢겨져 있었다.
“누굴까요?’
뒤를 따라 잡은 송현이 잔뜩 긴장하여 다가가자 곽무헌은 찢겨진 봉인 조각을 집어 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황제의 인장이 두렵지 않는 놈들이겠지. 가세나?”
안으로 뛰어든 곽무헌을 따라서 사천당문으로 들어선 송현은 심장을 옥죄어 오는 사이한 기운에 몸서리쳤다.
“크흑! 이...... 이게 도대체 뭐지?”
무극무해의 자연기가 사천당문 안에 숨어 있는 낯선 기운을 느끼고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것은 고스란히 송현에게 전달되었다. 게다가 그 사이한 기운은 달콤한 향기처럼 유혹하고 있었다.
“당천악, 과연 이곳에 숨어 있었구나!”
송현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이를 악다문 송현의 신형이 빠르게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