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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인재강호, 신불유기 (27/43)

  제5장 인재강호, 신불유기

  인재강호, 신불유기

  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오래된 장원은 동틀 무렵 더욱 신비해 보였다.

  산새들이 조잘대는 소리가 잠을 깨우지만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태평문의 아침 공기는 그윽한 향기로 가득 차 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곽무헌은 모처럼 가볍게 침상에서 일어났다.

  ‘상쾌하다! 참으로 상쾌하구나!’

  밖으로 나오니 전각 아래로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훗! 아직도 이런 곳이......’

  “낯선 풍경이신가 보군요. 하기야 무림맹의 맹주에게는 초라한 광경이겠죠.”

  가시 돋친 언사에 곽무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의 즐거움도 여기까지로군,’

  곽무헌은 쓰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깨끗한 백의로 갈아입은 송현이 무표정하게 반겼다.

  “아침 인사치고는 무척 부드럽군.”

  “상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전히 내게 감정이 좋지 않군. 다 좋아, 하지만 내가 충고 하나 해도 될까? 상대에게 감정을 그렇게 드러내다가는 오래 버티지 못해!”

  “저는 장사치지 싸움꾼이 아닙니다.”

  “아, 맞아. 내가 잠시 깜박했어.”

  “그......”

  악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억눌린 소리가 아침의 평화를 깨뜨렸다. 평화로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대치가 벌어졌다.

  두웅!

  산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정순한 울림은 복잡한 심마를 다스려 주었다. 고개를 들면 독경 소리가 들려와 마음의 불순함을 씻어 낼 듯했다. 그 때문인지 송현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 차분했다.

  “태평문은 평범한 곳입니다.“

  무미건조한 음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힘이 깃들어 있었다. 곽무헌 가볍게 손을 털었다. 낯선 기운을 지우려는 행동이었다.

  “그건 두고 볼 일이지?”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이러십니까? 아니 도대체 속셈이 뭐죠?”

  이 자리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송현은 서슴지 않고 곽무헌을 향해 속내를 털어 놓았다.

  “심사관 사건 이후로 제게 무공을 겨루자고 찾아오는 미치광이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쳤습니다. 그때 제가 몇 번이나 간청을 드렸지만 묵살하셨죠.”

  지난날 매일 같이 시달려야 했던 비무행을 떠올린 송현은 눈을 질끈 감고 격한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 다짜고짜 실력을 겨루자고 찾아왔던 소년의 죽음이 떠올랐다.

  너무 어린 소년이라서 몇 번이나 타일러 돌려보냈던 파산문의 어린 제자였다.

  결국 송현이 상대해 주지 않자 숨어서 습격을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고 근처에 있던 이자웅이 살수라고 생각하고 과하게 손을 쓰는 바람에 아까운 목숨이 비와 함께 사라졌다. 승부욕에 사로잡힌 강호인들은 그 후로도 쉼없이 도전해 왔고 오늘에 와서 다소 냉담해진 성격으로 변한 건 그날 이후부터였다.

  파산문 제자의 죽음 이후 찾아오는 강호인들에게 송현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패퇴시켰다. 잔인한 손속을 펼친 덕분에 겁 없이 찾아오던 강호인들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송현의 마음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한 번만...... 한 번만 나서 주셨더라도 그 어린 아이가 죽는 건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송현은 비 오던 그 날의 악몽이 떠오르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그걸 두고 운명이라고 하지. 네가 아니었어도 그 아이는 다른 고수를 찾아갔을 테고 결국 그 과한 욕심으로 화를 당했을 터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감정이 전혀 깃들지 않은 곽무헌의 음성이 송현의 눈에 핏발이 서게 만들었다.

  “알고 있었군요. 파산문의 제자가 개죽음을 당한 사실을 말입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시타르의 꿈을 꾸지 않았다면 송현은 심마로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이 그날의 꿈 이후로 송현은 평정심을 찾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침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겨우 열다섯이었습니다. 채 펴 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진 불쌍한 영혼의 죗값은 누가 치러야 합니까?”

  전각의 기둥에 손을 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니 원망이 가득 담긴 눈길이 곽무헌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등을 돌린 곽무헌에게 송현의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무림인이었다. 그렇게 죽었으니 제대로 살다 간 게야.”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 않아!”

  벽창호도 이런 벽창호가 없었다. 송현은 기가 막혔지만 곽무헌은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서로의 사상이 다르다는 것이 이토록 대화의 단절을 가져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송현은 그 괴리감을 느끼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눈을 감고 아이의 명복을 빌기라도 하듯이 뭔가를 중얼거린 송현은 후원을 향해서 몸을 돌렸다.

  “기왕지사 오셨으니 따뜻한 아침밥 정도는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속히 떠나 주셨으면 합니다. 이곳은 맹주님 같은 분에게 과분한 곳이니까요.”

  걸음을 옮긴 송현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송현이 일으킨 기운에 낙엽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좋겠지만 운명이란 괴물은 우리를 쉽게 놓아 줄 생각이 없다네. 그게 바로 인생이 역설적인 면이라고 할까?”

  곽무헌은 가슴 섶을 쓰다듬었다. 그 안에 느껴지는 서책의 촉감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이제 뚜껑을 열어 봐야 할 시간이 다 되었나? 오늘은 가부간의 해답을 찾아야겠군.”

  결심을 굳힌 곽무헌은 송현의 흔적이 약하게 남아 있는 길을 따라 뒤를 쫓았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그가 뭔가 중대한 결심을 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곽무헌은 송현이 일으킨 것보다 더 큰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태평문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방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편경을 건드리며 맑은 소리를 내자 겨우 눈에서 눈곱을 떼어낸 사내아이가 연신 하품을 하면서 뜰로 걸어 나왔다

  “기세!”

  사내아이는 청명한 목소리가 후원 뜰에 울려 퍼지자 익숙한 동작으로 마보세를 취하더니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뒤로 백의를 입은 수백 명이 동시에 두 손을 좌에서 우로 흔들었다.

  “좌우람찰의!”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지다가 힘을 쏟아 내는 시점에 서는 폭풍이 치듯 무섭게 퍼붓는 춤사위가 아침을 일깨웠다.

  “장관이로군!”

  곽무헌은 실로 크게 감탄하며 백색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부터 나이 든 노부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진지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이곳은 신성한 태극권의 도량이었다.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 수척해진 사공혜미가 곽무헌을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맹주님을 뵈옵니다.”

  “쯧쯧쯧, 언제나 총기를 잃지 않던 군사가 요즘은 너무 부산스러워 보여!”

  “면목 없습니다. 맹주님!”

  고개를 숙이는 사공혜미에게 잠시 눈길을 준 곽무헌은 남녀 간의 감정이 얼마나 무인에게 무서운지 그녀를 보면서 깨닫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대기의 기운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태극권의 무리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가운데 백의를 입은 태평문 식솔들 후미에 있는 송현의 춤사위를 본 곽무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신이 무얼 가지고 있는지, 저 녀석은 알고나 있는 걸까?’

  태극권의 투로가 끝나가자 대기의 기운도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봄 처녀의 들뜬 마음이 사라지고 가을이 찾아와 쓸쓸해진 느낌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사공혜미도 달라진 장내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마치 무당에 와 있는 느낌입니다.”

  사공혜미가 자신의 감상을 늘어놓자 곽무헌은 고개를 저었다.

  “자넨 무당을 가 본 적이 있나?”

  무시하는 기분이 들었는지 사공혜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두어 차례 있습니다.”

  그러나 곽무헌은 콧방귀를 뀌었다.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감히 거기에 대해서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보지 못한 거야.”

  사공혜미가 반박하려 했지만 곽무헌이 손을 내저으며 나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무당의 아침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 정도 인가요?”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기에 사공혜미는 크게 놀라 봉목을 부릅떴다. 그러나 다시 둘러보아도 기백이라든가 힘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녀는 도무지 곽무헌이 말 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없었다.

  ‘그래, 너는 이해 못하겠지. 이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곽무헌은 두 손을 들어 미미하게 떨고 있는 자신의 양 손을 바라보았다.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펴며 손바닥에 소름을 돋게 한 그 느낌을 떨쳐 내려 애를 썼다.

  “원지교량!”

  영호인의 입에서 마지막 투로가 흘러나오자 하얀 물결이 요동치는 것을 멈추었다. 아침 수련이 끝이 나자 태평문의 식솔들은 저마다 자신의 일과를 위해 총총히 자리를 떠났다.

  “맹주님을 뵈옵니다.”

  “뒤늦게 곽무헌을 발견한 영호인이 허둥지둥 달려와 읍을 했다.

  “허락은 받은 건가?”

  그러나 인사 대신 대뜸 던지는 질문의 뜻을 알아차린 영호인은 당황했지만 서둘러 해명을 했다.

  “태극권과 칠성검에 대해서 장문도장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흥! 멀리 도학을 퍼트려 만민을 복되게 한다 이거로군.”

  어제와는 너무나 다르게 대하는 곽무헌의 태도에 영호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굳게 다문 입술 때문에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누가 봐도 호의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영호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공혜미 역시 요 며칠간 맹주의 행동이 이성적으로 판단이 되지 않는 기행의 연속이어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곽무헌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다. 자신이 맹주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큰 오산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호흡을 가라앉히느라 다른 이들보다 마무리가 늦었던 송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해 뜨기 전이라서 제가 드린 말씀을 잊으셨나 봅니다.”

  운기조식을 한차례 해서 그런지 송현의 모습은 한결 좋아 보였다. 하지만 곽무헌을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냉랭했다

  “그런가 보이, 아마도 잠이 깨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말이네만 아까 자네가 했던 말이 다 잠꼬대나 헛소리로 들려서 말이지.”

  “저를 놀리시는 거라며 재미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걸 어쩌나 나는 막 재미있어지려는 참인데?”

  곽무헌은 분명히 송현을 도발하고 있었다. 이것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고 부당한 폭력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힘과 지위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아무리 극강의 무공 고수라고 해도 사람을 마음대로 핍박할 수는 없습니다.”

  송현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앞으로 한 발을 내딛자 영호인과 사공혜미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맹주님, 저희는 손님 입니다.”

  곽무헌과 송현 사이를 가로막아 선 사공혜미가 간곡하게 만류했다.

  “간밤에 불편하신 점이 있었다면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을 조기에 진화하려는 영호인 또한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화를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차가운 냉소 한마디에 두 사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내자식이 계집애처럼 조잘조잘 잘도 말만 많구나!”

  으득!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일단 내뱉은 말을 어찌 도로 주워 담을 수 있겠는가? 영호인은 눈을 찔끔 감았고 사공혜미는 손을 들어 입을 가릴 뿐이었다.

  두 사람의 대치가 만들어 내는 질식할 것 같은 숨 막힘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사공혜미가 비틀거리자 영호인이 재빨리 부축했다.

  그걸 본 곽무헌이 피식 웃더니 훌쩍 뛰어내려 뜰 위에 섰다.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거드름을 피우는 모양새가 유치한 졸장부처럼 보였다.

  “난 네 녀석이 싫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나에게 인정을 받아!”

  곽무헌이 태극권의 기수식을 취한 다음 오른손을 내뻗어 손목을 끄덕였다.

  턱!

  참지 못하고 뜰로 내려가려는 송현을 사공혜미가 붙잡았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송현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절레절레!

  ‘가지 말아요! 가면 당신은 죽어요. 그가 결코 당신을 살려 두지 않을 거예요.’

  서희와 방식은 다르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송현은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의 남다른 재주가 아까워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기 원했다. 서희가 있는 그대로의 송현을 좋아했다면 사공혜미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성공하기를 원하는 여자였다.

  그 차이를 몰랐던 송현은 자신을 위하는 사공혜미의 마음만은 서희와 같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지금까지 무례는 다녀와서 사과하겠소.”

  놓지 않으려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낸 송현의 앞을 영호인이 가로막았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정하라면 안 되겠지?”

  곧이라도 울 듯한 영호인의 어깨를 두드려 준 송현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웃어 보였다.

  “그런 거라면 황궁에서 지겹게 했잖아. 더 이상은 싫어. 게다가 난 태평문의 주인이라고. 주인이 손님에게 무릎을 꿇다니 웃기잖아!”

  어차피 고집을 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영호인은 송현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으로 격려할 수밖에 없었다.

  “곽무헌이 왜 권왕으로 불리는지 절대 잊지마!”

  두 사람이 오연하게 뜰 한가운데 서 있는 곽무헌의 등을 보며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일 것이다.

  죽음!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유가 무엇일이지 생각해 보았다.

  ‘좌군사 위공의 일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는 거겠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곽무헌의 성정으로 볼 때 무척 오랫동안 참아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홀가분해진 송현은 장포자락을 말아 넣으며 곽무헌과 거리를 맞췄다.

  “그렇게 엉터리 기수식은 난생 처음 보는군요.”

  송현이 기마세를 취하니 자연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이게 바로 태극권입니다.”

  빙긋이 웃으며 여유를 부리는 송현을 보자 곽무헌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내기할까?”

  권왕 곽무헌이 한발 내딛자 패도적인 기운이 송현을 향해 쏘아졌다. 한겨울에 몰아치는 삭풍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고통이 밀려왔다.

  ‘남궁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단순히 몇 수 위의 그런 게 아니야.’

  차원이 다른 곽무헌의 신위에 압도되었다.

  찌이익!

  바람 한 점 없는데 장포 자락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거칠게 찢겨 나갔다. 가슴이 서늘해지며 두려움이 솟아났지만 송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라.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사부 시타르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송현은 천천히 움직였다. 두려움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보지 않으면 그뿐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된다.’

  그것은 무당의 장 진인이 죽음을 앞두고 송현에게 남겨 준 태극무였다. 공포에 얼어 버렸던 굳은 다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현의 춤사위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그것이 다른 이에게는 겁에 질려 움츠려 든 것으로 보였다.

  “어쩌죠, 맹주님의 기세에 그가 위축된 것 같아요.”

  사공혜미가 하얗게 질린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영호인은 오히려 담담하게 뜰을 바라보았다.

  “아니오, 위축된 것이 아니라 무거워진 겁니다.”

  “네?”

  사공혜미가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영호인이 송현을 가리키며 그녀가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중동은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모습으로 조용한 가운데 부단히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동중정의 뜻은 겉으로는 강한 듯 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조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담담히 말하려 애를 쓰지만 그가 얼마나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언제 저렇게 성장했을까요? 돌아보면 어느새 저 멀리 가 있는 무정한 녀석이에요.”

  마치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처럼 대견해 하는 영호인과 달리 무공에 대한 지식이 짧은 그녀로서는 맹수 앞에 가녀린 짐승처럼 보이는 송현의 안위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파밧!

  맹렬한 권술이 송현을 핍박했다. 일견 태극권과 비슷해 보였지만 달랐다. 즉 형태는 태극권의 투로였지만 느낌은 폭발적이었다.

  두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태극권으로 서로 겨루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권법으로 상대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확연히 달랐다.

  수십 합의 겨룸이 눈 깜빡할 사이에 오고 갔다. 권과 권이, 각과 각이 충돌할 때마다 강력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북 터지는 굉음에 사공혜미는 귀를 막으며 경악했다.

  “세상에나! 도저히 믿기 어려워!”

  충격!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느끼는 감정의 한계치다.

  그녀가 아는 한 곽무헌의 무위는 절대적이었다. 그 옛날 태산에서 벌어진 칠주야의 경천동지할 대격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고 무림맹에서 벌어진 각종 비무 대회에서 그가 보여 준 신위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언젠가 서장의 하율탑극이라는 승려가 중원의 무공을 비웃으며 무림맹에 도전장을 낸 적이 있었다. 그때 크게 노한 소림의 무송대사가 나섰다가 기이한 사공에 크게 패했다. 서장의 승려는 기고만장했지만 찻물이 식기도 전에 불구가 되어 쫓겨나야만 했다. 바로 곽무헌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보여 준 무력에 한동안 맹주를 바꿔야 한다는 소문이 거짓말처럼 수그러들었다. 그런 실력자와 송현이 대등하게 격돌하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무후무한 대결을 지켜보며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손을 섞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송현은 요결을 지키면서 전사를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호인으로부터 귀가 따갑게 잔소리를 들어왔다. 그중 강조에 강조를 하며 설명한 것은 바로 태극권의 모든 전사와 투로에서 일관되게 중요한 요결인 ‘용의불용력’이다.

  이는 곧 지면의 힘을 올려서 증폭시킨다는 태극권의 묘리를 가장 잘 설명한 말이다. 발에서 끌어내는 힘이 요결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즉 힘의 원천이 발과 땅이라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자연스럽게 태극권의 묘리가 나오는 것이다.

  무공에 입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절정고수가 되려고 욕심을 내지만, 수련의 정진을 막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그 조바심이다.

  진정한 고수가 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타고난 신체 조건이 좋아야 하며,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 또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일체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참스승이다.

  왜 그런가?

  이끌어 주는 사람 없이 열심히 수련을 해 깨우침을 얻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실상은 매번 벽에 부딪혀 진전이 더디게 되거나 심지어 주화입마에 빠져 몸이 상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간절한 것이 경지에 이른 스승의 한마디 일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참스승이라는 것이 내가 만나자고 해서 만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노력하지만 마주치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무당의 장 진인이 남긴 오묘한 태극무의 묘리를 혼자서 깨우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패도적이고 태산같이 강력한 곽무헌의 권풍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위태로운 순간을 수십 차례 넘기는 동안 점차 태극무의 묘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펑! 펑! 펑!

  한순간에 세 군데 요혈을 찔러 오는 곽무헌의 권과 장은 귀기가 서린 듯 무시무시한 호곡성을 질러 댔다. 재빨리 막지 않으면 죽음이었다. 그처럼 엄청난 기운이 담긴 권과 장을 송현은 부드러움으로 맞섰다.

  이정제동

  후발제인

  이유극강

  운허어실

  상대방이 강하면 강한 대로 두어라.

  맑은 바람은 저절로 산마루를 스치고 지나리니.

  상대방이 횡폭하면 횡폭한 대로 두어라.

  밝은 달은 저 혼자 강물을 비치리니.

  ‘상대방이 아무리 흉악해도 나는 한모금의 진기로써 족하리라.’

  장 진인이 송현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그가 말년에 깨달은 태극의 오의였다. 송현은 장 진인이 걸었던 그 길에 들어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장 진인이 남긴 말을 소리 내어 외치고 말았다.

  기연은 송현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영호인 역시 깊은 심연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몸이 격하게 떨렸다.

  뭔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영호인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

  갑자기 영호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자 크게 놀란 사공혜미가 재빨리 곁에서 떨어졌다.

  무공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녀지만 지금이 영호인에게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혹시 누군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주위를 살폈지만 미리 언질이 있었는지 후원의 뜰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 아무도...... 헉!”

  뒷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바람이 느껴지는 순간 사공혜미는 따끔한 느낌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 가 있는 영호인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입단속을 할 필요가 있지.”

  지풍을 날려 점혈을 한 곽무헌은 수많은 발자국이 찍힌 땅을 바라보았다. 잔디가 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한쪽으로 뉘였는데 그것은 커다란 태극의 문양이었다. 느닷없이 기세가 변하며 태극무의 위력이 배가 되어 자신의 투로가 흐트러지자 다급히 공세를 거두고 거리를 뒤로 벌렸다.

  애송이를 상대로 물러섰다는 사살이 불쾌했는지 곽무헌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송현을 노려보았다

  “이 괴물!”

  갑자기 변한 태극무의 권역에 들어가자 정순한 기의 흐름에 자신의 투로가 어긋남을 느끼고 급히 뒤로 물러선 것이다. 자칫 송현에게 흐름을 뺏길 것을 염려해서 취한 조치였다.

  ‘내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와중에 스스로 뭔가를 깨우치고 오히려 나를 궁지로 몰았다는 건가? 뭐 이런 엄청난 놈이 다 있지?’

  물론 전력을 다하지 않은 힘이었지만 그것마저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곽무헌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손목이 저리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뒷짐을 진 곽무헌을 향해 송현은 읍소를 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시고 주신 가르침은 잘 받았습니다. 허나 이제 이쯤에서 노여움을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일방적인 공격에 기운이 다한 송현은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자세를 바로하고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했다. 그러나 그것이 곽무헌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흥!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있을 셈이냐. 화가 나면 화를 내라. 네 본색을 드러내란 말이다!”

  다짜고짜 다그치는 음성에는 적대감으로 가득했다. 감정이 격해진 곽무헌 때문에 긴장한 송현은 미리 대비를 했다.

  마음이 일어나니 몸이 자연스럽게 태극의 자세를 취하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좋구나,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야!”

  무엇을 어쩌라는 건지 정체 모를 분노를 감당하는 것이 버거웠다. 무림과 얽히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꾸만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곽무헌의 억지에 지치고 말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쉰 송현이 두 팔을 내리고 돌아서자 곽무헌이 웃음을 멈추었다.

  “무극무해!”

  굶주린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낮게 중얼거린 한마디에 경악한 표정으로 급히 돌아선 송현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 어떻게 당신이?”

  말까지 더듬는 송현과 달리 곽무헌은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하하하, 그렇게 나와야지!”

  송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좌군사 위공의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노린 이유는 뜻밖에도 무극무해였다. 낯빛을 굳힌 송현은 다른 사람이 들을까봐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지금까지와 달리 잔뜩 경계하는 송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곽무헌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처음 좌군사 위공의 처소에서는 나도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남궁휘를 쓰러뜨린 마지막 수에 너도 모르게 기운을 흘리고 말았더구나.”

  친절한 설명에 송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저지른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권왕 곽무헌을 죽여서 입을 막을 자신이 있는가 하면 그건 어불성설이었다.

  송현의 의중을 눈치 챘는지 곽무헌은 득의한 미소로 양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저자거리의 싸움패들이나 취하는 자세를 취하자 천근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곽가권!

  권의 명가라는 소림마저 인정한 현존하는 최고의 권술 이었다.

  꿀꺽!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침을 삼킨 송현은 아연실색 하고 말았다. 좀 전의 맹공도 가까스로 견뎌냈다. 분명히 닷 푼의 힘도 사용하지 않았음을 송현도 알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절기인 곽가권을 사용한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나를 죽일 셈이로군요.”

  비밀이 밝혀지자 송현은 오히려 담담했다. 언뜻 눈에 이채가 스친 곽무헌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 힘을 아는 자! 그 힘을 가진 자! 그리고 그 힘을 탐내는 자! 모두 없애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곽무헌 역시 침착한 음성이었다. 송현이 인정한 이상 쓸데없이 자극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미쳤군요. 그건 궤변이에요. 당신에게 그런 권리는 없습니다.”

  송현의 눈에는 곽무헌의 광기가 보였다.

  “왜 없어? 그 마서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뿐이 아니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스승까지도 모두 괴물로 변해서 가족들마저 해쳤다. 더 이유가 필요할까?”

  “그......”

  재빨리 송현의 말을 잘라 버린 곽무헌은 냉기를 풀풀 흘리며 조소했다.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 책이 없었다면 욕심도 생기지 않았어, 견물생심이라고 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고집에 송현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대화로 납득시킬 수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친인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복수!

  오로지 그 하나 때문에 무림맹의 맹주라는 허울 좋은 직책도 맡고 있는 것이다.

  “후, 당신 역시도 무극무해 때문에 인생을 망쳤군요. 당신의 미래라는 것이 고작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곽무헌의 입에서 어금니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눈에 선 핏발이 점점 많아지더니 곧이라도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지금 네가 나를 동정하는 것이냐? 이 나를 말이냐?”

  어이가 없다는 듯, 이를 악문 곽무헌이 송현을 향해 살기를 흘렸다.

  츳츠츳!

  곽무헌의 살기가 스쳐 지나가는 자리에 풀들이 누렇게 변색되어 죽어 버렸다.

  “괴물이 되어 버린 건 내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손을 들어 가리킨 송현을 향해 곽무헌은 악을 썼다.

  “그렇게 그 무공을 싫어했으면서 결국 당신도 그걸 보고 말았군요.”

  송현의 처연한 음성에 곽무헌의 신형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서 익히지 말았어야 할 무공에 빠져들고 말았겠죠.”

  곽무헌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거친 숨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고요. 다행이 끝까지 가지는 않아서 인성을 지킬 수 있었지만 손대서는 안 될 무극무해의 심상편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겠죠.”

  시를 낭송하듯 낭랑하게 말하는 음성에는 태극의 정순한 정화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거칠었던 곽무헌의 숨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그 분노를 거두십시오. 무극무해의 힘은 쉽게 변합니다. 정순한 마음에 깃들면 무극무해는 천상의 축복이지만 심마가 엄습하면 지옥의 야차로 변하게 만드니 부디 맹주님의 정순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노기를 누그러뜨리십시오.”

  해탈한 고승의 독경처럼 송현의 말에는 자연의 정화력이 담겨 있었다. 무극무해의 기구한 역사를 돌이키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송현에게 내재되어 있던 무극무해의 기운과 태극의 힘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기연이었다.

  핏발이 섰던 곽무헌의 눈에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큭!”

  각혈을 한 곽무헌이 기운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맹주님!”

  깜짝 놀란 송현이 나는 듯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얼마나 극렬하게 심마와 싸웠는지 곽무헌의 머리가 하얗게 새어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곽무헌을 편하게 눕힌 송현은 무극무해의 기운을 끌어올려 곽무헌의 가슴에 대었다.

  “후으읍!”

  깊은 잠에서 깨어난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곽무헌은 깊은 심호흡을 통해 내상이 치유되었음을 알았다.

  “나 곽무헌의 삶은 노이불사였네.”

  몸은 늙고 어지러운 일이 자꾸 닥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함을 한탄한다는 옛 고사에 자신의 삶을 비유한 곽무헌은 머리맡에 앉아 있는 송현을 보았다.

  “어쩌면 자네를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강하게 부정하는 송현에게 곽무헌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게 맞을 거네. 정말 궁금해. 어째서 자네는 변하지 않는 거지?”

  곽무헌은 무극무해의 기운을 가진 송현을 변하게 만들려고 쉼 없이 괴롭힌 것이었다. 그제야 송현은 곽무헌이 왜 자꾸 자신의 심사를 괴롭게 만들었는지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기실 무극무해의 기운에 의해서 괴물로 변해 버리면 곽무헌으로서도 상대하기가 벅찰 것이다. 그런데 굳이 상대를 분노하게 만들어 변하게 만드는 것은 최소한의 배려였던 것이다.

  인성이 남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괴물로 변해버린 짐승을 죽이는 것이 조금이라도 죗값을 더는 일이라고 믿은 것이다.

  ‘불쌍하신 분......’

  무극무해를 알고 있는 이들은 모두가 비참하게 죽거나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갑자기 늙어 버린 곽무헌을 보며 송현은 자신의 남은 삶도 평탄치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

  ‘결국 강호를 떠나려 하지만 강호는 놓아 주지 않는구나.’

  잔인한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 선 송현은 거부하고 외면하던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곽무헌의 말대로 세상에 뿌려진 무극무해의 흔적들을 자신의 손으로 지워야 함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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